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이야기쉼터 검색결과

  • [최환종의 공군 이야기 (29)] 방포사 생활③ 오산공군기지에서 습득한 '미국식 합리주의'와 '미국 조종사 자격'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왜 컴퓨터 시스템이 중지되는가에 대한 원인분석’ 임무를 부여받고, 필자는 그날 오후 내내 한.미 관련부서를 찾아다니면서 내용을 파악했다. 정확한 원인은 미군 측에서도 대답을 안하고 개념적인 얘기만 했다.   필자는 전체적인 개념을 파악한 후에 필자가 알고 있는 ‘컴퓨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경우’를 추가하고, 컴퓨터와 data link에 관련된 전문용어를 보충 설명하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필자는 워게임에 투입되어야 하므로, 작전통제부서장에게 비대면 보고를 했다.   오산기지 비행클럽에서 비행교관인 미 공군 장교와 함께 [사진=최환종]   그날 오후에 작전통제부서장(대령)에게 전화가 왔다. 대략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무슨 얘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면 제가 가서 보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냐, 워게임에 계속 집중하게!”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필자의 보고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분의 컴퓨터에 대한 기본지식이 모자라거나(만일 그렇다면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필자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얼마나 충실히, 빨리 보고서를 작성하는가 등등) 일부러 이런 임무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그때 이후로 이런 식의 보고서 지시는 없었는데, 1년 전에 정비 준사관이 필자에게 작전통제장비를 설명하려다가 오히려 필자에게 교육받은 상황이 생각났다. 서로 연관은 없겠지만...   한편 비행 얘기로 돌아가겠다. 비행클럽에 가입하고 난 후(대략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상 학술 과정부터 시작했다. 물론 비행 관련 활동은 일과 이후 또는 휴식 기간 중에 이루어졌고, 남들이 일과 후에 술 마시거나 운동을 할 때, 필자는 그 시간을 비행에 할애했다. 근무시간과 비행연습은 철저히 구분하여 실시했다.   비용은 1시간 비행에 14달러 정도여서 크게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상 학술 과정은 과거 초등훈련 때 배웠던 내용이었기에 복습하는 기분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미 공군 장교(비행교관)와 비행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조종간을 잡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행클럽에서 운용하는 항공기는 세스나 152 기종(2인승)과 세스나 172 기종(4인승)으로서, 초등 훈련때 접했던 T-41(세스나 172의 미 공군 훈련용 버전)과 유사해서 금방 적응했다.   오랜만에 비행을 하니 역시 착륙과 무선 교신이 가장 어려웠다. 오산기지 관제탑은 미 공군 요원이 근무하며, 당연히 영어로 교신한다. 관제 용어는 일반적인 회화와는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공부를 해야 하며, 영어로 하는 관제용어가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교육 방식이 한국 공군과는 약간 상이했는데, 조종학생에게 보다 많은 융통성과 유연성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한국 공군에서 비행 훈련을 받을 때는 항공기 외부점검부터 시동 걸 때까지 모든 절차를 외워서 해야 했고, 활주로에 접근할 때는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참조점을 보고, 어느 지점에 도달해서는 어떤 참조점을 참조해서 활주로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즉, 어떤 틀에 박힌 형태를 요구했다.   이런 방식에 익숙해 있던 필자는 오산에서도 이런 식으로 참조점을 정해 놓고 비행을 했는데, 어느 날 비행교관이 필자의 방식을 눈치채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활주로에서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서 비행기가 활주로 밖으로(또는 안쪽으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활주로와의 간격을 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구라기보다는 조언에 가까웠다.   그리고 필자가 항공기 외부 점검이나 시동을 걸 때까지 세부 점검목록을 외워서 하는 것을 보더니 “한국 공군 장교들은 절차를 모두 외워서 하는 것을 보았다. 외워서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으니 ‘비상 절차’를 제외한 점검 절차는 외우지 말고 ‘점검목록’을 보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 같은 두 가지 조언의 의도를 필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려고 했다. 단지, 점검목록은 습관적으로 외워서 할 때가 많았는데, 미국에서 실기 시험을 볼 때 그렇게 외워서 하다가 미국인 시험관에게서 큰 지적을 받았다. 시험관도 똑같이 얘기했다. “비상절차 이외에는 절대 외워서 하지 말고 점검목록을 보면서 하기 바랍니다.” 단지 이것 때문에 시험에서 탈락할 뻔 했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적인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두 가지 방식 모두 장단점이 있기에, 선택은 본인이 해야 할 사항이다.   비행을 다시 시작한 지 2~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비행교관이 야간비행을 하자고 한다. 그동안 실제 비행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달에 2~3시간 정도 비행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날까지 비행은 착륙을 제외한 공중조작은 초등비행훈련 때의 감각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었는데, 야간비행은 중등훈련 때까지 해본 경험이 없기에 은근히 부담이 갔다. 그런데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그리고 그날 착륙 감각이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우연히 착륙이 잘 되었는가 생각했지만, 이후 몇 번을 더 이착륙을 해보니 필자의 착륙 감각이 회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희열이었다.   착륙 감각을 회복하고 난 후, 자신감을 얻은 필자는 몇 시간 더 비행을 하고 제 2의 단독 비행을 나갔다. 그리고 이 단독 비행 이후에 필자는 미국 연방 항공국(FAA, 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에서 발행하는 자가용 조종사 (Private pilot)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고자 마음먹었다. 중등 훈련 때 다 하지 못한, 필자 본인의 오래된 숙제를 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당시 오산기지에서 비행 관련 여건은 좋았다.   외국에 나가지 않고도 오산기지에서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비행시간을 채울 수 있었고, 비용 또한 저렴했으며, 필기시험도 오산 기지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종사 시험은 한국과 미국 동일하게 필기시험, 구두시험, 실제 비행시험의 3가지이다). 그리고 그 당시는 한국에서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보다 미국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더 쉬운 방법이었다.   이후, 가끔은 장거리 비행으로 군산기지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세스나 172 항공기의 뒷좌석에 아내와 큰 아이를 태우고 비행하기도 했다. 공군인(空軍人)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가족과의 특별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8-03
