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26) 중공군 제 5차 공세 막아낸 장도영의 용문산과 파로호 전투 대승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2.24 16:59 |   수정 : 2020.03.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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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소재한 ‘용문산지구 전적비’와 중공군 제 5차공세(’51.5.16~5.20)시 공격로와 아군 배치 상황도 [자료제공=국방부/김희철]


국군 제 6사단, 사창리의 치욕적 패배 후 설욕 노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 


중공군 제 19병단 63군 3개 사단, 제 6사단 방어중인 용문산 지역을 공격

‘결사(決死)’ 맹세 띠 두르고 용문산 방어전투에 성공, UN군 반격작전 계기 마련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제 5차 4월공세(’51.4.22~4.30)시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 및 도주로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을 받는 시련을 겪은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용문산(1157고지) 일대에서 방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제 5차 4월 춘계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 용문산으로 눈을 돌렸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으므로 중공군이 점령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 ‘5월공세’를 개시하여 혈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제19병단 제 63군 3개 사단(제187, 188, 189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점 부근을 방어중인 미 제 9군단의 중앙인 국군 제6사단의 용문산 지역을 공격했다.

국군 제6사단은 당시 북한강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기도가 감지되자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가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 제7사단 31연대가 두능산에서 주저항선으로 각각 철수함으로써 제 6사단 2연대만이 용문산 전방인 청평호 남쪽에 남게 되었다.

당시 장도영 장군 휘하 제6사단 2연대는 인접 부대가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초진지를 사수했다. 이는 치욕적인 사창리 전투의 패배 결과로 연대장과 참모들이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연대장으로 부임했으며, 패배의 설욕을 위해 장병들은 머리에 ‘결사(決死)’라고 써진 띠를 두르고 사력을 다할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대비했기 때문이었다.

연대의 정찰대는 17일 적의 예상 도하지점을 탐색하던 중 이미 도강하여 방하리 계곡에 집결중인 중대 규모의 중공군을 발견하고 격퇴하였으나, 일몰이 되어 대규모의 적이 북한강 도처에서 도하를 기도함으로써 연대 주진지로 복귀하였다.

5월 18일 낮 동안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국군 제6사단 전초 진지인 제 2연대(연대장 송대후 중령) 1(대대장 홍재익 대위), 3대대(대대장 김두일 대위)를 향해 몇 차례 도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제 2연대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화력을 지원받아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고수하자 중공군은 이곳 전초 진지를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부터는 제187, 제188사단의 주력을 투입하여 돌파를 기도하였다.

사단 전초 진지를 담당한 제 2연대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의 막대한 물량 공세에 후퇴, 중앙지역인 나산과 427고지 일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대대장 김덕복 소령)와 합류하여 전면방어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제 2연대는 나산과 427고지 일대에서 미군의 항공폭격으로 힘겹게 전초 진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틀간의 격전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또 식량과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2연대의 전황을 간파한 중공군은 19일 야간에 다시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부터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 하에 진내로 접근한 적과 백병전을 하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그 후 2연대는 전투 상황을 고려시 철수하는게 맞지만 간신히 진지를 지키며 끝까지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 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결사적으로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했다.

중공군은 우전방 공격에 이어 이번에는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하여 좌전방 제 2대대의 울업산을 집중 공격하였다. 제 63군의187, 188사단에다 군 예비 189사단까지 투입해 중공군 3개 사단이 국군 1개 연대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사실 당시 중공군 입장에선 오판할 만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군이 도하하던 상황에 전초로 배치되어 있던 제6사단 2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도하하던 중공군을 기습 강타한 뒤 빠져나간 상태에서 2연대가 427고지 일대에서 고수방어로 저항을 하자 주저항선으로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다.

1대대와 2대대가 기습강타 후 치고 빠지는 방법을 활용한데다 진지 전환하면서 원래 1대대와 2대대가 있던 곳에서 미친듯이 결사저항을 하기도 했고 야음을 틈타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3대대와 2연대 본부대가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연대는 20일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방어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어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하였으나 사단의 적극적인 화력 지원과 강력한 정신력으로 진지를 고수하였다

또한 장도영 사단장은 기습적인 묘수를 발휘하여 중공군을 혼란에 빠뜨려 공황이 발생하게 만들었다. 바로 중공군이 2연대를 주저항선의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위의 상황도와 같이 제6사단의 7(연대장 양중호 대령), 19(연대장 임익순 대령)연대가 중공군의 측후방을 역습한 것이다.

즉, 포위하여 2연대를 섬멸할 계획이었던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명 주력군을 몰아넣고 승리하리라 장담했던 중공군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기습적인 역습의 묘수는 중공군 자신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습을 감행한 제7,19연대는 중공군이 2연대를 총공격을 하고 있었을 때 기습 준비를 철저히 하고있었다.

그리고 UN군과 국군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공군은 포위 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장도영 장군의 제6사단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던 제2연대와 연결한 후 즉시 반격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20일 07:00부터 18:00까지의 전과만도 중공군 사살 4,912명, 포로 9명과 소화기 312정에 이르렀다. 반면 이날 국군 제6사단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단은 5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다.

당시 국군과 중국군의 병력 차이는 제6사단 전체로 보면 1:3, 전투를 치르고 있는 2 연대만 놓고 보자면 1:9로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값진 승리였다.

용문산에서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5월 21일 새벽에 서둘러 퇴각하였다. 하지만 주도권은 국군에게 있었고, 제6사단은(2,7,19연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 좌측 파로호와 사로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후송을 기다리는 모습, 우측 당시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으로 참전해 적군 3만명을 수장시킨 파로호 전투의 산 증인 김달육씨가 화천댐 탈환을 기념하는 ‘전공비’를 바라보는 모습[사진자료= 연합뉴스]

북진하는 국군에게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 `화천댐을 확보하라'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받게 만든 ‘사창리 전투’의 치욕적 패배 설욕

‘용문산대첩’에서 쾌승한 국군 제6사단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했다.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제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그때 마침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패퇴하던 중공군은 화천(대붕)호에 이르렀을 때 호수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제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 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그 결과 중공군 3만여명을 '물 반 고기 반'이던 화천호에 `물 반 시체 반'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대승의 현장이었던 ‘화천(대붕)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제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어 3개 사단이 궤멸되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제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퇴주하는 중공군을 쫓아 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국군과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고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 좌측 당시 용문산 전투에서 전초진지를 담당했던 6사단 2연대 장병들의 결의를 다짐했던 철모의 결사(決死) 표식과 우측 국군 제 6사단장 장도영장군이 전쟁이후 1961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는 모습 [사진자료=국방부]

장도영 장군의 국군 제6사단은 위의 사진과 같이 철모에 결사(決死)라는 문구로 전투의지를 표식하고 중공군의 제 5차 5월 춘계공세에서 용문산과 파로호 전투의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워 국군의 위용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그리고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불명예스런 조롱을 받게 만든 ‘사창리 전투’의 치욕스런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다. 또한 육군은 용문산 전투의 주역이었던 제6사단 2연대에 ‘용문산 부대’라는 호칭을 부여해 오늘까지 이 날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한편, 당시 국군 제6사단장이었던던 장도영 장군은 평북 출신으로 광복 후 모교인 신의주 중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한때는 태능의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사)에서 제5기 생도대의 중대장도 하였다.

1950년 6.25남침 전쟁이 발발하자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용문산 전투에서는 대승하였다. 휴전 이후 육군 제8사단장, 육군 제2군단장, 제2군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으나,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어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5월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부터 1993년까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2011년 5월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2012년 8월 3일 90세의 나이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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