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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역군인 인생 2막] (4)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하), ‘효’학 교수로 기반 다져 민간의 효 문화 기수로 나서
    ​▲ 지난 1일 정약용문화교육원 정기총회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김종두 상임이사(앞줄 왼쪽에서 다섯 째). [사진제공=김종두 이사]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김종두 이사, “효교육에 특화된 명품 부사관학과 키워 졸업생 90% 임관”[뉴스투데이=김한경 국방전문기자] 2009년 3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김종두 상임이사는 육군에서 충·효·예 교육을 담당하던 시절 강사로 초빙돼 인연을 맺은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요청으로 의정부시에 위치한 경민대학에 부사관학과인 ‘효충사관과’를 만들게 된다.홍 이사장은 약관 21세 때 공산당이 싫어 부모와 가족을 북한 땅에 남겨두고 단신 월남하여 수많은 곡절 끝에 경민학원을 설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부모 사랑(孝)과 나라 사랑(忠)에 기초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철학을 갖게 됐고,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효’와 ‘충’을 가르치는 학과를 만들 생각을 했다.홍 이사장은 그 학과를 만들어 이끌 적임자로 일찍이 김 이사를 점찍어 두고 있었고, 이런 그의 바램은 김 이사의 전역으로 현실화 됐다. 당시 김 이사와 논의하던 그는 효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교육자 양성의 의미로 ‘사(師)’자를, 공직자 양성의 의미로 ‘관(官)’자를 넣은 ‘효충사관과(孝忠師官科)’로 학과 명칭을 정했다. 홍 이사장은 김 이사에게 어떻게 하면 학생을 모집해서 그런 인재를 육성해 낼 수 있는지를 물었고, 김 이사는 “군 초급간부를 양성하는 부사관학과로 특성화하면 군대와 나라에 모두 도움이 되는 명품학과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 이사는 5년 동안 효충사관과를 맡아 학과장으로 재직했다. ▲ 효충사관과 학생들이 제복 착복식을 실시한 후 김종두 학과장(앞줄 맨 왼쪽) 및 학교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김 이사는 부사관이 병영에서 초급 ‘지휘자·교육자·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 착안해 인근의 65사단과 업무협약을 맺고, 현장 실습을 통한 부하 상담 및 관리 요령 등을 가르쳤다. 또 인근의 사회복지시설에서 토요일마다 장애인 목욕 및 식사, 산책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함께 하면서 인성 함양에도 주력했다.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동안 효충사관과 졸업생들은 90% 이상이 육·해·공군의 부사관(군 공무원)으로 임관했고, 이 가운데 매년 3∼6명씩 3사관학교에 합격해 장교로 임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통이 이어진다면 효충사관과 출신 영관장교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다.경민대와 성산효대학원에서 ‘효행교육지도사’ 5000명 배출 앞장서김 이사는 학과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권인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을 저술했고, 이어 2012년 2권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효 교육’과 3권인 ‘효와 소통의 현대적 리더십’ 등을 출간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준비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효학 개론 성격으로 집필한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은 3판 째 출간했다.▲ 김종두 교수가 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 [사진제공=인터파크]이후 김 이사는 은사인 최성규(崔聖奎) 총장의 요청으로 경민대에서 성산효대학원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5년간 기획처장 및 효학과 교수를 맡아 강의하면서 효를 학문으로 특성화하는데 주력했다. 또 효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전환하고, 인성교육·리더십·사회복지 등 인접 학문과 융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기존에 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을 인성교육과 융합해 기본서 시리즈 4권인 ‘인성교육의 이해와 실제’를 2018년 출간했다.한편, 김 이사는 경민대 재직 시절에는 경민대학 총장 명의로, 성산효대학원 재직 시절에는 성산효대학원 총장 명의로 각 지방별 ‘효행교육지도사 자격과정’ 강의를 통해 5000여명의 효지도사 배출에 앞장섰는데, 이렇게 양성된 지도사들은 지역별 초·중·고등학교에서 효를 가르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 ▲ 김종두 교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지난해 12월 제5기 효행교육지도사 수료식 후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인생 2막 성공 비결, “군대 업무 잘하면서 제2의 영역 미리 개척해야”또한 그는 육군대학 교관시절에 다녔던 서당의 훈장 선생님이신 박성기(朴聖琪) 한학자와 육군의 충·효·예 교육을 함께 담당했던 민병돈(閔炳敦) 전 육사교장, 그리고 박사학위 과정의 은사이신 최성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등 3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금년 3월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떠나 2007년부터 이사로 활동해오던 정약용문화교육원(남양주시 소재)의 상임이사로 부임했고,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위치한 남양주에서 ‘정약용 선생 바로 알리기’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까지 가지 않아도 ‘효에 기초한 애국·애민정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교육 사업도 기획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가 2012년 정약용 선생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으므로 남양주시 마재 마을에 살았던 정약용 선생을 세계적 인물로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마재 마을 가꾸기’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전역을 앞둔 후배들은 그에게 묻는다.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냐고. 그럴 때마다 그가 해주는 말은 “군대 밖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그 분야를 공부해 전문성을 쌓으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주문한다. 그는 “군대 업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제2의 영역도 미리 개척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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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9
  • [전역군인 인생 2막] (4)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상), 육군의 ‘효(孝)’교육 선구자에서 대학의 ‘효’학 교수로
    [뉴스투데이=김한경 국방전문기자]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65세)는 ‘효(孝)’를 화두로 평생을 살아온 군인이자 학자이다. 그는 영관장교 시절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충·효·예 교육을 담당했고, 이 때 강사로 초빙됐던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주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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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2
  • [전역군인 인생 2막] (3)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하) '전쟁 인문학' 1인 기업 시험대에 올리다
    [뉴스투데이=김한경 전문기자] 윤동일 교수는 인류 역사와 현대의 일상에 숨어 있는 다양한 ‘전쟁 흔적’들을 살펴,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이어주는 전쟁 연구를 하고 있다. 통칭해 ‘전쟁 인문학’으로 정의하고, 일상의 의식주를 비롯해 전쟁에서 탄생한 스포츠, 과학기술, 상징, 음악, 미술, 게임, 뷰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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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2
  • [전역군인 인생 2막](3)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상) 병마 이기고 ‘전쟁 인문학자’로 변신
    병마 이기고 ‘전쟁 인문학자’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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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2019-05-06
  • [전역군인 인생 2막](2)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하) 안보교육을 넘어 국악 보급의 선구자로 자리매김
    ▲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문화사업 일환으로 군부대 공연을 지원하는 예술단 ‘군락’의 단원들과 공연 장면.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국군아리랑, 대한국군 등 전통 국악 ‘軍歌’ 창작해 교육 활용[뉴스투데이=김한경 방산/사이버전문기자] 변상문 이사장은 최근 뉴스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우리 소리 즉 국악이 대한민국의 정신이며 얼이고 혼”이라면서 “그럼에도 일본 요나누키 음계의 노래가 마치 우리 것 인양 사회에서 불리고 심지어 군가(軍歌)마저도 70% 이상이 일본풍”이라고 말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전통 국악으로 창작한 군가인 국군아리랑, 대한국군, 탈북아리랑, 통일아리랑 등을 만들어 장병 교육 및 공연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얼과 문화가 많이 훼손된 데다, 그 이후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이를 회복시키지 못해 우리 것보다 외국 가곡 중심의 음악교육을 하는 등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변 이사장은 군의 기상나팔도 미국의 남북전쟁에 악상을 둔 트럼펫 연주라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남북전쟁 악상에 근원을 둔 나팔 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잠을 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팔 소리 대신 우리나라 북 소리를 들려주면 긍정·도전·적극적 심리를 자극해 사고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트럼펫 연주곡을 북소리로 바꿀 것을 정책 제안하여 국방부가 검토 중에 있다.군 특성에 맞는 ‘풍물놀이’ 개발해 문체부와 군부대 교육사업 진행변 이사장은 “2014년 10월 유네스코에 세계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풍물놀이가 군사훈련 모습을 전통 놀이 형식의 종합 국악으로 표현한 예술”이라면서 “군에서 풍물놀이를 생활화하면 전통문화 보존과 함께 부대 단합을 도모하고 전우애도 고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그는 군 특성에 맞는 풍물놀이 상품을 이미 개발해 2015년부터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 군부대를 대상으로 풍물 교육 사업을 진행 중이다.▲ 국방국악문화진흥회는 2015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군부대를 대상으로 풍물놀이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2016년에는 서울시 주최로 일반 시민 및 학생을 대상으로 역사문화 탐방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변 이사장은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리랑과 뽕짝, 100년을 노래하다’란 교육공연 상품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세종연구소에서 연수 중인 고위공무원단, 국제대학교 재학생, 서울시 종로구 골목 해설사 등을 대상으로 실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과거 안보교육 위주였던 민방위 교육이 서울시와 행정안전부 지침에 따라 인문학 교육으로 대치되자 이에 맞는 찾아가는 인문학 공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사를 그린 ‘음악극 뉴스 스페셜’과 의병·독립군·광복군 이야기인 ‘주파수 1919’ 등으로 2017년부터 서울시 광진구·양천구 등을 대상으로 공연을 곁들인 민방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의병·독립군·광복군 이야기인 ‘주파수 1919’의 첫 장면. 12가지 인문학 공연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다음 달 새롭게 시작하는 창작극 공연에선 ‘辯士’로 직접 출연그는 오는 5월 11일 돈화문 국악당에서 ‘작금(昨今)의 소리, 나(我), 성(聲), 사(史)’를 공연 한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연이다. ‘소리’를 의인화 하여 우주가 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소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표현한 작품이다. 출연진, 관객이 ‘소리’라는 나로 변신한 배우가 돼 함께 진행하며, 변 이사장은 변사(辯士)로 공연을 이끌어 간다.또한 변 이사장은 평양 기생 왕수복 공연을 기획하며 통일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있다. 왕수복은 1930년대 서도소리를 하는 기생이었으나 우리 소리가 대중가요에 밀리면서 대중가수로 변신한다. 요즘 말로 10대 가수왕에 등극한 인물이다. 광복 후 월북하여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 교수 김광진과 결혼했고 북한 공훈배우로 대접 받다가 2004년에 이승을 떠났다. 그의 삶 속에 우리의 근·현대사가 농축돼 있다. 그녀의 삶을 통해 남과 북의 같은 문화가 무엇인지 조명하면서 오랜 분단의 시기를 극복하는 것이 공연 의도이다. “무대 위에 올린 사연과 풍류는 통일을 향한 민족의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금년 5월부터 공연하는 ‘작금의 소리, 나, 성, 사’의 출연진. 좌로부터 변 이사장, 판소리꾼 최한이, 경기민요 김보성, 해금연주 윤세비.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한반도 전쟁 역사에서 희생된 군인들 위무하는 ‘굿판’ 무대 추진변 이사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에서 죽은 군인들의 넋을 달래는 굿판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6·25전쟁 때 죽은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군인들을 위무하는 민속 문화 행사를 전쟁기념관 마당에서 개최하는 것이 중장기 목표이자 꿈이라는 것이다.우리나라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서울 굿(국가 무형문화재 104호)을 비롯한 12개 굿판을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는 “굿이 문화재로 보일 때 유·무형 문화재의 본질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말했다.국방국악문화진흥회 사무실을 나올 때, 인터뷰 도중 그가 던진 한 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을 흔들었다. “모두가 대중가요를 따라갈 때, 누군가는 국악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문화가 살아서 숨 쉬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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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1
  • [전역군인 인생 2막] (2)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상) 국악인을 ‘군통령’ 만드는 안보교육 전문가
    국악인을 ‘군통령’ 만드는 안보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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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2019-04-14
  • [전역군인 인생 2막] (1) 강웅식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 회장(하) 이집트와 소통하며 ‘사업 분야’ 다각화