  • [최환종의 공군 이야기 (28)] 방포사 생활② 미군 소관인 워게임 중단 사건을 조사하게 된 '황당한 이유'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팀 스피리트 기동 훈련이 시작된 며칠 후 어느 날, 작전장비 안에서 훈련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날 주어진 임무는 무사히 완료되었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나서 그 장교와 얘기를 하면서 '야외기동 훈련 기간 중 힘든 것은 없는가', '훈련 중에 숙식은 문제 없느냐'는 등 일반적인 얘기를 하는데, 그 장교의 대답이 필자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작전장교(중위)들은 별도의 숙영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장비에서 먹고 자고, 훈련 상황이 없으면 병사들 천막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는 그런 얘기였다. 이외에도 몇 가지 애로사항을 말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동안 자기들의 그런 애로사항을 얘기할 곳이 없었는데, 필자가 오니 얘기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 부사관, 병사들은 숙영 공간(천막)이 있는데, 장교들은 없다니. 그리고 작전장교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니.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포대장(당시 포대장은 육군에서 전군한 장교이고, 필자보다 임관이 3~4년 빠른 장교였다)과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포대를 돌아보니 작전장교들 숙소가 없던데 무슨 이유가 있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필자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까 해서. 그러자 그 포대장에게서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작전장교)은 단기장교로서 2~3년만 근무하면 전역한다.   그러나 부사관들은 장기 자원들이다. 단기자원들에게 별도의 숙소를 마련해 줄 이유도 없고 잘 대해줄 이유도 없다. 단기장교들은 고생해야 한다.” 대략 이런 취지의 대답이었는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자기 휘하의 장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사례를 겪으면서 느낀 점은,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교들은 전투의지는 높다고 평가했지만, 일부 영관 장교들은 부대원을 대하는 자세 내지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었다.   팀 스피리트 훈련 통제관을 마치고 돌아오자 필자의 차기 보직이 거론되었다. 오산기지의 작전통제부서로 가게 된다는 얘기가 들리기에 필자는 여단 인사참모(소령)에게 현재의 보직 이수기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보직이수 후에 인사명령을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단 인사참모는 육군 인사규정 개념이 이러이러한데 공군규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보직 이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필자를 설득했다. 결론적으로 그 때문에 필자가 인사상 불이익을 보았다. 물론 후에 다른 보직을 이수하면서 해결이 되었지만, 이런 식으로 필요에 따라서 육군 규정과 공군 규정을 혼용하는 답답한 경우가 꽤 있었고, 이에 따라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해 봄에 오산기지의 작전통제부서로 전속명령이 나서 오산으로 부임했다. 오산기지는 통신 장교 이후로 몇 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고, 이제는 방공포병 장교로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분은 그때와 달리 상쾌했다.   부임하고 한 달 후에 작전 가능 평가를 통과하고는 바로 임무에 투입되었다. 작전통제부서의 근무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24시간 근무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전 인원이 조별 근무를 하게 되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근무 후 휴식, 다시 근무 후 휴식, 이런 식으로 근무가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심신이 늘 긴장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고, 체력관리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단점이 있는 반면에 한번의 근무 주기가 끝나면 이틀 정도의 긴 휴식이 주어진다. 얼핏 보면 신선놀음 하는 것 같지만 한번 경험해 본 사람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근무 형태다. 특히 심야 근무는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한편, 오산기지에서 근무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비행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후배 장교가 오산 기지의 비행클럽에 한국군 장교도 가입이 가능하다고 하며 가입을 권유해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비행클럽은 미군 또는 그들 가족의 복지를 위한 미 공군 소속의 비행클럽이었고, 당시에는 한국군 장교도 회원가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9.11 사태 이후에는 미군 이외에는 회원 가입이 안되었다.)   중등 비행 훈련 이후 늘 아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비행클럽에 가서 책임자와 면담을 하고는 곧바로 회원으로 가입했다.   오랜만에 다시 온 오산기지에서의 생활은 평이했다. 오산기지는 군 생활 중 가장 많이 근무한 곳이다. 소위 때를 제외하고는 전 계급에서 1년 내지는 2년을 근무했던 곳이라 ‘마음의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이다. 그만큼 추억도 많고 정이 많이 든 곳이다.   그 해에 오산기지 근무는 특별하게 어렵거나 통신장교 때와 같은 ‘독특한’ 상관을 만나지도 않고 그야말로 평이하게 근무했다. 그 당시 작전통제부서 인원 구성은 공군으로 전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서 부서장도 육군에서 전군한 장교(대령)였고, 1개 조 인원의 대다수가 육군에서 전군한 장교들이었다.   필자보다 모두 임관이 4~5년이 빠른 장교들이었고, 대부분 중령 진급 시기가 지난 장교들이라 그런지 조용히 근무하면서 필자에게 이런저런 얘기(방포사 업무 흐름이나 유도탄 포대에 관한 얘기 등)를 들려주었다. 당시 그들에게 들은 얘기는 필자에게 방포사 근무에 대한 간접 경험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공군의 업무나 문화에 대해서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을지 연습’이 시작되면서 필자는 war game 요원으로 차출되어서 약 보름간 한미 연합 근무(war game)에 투입이 되었고, 근무 지역이 같은 오산기지 내에 있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을지연습이 끝나갈 즈음해서 황당한 일이 생겼다.   당시만 해도 War game을 하다 보면 가끔 워게임 컴퓨터 시스템이 정지되어서 워게임 흐름이 끊어지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 워게임 컴퓨터 시스템은 한국군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미군 측에서 운영하는 것이라서 왜 컴퓨터 시스템이 중지되는가는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미군 측에서 그 원인을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컴퓨터 시스템이 중지 되는가에 대한 원인분석’ 임무가 필자에게 주어졌다. 