    ▲ 지난해 11월 강웅식 회장(왼쪽 두 번째)이 학술 교류가 활발히 진행 중인 BUC 대학을 방문해 엘 칼라 BUC 총장(왼쪽 네 번째) 및 총리 출신의 아브라함 마흐렙 이집트 KEDA 명예회장(오른쪽 세 번째)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KEDA]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언청이 환자 수술, 인천대-BUC 간 학생 교환 등 다양한 자선봉사와 학술 교류[뉴스투데이=김한경 전문기자]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는 2018년 11월 가난한 이집트 장애인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 설립에 현지 콥트교 교황을 통해 2만 달러를 기부했다. 또 빈곤한 농가들이 재정적 자립을 할 수 있게 친환경 양계장 2개소를 설립하는 시범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이어 한국 최고의 언청이 수술 전문의인 정필훈 전 서울대 치과대학원장이 자신을 후원하는 단체의 예산으로 언청이 환자 21명을 무료 수술하는 행사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자선봉사 활동을 추진하였다.KEDA는 또한 학술문화 교류 활동으로 2018년 12월 인천대와 카이로 바드르(BUC) 대학 간 2 2 학생교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인천대와 BUC 대학에서 각각 2년씩 교육받으면 졸업 시 양 대학으로부터 복수학위를 받는 프로그램이다. 또 인천대 의과대학 일부를 BUC 대학에 설립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또 BUC 대학 석좌교수로 위촉된 강 회장은 대학 내에 한국어과와 한국문화연구센터를 개설하기 위해 안철주 KEDA 수석부회장을 2018년 7월부터 BUC 장학생으로 아랍어과에서 수업 받게 하는 등 관련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필훈 전 서울대 치과대학원장이 이집트 아인 샴스 치과대학에서 언청이 수술을 집도하고 환자의 상태를 살펴본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KEDA]한국기업 선호도 높고 정부 분위기도 가장 우호적...비즈니스 성과 나오는 중 강 회장은 "이집트 정부는 산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외국 기업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반기고 있다"면서 "그중에서도 한국 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무척 높아 엘시시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분위기가 역대 가장 우호적이다"고 말했다. 양국 산업 발전을 위해 KEDA가 지금까지 추진한 비즈니스도 서서히 성과가 나오고 있다.2018년 11월 아랍산업화기구인 AOI(Arab Organization for industrialization)와 KEDA는 "상호 합작사업 시 각각을 창구로 한다"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AOI는 국방 및 민수물자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평시 이사회를 통해 중요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사회 회장은 이집트 대통령이며 국무총리, 국방장관, 외교부장관, 산자부장관, 투자부장관, 방산물자부(MOMP) 장관이 상임이사다. 이집트 방산협회(AOI)와 KEDA 간 MOU 체결..."상호 합작사업 창구로" "프로젝트 제안은 AOI에서, 기술은 한국에서, 자금은 아랍국가에서 제공한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AOI와 KEDA의 MOU 체결식에 사우디 알나임 그룹의 회장과 AOI에 1조 달러를 투자한 바레인의 Albaraka Banking Group 대표도 참석했다. AOI를 통해 공급 시 관세 30%가 면제된다. 따라서 이집트는 물론 중동·아프리카에 수요가 많은 제품을 AOI를 통해 무관세로 공급한 후 수출하면 중국제품과도 가격 경쟁력이 있게 된다. ▲ 지난해 11월 AOI와 KEDA 간 MOU 체결식에서 강웅식 회장(오른쪽)이 서명하고 있다. [사진제공=KEDA]MOU 체결식에 참여한 6개 한국기업은 모두 AOI의 CEO와 각 기업별로 MOU를 체결했고, 이에 상응하는 후속조치를 진행 중이다. AOI와 MOU 체결로 KEDA의 모든 회원사는 향후 이집트는 물론 중동·아프리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갖게 됐다. 이집트, MENA 전초기지이자 유럽 허브로 16억 명 시장 진출할 교두보MENA(아프리카·중동)의 전초기지이자 유럽의 허브인 이집트 정부가 투자 문호를 개방한 지금이 진출 적기라고 강조한 강 회장은 "이집트는 범아랍무역자유지대(GAFTA) 17개 회원국,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 19개 회원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있어 이 나라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3개 대륙 16억 명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그는 "작년 6월 엘시시 대통령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민의 성원과 추앙을 받아 연임이 결정됐고, 현재 이집트가 IMF체제 하에 있지만 120억 달러의 IMF 자금을 4회에 걸쳐 벌써 절반이나 갚았다"고 소개하면서 "2017년에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가진 천연가스가 이집트 연안에서 발견되는 등 정부가 국민에게 제시한 비전이 마무리되는 2030년에는 세계 7대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강 회장, 한 달에 절반 이상 이집트 체류..."이집트인과 가족처럼 관계 맺어야"강 회장의 향후 행보가 어디까지 어떻게 미칠지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최근 강 회장은 한 달에 절반 이상을 이집트에 체류하며 회원(사)들과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현지 활동 사항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평소 한국이집트발전협회의 정례 연찬회 등을 통해 250여 명의 정회원과 50여개 회원사 대표들에게 "이집트와 경제 교류에 앞서 이집트인들과 가족처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지난해 11월 BUC 대학을 방문한 이희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이자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특강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KEDA]자신보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 생각하는 강 회장은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그런 인생관이 점차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북한과 매우 친밀했던 이집트가 엘시시 대통령 취임 이후 2회에 걸친 한국 방문과 정상회담 등으로 친한(親韓) 국가로 변하고 있으니 말이다.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이희범 KEDA 명예회장은 "강 회장은 진짜 애국자다. 강 회장의 활동을 보면서 한 나라를 상대로 꾸준히 사랑한다는 것이 진짜 중요한 일임을 실감하며, 돈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강 회장을 존경하게 된다"면서 "이집트가 한 때 세계 최대강국이었고, 6.25 참전국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 사람들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2019-03-28
  • [전역군인 인생 2막] (1) 강웅식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 회장(상) 영국 유학 시절 엘시시 대통령과의 우정이 만든 힘
    (상)영국 유학 시절 엘시시 대통령과의 우정이 만든 힘
    • 사람들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2019-03-26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용감한 형제③ CEO의 성공법칙, ‘협업의 마술사’
    ▲ 용감한 형제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무명시절 '나홀로 작업' 스타일서 '협업' 통한 음악적 영감의 조율사로 부상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성장에 걸맞는 변신 시도가 창업 성공의 동력용감한 형제(본명 강동철, 37)는 2004년 작곡가로 데뷔해 4년 간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그 여세를 몰아 2008년에 자신의 매니지먼트 회사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를 창업했다. '작곡가'에서 '창업자'로 변신한 것이다.현재까지 그의 변신은 성공적이다.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에는 브레이브 걸스(유진, 혜란, 민영, 유정, 은지, 유나), 빅스타(필독, 바람, 래환, 성학, 주드), 일렉트로보이즈(마부스, 원카인, 차쿤), 펀치, 송채윤 등이 소속해있다.특히 2011년 데뷔한 브레이브 걸스는 수많은 걸그룹을 스타 반열에 오르게 한 용감한 형제가 처음부터 프로듀싱해 세상에 내놓은 걸그룹이다.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가 이수만의 SM, 양현석의 YG 등과 같은 메이저 연예기획사의 틈바구니에서 갖는 경쟁력은 용감한 형제의 '협업 능력'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빠르게 변하는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에너지가 필요하다.용감한 형제는 초기에는 골방에서 '나홀로 에너지'를 분출했다. 20대의 청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악적 영감은 고갈되기 십상이다. 부와 명성을 얻게 되면 나태해지고 싶은 유혹도 커진다.따라서 예술적 열정과 영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외부 자극을 필요로 한다. 그는 스타작곡가의 반열에 오르면서 '협업'이라는 작업 방식에서 돌파구를 찾게 된다.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최고경영자(CEO)가 된 후에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그는 "협업을 통해 내가 파트너에게 자극을 주는 순간 파트너가 다시 나에게 영감을 던지는 경험을 한 적이 적지 않다"면서 "음악적 창조는 나의 뚜렷한 색깔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색깔과 조화를 이뤄나가면서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용감한 형제가 CEO가 된 후에도 과거의 나홀로 작업 방식을 고집했다면 쉽게 한계에 봉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장에 걸맞는 변신을 거듭함으로서 성공적인 창업자가 될 수 있었다.국적, 성별, 연령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협업'실제로 용감한 형제의 '협업 방식'은 전방위적이다. 국적, 성별, 연령을 가리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사의 CEO이면서 작곡가를 겸하는 사람중에서 그는 가장 활발한 협업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2일 발매한 AOA의 정규 1집 타이틀곡 ‘익스큐즈미’는 아무로 나미에 등과 작업한 유명 프로듀서 에릭 리드봄(Erik Lidbom) 그리고 한성호, 김창락과 함께 작곡했고 작사도 차쿤과 함께 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또 다른 곡 ‘불면증’도 투챔프, 차쿤과 함께 협업해 작곡했다.이 외에 씨스타의 ‘나혼자’는 똘아이박과, AOA ‘사뿐사뿐’은 차쿤, JS와, ‘짧은 치마’도 차쿤과 함께 했다. 또 빅뱅의 ‘마지막 인사’는 지드래곤, 포미닛의 ‘오늘뭐해’는 코끼리왕국과 함께 했다. '나홀로 작곡'의 비중이 줄어들고 '협업'이 늘어나는 추세이다.지난 해 1월에는 유튜브의 슈퍼스타인 래퍼 사일렌토(미국)와 공동작업을 했다. 사일렌토는 한국을 방문해 용감한 형제와의 협업을 마친 후 “K팝과의 컬래버레이션이 너무 신이 난다”고 환호했다.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는 작곡가가 창업한 기획사답게 가수뿐만 아니라 음악 프로듀서들을 양성하고 있다. 별들의전쟁, 미스터강, 미쓰리, 제이에스 등의 프로듀서들과 함께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음악들을 내놓고 있다.이 퓨로듀서들도 용감한 형제의 협업 방식을 자주 애용한다.  씨스타의 ‘가식걸’, AOA ‘심쿵해’,  'Chocolate’, 빅스타 ‘달빛소나타’ 등의 인기곡들이 협업의 산물이다.그가 확인해준 명제='화려한 스펙의 소유자' 보다 '꿈꾸는 자'가 성공용감한 형제는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지난 해 6월에는 ‘일기장’이라는 곡으로 ‘발라드의 황태자’ 이승철과도 협업을 했다. 용감한 형제가 곡을 쓰고 이승철이 노래를 불렀다. 녹음하는 과정에서 이승철의 음악적 입장이 일부 반영됐다고 한다.당시 용감한 형제는 “이승철 형님과 ‘댄스 음악’도 협업하고 싶다”면서 “난 계속 하고 싶고,  퇴짜 맞을 생각하면서 계속 도전해 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승철은 “용감한 형제는 스타일이 맞지 않은 나 같은 가수는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러브콜을 해줘서 고맙다”며 “서로 시너지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콜라보레이션은 언제든 할 생각”이라고 화답했다.영역의 확장은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가수 기획사로 출발했지만, 배우 매니지먼트로 그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이를 위해 최근 정만식, 김병춘, 우정국, 지승현과 전속 계약을 맺고 사업을 확대했다. 종합엔터테인먼트를 목표로 음악 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공연 등 전반위 토탈 콘텐츠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세계 중심의 한류를 이끄는 엔터테인먼트로 성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용감한 형제는 최근 일본인 걸그룹 ‘첼시’의 프로듀싱과 더불어 제작까지 맡았다. 기존에 데뷔한 일본 그룹에게 작곡한 곡을 준 적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프로듀싱에 참여해 제작한 가수는 처음이다.용감한 형제가 첼시에게 이토록 힘을 쏟는 이유는 그의 새로운 목표 때문이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성공하고 싶은 것이 그의 새로운 꿈이다.용감한 형제는 자신의 10대 시절을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았던 때라고, 20대 시절을 자신의 10대를 후회하며 살았던 때라고 말한다.하지만 그는 후회에 머물지 않았다. 후회 이후에 새로운 꿈을 꿨다. 그의 말처럼 구덩이에 빠졌던 10대였지만 20대에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어둠 속에서 작곡가의 길을 선택하고, 성공 이후에도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하게 하는 원동력은 '꿈'이었다. 따라서 그의 성공은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꿈을 주는 사례이다.용감한 형제는 “내가 이 위치에 있고,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내 노래가 히트되고, 제가 프로듀싱한 그룹들이 성공하고, 그들이 소속된 회사들이 성장하고. 이런게 나도 믿기지 않은 꿈같은 현실이다”고 신기해한다. 그의 솔직한 감회는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보다 꿈꾸는 자가 성공확률이 높다는 명제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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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용감한 형제②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잇몸의 승부사
    ▲ ⓒMBC ‘사람이 좋다’ 방송 캡처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악보·코드 몰랐지만, 전자 장비와 고군분투하고 현장서 어깨너머로 작곡법 터득작곡가 용감한 형제(본명 강동철, 37)는 '잇몸의 승부사'이다. 그는 악보를 볼줄도 몰랐고, 음악을 구성하는 기본 코드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작곡은 물론 기초적인 음악 상식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다.그랬던 그는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뜻의 속담) 정신으로 작곡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없이 잇몸으로 살았던 음악가는 또 있었다. 베토벤은 30대 중반에 청력을 잃고도 ‘운명’, ‘합창’ 등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그가 청력을 잃고 난 뒤에 작곡한 곡은 25곡 이라고 알려졌다. 베토벤 또한 청력을 잃고 이가 아닌 잇몸으로 작곡에 몰두했다.베토벤은 청력을 잃고 난 뒤 소리의 진동이 귀에 전달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고, 이후 더 많은 작곡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악상이 떠오르면 쇠막대기를 치아에 물고 피아노 앞에서 연주했다. 피아노를 치면 그 파동이 치아에 물고 있던 쇠막대기의 진동으로 전달됐고 그 미세한 진동으로 작곡을 해냈다. 청력을 잃고서도 후대에 남길 명작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아이돌 음악 작곡가인 용감한 형제를 세계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베토벤과 비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작곡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능력이 결여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비슷한 조건이었다.그렇다면 용감한 형제는 어떻게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했을까? 베토벤이 쇠막대기를 입에 물고 음의 파동을 감지했다면, 용감한 형제는 어떻게 떠오르는 멜로디와 리듬을 음악으로 완성했을까? 작곡의 문외한인 그는 첨단 음악 장비를 잇몸으로 사용했다.'기존 지식(작곡법)' 보다 첨단 전자 음악장비를 활용하기 위한 '학습 능력' 관건사이프러스 힐의 음악을 듣고는 힙합음악을 하고 싶어진 스무살의 용감한 형제는 그 다음날로 곧장 낙원상가를 찾았다. 어떻게 하는 건지, 무엇으로 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무작정 ‘힙합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장비’를 달라고 해 그의 전재산을 털어 장비를 구입했다. 전자 음악장비였다. 최근에는 이처럼 컴퓨터프로그래밍 음악이 보편화 됐다. 때문에 악보를 보지 못해도 작곡을 할 수 있는 장비가 갖춰졌다. 1970년대 전자 악기가 보급화 됐고, 1980년대 전자 악기의 통신 표준인 MIDI가 만들어지면서 전자 음악이 활성화 됐다. 전기 신호를 사용해 다른 악기의 소리를 흉내내거나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신시사이저, 드럼 파트를 자동으로 연주하는 드럼 머신 등 전자 악기로 음표를 몰라도 작곡이 가능해졌다.용감한 형제도 이런 ‘전자 음악 장비들’을 활용해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한번 곡 작업을 시작해서 몰입하면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고 밤새 작업에만 몰두했다. TV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하는지, 어떤 옷이 유행하는지도 모르고 세상과 단절한 채 오직 음악만 듣고 만들었다.혼자서 음악을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던 용감한 형제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드럼 소리가 만들어지고, 그 밑에 베이스 기타 소리를 넣고 있고, 스트링이라는 악기 소리도 넣고. 그럴싸한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더라”고 밝혔다. 잇몸으로 작곡하는 법을 독학으로 완성한 것이다.그렇게 그는 2005년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란 곡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말그대로 이 없이 잇몸으로 승부를 냈다.용감한 형제의 사례는 21세기에 성공을 위해서는 ‘기존 지식’보다 ‘첨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습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떠오르는 악상을 악보로 만드는 것은 기존 지식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런 지식이 없이도 작곡은 가능해졌다.첨단 음악 장비를 사용하면 뇌리를 스치는 멜로디와 리듬을 즉각 구현해 보고 저장할 수 있는 것이다. 첨단 음악 장비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학습 능력’이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인 셈이다.모르면 부딪히는 '현장주의'의 결실…“6개월~1년은 낙원상가에서 살다시피”용감한 형제는 누군가에게 첨단 음악 장비를 다루면 작곡이 가능하다는 조언을 받은 것일까? 아니다. 그는 무작정 현장으로 달려갔다. 197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시대를 이끌었던 ‘기업가 정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힙합음악이 하고 싶었던 그는 낙원상가에 살다시피 했다. 용감한 형제는 “옛날에 돈 없어서 여기서 음악장비 구경만 했다. 사고 싶었지만 소리만 들어야 했다”라며 하루에도 두 세 번씩 낙원상가를 찾았다고 밝혔다.“여러 가지 장비를 구경하고, 장비에 대해 묻고 따지며 그렇게 어깨 너머로 장비들을 훔쳐봤다.”푼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장비를 구입한 후에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골방에서 쉴새없이 떠오르는 멜로디를 음악장비로 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방에서 계속 장비들만 두들겨댔다”며 “장비 만지다가 망가지면 낙원상가 가져가 고쳐오면 점심 때 되고, 또 두 세시간 만지다가 망가지면 한 번 더 고치고 오면 저녁 6시 되고 그랬다. 저녁에 망가지면 낙원상가는 문을 닫으니깐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는 동안 미치겠더라. 그럼 또 음악 들어보면서 따라 해봤다. 그러다 또 아침되면 낙원상가로 가고. 그 생활을 6개월~1년 내내 한 것 같다. 아무데도 안나갔다.”음악에 대한 공부를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던 용감한형제는 음악 장비가 즐비한 현장을 발로 뛰며 스스로 작곡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소년원 출신에 중졸 학력의 용감한 형제의 성공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1만시간 이상 몰두했다.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직접 현장을 돌아다니며 작곡법을 터득했다. 여기에 전자 악기의 발전도 그의 성공을 도왔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몰입과 부지런한 현장 체험 등과 같은 용감한 형제의 성공 비결은 작곡가를 넘어서 어떤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이야기는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용감한 형제③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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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2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용감한 형제① 소년원 출신이 ‘아이돌 대부’ 된 원동력은 ‘1만 시간의 법칙’
    ▲ 작곡가이자 자신의 소속사를 창업한 용감한형제소년원 출신에 중졸 학력이지만 스타 작곡가로, 수십억대 자산가로 성공했다. ⓒ뉴스투데이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1막, 나이트 클럽 영업 부장(19세~)→  2막, 아이돌 제조기(25세~)→ 3막, 엔터테인먼트 회사 창업한 수백억원대 자산가(29세~)빅뱅의  ‘마지막 인사’, ‘거짓말’, 손담비의 ‘미쳤어’, ‘토요일밤에’, 씨스타의 ‘나혼자’, ‘푸쉬푸쉬’, AOA 의‘사뿐사뿐’, ‘심쿵해’, 애프터스쿨 의 ‘Diva’, 포미닛의  ‘이름이 뭐예요?’ 등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이 히트곡들의 공통점은 바로 '용감한 형제(본명 강동철, 36)'가 작곡했다는 것이다.  용감한 형제는 수많은 메가히트곡들을 탄생시키며 저작권협회에 400곡 가량 등록된 스타 작곡가이다. '아이돌의 대부'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다. 그의 곡을 받은 아이돌 그룹은 스타가 된다는 게 수년 동안 '업계의 정설'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곡 뿐만 아니라 안무 감각도 대중의 취향을 정확하게 저격해왔다. 신인 아이돌 그룹은 물론이고 스타급 아이돌들도 그의 곡을 받으면 안무 지도를 받는 '패키지 상품'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프로듀싱한 아이돌 그룹들이 연이어 성공하자 급기야 창업자가 됐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해,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연 저작권 수입만 평균 40억 원에 달하는 수백억원대 자산가로 성장했다.  작곡가와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성공한 그의 성공스토리는 확실히 조금 남다르다. 그의 성공엔 ‘악보 볼 줄 모르는 작곡가’, ‘중졸 출신에 수백억대 자산가’ 등 독특한 수식어가 붙는다. 17살에 소년원에 들어갔고, 19살에 유흥업소 영업부장으로 일하며 조직폭력배의 세계에도 발을 담궜다. 그의 인생을 바꾸게 한 건 20살 때 들었던 힙합 음악이다. 음악에 빠져 무작정 작곡이 하고 싶었던 그가 보스에게 무릎을 꿇고 조직에서 나가겠다고 애원해 허락을 받았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기본적인 음악 코드도 몰랐던 그는 혼자 음악 장비를 두드리며 작곡과 씨름했다. 결국 2004년 렉시의 '눈물씻고 화장하고'라는 곡으로 작곡가로 데뷔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연예계의 큰 손인 'YG엔터테인먼트'에서 작곡가로 일했다.2008년은 그의 음악의 황금기였다. 손담비 '미쳤어', 빅뱅 '거짓말', 'BABY BABY', 브라운아이즈걸스의 'MY STYLE' 등 메가 히트곡을 내놓으며 독립 기반을 다졌다. 2008년에는 음악프로그램의 반절 이상이 용감한 형제가 작곡한 곡들로 채워질 정도였다. 작곡가로 성공가도를 달린 그는 2008년 29세의 나이로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대표자리에 올랐다. 작곡은 커녕 음악도 배우지 않았던 그는 어떻게 작곡가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 첫번째 원동력은 '1만 시간의 법칙'을 실천한 데 있다. 이 법칙을 실천하기 위한 끈기와 노력은 용감한 형제가 어두운 청소년시절을 보냈기에 오히려 가능했다. 깊은 수렁 아래로 빠져 본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쳐도 좌절하는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 소년원까지 다녀오는 '절망의 어둠'으로 단련돼 그의 어린 시절은 어두웠다. 스스로 구덩이에 발을 집어 넣었다고 말하며 후회하고 있다. 중졸 학력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유명한 싸움꾼으로 소년원까지 다녀온 문제아였다. 가출한 용감한 형제를 보기 위해 어머니가 고등학교 입학식에 찾아갔지만 그는 입학식조차 결석했다는 일화도 있다.용감한 형제의 어머니 정선옥 씨도 아들 용감한 형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애가 밤에 늦게 안 들어오면 ‘또 경찰서에 가서 있나’ 마음이 두근두근거렸다. 빨랫방망이 두들기듯이 심장이 막 뛰었다”고 회상했다.   오직 강해보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용감한 형제는 17살에 싸움이 커져 소년원에 구속됐다. 아들이 포승줄에 묶인 모습을 본 어머니는 거의 실신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소년원에서 용감한 형제는 깨달았다. “아 이건 아니구나. 지금 내가 잘못 가고 있구나.”  하지만 한번 빠진 구덩이에서 쉽게 나올 수는 없었다. 그는 “구덩이에다가 발을 집어넣으니까 계속 깊숙이 더 들어가게 되더라.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소년원에서 나온 뒤 19살 어린 나이에 유흥업소의 영업부장으로 일했다. 현재 그의 팔을 휘감고 있는 다양한 문신들도 과거 그의 상처를 담고 있다. 과거 자해를 많이 했고, 선명하게 남은 자해자국을 감추기 위해 문신이 하나둘 늘어났다. 자해는 오직 강해보이기 원했던 어린 시절 그가 남긴 흔적이다. 남아있는 그 흔적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워 문신으로 덮었다.악보도 볼 줄 모르지만 골방에서 '나홀로 작곡법' 터득6년간의 사투 끝에 출산한 첫 작품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로 대박  그가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나이트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음악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곡을 듣고 돌연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도 그 음악의 이름을 모른다. 힙합계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정도로 음악의 '문외한'에 불과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콩나물 대가리'도 이해하지 못했던 상태이다. 지금도 그는 악보를 볼 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맨몸으로 부딪혔다. 그는 무작정 낙원상가 장비 가게를 찾아 물어보고 어깨너머로 보며 겨우겨우 노래를 만들었다. 해보고 해보고 또 해봤다. 눈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장비를 붙잡고 씨름했다.  형(강흑철)이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생활하고, 형이 음식이며 빨래며 살림까지 도맡아 도와주었다. 덕분에 용감한 형제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골방에 틀어박혀 음악 만들기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분야에 1만 시간 이상을 꾸준히 노력했다는 성공학 이론이다. 이 법칙은 그를 빗겨가지 않았다. 1만 시간 넘게 하루 종일 음악과 사투하기를 6년, 2004년에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단숨에 인기 작곡가로 떠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고 작곡을 시작한지 6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도 악보도 볼 줄 모르고, 코드도 모른다.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음악장비와 사투를 벌이면서 스스로 터득한 음감으로 작곡하기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도 “내가 이 위치에 있고,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내 노래가 히트되고, 제가 프로듀싱한 그룹들이 성공하고, 그들이 소속된 회사들이 성장하고. 이런게 나도 믿기지 않은 꿈같은 현실이다”고 신기해한다.  용감한 형제가 골방의 세월 6년 동안 좌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유년 시절에 겪은 어둠이 너무 짙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에게 과거의 어둠이 '절망의 어둠'이었다면 골방에서 작곡을 하면서 보낸 6년은 '희망의 어둠'이었다.     이야기는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용감한 형제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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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2016-12-30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④ 거대 소비시장인 미국·중국을 노린다
    ▲ 서정진 회장 ⓒ뉴스투데이DB (뉴스투데이=이지우 기자)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은 여전히 성장중이다. 최순실 씨 국정농단으로 경제심리가 꽁꽁 얼어붙어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서정진 회장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그간 ‘인생 2막의 창업자들’시리즈를 통해 과거 그의 성공을 분석해왔다. 서 회장은 1957년생으로 만 59세이다. 100세 시대에서 40년 가까이의 인생이 더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성공가도에 놓여 있는 서 회장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서정진 편 네 번째 이야기는 ‘서정진의 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신체포기각서까지 썼던 ‘바이오 사랑’, 마침내 최종 목적지 ‘미국’으로 서 회장의 주력제품 램시마가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다. ‘바이오’로 거대 시장인 미국과 유럽 시장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서 회장은 지난 5일 미국 라스베가스를 방문했다. 셀트리온의 주력제품인 ‘램시마(미국 판매명 : 인플렉트라)’의 미국 런칭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서 회장에게 램시마는 특별하다.과거 램시마 개발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명동에서 사채를 썼었고 신체포기각서까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명동지역에서 너무 자주, 또 많이 작성하다보니 더이상 신체포기각서를 안 받아줬다는 후일담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 회장은 램시마에 자신을 걸었던 것이다. 이랬던 램시마가 바이오·제약 강국인 미국 시장에서 다국적제약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서 회장에게는 이 자리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국내 상위 제약사들도 미국 시장 진출과정을 어렵게 꼽는다. 올해 초 서 회장의 오랜 심혈을 기울인 램시마가 미국 식품의약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복병을 만났던 것이다.다국적제약사인 얀센이 제기한 ‘레미케이드’ 물질특허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송 5개월만에 미국 현지 법원에서 승소를 얻어내게 됐다. 램시마는 레미케이드의 바이오시밀러이다. 얀센은 미국 다국적제약사 존슨앤드존슨의 자회사로 존슨앤드존슨은 2013년 기준 매출 약 713억 달러(84조 5000억원)를 내고있는 거대기업이다. 특히 램시마 오리지널 제품인 레미케이드는 세계 시장에서 한해 98억 8500만달러(약 12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전세계 판매액 기준 3위에 오른 블록버스터 항체의약품이다. 따라서 런칭 후 본격적인 판매에 돌입하면 매출증가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유통 및 판매는 다국적제약사 화이자(Pfizer)가 독점판매권을 맡아 시너지는 더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외신에서는 레미케이드의 매출이 약 10억 달러(1조 1800억원) 이상 감소할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했다. ▲ ⓒ셀트리온 ‘코스메슈티컬’ 시장에 영업손실에도 1500억원 투자 서 회장은 ‘바이오’로 최종 목적지인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이와 함께 이제는 글로벌 기업인으로 보유한 바이오기술을 활용해 신사업 확장에 나서 역량을 더 극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인구 약 14억 명에 이르는 중국에서 ‘기능성 화장품’으로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서 회장은 기능성 화장품 사업(코스메슈티컬)에 뛰어들고 있다는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코스메슈티컬(Cosmeceutical)은 ‘화장품(Cosmetic)’과 ‘의약품(Pharmaceutical)’을 합친 말로 세포 배양액 등을 함유해 피부 재생, 미백 등 효과를 갖춘 기능성 화장품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서 회장은 한 자리에서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바이오 문외한이었던 한 샐러리맨에서 바이오 전문 기업인이 될 때까지 끊임없는 도전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도전정신을 살려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사 바이오기술을 활용해 화장품사업으로 도전하고 있다. 서 회장은 2013년 90억원을 들여 화장품업체 한스킨을 인수해 사명을 ‘셀트리온스킨큐어’로 바꾸고 화장품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어왔다. 물론 신사업으로 확장하면서 셀트리온은 영업 손실은 피할 수 없었다. 셀트리온스킨큐어는 지난해 매출 182억원, 영업손실 52억원을 기록했다. 2014년 매출 228억원, 영업손실 27억원 실적보다 부진했다. 하지만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 회장은 올해 사업에 1500억원을 투자했다. 이 투자금은 셀트리온의 반년 R&D(투자개발) 자금을 뛰어넘는 금액이라 그의 관심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셀트리온의 올해 상반기 R&D비용은 1205억원이었다. 셀트리온 관계자는 “초기 투자확대로 실적이 부진했던 것”이라며 “바이오 기술이 접목된 화장품제품들이 본격적으로 나오면 실적이 개선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 회장이 코스메슈티컬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전세계적으로 코스메슈티컬이 부상하고 있지만 국내에 뚜렷한 ‘1위’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자체 기술을 다수 보유한 셀트리온도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 회장은 남다른 시장흐름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15년 전 전세계적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바이오 불씨’를 봤던 것 처럼 ‘코스메슈티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80대20의 파레토법칙과 반대인 ‘롱테일법칙’에 적용된다. 아직 셀트리온스킨큐어의 수익구조는 미미하지만 ‘기능성 화장품’을 원하는 변하고 있는 고객심리(효능, 기능을 중시)를 노리는 틈새시장이다. 전 세계 코스메슈티컬 시장 규모는 2012년 350억달러(41조 5000억원)으로 연평균 5% 이상씩 성장해 내년에는 460억달러(54조 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서정진 회장 ⓒ뉴스투데이DB 서 회장 지분 94% ‘드림E&M,’ ‘한류 바람’ 이용해 화장품사업 활성화 서 회장은 중간이 없다. 단점이 될 수 있지만 목표한 것에는 가감없는 투자정신을 갖고 있다. 서 회장은 자회사인 드림E&M을 통해 엔터테인먼트사업을 하고 있다. 드림E&M의 한류 콘텐츠를 화장품 마케팅에 활용해 셀트리온스킨큐어와 시너지 효과를 목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올해에는 영화 ‘인천상륙작전(7월27일개봉작)’에 CJ E&M등과 함께 30억원씩 투자했다. 특히 셀트리온의 영화 투자는 전적으로 서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 회장은 셀트리온홀딩스가 100% 지분을 보유한 드림E&M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벌이고 있다. 셀트리온홀딩스는 서 회장이 93.9% 지분을 보유해 드림E&M은 사실상 서 회장 개인회사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엔터테인먼트 사업까지 손을 뻗치는 이유는 국내 드라마, 예능 등이 중국에서 거대한 ‘한류바람’을 몰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셀트리온스킨큐어는 드림E&M이 제작하는 드라마에 PPL(간접 광고) 형태로 한류스타들이 셀트리온스킨큐어 제품을 쓰는 장면을 내보내는 식으로 마케팅을 펼칠 예정이다. 또 유명인을 이용한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김태희, 장동건 등 유명배우들과 장기간의 전속모델 계약을 맺고 최근 중국에서는 유명한 뷰티 파워블로거를 초청해 셀트리온스킨큐어 제품을 알리기도 했다. 과거 서 회장은 ‘바이오’ 불모지였던 한국에 ‘바이오’를 들여왔었다. 하지만 15년 만에 상황은 역전돼 ‘바이오’를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다. 또, ‘바이오’ 역량을 강화해 ‘코스메슈티컬’에 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서 회장은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고 1997년 터진 외환위기 직격타를 받은 실업자 중 한명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 중 1인이었다. 하지만 ‘치킨’의 물결에 편승하지 않고 ‘새로운 치즈 찾기’에 도전해 성공을 이룬 인물이다.  서 회장은 한 강연에서 “꿈을 갖는 순간 열정이 샘솟고 생각과 몸이 바뀌며, 생활에 질서가 생기고 행동이 바뀌고 목표를 향해 매일 새롭게 진보한다. ‘독학’을 하라. 파고 또 파라. 전세계를 누비며 질문하고 질문하라”고 청년들에게 주문했다. 서 회장의 끊임없는 ‘도전’은 ‘그의 꿈’에서 비롯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는 허상에 불과한 꿈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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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0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③ 숫자로 보는 ‘성공과 위기’ 스토리