왜 이런 지시가 하달되었는지, 누구 지시인가 알아봤더니 그날 아침 방포사 상황보고 시간에 사령관이 ‘왜 워게임 컴퓨터 시스템이 자주 중지 되는가’를 질문했고,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참모가 없자 작전통제 부서장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필자에게 그 임무가 하달된 것인데, 사령관이 궁금하다고 해서 워게임 컴퓨터 시스템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필자에게 그런 임무가 하달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갔다.   그때 사령부 참모들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 공군으로 전군한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War game 컴퓨터 시스템 개념도 모르는 참모들!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작전통제부서에 떠넘기는 무책임한 사람들! 필자 생각에는 사령관이 이런 질문을 했으면 그 대답은 통신(전산) 참모나 작전 참모가 대답을 했어야 했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7-22
  • [최환종의 공군 이야기(27)] 방포사 생활①공군에는 4성 장군이 몇 명이냐고?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지난 기고문에서 육군과 공군의 문화적인 차이가 ‘상당기간 동안 육군에서 전군한 장병들과 기존의 공군 장병들 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더불어 흥미로운 현상은, 몇 년 전에 비행장 발칸포대가 공군으로 전군한 후에는 기존 공군 병사들이 포대원들에게 일종의 텃세를 부렸는데, 방포사가 공군으로 전군한 이후에는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즉,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병들의 ‘필자와 같은 기존 공군 장병들에 대한 텃세’가 눈에 보였다.   00사격장에서. 사진에 있는 공군 장교 대부분은 후에 방포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사진=최환종]   때로는 공군을 무시하는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고, 가끔은 경우에 맞지 않는 언행 내지는 상대방을 모함하는 장병들도 있었다. 같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소인배 같은 행동을 하는지...(당시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병을 ‘육공’이라 불렀고, 기존의 공군 장병은 ‘오공(오리지날 공군)’이라 불렀다. 누군가가 재치있게 그런 명칭을 지었는데, 물론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한동안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방포사 전군 초창기에 필자가 겪은 “텃세나 사고방식의 차이 또는 문화적인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겠다.   필자가 방포사 첫 보직인 수도권 방공포병여단의 작전통제부서 선임 장교로 부임한지 하루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나이 많은 정비 준사관이 필자에게 질문했다. “공군에는 4성 장군이 몇 명이나 있나요?” 처음에는 왜 이런 질문을 할까 하고 생각했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이내 필자는 이 준사관이 질문한 의도를 알아챘다.   즉, ‘육군은 4성 장군이 여러 명 있는 규모가 큰 군인데, (4성 장군이 한명인) 공군은 얼마나 규모가 작은가?’하는 의미였고, 육군과 공군의 인원수(규모)를 비교하며 은근히 공군을 무시하는 질문이었다. 말투는 존대말이지만 건방진 모습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공군, 해군에서 4성 장군은 각 군 참모총장 1명뿐이다.)   이에 필자는 모른 척하고 “전군한 방포사 장병 모두가 전군 전에 공군화 교육을 받았고 시험도 봤다고 들었는데, 공군에 4성 장군이 몇 명인지도 모르나요?”. 그러자 그 준사관은 당황한 듯 얼버무리며 대답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육군은 4성 장군이 여러 명이 있어서......”   다음날, 그 정비 준사관이 당당하고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작전장비에 대해서 설명해 주겠다고 해서 작전장비로 갔다. “이 장비는 방공포병 작전통제 장비로서 언제 미국에서 도입했고, 도입가격은 얼마이고, 기능은 뭐고 등등”, 장황하게 설명한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필자는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이 장비의 프로그램 언어는 무엇인가? 소스코드는 보유하고 있는가? CPU의 1초당 처리능력은? 그리고 이 장비와 연동된 00 레이다의 품질관리(QC, Quality Control)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순간 정비 준사관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질문한 단어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그 준사관의 실력을 대충 파악한 필자가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이 장비는 작전통제장비로서 가장 기본은 ‘작전 통제용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소스코드를 알아야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레이다의 품질관리는 레이다를 운용함에 있어서 레이다의 신뢰성에 관한 문제이다" 등등.   설명하는 자(준사관)와 설명을 듣던 자(필자)의 입장이 바뀌었다. 그 준사관은 얼굴이 상기되어서 아무소리 못하고 듣기만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준사관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다가 한마디 겨우 한다. “저희는 그런 내용은 몰랐습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비 준사관이 모르면 누가 알아야 하나?’   필자가 질문했던 내용은 레이다나 작전통제장비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기본중의 기본인 사항이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모르고 있었다니, 필자의 표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고, 정비 준사관들은 필자가 또 다른 질문을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공군에서 온 새파란 소령이 뭘 알아?”라는 식으로 필자를 대하던 정비 준사관들은 이날 오후부터 필자를 대할 때 무척 조심했고, 다시는 공군에 4성 장군이 몇 명이냐고 하는 ‘예의 없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가 언제 또 무슨 질문을 할까 은근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이후에도 필자가 정말 몰라서 무엇을 물어보는데도 그들은 엄청 고민하고 답변을 했다. (전군 초기에는 정비와 관련한 기본지식이 조금 약한 정비 준사관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얘기는 후에 다시 하겠다.)   또 다른 예는, 마지막 팀 스피리트 훈련 때 필자가 훈련 통제관으로 파견 나갔을 때의 일이다. 이때 육군에서 전군한 어느 영관 장교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경험했다. 물론 전군한 장교 중에 이런 장교가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팀 스피리트 훈련 때마다 방포사 예하의 0개 포대가 선발되어 야외 기동훈련을 실시했는데, 이중 한 개 포대에 필자가 훈련 통제관으로 나가게 되었고, 약 2주간 이들과 숙식을 같이 했다. 그때는 필자가 유도탄 포대 경험이 없던 때라 훈련 통제라기보다는 배운다는 자세로 임무에 임했다.   해당 포대에 가서 인원 및 장비를 돌아보는데 안면이 있는 중위 한명을 만났다. 그 장교는 포대 작전장교로서, 필자가 발칸 포대장일 때 인접 포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장교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6-23