    ▲ 서정진 회장 ⓒ뉴스투데이DB(뉴스투데이=이지우 기자)제2의 인생을 꿈꾸는 중장년층에게 ‘희망’과 ‘반면교사’가 되는 서정진의 숫자들셀트리온의 성장세는 무섭다.셀트리온이 올해 1~3분기 바이오·제약 기업 중 가장 많은 영업이익을 낸 기업으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바이오·제약기업 중 영업이익이 1000억원 선을 넘긴 것은 유일하다.지난 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셀트리온 영업이익은 1781억원으로 2위인 동아쏘시오그룹의 계열사 에스티팜(609억원)을 큰 차이로 따돌렸다. 이외 녹십자(608억원), 유한양행(502억원) 순이었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이 공식석상에서 그룹 4개 계열 전체 순익을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룹자체로는 올해 순익이 6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내년 1조원, 2018년에는 2조원을 넘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셀트리온은 계속 확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의 세 번째 이야기는 ‘숫자로 본 서정진 성공 이야기’이다. 그 숫자들에는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층과 제 2의 인생을 설계하는 중장년층에게 도움이 될 ‘희망’과 ‘반면교사적 교훈’이 담겨있다.    ① 14 = 제약기업 최초로 ‘대기업 집단’에 오르는데 걸린 시간 올해 초인 3월, 셀트리온은 벤처기업으로 창업한 지 14년 만에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됐다.  ‘대기업 집단’은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기업이 포함되는데 4월 1일 기준으로 셀트리온은 자산 총액이 5조8550억원으로 집계됐다. 따라서 새로 지정됐던 28개 대기업 중에 포함된 것이다.이때 셀트리온과 같이 새로 지정된 대기업 집단 기업에는 카카오와 하림 등이 있었다. 카카오의 경우 자산 총액이 5조83억원이었는데 카카오보다도 셀트리온이 더 규모가 큰 셈이다. 특히 국내 제약·바이오 벤처기업이 대기업 집단 지정된 것은  들어가는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를 계열사로 둔 삼성처럼 대기업이 바이오나 제약사업에 뛰어든 사례는 있지만 제약·바이오그룹이 스스로 ‘몸집’을 키워 대기업 집단에 지정된 적은 없었다.서정진 회장은 창업한 지 14년만에 ‘대기업 총수’ 명함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난 9월 대기업집단 자산 기준이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상향되면서 셀트리온은 대기업 집단에서 빠지게 됐다.   물론 셀트리온 입장에서는 각종 규제가 걸리는 대기업집단 제외를 반기는 분위기다. 현행법상 대규모 집단에 지정되게 되면 상호출자와 신규 순환출자, 일감몰아주기, 상호채무보증 등 기업의 독점 규제를 막기 위한 행위들이 법적으로 제한된다. 이에, 신규 대기업들은 각종 규제로 진행중인 사업에 차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② 12 - 7만2500 - 13 = 시총, 시총 증가율, 국내 자산가 순위 지난달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코스닥에 입성하면서 셀트리온과의 경쟁구도가 예고 됐었다. 특히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상장 전부터 시총 10조원 대어로 꼽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시총 1위 셀트리온은 굳건했다. 현재 삼성바이오로직스 시총은 9조4616억이며 셀트리온은 약 12조에 이른다. 특히 국내 주식시장에 상장된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최근 10년간 시총 증가율이 가장 높은 기업으로 셀트리온이 선정됐었다. 2006년 시가 총액은 174억원으로 증가율은 무려 7만 2500%였다. 그렇다면 서정진 회장 개인 재산은 얼마나 될까.  포브스가 지난 4월 28일 발표한 2016년 한국 50대 부자를 살펴보면 서 회장은 2조 6362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4계단 오른 13위를 기록했다. 14년 만에 서 회장은 국내 부자,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기업적으로도 성공을 이룬 셈이다.③ 5000만 = ‘치킨’이 아닌 ‘바이오 태풍’을 겨냥해 투자한 돈 서정진 회장의 성공신화가 남다른 이유는 또 있다. 현재 국내 시총 1위 바이오·제약기업이지만, 창업자금은 깜짝 놀랄 수준이다. 단돈 5000만원이었다. '단돈'이라는 표현은 듣기에 불편할 수 있다. ‘5000만원이 작은 돈도 아니고’라고 생각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40대 중반인 서정진은 대우자동차에서 구조조정에 튕겨져 나왔다. 금융위기 당시 길에 흔하고 흔했던 다른 실업자들과 다를 것 없는 한 가정의 가장에 불과했다. 그의 창업  자금 또한 자영업 창업자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선택은 다수와 달랐다. 서 회장은 손에 쥐여진 5000만원으로 ‘치킨공화국’이 된 한국 창업 물결 속에 ‘치킨’ 또는 ‘편의점’ 등을 주종목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다가올 바이오라는 태풍을 본 것이었다. 지난 8월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개최된 ‘제1차 글로벌리더스포럼’에서 서 회장은 “처음에는 망하지 않으려고 죽도록 일했고 자리가 잡히고는 자선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다음세대에 성공신화가 많이 만들어 질 수 있는데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취업난에 창업이 주목받고 있지만 그 흐름은 일괄적으로 찍어내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 판에 박힌 창업이 계속되고 있다. 치킨집이 한국 사회에 자리잡은지 서정진과 비슷한 시간이 지났지만 치킨집은 포화상태로 10곳 중 8곳은 수명이 2년도 되지 않아 폐업하는 실정이다. 14년전에는 똑같은 5000만원이었지만, 치킨집 사장님과 서정진이 만들어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미지의 세계였던 ‘바이오’에 맨몸으로 뛰어든 그 도전정신은 5000만이라는 수치를 통해 실감할 수 있다.④ 5000만 - 5억 = 사회적 명성 관리 위기를 드러내는 수치 서정진 회장은 성공 가도 위에 서있지만 반대로 명성관리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내 부자 13위에 있지만 기부에는 인색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2011년 ‘5.16민족상’에서 ‘과학기술개발’부문 수상자로 선정됐고 5000만원을 5.16민족상재단에 기부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상한 상의 성격도 문제로 지적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셀트리온 기부 내역이었다. 지난해 기부금은 1890만원으로 2014년(1740만원)에 비해 7.9% 늘었다. 하지만 셀트리온 매출액(6,034억)과 대비했을 때는 기부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0.003%로 동종 업계 최저 수준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셀트리온 그룹은 ‘사실과 다르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셀트리온 그룹 복지는 2011년 출현된 ‘셀트리온 복지재단’에서 총괄하고 있는데 언론 보도는 일부 사업의 내용만 다룬 것이란 설명이다.  셀트리온 복지재단 관계자는 뉴스투데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셀트리온 그룹에서는 복지재단이 총괄하고 있는데 보통 한해에 5억원 이상 많게는 재단에서 6억원 정도 복지에 들이고 있다.진행 사업은 ▲의료비지원 ▲학자금지원 ▲자원봉사활동지원 ▲부식 및 쌀 지원 등으로 진행한다. 특히 생명공학회사라 의료비 지원에 연간 2억원 안팎으로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셀트리온 본사가 인천에 있기때문에 주로 사회공헌은 인천, 충북지역에 타겟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서정진 회장이 사회공헌활동을 바깥으로 홍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5000만원이 아닌 6억원이라 하더라도, 6000억원 매출에 6억원 기부는 0.1%밖에 되지 않는다.  기부는 기업의 역할 중 하나이다. 윌리엄 워서(William Werther)와 데이비드 챈들러(David Chandler)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과정’인 동시에 ‘목표’라고 정의했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 전략의 통합적인 요소”로 기업이 시장에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전달하는 방식인 동시에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이 단순히 이윤만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생각은 일부의 견해가 아니다. 시대정신에 가깝다. 사회공헌에 인색한 기업은 그 존재가치가 퇴색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윤리 자체가 이윤추구와 나눔의 조화를 지향하는 추세이다.    국제적 흐름도 뚜렷하다.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잘 알려진 워런 버핏은 지난해에만 약 3조1978억원을 기부했다. 2006년부터 10년간 총 기부금액은 약 25조4000억원에 이른다.  셀트리온과 비슷한 신흥기업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네이버의 경우 지난해 매출액 2조1413억원 중 409억원으로 1.9%였으며 카카오는 8621억원 중 59억원으로 0.7%를 차지했다. 국내외의 어떤 자산가와 비교해도 서 회장의 적극적인 사회공헌 활동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서 회장은 ‘성공한 재력가’이지만 ‘위기에 처한 명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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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3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② 우연에서 필연이 된 성공동력 2가지
    ▲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지난 8월24일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열린 '2015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윤여표 총장에게 명예 약학박사 학위를 전달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사내용과 사진은 관련 없음. ⓒ뉴스투데이 (뉴스투데이=이지우 기자)   ‘바이오 시작’은 우연이었으나, ‘성공’은 스스로 필연으로 만든 서 회장 고령화 사회 속에서 하나의 ‘직업’에 평생을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수명은 길어져가는 데 ‘직장 수명’은 오히려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 2의 직업과 삶을 준비해야되는 것이 현대인들의 숙명이 된지 오래이다.  이런 점에서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이 ‘인생 제2막’을 성공시킨 비결은 궁금증의 대상이다.  그 비결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천재 과학자 에디슨의 명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서 회장의 창업과 성공 과정은 “창업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한 줄로 설명된다.  당시 바이오 불모지인 한국에서 서 회장이 ‘바이오에 눈을 돌린 이유’는 우연이 될 수 있지만, ‘성공’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 회장의 성공 동력인 노력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성공 동력, “꿈꾸고 독학하라” 얼마전 서 회장은 인천재능대학교를 방문해 ‘기업가 정신’ 강연을 펼쳤다. 서 회장은 이날 강연에서 셀트리온을 창업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을  ‘꿈과 독학’이라고 표현했다. 서 회장은 “꿈을 갖는 순간 열정이 샘솟고 생각과 몸이 바뀌며, 생활에 질서가 생기고 행동이 바뀌고 목표를 향해 매일 새롭게 진보한다. ‘독학’을 하라. 파고 또 파라. 전세계를 누비며 질문하고 질문하라”고 조언했다.  다만 서 회장은 꿈을 갖지만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수준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했다. 강연에서 “꿈을 갖되 일평생 목숨이 다하도록 간절히 이루고 싶은 꿈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간절한 꿈’을 가졌다면 그 다음은 ‘공부’다. 15년 전 서 회장이 ‘바이오’로 눈을 돌린 시기에 국내 시장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지피지기면면 백전백승’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이긴다는 뜻이다.이 고사성어는 서 회장에게 과분(?)했다. 적을 알기는 커녕 앞으로 친구가 돼야 할 ‘바이오’조차도 모르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이나 바이오 관련 전공자가 아닌 서 회장이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선 ‘적을 알기보다 나를 먼저 아는 것’이 필요했다. 때문에 ‘先공부’는 필수적이었다. 서 회장은 회사를 나온 1999년부터 셀트리온 창립인 2001년까지 2년간 ‘바이오’에 인생을 걸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 회장은 주저없이 외국으로 떠났다. 바이오를 알기에 ‘가장’ 공부하기 좋은 환경으로 외국을 선택했다. 한국은 불모지였지만 당시 미국과 유럽은 바이오가 꽃피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서 회장은 전 세계의 바이오 선진국을 돌아다니면서 바이오 연구자뿐만 아니라 바이어들을 만나면서 제품에 대한 지식, 시장의 메카니즘 등을  ‘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오 공부를 하면서 산업에 대한  서 회장의 확신은 커졌다. 선진국에서는 이제 막 바이오산업이 커지고 있었고, 한국은 불모지였다. 하지만 바이오 열풍은 조만간 한국에 상륙할 것이라는 예측은 치열한 독학의과정을 통해 단단해졌다.    예상은 적중했다. 서 회장은 오리지널 바이오의약품 복제약 ‘바이오시밀러’에 주목했다. 미국과 유럽의 블록버스터급 의약품들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대거 특허가 만료된다는 점이다.대거 만료되면 복제약 생산이 가능해지는데 의약품 원료가 되는 단백질은 오랜기간 배양기를 거쳐야해 일시에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역발상해 2002년 인천 송도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갖춰 제약사들의 위탁 생산을 할 수 있도록 해 수익구조를 마련하는 등 시장해석 능력도 뛰어났다.  두 번째 성공동력, “이 또한 지나가리라…역경을 친구로” 서 회장의 삶은  ‘성공신화를 그리는 성장 드라마’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서 회장이 주연인 드라마는 흔한 ‘금수저’의 남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천재성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정말 평범한 한 인간의 드라마이다. 때문에 막장 드라마의 스토리가 아닌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로 수많은 흙수저들의 공감대를 형성한 인기 드라마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많은 성장 드라마에는 ‘역경’이 존재한다. 그리고 역경을 통해 주인공은 내적으로 강화하고 성장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서 회장도 그렇다. 서 회장에게 역경은 세번 찾아왔다. 먼저 첫 번째 역경은 어릴 적 어려운 가정 환경이다. 10대 때 등록금이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미뤘다. 대신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연탄배달과 고추장사를 해야했다. 고학(苦學)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두 번째는 1997년 말 터진 외환위기이다. 대우자동차 컨설팅직에서 대우차 임원까지 30대의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가 위기 돌파를 위해 ‘부실기업 매각’ 및 ‘구조조정’ 등을 실시했는데 대우그룹이 그 정책의 핵심 타깃이었다. 외환위기 부실기업 매각 분위기에서 대우차도 공중분해 된 것이다.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두 번째 역경이 찾아왔다.    성공하려면 도전해야 하고, 도전하면 역경을 피할 수 없는 법  세 번째 역경은 셀트리온 ‘창업 후’였다. 사업 초기에는 생각만큼 일이 진행되지 않아 자금난에 시달렸다. 서 회장 말을 빌리자면 “사업 초기에 하루하루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고 회고했을 정도 였다. 2002년 셀트리온 설립 이후 끊임없는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사채까지 끌어다 쓸 정도로 상황은 나빴다. 세 번의 역경 속에서 서 회장이 가장 견디기 힘든 역경이었다. 고학과 외환위기를 버텼지만 셀트리온 창립 후에는 ‘죽을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그는 “전동차에 뛰어들자니 여러 사람에게 못할 짓 같고, 목을 매자니 육중한 몸에 줄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차를 몰고 북한강에 뛰어들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15일만 더 살아보자”는 결심으로 차를 돌렸고 그 이후로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서 회장의 성장 드라마를 살펴보면,  ‘그는 역경이 닥치면 오히려 강해지는 스타일’이다. 역경에 강한 것이 성공의 최대 동력인 셈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도전해야 하고, 도전하면 역경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역경에 무릎 꿇지 않는 강인함과 돌파력이 성공의 마지막 동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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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2016-11-21
  • [인생 2막의 창업자들] 대우차 출신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① 자동차 대신 바이오에 눈돌린 2 가지 이유