  • [최환종의 공군 이야기 (26)] 결혼, 대학원 졸업, 그리고 육군 방공포병사령부의 공군 전군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리스트] 2학기 중반이 되면서 석사학위 논문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막했으나 논문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며 집중하다보니 어느 순간에 논문주제가 떠오르며 전체적인 윤곽이 잡혔다.   그때가 2학기가 끝날 즈음이었다. 3학기를 마칠 때 즈음해서 논문은 초안이 거의 완성되었고, 학술회의에 나가서 발표도 했다. 가을에 학교에서 논문 발표와 졸업 시험만 남겨놓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무렵에 큰 아이를 안고 모처럼 여유있게 앉아 있는 필자 [사진=최환종]   ■서른 즈음에 큰 아이 품에 안아   한편, 대학원 입학을 전후해서 부모님과 친척들은 언제 결혼할 것이냐고 은근히 부담을 주었고, 필자도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사관학교 동기생중 결혼한 인원은 80% 정도였으니, 필자는 동기생 중에서 결혼이 늦은 편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 초여름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천생배필을 만나게 되었고,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그해 가을에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원 입학과 결혼! 여러 가지로 흐뭇한 한해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8월 말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내 나이가 서른인데도 처음에는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내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아이를 내 품에 안았을 때야 비로소 내가 아빠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때가 4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공군에서는 큰 이슈가 있었다. 창군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전군(轉軍) 행사가 그것인데, 3학기가 끝날 때쯤 해서 ‘효율적인 방공(防空)작전’을 위하여 육군 방공포병사령부가 공군으로 전군 하였고, 전군과 동시에 공군 방공포병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필자는 대학원 졸업 후에 방공포병 사령부 예하 부대로 보직이 주어졌다.)   4학기가 되었고, 졸업시험과 논문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했다. 논문심사를 끝낸 그날 저녁은 나이어린 동급생들과 같이 마음 편하게 서로의 논문심사 통과를 축하하며 축하주를 들었다. 대학원 입학 초기에는 6년 만에 공부하면서 많은 것이 어려웠고 힘들었고,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하여 배수의 진을 치고 전투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했는데, 어느덧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위탁교육 일정으로 보면 4학기는 다음해 2월 말까지이고, 그때까지는 부대에 복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학교 연구실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서 그해 12월에 공군대학의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에 입과했다. 주위에서는 구태여 그럴 필요 있느냐, 조금 더 학교에서 지내다가 복귀하지 그러느냐고 얘기를 했지만, 필자는 어차피 위탁교육 임무는 완수했으니 하루빨리 부대로 복귀하고 싶었다.   대학원 졸업식은 다음해 2월 중순에 있었다. 어머니와 장모님 그리고 아내와 아직 첫 돌이 지나지 않은 큰 아이가 졸업식에 참석해서 필자의 대학원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대학원 과정 2년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사관학교 졸업 후 사회를 일부나마 접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공부 이외에도 대인관계 등 여러모로 시야를 넓힌 2년이기도 했다.   ■공군대학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 수료 후 소령 진급   그해 3월 말에 공군대학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 교육을 수료했고, 4월 1일부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어서 공군 방공포병학교 운영참모 교육에 입과했다. 이 과정은 지대공 유도탄 관련 교육을 받지 않은 장교를 대상으로 한 임시 과정이었다. 즉, 필자같이 유도탄 포대 근무 경험이 없거나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교 중 대위로 진급한 장교들이 교육 대상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육군의 고등군사반 정도에 해당되는 과정이었고, 여기서 호크, 나이키 등의 지대공 유도탄 시스템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했다.   약 3개월 반 정도 교육을 받고 보직을 부여받았다. 첫 보직은 수도권 방공포병여단의 작전통제부서 선임장교였다. 여단장에게 보직신고를 하고 부서장에게 인사 후에 업무 파악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포사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또 다른 차원의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공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를 먼저 얘기하면, 몇 년 전에 비행장 발칸포대를 인수할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즉, 발칸 포대를 인수할 때는 필자를 제외한 전 포대원이 육군에서 전군한 인원들이었지만, 비행장이라는 공군 부대 내에 포대가 있었기 때문에 포대원들이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공군의 특성에 익숙해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공군의 특성은 융통성, 기동성, 신속성, 다양성 등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공군의 작전개념, 부대관리 기법, 상급자와 하급자 관계 등은 타군과 차이가 있다.)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된 방공포병사령부 근무, 육군규정 적용?   그러나 방공포병 사령부(이하 방포사)가 공군으로 전군한 이후에는, 비행장 발칸포대를 인수할 때와는 많이 다른 현상이 벌어졌다. 전군한지 1년이 지났는데도,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부대원의 99%가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병들이어서 그런지, 그들은 여전히 육군의 사고방식 하에 부대를 운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장은 공군이지만 부대원들(특히 장교들)의 사고방식이나 일처리 하는 방식 등은 아직 육군 부대 같았다.   공군규정은 무시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지휘관의 개성과 특성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육군 규정을 적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이런 경우가 상황에 따라서는 장병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튼 이 당시에 육군과 공군의 문화적인 차이를 많이 느꼈고, 그 문화적인 차이는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육군 방공포병사령부의 문화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이 말의 의미는 후에 다시 얘기하겠다.)   그 문화적인 차이는 상당기간 동안 육군에서 전군한 장병들과 기존의 공군 장병들 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6-05
  • [나의 공군 이야기 (25)] 포대장 시절을 뒤로 한 대학원 공부, '즐거운 상상'과는 전혀 달라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며칠 간 고민하다가 결국은 개인의 발전을 위하여 위탁교육 시험을 보기로 결정하고 전대본부로 보고를 했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는 근무성적이 양호하고 본인이 원할 경우에 민간 대학(국내 및 해외)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다. 물론 학비는 공군에서 지원하고, 위탁교육 기간은 부대를 떠나 해당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임무다. 정말 좋은 여건이다. (지금은 공사 출신이 아니라도 위탁교육을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험과목은 영어, 수학, 전자공학 등이었다. 영어는 업무상 매일 사용하므로 큰 부담은 없었지만 수학과 전자공학이 문제였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생도때 보던 책을 구해서 다시 공부하는데, 머리속이 하얗게 되는 느낌이다. 괜히 신청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포대장 이취임식 [사진=최환종]   위탁교육을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두 번 치루어야 한다. 즉, 1차 시험은 공군내 선발 시험이고, 2차 시험은 해당 대학에 가서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시험을 치룬다. 결코 만만한 과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일과시간 후와 주말에는 꼼짝 없이 숙소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했다. 그때는 왜 그리도 술 마시자는 후배들의 유혹이 많은지.......   시간은 흘러, 어느덧 시험일자가 되었고 필자는 1차 시험인 공군내 선발 시험을 치루기 위하여 공군사관학교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시험! 문제를 풀다보니 머릿속이 과열되어 머리가 폭발하는 줄 알았다.   가을로 접어들 때쯤 해서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필자의 이름이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사명령이 하달되었다. 포대장을 마치고 공군사관학교로 소속이 바뀌면서 본격적인 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군산기지에서는 약 20개월 정도 근무를 했다.   포대를 육군에서 인수한 후에 심혈을 기울여 지휘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이 있었고, 숱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막상 포대장을 마치고 떠나려고 하니 하나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성취감과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11월 초에 포대장 이취임식이 있었고, 후임자에게 포대를 인계한 후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정든 군산 포대를 떠났다.   며칠 후, 필자를 비롯한 1차 시험 선발자들은 사관학교에 집결해서 대학(원) 시험에 대비한 각종 교육을 받았다. 필자는 한양대학원 전자공학과에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이날부터 대학원 본고사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약 한달 반 정도의 시험 준비 기간을 거쳐 대학원에 가서 시험을 보게 되는데, 매일 책상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하려니 처음 며칠은 적응이 안되었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답답한 한달 반이었다.   시간은 흘러, 12월 중순! 시험을 치루는 날이 되었다. 답안지는 빈칸 없이 모두 채웠다. 그리고 스스로 잘 될 거라고 최면을 걸면서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이 밝았다. 당시는 인터넷이나 휴대폰이 없을 때라 합격자 발표가 나오면 한양대에서 1년 먼저 위탁교육을 받고 있는 후배 장교가 확인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후배와 통화했다. 합격했다는 후배의 말에 그동안 쌓인 긴장이 풀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앞으로 어떻게 즐거운 대학원 생활을 할지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위탁교육생의 생활은 부대를 떠나서 학교에서 하는 생활이기에 매우 자유롭고 여유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대학원 연구실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대학원에 가서 어떤 교수님 연구실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고, 다음날부터 연구실로 출근했다. 나의 선택지는 컴퓨터 언어 분야 전공이었다. 그때가 1월 초로 기억한다.   연구실 생활은 박사 과정 학생이 일종의 팀장이 되어서 석사 과정 학생들을 이끌어 가는 형태였다.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공부에 대한 부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를 제외한 신입생 대다수는 대학을 마치고 갓 입학한 학생들이었고 필자보다 5~6년 정도 어린 학생들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연구실에서 돌아가면서 과목별로 연구한 것을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해야 했다. 나이 어린 신입생들은 공부가 계속 이어지는 환경이었기에 능숙하게 했는데, 필자는 많은 것이 어렵고 새로웠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6년 만에 공부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아무튼 합격자 발표하는 날의 즐거운 상상과 기대는 사라지고 밤을 낮 삼아 공부할 때가 다반사였다.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 갔다.   한편, 대학(원)에 위탁교육 받으러 가는 것을 마치 대충 공부하며 쉬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장교들이 있었다. 필자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즉, 각 군 규정상, 성적이 불량하면(C학점 이하로 기억한다) 즉시 원대복귀와 동시에 각 군의 ‘징계위원회’는 물론 ‘장교 부적격 심의위원회’에 회부된다.   ‘징계위원회’나 ‘장교 부적격 심의위원회’에 회부된다는 것은 장교로서 엄청난 불명예이며, 차후 진급이 매우 심각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실제로 성적 불량으로 원대복귀해서 징계를 받은 사례가 있었기에 위탁생들은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심한 규정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규정이 이해가 간다. 귀중한 국비로 교육을 받는데 성적이 불량하면 되겠는가!)   첫 1학기 기말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은 후에야 공부하는 것이 궤도에 올랐음을 느끼며 자신감이 생겼다. (2년 후 졸업 성적은 매우 양호했다.) 대학원 2년을 지내면서 방학이란 개념은 없었다. 연구실에 계속 출근해서 공부(연구)를 해야 했고,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기간은 하계와 동계방학 기간 중에 공군에서 실시하는 위탁생 소집 교육 기간(2박 3일 정도)이 유일한 휴가였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5-28