    ▲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그래픽=뉴스투데이] (뉴스투데이=이지우 기자)   서정진의 메시지, “중년도 미지의 영역에 도전해 성공할 수 있다”  인구 고령화와 수명 연장으로 헬스케어 분야가 조명받는 21세기에 ‘바이오제약산업’이 새 먹거리로  주목되고 있다. 그런만큼 글로벌 시장의 경쟁은 치열하다. 그 와중에 국내 기업 셀트리온은 바이오 시밀러(바이오 의약품 복제약) 세계시장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2001년 서정진(59) 회장이 창업한 셀트리온은 올해로 15년 차에 접어들었다. 사실 다른 바이오제약기업과 비교하면 짧은 역사이다. 하지만 단기간에 큰 성과를 거뒀다. 국내 코스닥 시총 1위 기업의 자리에 올랐다.  지난해의 경우에도 대표 제품인 ‘램시마’를 ▲유럽 12개국 (2월) ▲브라질·베네수엘라(4월) ▲러시아(7월) ▲호주(8월)등에서 판매허가를 받는 성과를 냈다. 램시마는 셀트리온이 개발 생산하고 있는 자가면역질환 치료제이다. 존슨앤드존슨의 레미케이드(Remicade)를 복제한 바이오시밀러이다. 오리지널 제품과 동등한 약효를 발휘하면서 가격은 30~40% 정도 저렴한 게 강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 회장이 바이오와 전혀 관련없는 대우자동차에서 근무했던 한 샐러리맨 출신이라는 점이다. 흔히 창업의 성공조건으로 '전문성'을 꼽는다. 자신이 땀을 흘려온 분야에서 사업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서 회장은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어 성공한 창업자이다. 그것도 20~30대의 청년이 아니라 40대 중반의 나이였다. 때문에 그의 성공은 ‘인생 제 2막’을 준비중인 중년층에게는 대단히 희망적인 사례이다. 육체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 사람도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대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게 ‘서정진의 메시지’ 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출발선에 선 청년층에게도 교훈적이다. 자신의 전공과 같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용기를 준다.   이 같은 이유로  ‘인생 제2막’을 성공으로 이끈 창업자 시리즈의 첫 사례로 서정진 회장을 선택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자동차 맨’이었던 서 회장이 전혀 새로운 분야인 바이오에 눈을 돌리게 된 2가지 이유”로 시작한다.     ① 창고에서 사라진 ‘과거의 치즈’를 잊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서라   서 회장은 1957년 10월 23일 충북청도에서 태어나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와 건국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생산성본부에 들어가 당시 대우자동차 판매 컨설팅일을 한동안 했다. 그의 열성적 컨설팅을 눈여겨 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의해 대우자동차에 스카웃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만큼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임원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고 당시 김대중 정부는 부실기업 매각 및 구조조정 등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대우그룹은 그 정책의 핵심 타깃이었다. 1999년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서정진은 대기업 임원에서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서정진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동차 회사로의 재취업 혹은 자동차 관련 부품 업체 창업등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에 전혀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스펜서 존슨이 베스트셀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서 주장했듯이, ‘사라진 과거의 치즈’를 그리워하기 보다는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섰다.   그 계기는 우연이었다. 그 우연을 놓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기회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버리곤 한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우연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변혁점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전력투구한다. 서 회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서 회장은 1999년 대우자동차를 나와 같이 퇴직한 10여명의 직원과 사무실을 차렸다고 한다. 대우차 출신들이 모여 앞날을 걱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사업 아이템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에 바이오 산업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서 회장은 당시 판단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연히 제약산업을 보게 됐다. 당시 세계 제약시장은 1000조원대의 시장이었다. 자동차는 500조~600조원 시장이었다. 한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이면, 그 1000조원 중 100조원은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자동차가 창고에서 사라진 ‘과거의 치즈’라면, 바이오 제약은 앞으로 찾아나서야 할 ‘새로운 치즈’라고 생각한 것이다.  서 회장은 특히 오리지널 바이오의약품 복제약인 ‘바이오시밀러’에 주목했다. 미국과 유럽의 블록버스터급 바이오 의약품들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대거 특허가 만료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혁신적 바이오 신약들의 특허가 대거 만료되면 복제약 생산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바이오 의약품 원료가 되는 단백질은 오랜기간 배양기를 거쳐야한다. 단기간에 대량 생산체제를 갖출 수 없다.  서정진은 무릎을 쳤다. 바이오 복제약 대량생산을 위해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뛰어들면 ‘블루오션(Blue ocean. 경쟁없는 신시장)’을 선점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일종의 ‘역발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2002년 인천 송도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위탁 생산을 할 수 있는 준비작업을 본격화한 것이다. 새로운 치즈가 바이오 의약, 그중에서도 바이오 시밀러라는 확신을 갖고 준비된 자의 길을 걸은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새로운 치즈를 정확하게 포착해낸 서 회장은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② 모두의 조언을 경청하라…“요즘 바이오 산업이 뜬다”는 한 마디가 출발점  그렇다면 새로운 치즈로 바이오 제약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일까? 서 회장은 주변 말을 듣는 신중함이 있다. 서 회장의 ‘바이오 짝사랑’의 시작은 주변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서정진은 2000년 어느 날 대우자동차 퇴사자들의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사무실을 낸 지 해를 넘겼지만 구체화된 게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누군가가  “요즘 바이오 산업이 뜬다”는 말을 꺼냈다.  그 누군가의 조언을 흘려듣지 않고 붙잡았다. 무작정 ‘바이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흘려듣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자양분으로 소화해내는 능력이 셀트리온을 탄생시킨 원천이었던 셈이다.   조언을 경청하는 서 회장의 철학은 셀트리온 창업 준비단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전 세계 40개국을 돌며 바이오 관련 전문가에게 직접 자문을 구했다. 문외한이었던 서 회장은 이러한 조언 청취의 과정을 통해 바이오 제약의 ‘문외한’에서 ‘전문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3명의 행인이 지나가면 그 중에 반드시 한 명은 나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공자의 어록이다. 서정진이 미지의 영역인 바이오에 눈을 돌린 이유는 바로 공자의 어록이 설명해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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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7
  • [리 스타트] ‘내실강화·조직통합’ 윤종규식 실용주의로 KB변화 이끈다!
    KB금융 윤종규號, 새로운 도약 위한 출항 준비 완료리딩금융그룹 탈환 위한 흑묘백묘論(색깔보다 실질성과 중요) ‘세가지 해법’ 제시(뉴스투데이=윤지현 기자) 윤종규 KB금융그룹지주 회장의 출발을 알리는 TV광고가 9일 새롭게 선보였다. ‘새롭게 도약하는 KB’,‘국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KB’를 컨셉트로 하는 TV 광고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새 광고에는 ‘피겨여왕’ 김연아와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가 출연해 자긍심 회복과 고객신뢰 회복에 최선을 다하는 KB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종규 회장은 지난 11월25일 열린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KB금융에 필요한 것은 어떠한 모양으로 시장에서 평가되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모양으로 변화해 나가는가 하는 문제"라며 "취임초 미사여구의 수식어로 시장에 어필하는 것이 아니라 KB의 실질적 경쟁력 회복과 그 지속성에 의미를 부여하겠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어떤 색깔로 KB를 입힐 것인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윤종규표는 중요하지 않다. KB표가 중요하다’ 는 함축된 말로 실질적인 성과와 내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신임 윤종규號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현재의 어려운 금융환경을 극복해 KB의 과거 위상을 회복하고 ‘대한민국 최고 리딩금융그룹 탈환을 위한 기반 구축’ 이라는 조직원들의 염원을 안은 채 힘찬 출항에 나섰다.  ▲ “리딩금융그룹 회복으로 직원 자긍심 회복하자”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겸 행장이 11월21일 취임식 일성(一聲)으로 내뱉은 말이다. 윤 회장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에서 열린 이날 취임식에서 회장 및 행장으로 취임한 소감과 함께 KB금융그룹을 이끌어갈 향후 비전을 밝혔다.윤 회장은 KB금융의 위상 회복에 대한 열망과 염원이 있었기에 본인이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비장한 각오로 말문을 열었다. 저성장, 저금리, 저출산 및 고령화 등 3低1高가 이미 현실이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더욱 치열해진 금융경쟁의 틈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KB금융그룹의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윤 회장은 마지막으로 KB금융그룹 2만5천 전임직원에게 애정 어린 말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모두 KB의 일원이라는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와 소통을 통해 새로운 KB를 만들어 가자고 말하며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말로 직원들의 용기를 북돋았다.윤회장은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시다. ‘1등 금융그룹의 위상회복’ 이라는 꿈을 이루고 대한민국 금융의 새 역사를 만드는 길에 2만5천 KB가족 모두가 함께 합시다"라며 "훗날 우리의 노력들이 후배들에게 아름다운 도전으로 기억되도록 합시다"라고 강조했다.▲ 과거의 잘못은 인정…통렬한 반성 통해 극복윤 회장은 ‘과거 10년전 KB의 눈은 국내를 넘어 아시아를 향했었다’ 고 운을 뗀 뒤 과거 KB는 1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서민금융 안정과 주택시장 발전을 견인했으며 국가경제의 근원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며 명실공히 대한민국 금융을 선도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화된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시장과 고객을 경쟁자들에게 내주었다는 통렬한 반성을 덧붙였다. 아울러 우리를 믿고 기다려주신 투자자들과 고객에 대한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최근 KB금융그룹 내외에서 불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윤 회장은 통렬한 자성(自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자고 목소리를 높이며 지금부터 어떤 변화의 모습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지가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주문했다.▲ 수 차례 위기극복 경험…"희망은 있다" 윤회장은 우리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3천만 고객과 1,200여 개가 넘는 국내 최대 영업점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그 동안 수 차례 위기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응집력과 추진력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저력이자 힘이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그러한 KB만의 장점을 살리고 과거 성공을 경험했던 ‘성공DNA’ 를 다시 일깨워 새롭게 변화된 KB를 보여주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철저한 내부통제와 윤리의식으로 사고 없는 깨끗한 KB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최근 KB금융그룹 내외에 불어 닥친 불미스러웠던 일들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금융업 본연의 중소기업 지원과 서민금융 확대를 요청했으며 정부의 정책방향에 부합하는 기술금융 지원 등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도 더욱 노력하자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룹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KB人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은행이 확고한 리딩뱅크의 지위를 되찾고 비은행 부문 또한 지속적 성장의 기반을 굳건히 하자고 강조했다. ▲ 리딩뱅크 탈환…세 가지 해법 제시윤회장은 리딩뱅크 탈환을 위한 구체적 방안 세가지를 제시하며 전임직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리딩금융그룹의 자긍심을 회복하자 △고객 신뢰회복에 최선을 다하자 △차별화를 통해 그룹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자" 윤 회장은 관리와 통제가 일상화 되면서 수동적으로 바뀐 우리의 업무를 돌아보자고 제안했다. 조직에 활력이 넘치고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은 경쟁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고 인정하며 제도와 프로세스를 영업 중심으로 변화하는 등의 새로운 변화를 주문했다.영업점은 고객과 영업에만 집중하고 본부는 현장을 지원할 수 있도록 조직과 기능을 재편하자고 말하며 현장의 리더가 小CEO가 되어 영업점을 경영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고 재량권을 부여하겠다고 말했다.한편 100년 KB를 위해서는 내부에서 최고 경영자가 배출되는 토양 마련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인재 육성과 경영승계 프로그램 마련에 노력을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윤 회장은 최근 KB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고객신뢰에 대한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며 ‘고객이 없으면 KB도 없다’ 라는 말로 신뢰회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상품과 서비스는 차별화하고 고객에게 혼선을 주는 영업과 마케팅은 일관성 있게 재정비해 고객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영업 행태를 돌아보자고 강조했다. 모든 채널을 고객중심으로 재편하고 어떤 경로를 통해 KB를 방문하더라도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며 기존 관행에 대한 강력한 쇄신을 당부했으며 아웃바운드 마케팅의 체계화를 통해 변화된 금융환경에 대한 선제적, 적극적 대처를 주문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윤 회장은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을 강조하며 글로벌 경쟁을 하는 기업들의 철저한 미래준비에 비교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는 점을 지적했다. 또 고객과 시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하는 소매금융은 더욱 차별화하고 가계부문의 정체와 저성장, 고령화에 대응하도록 SOHO 및 중소기업금융과 자산관리 분야 역량강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CIB 분야의 수익기회 모색 및 미래 경쟁력을 위한 해외진출 또한 착실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며 기업금융 서비스 질 개선을 주문하기도 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조직 통합 나선다 윤 회장은 취임사 말미에 ‘서로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화합하고 단합한다’ 라는 뜻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KB금융 내부에 여전히 존재하는 채널 갈등 극복 의지를 강력히 피력했다. 2만5천여 전임직원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모여 각자의 개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방향과 목표가 정해지면 KB라는 이름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 협력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첫 걸음은 ‘신바람 나는 일터’ 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 직원 개개인의 활기가 조직의 활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현장의 생기를 특별히 주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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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9