  • [나의 공군 이야기 (24)] 군산 방공포대장③ 물만난 물고기 시절, 육군·미공군 등과 폭넓은 소통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당시 군산기지는 골프를 포함하여 테니스, 볼링 등 여러 가지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정말 좋았다. 오산, 군산기지는 미 공군(美 空軍)에서 골프장을 포함한 많은 운동시설을 운영하였고, 그 당시 군산기지 골프장은 한국군, 미군 할 것 없이 자기가 운동하고자 하는 날에 선착순으로 자기 이름을 적어 넣으면 그것으로 예약이 되었다. 비용도 엄청 저렴했다. 1개월 골프장 이용료가 대략 20~30달러였으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은 얘기다.   ‘88 올림픽이 끝나고 그해 가을부터는 일과 이후 또는 주말에 선후배 장교들과 운동을 많이 했다. 때로는 주말에 부대내 바닷가에서 낚시도 했고, 어떤 토요일에는 오후에 골프, 그리고 저녁 식사 이후에는 볼링, 테니스를 새벽 3~4까지 했다. 혈기왕성한 시절이었기에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이런 여가활동이 가능했다. 물론 모든 여가활동은 부대 내에서 하였고, 상황 발생시에는 즉각 포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한쪽 귀는 늘 무전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말 오후에 육군 포대장과 낚시를 즐기며 [사진=최환종]   ■ 美 공군 헌병대대가 파트너, 통역관 없어 영어로 대화 나눠   당시 군산기지 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좋았다. 부대 내에서 생활하는 것이 더 수준 높은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굳이 군산 시내까지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강원도 부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군산 시내는 가끔 포대 간부들이나 선후배 장교들하고 저녁 식사하러 갈 때 이외에는 나갈 일이 별로 없었다.   아무튼 군산기지에서 방공포대장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필자는 임무수행 이외에도 개인의 발전(체력관리, 독서 등)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적극 활용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았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맛보는, 여러모로 재미있고 알찬 시간이었다.   한편, 대공방어 측면에서 필자의 업무 파트너는 미 공군 헌병대대였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미 공군 헌병대대에서도 대공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대공방어 측면에서 발칸 포대와 미 헌병대대간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필자가 발칸 포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미 공군 헌병대대 지휘부에서는 필자를 초청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포대 소속이 공군으로 변경되었지만 기본임무(대공방어)는 같으므로 지속적인 업무협조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필자도 신임 포대장으로서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란다는 취지의 말로 답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한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이때 통역관의 도움 없이 영어로 대화를 이어 나갔는데, 강원도 부대에서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한 보람을 느꼈다.   이후에 미 헌병대대로 새로 부임한 미 공군 중위가 포대로 인사차 방문했다. 이 장교는 미 공군사관학교 출신에(졸업은 필자보다 1년 늦게 했다) 비행훈련 받은 수준(중등 훈련까지)도 필자와 비슷했다. 게다가 공통의 업무(대공방어)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서 군산에 근무하는 동안 업무 파트너이자 형제같이 또는 친구같이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대공방어 관련한 전술토의는 물론이고 때로는 부대관리상 공통적인 애로사항도 서로 얘기하고 상의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이 장교는 후에 대령으로 진급해서 독일의 어느 미 공군 기지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이때 오산기지에서 대령으로 근무하던 필자와 연락이 되었다. 20여년 만에 연락이 되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서로 잘살고 있음에 기뻐하고 반가워했다.)   ■ 상호협력관계 맺었던 육군 유도탄 포대장은 아직도 기억나는 '멘토   비행장 발칸 포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근의 육군 유도탄 포대장, 육군 해안대대장, 중대장과도 잘 알고 지내게 되었다. 육군 유도탄 포대장은 이 모(某) 소령이었고, 상당히 강직한 성격을 가진 장교였다. 필자보다 4~5년 선배 장교로 기억하는데, 필자에게 절대로 하대(下代)하는 경우가 없었고, 필자에게 많은 지휘 조언을 해주었다. 육군 포대장은 가끔 한. 미 공군 측에 협조할 일이 있으면 필자에게 와서 협조를 구했고,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도와 드렸다.   한번은 육군 포대장이 자기 포대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해서 육군 유도탄 포대를 방문했다. 이 포대는 꽤 오래전에 미 육군에서 인수받은 포대라고 한다. 포대는 시설은 낡았으나 아담한 규모로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그날 무척 좋은 인상을 받고 부대로 복귀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육군 방공포병사령부 전체가 공군으로 전군하였고, 그로부터 또 몇 년 후에 필자가 그 포대의 포대장으로 부임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인생은 우연과 인연의 연속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근에 있는 육군 해안대대 0중대는 육사 동기생이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깝게 지내면서 부대 지휘관리에 대해서 상의도 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우며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군산기지 발칸 포대장 시절이 계급은 비록 새파란 대위였지만 한국군(육군, 공군), 미 공군 등 상대방의 소속 군(軍)과 계급을 가리지 않고 가장 폭넓게 대인관계를 맺으며 자신감 있게 행동했던 시기였고, 그들을 통해서 시야도 많이 넓힌 시기였다.   ■ 전자공학 석사과정 교육 기회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   다양한 경험과 함께 포대장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해가 바뀌었다. 부임한지 1년이 지나면서 포대장 업무는 첫해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보다 자연스럽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초여름의 어느 날, 방공포 전대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 국내 민간 대학교 위탁교육(석사과정) 소요가 나왔는데, 방공포 분야에도 인원이 할당되었으니 지원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전공과목은 전자공학!   며칠간 고민에 빠졌다. ‘사관학교 재학중에 전자공학을 전공과목으로 선택해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졸업한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다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등등의 고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부도 더 하고, 보다 폭넓게 세상을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5-11
  • [나의 공군 이야기 (23)] 군산 방공포대장② 담배상납 요구와 부당한 차출 명령을 바로잡다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필자는 부대를 지휘할 때 규정과 절차를 중요시했다. 물론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모두 그렇게 했겠지만. 훈련할 때는 강하게 훈련하고, 훈련이나 평가 결과가 양호하면, 또는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포상 휴가(또는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즉, 부대를 지휘할 때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명확하게 하고자 했다. 물론 필요시에는 융통성도 충분히 발휘했고, 이후 유도탄 포대장, 대대장, 여단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계속 이런 방식으로 지휘했다.   전역하는 병사들과 기념 촬영 [사진=최환종]   ■전군된 포대원들은 헌병대의 담배상납 요구 받아, 헌병대장에게 강력 항의해 시정    포대원들에게 훈련은 강하게 시키고 규정과 절차 준수를 강조한 만큼, 포대원들의 사기, 복지증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애로사항이나 불만은 없는지를 수시로 확인했는데, 가끔은 그런 내용을 마음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공군으로 전군 이후에 비행장에 근무하는 기존 공군 병사들이 우리 포대원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이었는데, 가장 흔한 예가 헌병들이 가끔 군기 순찰을 돌면서 사소한 이유로 군기 위반 카드를 끊는다든지, 포대원들이 외출, 휴가를 나갈 때 비행단 정문에서 헌병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포대원들에게 담배를 요구하는 부당행위 등이었다. 군기 위반 카드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으나, 부당하게 담배를 요구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었다.   즉각 헌병대장을 찾아가서 위와 같은 사실을 얘기하고 정중하게 시정을 요구했다. 당시 헌병대장은 소령이었고 필자보다 6~7년 선배 장교였는데, 헌병대장은 ‘감히 새파란 대위가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확인해 보겠다’고 하면서 차 한잔 하자고 한다. 그리고는 한동안 ‘담배 요구’ 같은 부당한 행위는 없었다. 그러다가 유사한 일이 또 생기면 헌병대장에게 찾아가서 시정을 요구했음은 물론이다.   이외에도 전군 초창기에는 비행단 지휘부에서 포대 병사들을 전투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간부업무를 보조하거나 또는 행정업무나 보는 병사로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다 보니 포대 임무를 저해하는 불합리한 임무가 하달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필자는 직속 대대장 또는 지휘부에 강하게 건의해서 포대 병사들이 대공방어 임무를 수행하는데 전념하도록 했다.   ■ 방공포대대 창설되기 전까지 '부당한 차출' 명령 등으로 어려움 겪어   예를들어 ‘88올림픽 기간 중에 비행단 00지역의 지상경계 강화를 위하여 각 대대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지상경계를 보강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포대에서도 병력을 차출하라는 것이었다. 황당한 지시였다. 포대 병사들은 한명 한명이 대공방어를 담당하는 전투원인데, 그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타 지역의 지상경계 임무에 배치한다니 대공방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마 전대본부(戰隊本部)의 어느 참모가 포대 임무는 고려하지 않고 계획한 것이었으리라. 필자로서는 말이 안되는 지시였다.   당장 대대장(당시 소령)에게 가서 ‘포대의 임무 수행상 포대원 차출은 불가하다’고 정중하게 건의했다. 처음에는 대대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 무조건 따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필자도 이에 지지않고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졌다. 결국에는 필자가 대대장에게 “병력 차출로 인해서 대공방어에 문제가 생기면 대대장이 책임질 것인가?”라는 취지의 말까지 했다. 책임 소재가 대두되자 대대장이 한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결국 포대 병사 차출은 취소되었고, 포대원들은 고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포대에 대한 지휘부의 왜곡된 시각에 대하여 대처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데, 이런 문제는 전군 첫해 가을에 포대의 소속이 변경됨에 따라 크게 줄어들었다. 즉, 전군식 이후에는 포대가 각 비행단 소속이었으나 그해 가을에 방공포전대(戰隊) 및 방공포대대가 창설되면서 포대의 지휘는 방공포대대에서 하게 되었고, 비행단은 포대의 후방 지원 임무를 담당했다. (* 공군에서 전대(戰隊)는 대령이 지휘하는 부대임)   이런 가운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88 올림픽도 끝났다. 이때부터 필자는 다소 여유를 가지고 포대를 지휘할 수 있었고, 일과시간 이후나 주말에는 하고 싶은 운동을 하면서 체력관리를 했다.   ■ 부대장에 이끌려 골프입문, 대령 때 첫 싱글   강원도 부대에서는 좁은 부대 내에서 특별히 운동할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제한된 공간에서 족구나 할 정도이고 조깅 등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말에는 부대에 잔류하는 장교들과 같이 인근 산봉우리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것이 운동이자 큰 낙이었다.   그러나 군산 비행장은 아주 아주 넓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30분 정도 활주로를 따라서 구보를 하고, 아침 일과 시작 후 일조행사(일과 시작과 동시에 사무실 밖에 집합해서 국군도수체조와 간단한 지시 및 강조사항을 전파하는 제도. 이전에는 공군만 시행했다)를 마치고 병사들과 1km 정도 구보를 했다. 일과 후에는 테니스 등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장이 갑자기 필자에게 묻는다. “포대장은 주말에 뭐하고 지내나?”. 그 당시는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할 때다. “네. 밀린 잠을 자고, 그저 숙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대장이 필자에게 “그러면 이번 주말부터 골프장으로 나와라. 내가 가르쳐 줄께!”.   필자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당시 대령이었던 부대장은 후에 3성 장군으로 전역했다. 이 분은 공학박사 학위를 가진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분이었고, 폭넓은 지식과 아량과 융통성을 가지고 지휘를 하는 분이었다. 본받을 점이 정말 많은 분이었다.)   그리고 그 주말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물론 골프채는 빌려서 했다. 골프를 처음 배우는 날, 부대장이 골프장 옆에 있는 연습장에서 몇 번 시범을 보이더니 “봤지? 따라오게!”.   사전 연습 기간도 없이 바로 실전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며칠간 골프 관련 책을 구해서 기본적인 골프 규정과 골프채 번호별 용도 등은 공부했지만 골프채를 가지고 스윙 연습은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첫날 골프장에서 필자가 어떠했겠는가? 아무튼 용감하게 골프채를 휘두르면서 18홀 경기를 마쳤다. 마친게 아니라 따라다닌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장은 귀찮은 기색 없이 필자에게 골프 규정부터 가르쳐 주었다. 그날 저녁, 부대장은 같이 운동을 한 동반자들에게 저녁을 사주면서 필자에게 얘기했다. “골프는 신사의 운동이네. 그리고 골프 규칙은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적용하면 틀림없네!”   그러나 독학으로 골프를 배우려니 실력향상은 미미했다. 골프는 군산 포대장을  마치고는 한동안 하지 못했고, 이후 중령이 되어서 가물에 콩나듯 가끔 골프를 하다가 대령이 되어서야 첫 싱글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5-06