  • [리 스타트] 여원태 리더스21 대표 “지금은 글로벌 시대, 해외 문을 두드려라”
    ▲ (주)리더스21 여원태 대표 [사진=양문숙기자] (뉴스투데이=조호성 기자) (주)리더스21 대표 여원태(50) 대표는 저자극 화장품 ‘몬드레브’라는 획기적인 아이템으로 창업을 시작해,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에 열정을 불사르는 늦깎이 CEO다. 여 대표는 존슨앤존슨, 로레알코리아 등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근무를 해오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자극이 없는 화장품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그러한 고민을 통해 ‘몬드레브’를 탄생시키게 된 것. 여 대표는 “몬드레브는 정말 특이한 제품”이라며, “이 제품에는 사람에게 유해한 성분이 절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라며 자신했다. ‘몬드레브’ 화장품은 처음 일본의 제일동포가 운영하는 유명 피부과에서 아토피 환자를 위한 치료용으로 처음 개발됐다고 한다. ■ 직장에서 얻은 교훈으로 시작한 창업 여 대표는 지방의 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존슨앤존스’라는 외국계 기업에 입사해 영업 마케팅 인턴사원으로 화장품을 처음 접하게 됐다. “11년 간 이 회사에 몸담으면서 화장품, 영업, 마케팅 등 수많은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존슨앤존스’라는 회사는 안전한 제품을 팔려고 노력하는 회사입니다. 또 기업에 이익이 생기면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으로서 본보기가 되는 회사였죠. 제가 가장 크게 배운 건 이 회사의 경영 마인드였습니다.” 여 대표는 11년의 직장생활 중 중도금이 필요해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 로레알 이라는 회사의 스카웃 제의로 바로 이직을 할 수 있게 됐다. “로레알이라는 회사는 정말 딱딱한 회사였어요. 복지나 급여에 대한 문제는 다른 회사보다 좋은 편이지만 그만큼 치열한 경쟁과 처세, 인간적이지 않은 회사였죠. 로레알은 100여개의 화장품 브랜드를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이런 큰 기업에서도 피부트러블 때문에 클레임이 들어와요. 솔직히 화학제품인 화장품이 자극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저는 혹시 이런 자극이 없는 제품이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로레알에서 7년을 끝으로 제 스스로 창업을 하기 위해 퇴직을 했어요. 자극 없이 무해한 화장품을 만들자는 목표를 가졌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만들고 싶단 생각이었죠. 창업을 위한 준비로 한국기업에 취업해 한국적인 기업에 대해 배우고 나와서 무역 일을 하면서 ‘몬드레브’를 만나게 됐고, 이렇게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 (주)리더스21 여원태 대표 [사진=양문숙기자] ■ ‘몬드레브’는 특이한 화장품이다 아직까지 ‘몬드레브’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화장품이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 저자극, 아이부터 어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발라서 자극이 없는 제품이라고 한다. “몬드레브는 정말 특이한 제품입니다. 보통 화장품은 물과 기름으로 만들어졌죠. 이 섞이지 않는 물질을 섞기 위해 개명활성제가 필요해요. 화학물질이죠. 또 화장품에는 보습을 위해 알콜이나 오일 성분이 들어가는데, 이 것을 바르면 피부가 숨을 쉬지 못하게 되고, 결국 피부가 건성으로 바뀌게 되죠. 그 밖에도 살균제, 방부제, 산화방지제 등 많은 화학물질이 들어가 피부에 자극이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몬드레브는 절대 이런 유해한 화학물질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이런 화학물질이 없이도 화장품이 된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거죠.” “몬드레브는 처음 일본의 제일동포가 운영하는 정 피부과 병원에서 저와 함께 개발했어요. 이 제품은 아토피 환자를 위한 치료제를 시작으로 개발 되었죠. 사람 피부에 가장 좋은 물질은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를 보호하는 양수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양수와 같은 화장품을 만들었고, 이 상품을 한국으로 가져오게 된 겁니다.” ▲ (주)리더스21 여원태 대표 [사진=양문숙기자] ■ 화장품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해 무모한 도전을 여 대표는 한국 사람들이 화장품에 대한 인식은 뷰티 쪽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 특히 유럽 권에서는 화장품의 안전성을 더욱 중요 시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추세다. “한국에도 점점 소비자가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품의 성분을 보며 판단 할 줄 알게 되고 자신의 피부에 맞는 제품을 찾고 있죠. 그렇게 ‘몬드레브’의 성분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에서 개최한 화장품 관련 행사에서 바이어들이 뽑은 최고의 제품상과 우수 기술상을 받았어요. 큰 영광이었죠. 얼마 전에는 SBS에서 방송하는 좋은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큰 화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몬드레브라는 상품을 유럽 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에요. 유럽은 한국과 다르게 화장품에 대한 안전성을 중요 시 하죠. 그 때문에 수출하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한국 화장품 대기업도 유럽 권에는 수출한 적이 없을 정도죠. 먼저 유럽 권에 수출을 계획하는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한국 최초로 유럽 권에 수출을 해서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자연스레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을 테니까요.” “저는 항상 무모한 도전을 해왔어요. 사람 성격인 것 같아요. 내 것이라는 자부심, 욕심 같은 것들이 이러한 도전을 방불케 하죠. 현재 유렵 현지 바이어가 저희 제품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고 해당국가의 기관과 협조 중입니다. 이미 상당부분 진행 돼있어요.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선 차별화 돼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해외 쪽에 노크를 했죠.” ■ 장년창업취업센터의 도움으로 창업을 시작하다 여 대표는 창업을 위해 장년창업센터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창업을 준비하는 장년층에게 멘토링이 돼주고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프로그램으로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창업이란 것은 직장생활을 화려하게 한 사람은 창업에 실패합니다. 창업은 직장생활과 180도 다르죠. 직장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바닥부터 시작하기 힘들기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거죠. 또 창업초기에는 투자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장년창업센터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고 서류를 넣어 통과하게 됐죠. 이곳에서는 6개월 정도 사무실 공간을 빌려주고 무역 기초, 세무 등 창업에 필요한 강의를 해줍니다. 또 1대1 멘토링 시스템으로 노하우를 전수하고 각세계 각지의 바이어들을 초청해 소개시켜주죠. 이러한 부분들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고 실수를 줄여줍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 (주)리더스21 여원태 대표 [사진=양문숙기자] ■ 와신상담(臥薪嘗膽) 원수 같은 성공을 위해 쓰디쓴 고통을 감내하라 “창업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노하우를 주자면, 창업 초기에 모든 것을 혼자 해봐야 되요. 사무실 청소부터 전화 받는 일까지 무슨 업종을 시작하던 본인이 밑바닥부터 다 해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고용비가 줄어들어 창업 초기비용도 줄어드는 이점도 생기죠. 직장생활은 비닐하우스 온실입니다. 거기서 나오면 허허 벌판이죠. 대출 없이 기업을 이끌어가기란 정말 힘든 일이죠. 가족들의 문제와 여러 가지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이겨내고 목숨을 걸어야 되요.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야 하죠.” “또 창업을 시작 할 때 좋은 사람을 만나냐 못 만나냐의 문제는 비즈니스의 승패가 달라집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신뢰를 쌓아야 되요. 그리고 해외에 눈을 돌려보세요. 무궁무진한 사업 아이템들이 있고 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 (주)리더스21 여원태 대표 [사진=양문숙기자] ■ 글로벌 시대,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려라 “장년들뿐 아니라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해외에 도전하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어와 자금 문제 때문에 시작도 안해 보고 미리 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것들은 기우에 불가합니다. 해외 시장은 무궁무진해요. 전략과 바탕을 가지고 도전 하는 게 중요하죠. 또 국가에서 창업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잘 활용하면 사업 초기에 많은 도움이 되죠.” “인생 살면서 너무 잘나가면 재미없어요. 인간지사 새옹지마가 맞는 말이죠. 다만 초심을 잃지 말고 3년만 유지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신뢰를 쌓고 겸손하면 무슨 일이든지 잘될수 있습니다. 꼭 도전 하세요.” 끝으로 여 대표는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한다. 바쁜 창업 때문에 집에 가면 쓰러지기 일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자녀들과의 소통 또한 부족해 걱정이 되고 아쉽다고 한다. 특히 창업에 대해 아내랑 의논 없이 시작한 터라 가장 미안하고 안쓰럽다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모습을 응원하는 가족들이 있어 힘이 나고 행복하다고 한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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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7
  • [리 스타트] 강 훈 꼴목 포차 사장 “즐거운 일을 찾아 도전하면 돈은 저절로 따른다”
    ▲ 왼쪽부터 김기섭 사장, 강훈 사장, 박영광 사장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조호성 기자) 젊은이들의 거리인 건대입구 상골의 제일 끄트머리 골목길에 있는 가장 허름한 가게 ‘꼴목 포차’에는 세 명의 유쾌한 사장이 있다. 조경 회사의 관리직을 하던 강훈(44) 사장은 10여년의 회사 생활을 내려두고 지난해 창업을 결심했다.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대학 후배 김기섭(42) 사장은 강 사장의 퇴직소식을 듣고는 “작은 가게를 봐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서 가게를 열어보지 않겠냐”고 선뜻 제안을 했고, 실내 인테리어를 하는 박영광(46) 사장이 합류하게 되면서 세 명의 공동 창업이 시작됐다.   ▲ 김기섭 사장 [사진=양문숙 기자] ■ 공동창업은 서로의 깊은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공동창업이란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꼴목 포차’ 사장들은 깊은 신뢰를 가지고 즐겁게 가게를 운영해 가고 있다. “세 명이서 공동으로 창업을 하다 보니 투자비용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서 그런지 매출이 적어도 크게 걱정이 안돼요. 그래서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던 것 같아요.”가게의 유통을 도맡는 김 사장은 자신이 유통업계에 종사하며 얻은 노하우로 ‘꼴목 포차’의 식자재 구입을 책임진다. 또 가게의 인테리어와 ‘쉐프’를 맡고 있는 박 사장은 ‘꼴목 포차’의 인테리어를 직접 해 인테리어 비용을 절감 시켰다. “가게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거의 재활용한 것들이에요. 벽면에 붙어있는 원목도 사실 카페에서 철거하다 남은 자재를 얻어 온 것이에요.” 강 사장은 가게 손님들을 맡는다. 김 사장은 “훈이 형은 ‘꼴목 포차’의 마스코트에요. 가게의 미소를 담당하며 손님 접대를 하고 있어요. 이러한 역할 분담이 영업에 시너지 효과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 박영광 사장 [사진=양문숙 기자] ■ 음식의 맛을 위해 많은 발품이 필요하다. 세 명의 사장은 처음 창업을 시작할 때 많은 연구를 했다고 한다. “이 곳에 처음 자리를 잡고 두 달 동안 가게 월세를 내면서도 문을 바로 열지 않았어요. 음식을 만들어서 테스트를 하고 각 지역 유명 맛 집이란 맛 집은 모두 돌아다니며 연구를 했죠. 심지어 다른 음식점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져가며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오픈을 하고 첫주에는 손님이 하루 한 팀 정도 밖에 없었어요. 그 다음에는 두 팀, 그리고 세 팀, 이렇게 조금씩 많아지더니 지금은 웨이팅 고객이 생겼어요. 하루 약 50팀 정도가 가게를 방문하죠. 저희 가게에 블로그에 다녀간 손님들이 후기도 작성해주고요. 또 현재 청주, 인천, 연신내 이렇게 체인점도 내놓았어요. 앞으로는 직영점을 하나 더 낼까 생각 중입니다.” “수익은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눠서 생활비 되는 정도로 벌고 있어요. 어차피 돈 벌 욕심을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 강 훈 사장 [사진=양문숙 기자] ■ 술집은 문턱이 낮아야 한다.‘꼴목 포차’의 강 사장은 남다른 영업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얼굴을 찌푸리고 들어온 사람은 얼굴을 펴서 나가게 하고, 그냥 온 사람은 웃음을 머금고 나가게 하고, 웃고 들어온 사람은 더 활짝 웃고 나가게 하자’는 원칙으로 손님을 만나요.” 또 손님들에게 ‘꼴목 포차’가 사랑받는 이유는 만족스러운 가격과 푸짐한 안주 서비스이다. “‘꼴목 포차’를 찾는 사람들은 서비스에 놀라고 맛에 놀라고 계산할 때 가격에 다시 한 번 놀래요. 술을 마시러 온 가게는 문턱이 낮아야 되요. 문턱이 낮다는 건 단지 드나들기 편하라고 낮아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에요. 경제적으로도 마음의 부담감이 없어야죠.” “친구들과 혹은 연인과 즐겁게 술 한 잔 하러 온 건데 비싼 가격 때문에 부담되면 마음이 즐거울 리가 없잖아요. 이런 서비스를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해요. 돈 욕심 버리고 손님을 더 생각하는 마음으로 영업을 하면 저희도 마음이 편해져요. 그리고 저희도 즐겁고요. 또 저희 가게에서는 절대 음식을 재활용 하지 않습니다. 김 사장과 박 사장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담배도 끊었어요.”  ▲ [사진=양문숙 기자] ■ 하고싶은 일을 하다보면 일은 놀이가 되고 즐거움이 된다강 사장은 가게를 찾는 손님들 얘기를 시작할 때면 얼굴에 환한 웃음이 핀다. “저는 대학 전공에 따라 조경 설계 업을 시작했어요. 솔직히 재미도 없고 스스로 자질이 부족해 보였어요. 그래서 관리직 업무로 전환해봤고 그 일도 그다지 재미를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10여년을 일하다가 문득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공부도 해보고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보려 애썼어요.” “그러던 중 대학후배인 기섭의 제안으로 창업을 시작하게 됐죠.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어요. ‘이게 과연 나에게 맞는 일일까?’ 아르바이트도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그래도 경험이라도 해보자하는 차원에서 시작을 했죠. 요리도 처음 배워보고 손님을 맞고 이렇게 처음 해보는 것들이 정말 재밌더라고요. 모르는 사람들과 교감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이렇게 얘기했다. “하고 싶은 거 하세요. 하고싶은 일을 쫒아서 하다보면 일은 놀이가 되고 또 즐거움이 되요. 즐기면서 일을 하면 돈은 당연히 쫒아오게 돼있어요. 저는 가게에 올 때마다 놀러온 느낌이 들어요. 자신이 잘하는 것, 재밌는 일을 찾으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라도 도전하세요. 즐겁게!” 강 사장은 언제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 다른 행복을 찾아갈 강 사장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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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0
  • [리 스타트] 공서영 “출신·학벌 편견 이겨내기 위해 최선 다했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김숙희 기자) 걸그룹으로 시작해 아나운서에 도전,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공서영을 만났다.  그룹 클레오로 데뷔한 공서영은 클레오 5집 중간에 투입되었지만 가수로서 인기를 얻지 못하면서 본래 꿈이었던 가수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립싱크가 아닌 발라드 가수로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으나 그룹 활동을 하게 되면서 노래보다는 춤밖에 출 수 없는 현실에 많이 힘들었다고 여러 차례 고백하기도 했던 그.  걸그룹 실패 후 5년간 폐인처럼 지내다 야구 프로그램을 보면서 스포츠 아나운서 꿈을 갖게 된 공서영은 29살, 늦은 나이인 지난 2010년 KBSN 스포츠 아나운서로 입사하게 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최초 고졸 출신 아나운서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면서, 아나운서가 된 이후에는 고졸 출신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남들보다 3배는 더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신해 대한민국 학벌 사회에서 꿋꿋이 이겨낸 모습에 대중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KBSN으로 입사한 공서영은 CJ E&M의 채널 XTM으로 이적,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당당히 꿈을 이루며 ‘야구 여신’으로 등극하는가하면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점차 대중들에게 아나운서 공서영으로 사랑을 받게 된다. 뛰어난 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 능숙한 진행으로 스포츠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는 특히 남성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떠오르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해 프리랜서 선언 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공서영. 채널A 신규 예능 프로그램 '동네 한 바퀴' MC로 발탁되는가 하면 ‘썰전’에서는 박지윤을 대신해 일일 MC로 나서며 예능 MC를 위해 시동을 걸고 있다. MBC에브리원 ‘무작정 패밀리 시즌3’에 고정 출연하며 첫 연기 도전으로 그간 세련되고 지적인 외모와 볼륨감 넘치는 몸매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색다른 모습을 선보이며 변신을 꽤하고 있다. 평소 모습과 웃는 모습에서 풍기는 서로 다른 매력이 인상적이었던 공서영의 첫 인상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의지와 열정이 샘솟는 그야말로 뜨거운 사람이었다. 특히 수많은 좌절을 맛봐야했던 그는 오히려 그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며 지난 시간을 값진 경험이라고 표현, 33살 공서영에게서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연륜’이 묻어난다. 요즘 눈코 틀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요즘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하고 있다. 재미있다”며 신나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롤러코스터 같은 공서영의 실패담과 성공담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 걸그룹 실패, 막막했다 걸그룹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활동을 접어야 했다. 원래 가수가 꿈이었던 만큼 실망감, 좌절감이 컸을 것 같다. “어떤 일을 할 때 올인을 하는 편이다. 잘 안됐을 경우, 차선책을 생각하면서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노래가 하고 싶어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실패의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다. (가수가 되기 위해)늦은 나이까지 도전을 했었다. 그러나 실패 후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나 막막했다. 두문불출 할 정도로 정말 힘든 시기를 겪었었다.”  “되돌아보니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 시간 안에서 정말 감사하게도 야구라는 스포츠를 만나게 되었고,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어린나이에 대책 없이 부딪쳤다가 실패와 좌절을 하고 나니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철들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 5년 공백기, 야구를 만나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KBS N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기까지의 5년간의 공백 기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사실 5년 동안 처음부터 집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계속 도전도 했다. 노래하고 싶어서 오디션도 많이 봤는데 계속 연습하다가 엎어지곤 했다. 그런 과정을 겪다보니 도전자체에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도 실망하게 되고, 자꾸 좌절감이 쌓여갔다. 특히 주변사람들에게도 이번에 잘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심어줬다가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이 더 힘들었다. 아마 혼자였다면 아직까지도 이 나이에 노래의 꿈을 이루겠다며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잘 아니까 계속해서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 아나운서였나.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보다 야구가 먼저였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야구를 볼 시간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거의 매일 중계를 챙겨보고, 선배 아나운서들이 했던 야구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서 나도 저런 야구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필요한 과정이 무엇인가 알아보니 아나운서 학원을 찾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방송인이다 보니 방송 능력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아나운서 과정을 준비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한 방송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비전이 없다고 차인 이유가 스포츠 아나운서를 꿈꾸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지금 그 남자친구가 보고 있을 텐데, 통쾌한 복수가 될 것 같다. 한마디 하지면. “방송에서 그 이야기가 두 번 나갔는데 그 친구와 나를 위해서 그만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친구도 어렸고, 나도 어렸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주홍 글씨처럼 계속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한마디 하자면? 사람 일 모르는 거다(웃음). 오히려 내가 잘 돼서 아예 그 친구 이름이 생각 안 날 정도로 잘 사는 것이 통쾌한 복수 같다. 자꾸 그 친구 이야기 하는 것도 복수가 아니라 찌질 한 것 같다(웃음).” ■ 스포츠 아나운서를 꿈꾸다, 초보과정 떼기도 전에 ‘덜컥’ 합격 아나운서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보통 공중파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몇 년씩 준비하는 과정을 겪는다. 나는 시작단계부터 야구 스포츠 아나운서를 꿈꿨고, 공중파 뉴스를 진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 학원 등록당시 원장님과 상담할 때 야구를 전문으로 하는 스포츠 채널의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의아해 했다. 당시에는 스포츠 반이 따로 없었고, 아나운서 하루 과정 중에 한 번 정도 있었다. 지금은 이 직업이 각광을 받다보니 원하는 친구들도 많고, 스포츠반이 생긴곳이 많다고 한다. 초보반에 들어갔다. 처음에 뉴스 원고를 많이 읽었는데 너무 스포츠처럼 읽어서 억양을 많이 죽여야 한다고 혼도 많이 났다. 하지만 나중에는 단점이자 장점이 되어 나만의 특색이 된 것 같다. 처음에는 무척 이상했다.”  “사실 학원을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초보 과정을 다 떼기도 전, 두 달 좀 안 된 상황에서 마침 채용공고가 났다. 스포츠 아나운서 공고는 공중파처럼 1년에 한, 두 번 채용 공고가 나는 게 아니라 티오가 날 때에만 공고가 난다. 몇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하는 기회였다. 학원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아직 더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기회를 눈뜨고 놓칠 수는 없어 일단 잡아야 했고, 무모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면접에 정말 최선을 다 했다. 다행히 그 분들께서 내 열정을 좋게 보셨고, 입사해서 정말 많이 배웠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면접을 위해 1주일 정도의 과정이 있었는데 그 일주일 동안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굉장히 힘들었다. 예전에 오디션을 보면서 많이 떨어서 잘 못하기도 했고, 많은 실패가 있었다. 형식은 비슷하지만 오디션에서 면접으로 도전하는 분야와 이름이 바뀌었는데 왜 그렇게 떨리는지. 아마 떨어진 뒤의 느낌을 알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일주일 동안은 사력을 다해 최선을 다 하면서도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  ■ 가수출신, 고졸출신 수식어 탓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실패가 많았던 만큼 아나운서 합격에 대한 기쁨이 굉장히 컸을 것 같다.  “솔직히 믿을 수 없는 결과였던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책임감과 부담감이 무척 컸다. 첫 출근하자마자 가수 출신, 고졸 출신 아나운서라는 기사가 났었고, 심지어 검색어 1위까지 했다. ‘어떡하지, 아직까지 내 실력에 대해 나조차도 의문인데. 정말 잘 해야겠다. 이 분들에게 폐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명의 동기가 있는데 그야말로 잘난 친구들, 엘리트들이다. 괜히 나 때문에 이 친구들까지 깎아내려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상 그걸 못 버티겠더라. 그래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열심히 했다. 처음부터 잘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 했다고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내 인생의 하루 일과가 스포츠였다. 방송을 잘 못하면 성격 자체가 잠도 잘 못잘뿐더러 잠자다가 하이킥하고, 자책하는 스타일이다. 모든 방송을 모니터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끝까지 파는 스타일이다. 처음에는 선배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엿듣고, 조언 받는 것 까지는 괜찮지만 스스로 깨우치고 싶은 성격이라 혼나더라도 부딪히고 깨졌다. 스스로 부딪혔기 때문에 더 빨리 늘었던 것 같다.”  ■ 29살? 고졸 학벌? 핸디캡 대신 나만의 장점으로 승부수 29살 늦은 나이에 새로운 시작,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더군다나 고졸 학벌로 아나운서 문턱을 넘기란 힘들었을 것 같다.  “물론 더 겁이 났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용감했던 것 같다. 솔직히 거기서 잃으면 더 잃을 것이 없었다. 그냥 어제까지 집에서 야구 보던 29살의 나인 거다. 도전 못 할 이유가 없다. 도전 안하면 그냥 그대로 있는 거고, 해서 잘되면 좋은 거다. 겁만 내고 있기에는 이전의 내 모습과 달라질 것이 없었다. 5년 동안 힘든 과정도 겪고, 야구를 알게 되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 내 성격, 생각, 마음가짐이다. 못할 게 뭐 있나. 이전에 나이, 학벌을 생각했다면 야구를 알게 되면서 ‘내가 뭐가 모자라, 내가 못할게 뭐있어’라는 생각의 전환이 됐다.”  “핸디캡이 있는 대신에 그들보다 분명히 장점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큰 장점이다. 만약 아무것도 몰랐던 20살, 21살로 돌아가라면 안 돌아갈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힘들게 얻어온 경험들이며, 쌓아온 생각들인데. 만약 어린 나이에 좋은 기회를 얻어 스포츠 아나운서 일을 하게 됐다면 솔직히 노력안하고 돌아다녔을 수도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나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고졸 출신 아나운서로 부각되는 것에 대해 주변 시선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사실은 불편했었다. 하지만 사실이고, 잘못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인생 잘 살아왔고, 내 선택이었다. 지금도 그런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연기나 음악 하시는 분들은 이미 자기 진로를 정해놨고, 대학 과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다. 물론 만약 필요한 과정이라고 느낀다면 느지막하게 다니시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KBS N에 들어가면서 회사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됐던 부분도 있다. 출근하자마자 부각되면서 이분들이 그럼에도 나를 뽑아줬는데 거기서 주눅 들지 않고, 무조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 4명의 엘리트 동기들, 경쟁 속에 성장 그러한 주변시선 때문에 동기들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입사 후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네 명의 동기가 있었는데 수시로 ‘이중에 4등 턱걸이로 들어 왔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보다 엘리트인 친구들이라 하더라도 4등에 만족하고 꿈을 이뤘다고 만족하면 바보짓이다. 1등은 아니더라도 꼴등은 하지 말자. 중간 이상은 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위를 봤다.” “솔직히 서로 질투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서로 가진 장단점이 있다. 나 역시 장점일 수 있지만 단점으로도 작용하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나는 잠깐이라도 방송을 했고, 그 때 쌓았던 경험들이 있었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방송경험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은 다들 스스로 발전하고, 자기의 길을 찾아가 잘 됐다. 나에게 없는 부분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친구들이다.”  ■ 가수출신 고졸출신으로 화제몰이? 편견도 있었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아나운서 입사 후 가장 힘들었던 일이 있다면. “다른 요인에 의해 잘못되는 것보다 내가 잘 못했을 때다. 자책도 많이 하고 댓글 하나하나 신경 쓰는 스타일이다. 어떤 상황이나 남의 잘못이었다면 핑계가 될 텐데 내 잘못이라면 더 이상의 핑계가 없다. 잠도 못자고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라 만족하지 못한 방송을 했을 때가 가장 힘들다. 한번은 현장 인터뷰 때 부산에서 촬영했는데 너무 못 해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내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집에 와서도 잠도 못자고 울었다. 너무 심한 자책은 좋지 않지만 분명히 다음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힘이 됐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가수출신, 고졸출신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편견도 있었다. 더 이상 울고불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미리부터 준비를 잘하고, 후회 안할 방송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성격이 본인은 피곤하지만 도움은 되는 것 같다.”  ■ 노출논란?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아이돌 출신으로 예쁜 미모와 섹시한 몸매가 실력보다 집중됐던 것에 아쉬움은 없었나.  “물론 가수 출신으로 주목 받았지만 예쁘다고 주목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력으로 먼저 인정을 받았다. 처음에 서툴렀지만 배구 팬들과 야구팬들 눈에 내가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 것 같다. 현장 인터뷰에서는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잘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 가져가야할 이미지, 만들어가야 할 색깔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처음부터 섹시한 이미지를 어필하고, 실력도 없었다면 정말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실력을 다져놓고, 다져 나가면서 방송인으로 추가할 부분이 있었고, 주변이나 회사, 채널 쪽에서 제안했을 때 추가된 것이다. 결코 그걸로 이슈가 되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처음에 ‘왜 내 실력은 봐주지 않고 외적인 면만 부각되지’라는 생각에 혼란이 있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부분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내 일을 못하고 있었다. 진행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내 일을 똑바로 한다면 ‘진행도 잘하는데 옷도 섹시하게 입어’가 된다. ‘옷은 섹시하게 입는데 진행은 곧 잘해’라면 자존심이 너무 상했을 거다.” ‘노출 논란’에 대한 냉담한 시선 어땠나.  “혼란스러웠던 시기다. 그때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회사 이미지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신에 실력도 없는 게 옷만 야하게 입고 나와서 이슈 되려고 한다는 말을 안 들으려면 내 일을 흔들리지 않고 똑 부러지게 잘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나중에는 많은 분들이 그걸 봐 주셨고, 반응도 많이 바뀌었다.”  ‘야구여신’ 타이틀로 승승장구 했다. “너무 좋다. 어디 가서 ‘여신’ 소리를 듣겠나. 사실 여신 같아서 붙여진 게 아니라 야구 분야에서 열심히 뛰어다녀서 ‘야구 여신’이라고 붙여 준 것 같다. 야구팬들이 붙여준 별칭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방송을 하겠다고 더 이상 ‘야구여신’ 안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만이고 오만인 것 같다. 그분들이 더 이상 ‘야구여신’이 아니라고 하면 서운하고, 속상할 것 같다. 너무 감사하다.”  ■ 야구 선수들에게 대시? 많이 받았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인기가 상당했다. 실제 야구 선수들에게 대시가 많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 “없다면 거짓말. 너무 자주 보는 남자, 여자다. 횟수로 치면 올해 5년차인데 대시한번 못 받았다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없다면 매력이 없는 거 아닌가. 대시 받은 적 많지만 실제로 사귄 적은 없다. 너무 편하게 다가가는 성격이라 있었던 것 같다. 야구할 때 진짜 멋있다. 그래서 호감을 한 번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 다만 나이를 먹고 얻은 선물 중에 하나가 중심을 잡울 줄 아는 거다. 몇 살 더 어린 나이에 아나운서가 됐다면 그런 중심을 못 잡을 수도 있었다. 두근거리는 멋있는 사람이 나를 좋다고 하는데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보기보다 고지식하고 보수적이라 만약 연애를 하고 데이트를 하면 일 자체는 못하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멀리 보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잘 처신했던 것 같다. 잠깐 연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지난 4년 동안 내 일에 열정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연애를 깊게 했다면 그 정도의 열정을 못 쏟아 부었을 것 같다. 일을 못했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일로 받은 스트레스는 일로 푼다. 만약 그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송, 마음에 드는 방송을 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복권 당첨보다 너무 기쁜 일이다.” ■ 프리선언? 처음부터 프리랜서였다 힘들게 아나운서가 됐다. 프리랜서 선언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프리였다. KBS N 정직원이 되는 과정이 있다. 공채로 시험과정을 통해 뽑기는 하지만 그렇게 뽑혔어도 수당으로 돈을 받는 형식이었다. 솔직히 정직원은 못 된 거다. 여자 아나운서가 정직원이 되는 경우는 최희 아나운서가 처음이었다. 정말 개척자고, 진짜 열심히 했다. 밑에 기수가 나였는데, 그 상황에서 ‘베이스볼 워너비’라는 프로그램에 스카우트되었다. 이미 이쪽에서도 소속개념이 강한 프리였다면 ‘베이스볼 워너비’로 넘어가면서 완벽한 프리였다. CJ 그룹 혹은 XTM 채널에 소속되어있는 줄 아시는 분들도 있는데 따로 프로그램 계약만 했었다.”  “시즌 중에는 주 6일을 일했다.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웠는데 겨울만 되면 다시 백수였다. 겨울 스포츠 채널이 아니라 많이 힘들기도 했다. 또 방송제의가 들어올 때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했다. 이 방송을 할지 말지 혹은 그 안에서 내용을 조율하는 조력자가 있었다면 잘해낼 수 있는 일을 혼자 다니면서 고민했다. 때마침 소속사 초록뱀주나E&M에서 같이 하자고 제안이 왔던 거다.” “가장 고민했던 것은 미련이 남아서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까 였다. 또 야구를 너무 좋아했고, 일을 하면서 힐링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포기해야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대표님께서 지금의 일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을 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말씀해주셔서 선택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정체되어 있지 않고 내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야구 쪽 일을 타의에 의해서 1년 안에 그만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감사하게도 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해 주신 거다.”  ■ 예능 MC - 연기 도전, 겁났지만 최선 다할 것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클라라 후임으로 MBC 에브리원 ‘무작정 패밀리 시즌3’ 합류, 첫 연기 도전에 나섰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살짝 망가진 모습을 서슴지 않고 보여줬다. 갑작스런 변신 부담스럽지 않나. “그 부분에 겁도 많았고, 도전에 인색하게 됐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해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잘하지도 못 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표님이 처음부터 잘하기보다 부딪히고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많은 일을 하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했었고, 거기서 깨지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일에는 솔직히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좋은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는 왜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 없는 일을 하면서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의 연륜이 생긴 것이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수는 없고, 내가 잘하는 일만 하면서 살수는 없다. 내가 잘 못하는 일도 부딪히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때가 왔을 때 즐거움, 재미를 찾고 점점 더 발전해야한다. 당연히 책임도 뒤따른다. 잘 못해서 깨지는 것도 경험이고 배움이 된다. ‘무작정 패밀리 3’는 내게 그런 걸 많이 알려주는 것 같다.”  연기 어떤가.  “처음 촬영장 갈 때 너무 힘들었다. 혼자 너무 걱정했었다. 연기 수업도 안 받았었다. 대표님이 일부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연기 욕심이 생기면 그때 다니고, 일단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연기하는지 봐야한다며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하셨다. 시트콤 자체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선배님들도 본인 성격 그대로 하라고 말씀해 주신다. 매주 월요일 촬영인데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두 번째 갔을 때부터는 조금씩 나아졌고, 또 재밌다. 잘 챙겨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잘 알려주신다. 연기자의 꿈?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을 때 말씀드리고 싶다.” 예능 MC로도 활약 중이다. 하지만 최근 ‘썰전’ 일일MC 출연 방송 때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날 무작정 패밀리 녹화 때문에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다음 날 4시까지 몰아서 찍었다. 부담감 때문인지 한 시간도 못 자고 촬영했다.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이동해 배달 떡볶이를 먹고 촬영에 들어가게 됐는데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나를 못 믿겠더라.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솔직히 눈뜨고 있기도 너무 힘들었다. 심지어 ‘썰전’이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설전을 벌였어도 그분들 발뒤꿈치 따라갈 수 있을까 말까 한데 배우는 입장이지만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서 도와달라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일단은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대신에 욕심 내지 말고 정리만 잘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내가 봐도 너무 아쉬운 방송이었다. 이후 일주일을 울고 또 자책했다. 말 그대로 제대로 깨졌고, 인정한다. 컨디션 관리역시 프로로서 내가 잘못한거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중에 꼭 설욕전을 해야 한다. 만약 컨디션 좋을 때 그분들과 붙어서 말도 안 되게 깨졌다면 내 실력을 인정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계속 성장해서 다시 해 보고 싶다. 너무 감사하게 깨지고 온 것 같다.”  야구중계, 연기, 예능 MC, 가수 중 순위를 매기자면. “너무 어렵다. 내게 야구와 노래는 동급이다. 나한테 일이자 친구이자 내가 힐링 할 수 있는 유이한 소통구이고 비상구다. 그 두 가지 때문에 힘든 것도 참 많았고, 그 두 가지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예전에 노래 때문에 좌절했을 때 야구가 나를 건져줬고, 야구 방송 때문에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음악을 들으면서 힐링을 한다. 그 두 가지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 같다. 이제 MC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 지금 도전하는 입장에서 아직 발도 담가보지 못했는데 순위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연기와 MC 두 일은 용감하게 잘 해내야할 것이다. ‘썰전’에서 잘 못해 많이 힘들었다. 진짜 잘 할 거다.” ■ 어제의 실패를 잊어버리지 않는 내일의 내가 되고 싶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롤모델이 있다면. “꿈과 목표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신다. 가수, 스포츠 아나운서, 그 다음의 꿈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시는데 직업에 수치를 정해놓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원하는 무대에 서봤음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 이유가 내안에 수치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1위하는 가수, 대상받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만약 스포츠아나운서가 되어서도 무조건 1등을 바라거나 시청률 1위를 생각했다면 일을 즐기지 못 했을 것이고,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기준을 남으로 정하고 수치로 정하는 것 보다 어제보다 오늘 잘했으면 좋겠고, 점점 조금씩 만족해가는 일들이 모여서 꿈이 되고 목표가 되고 싶다. 롤모델? 어제와 다른 나다.”  늦은 나이, 학벌 때문에 도전에 주저하고 있는 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나 조언 한마디 부탁드린다. “젊은이들이다. 왜 나이에 주저하나. 주저할게 없다. 철없고, 하나밖에 몰랐던 스무살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안 갈 것 같다. 나이는 경험이고, 또 도움이 된다. 학벌 자체도 본인의 선택이다. 공부는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은 인정한지만 본인이 중심이 있고, 선택한 일이라면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나는 대학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미 내 진로를 결정했고,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서 굳이 대학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 내게 대학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분들께도 대학갈 필요가 없다고는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다. 갈 수 있고, 가라고 한다. 다만 상황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굳이 정해져 놓은 곳이 있다면 그것을 집중해서 파라고 말한다.” ▲ 공서영 [사진=양문숙 기자] 그 때로 돌아간다면 대학을 선택했을까.  “그건 솔직히 모르겠다. 가수를 하고 단 한 번도 학력에 대해 불편을 느끼지 못하다가 스포츠 아나운서를 했을 때 걸림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학원에서도 지금이라도 빨리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29살에 대학가서 언제 졸업하겠나. 나한테 그 말은 ‘그 꿈 포기하세요’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제 날지 모르는 공고를 기다리면서 서른 몇 살 누가 뽑아주겠나. 만약 이 생각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대학에)가겠다. 예전에는 차선책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차선책을 생각하고 갈 것 같다. 그게 편리한건 알겠다.”  최종 꿈은 무엇인가. “어제의 실패를 잊어버리지 않는 내일의 내가 되는 거다. 올해 정해놓은 목표는 연말에 많이 성장되어 있는 나다. 연말에 TV에 나오는 시상식에 나오고 싶다. 인정을 받는다는 이야기니까. 옛날 가수할 때 늘 연말마다 시상식을 보면서 울었다. 지금은 진행자로서 있겠지만 연말에 집에서 TV 안보고 내가 방송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현재의 자신 중에 1초의 망설임 없이 현재를 선택한 그는 혹독한 실패마저도 ‘공부’였다고 말한다. 늦은 나이에도 욕심 부리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신하는 공서영의 모습에서 나이, 학벌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비법’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즐겁게 일 할 수 있는 길을 위해 포기보다 용기가 앞섰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이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 안에서 즐겁게 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그에게서 현재 우물쭈물하고,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교훈이 되는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끊임없이 실패를 교훈삼아 도전하고 있는 공서영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 공서영 싸인 [사진=양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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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4
  • [리 스타트] 이애란, 죽을 각오로 탈북…지금은 북한음식 전파 힘써
    ▲ 이애란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남북한 통일은 밥상에서부터…” 남북한 밥상으로 통일을 응원하는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 이애란 원장(이화여대 박사)을 만나고 왔다.  ‘파란만장한 삶’은 딱 이 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부모의 월남으로 인해 11살 소녀 이애란은 양강도 산간지대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했다. ‘희망’이 없던 그 곳에서도 ‘희망’을 꿈꾸던 소녀, 하지만 그녀 앞에는 ‘좌절’이 찾아 왔다. 사촌동생이 미국에서 출간한 책에 그녀의 편지 등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애란은 정치범 수용소 행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벼랑 끝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희망을 꿈꿨다. 쥐약 4봉지와 4개월 아들을 데리고 9명의 일가족이 압록강을 건넌 것.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당도한 이애란은 청소부, 보험설계사 등의 일을 했고, 이후 북한 신의주경공업대학에서 식료공학부를 졸업한 경력을 살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식품영양학과를 졸업, 탈북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서울 종로구에 세워진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은 북한지역의 전통음식과 문화를 연구, 개발,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승승장구하던 보험설계사를 제쳐두고 북한전통음식에 주력한 이유를 물었다.  “지금 북한은 식량난 때문에 제대로 된 전통음식이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르지만, 더 늦기 전에 사라져가는 북한의 전통음식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통일이 된 뒤 북한사람들도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게 남한에 북한음식을 미리 알렸으면 좋겠어요.” 통일 후에 북한국민을 위해서라도 북한음식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이 원장은 연구원에서 운영하는 북한전통음식점에 직원들도 모두 탈북자로 채용. 탈북자를 위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통일을 위한 문화 저변 확대와 탈북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 등 좋은 취지로 나섰지만, 북한음식 연구와 식당 경영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식당 경영도 직원들 월급주기가 빠듯하다고.  “고정적인 후원이나 수입원이 변변치 못해 운영하기 힘든 게 사실이에요. 음식을 연구하려면 다양한 시도를 해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식재료비도 많이 들고 인건비도 만만치 않죠.” 또한 북한 음식에 쓰이는 재료가 남한에 없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웬만한 재료는 다 구할 수 있어 재료에 대한 어려움은 크게 없다.  ▲ 이애란 [사진=양문숙 기자] ■ 북한서 삼시세끼 먹던 ‘감자’, 지금은 절대 안 먹어 이 원장과 음식 얘기를 나누다 보니, 탈북한 뒤 남한에서 맛본 음식 중 가장 특이했던 음식이 궁금해졌다. “사실 같은 한국 음식이라 신기할 것 까진 없었어요. 그런데 처음 접하는 서양 음식은 정말 신기했어요. 예전에 미8군 식당에 갔는데 사람들이 다 스테이크를 시키길래 ‘정말 맛있는 음식인가 보다’하고 저도 따라 시켰는데 못 먹겠더라고요.(웃음) 웬 고기 덩어리가 떡하니 있는데, 세상에 이런 것도 먹나 싶었어요. 북한 사람들은 소고기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 옆에 감자가 떡하니 있더라고요. 산간지대로 쫒겨나 하루 3끼를 계속 감자만 먹었거든요. 감자만 아니었어도 좀 먹었을 텐데, 감자가 함께 나오는 바람에 쫄딱 굶고 집에와서 김치에 밥 먹었어요.(웃음) 지금도 감자는 안 먹어요.” 감자는 제대로 질려버렸다는 이원장의 힐링푸드는 ‘돼지고기’다. 감기에 걸리면 돼지고기를 삶고 새우젓이나 마늘로 양념해 보양식으로 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진다고. 그 외에 심장이 안 좋을 땐 토끼요리, 간이 안 좋을 땐 자라요리가 좋다고 설명했다. 최근 연구원에서 개발한 음식에도 그녀의 힐링푸드 돼지고기가 들어간다. 낙지와 사과 돼지고기를 한 냄비에 넣어 자글자글 끓여먹는 ‘낙사돈’이 그것이다.  ▲ 이애란 [사진=양문숙 기자] ■ 1%의 용기로 얻은 새로운 인생 이애란은 어린 시절 산간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다니며 새로운 인생을 꿈꿨고, 정치범 수용소로 향해야 할 발걸음을 압록강으로 돌려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보내고 있다.  새로운 삶을 갈망해 내딛은 첫 발이 두렵지는 않았을까. 실패가 두려워 첫 발을 내딛지 못하는 청춘에게 이 원장은 앞을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낙하산병이 비행기에서 떨어질 때 땅만 내려다보면 무서워서 떨어지지 못 해요. 시선을 좀 더 올리면 그때는 떨어질 수 있겠죠. 도전하지 못 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 경험과 안 좋은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시선을 높여 앞을 봐야합니다.” 죽을 각오로 탈북해 남한에 정착하고, 또 북한음식을 연구 전파하고 있는 이 원장은 성공의 비결로 ‘1%의 용기’를 꼽았다.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50 대 50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아주 자그마한 요인에 승패가 판가름 나죠. 그런 상황에서 1%의 용기가 성공을 향한다면 성공의 확률이 높아지겠죠. 그건 어쩌면 1%도 아닌 0.00001%일지도 몰라요. 두려워만 하지 말고 무엇이든 용기를 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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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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