  • [나의 공군 이야기 (22)] 군산 방공포대장① 육군과 공군 간의 소통 불가능성, 첫 지휘관 맡고 깨달아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군산 기지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부대장에게 신고를 하고 필자가 인수할  육군 발칸 포대로 향했다. 당시 육군 발칸 포대 지휘관인 김 모(某) 대위는 필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이날부터 필자는 육군 포대장과 같이 일주일 동안 포대 현황 파악 등 포대 인수 절차를 밟으며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轉軍)하는데 필요한 각종 업무를 수행했다.   인원, 작전장비, 개인화기 등을 비롯한 전투장구류, 차량, 탄약, 피복, 각종 문서 등등을 확인하고 인수인계서에 서명할 때까지 일주일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필자 혼자서 인사, 행정, 군수 등 모든 것을 확인하고 인수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포대장실에서 [사진=최환종]   ■ '폭풍'같았던 첫 일주일, 정시퇴근 꿈도 꾸지 못해     한번은 전군하는 포대원들에게 공군 피복류가 제대로 지급되었는지, 부착물은 제대로 부착되었는지 등을 확인해 보니, 일부 인원에 대한 공군 약정복 지급상태가 원활하지 않음을 발견했다. 비행단 군수참모에게 통보해서 조치를 요구했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필자가 세밀하게 확인해야 했고, 일주일동안 그 많은 업무를 하다보니 정시 퇴근은 꿈도 못꾸었다.   그러나 포대 인수 작업은 필자에게 주어진 명확한 임무였고, 사관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주어진 지휘관 업무였기에 필자는 피곤해도 즐거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하는 작업(각종 현황 파악 및 인수준비 등)을 하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폭풍같은 일주일이 지나고, 3월 초에 군산기지 항공기 주기장에서 부대장 임석하에 육군 발칸 포대의 공군 전군식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실시되었다 (전군식은 각 비행단별로 실시되었다).   전군식을 마친 후 포대의 지휘권은 필자에게 주어졌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주어진 지휘관 임무! 4년 전, 소위 임관 후에는 그저 막연한 심정으로 강원도로 부임했지만, 이번에는 발칸 포대의 지휘관이다. 새로운 임무에 대한 기대와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공군으로 전군이 되면서 포대의 정식 명칭은 방공포대로 명명되었다.)   전군식을 마치고 포대 간부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지난 일주일간 포대를 관찰한 결과 포대 간부들은 업무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사기, 군기, 장비 상태 등 전반적인 전투력 수준은 양호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 해는 ‘88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고 대비태세가 엄청 강조되었는데, 이에 필자는 최상의 전투력 유지’에 중점을 두고 포대 지휘방침을 하달했다.   ■ 포대원들, "공군은 편한 군대"로 오인 / 수많은 훈시와 대화 통해 잘못된 생각 바로 잡아   당시 공군으로 전군한 포대 인원들은 120여명 이었고, 선임 소대장부터 방위병까지 모두 육군에서 근무하던 인원들이었다. 즉, 필자를 제외한 전 포대원이 육군에서 근무하던 병력인데, 처음 몇 달 동안은 필자와 포대원들 간에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용어 사용이라던가, 같은 사안인데도 바라보는 시각이나 해결 방법이 차이가 나는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육군과 공군간의 문화적인 차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래와 같은 사례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즉, 포대장 취임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포대원들의 공군에 대한 인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포대장으로 부임한 지 1~2개월 후에 병사들로부터 ‘마음의 편지’를 받았다. 마음의 편지란 육군 시절부터 시행한 제도로서 부대 내에서 불합리한 점(구타, 가혹 행위 등)은 있는지, 건의사항은 있는지 등을 포대장이 병사들로부터 서면으로 받아보고 문제점이 있으면 시정하는 제도인데, 무기명으로 작성해서 제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내용 중에 황당한 내용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공군이 되면 머리를 길게 기를 수 있고, 외출, 휴가도 마음대로 나갈 수 있고, 부대 생활이 편하고 등등 많은 병사들이 전혀 사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요약하면 공군은 무조건 편한 군대이고, 따라서 포대의 임무도 대충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했다. “여러분이 공군으로 전군한 배경은.....(중략), 공군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같이 무조건 편하기만 한 군대가  아니다. 당연히 공군에도 전투력 유지를 위하여 지켜야 할 규정이 있고, 훈련 요구량이 있다.... (중략). 여러분이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했지만 임무 수행에는 변한 것이 없다... 등등” 일장 훈시를 해도 즉각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필자가 강원도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추위, 폭설, 강풍, 물부족 등을 얘기하면 “설마 공군에서 그럴 리가. 육군에서도 그런 부대 얘기는 못들어봤는데...” 이런 반응이다. 우물안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아무리 후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라지만 답답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주기적인 반복교육과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정리되었다.   ■ 방공포대 간부들도 기본 이론에 대한 이해 부족해 / 고생끝에 발칸포 사격 통제시스템 완박하게 습득   한편, 포대의 주 화력장비인 발칸포는 20mm 탄을 사용하는 화포이면서 레이다를 갖춘 전자장비이기도 하다. 육군 방공포병학교에서 20mm 발칸에 대해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교실에서 배운 것과 실제 장비를 운영하는 것은 차이가 난다.   육군 방포교에서 배운 것을 염두에 두고 포대 간부들과 발칸포 관리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니, 많은 간부들이 레이다 관리 및 운용에 대하여 부담을 갖고 있었고(기본적인 레이다 이론을 잘 모르고 있었다), 사격시 발칸포의 사격통제 컴퓨터에 입력하여야 할 제 요소(외부 온도, 공기 밀도 등)들에 대하여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다.   필자는 강원도 부대와 오산기지에서의 업무가 레이다 관리(정비)이었던 만큼 레이다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정비 부사관과 토의 및 실제 장비를 보면서 공부한 결과 발칸 레이다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격통제 컴퓨터는 발칸포 진지에 나가서 교범을 보면서 좀더 세부적으로 공부를 했고, 모르는 것은 팬텀(F-4) 조종사들에게 물어보면서 궁금증을 해소했다. (팬텀기에도 20mm 발칸포가 장착되어 있고, 이를 운용하는 조종사들은 발칸포의 사격통제 시스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발칸 사격을 앞두고는 육군 지원선 부대의 담당 부서를 직접 찾아가서 수리부속 확보를 요청하고, 당장 필요한 부속을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포대의 주 화력장비인 발칸포 운용/정비 개념을 숙지하고 포대원(간부/병사)들을 장악하면서, 발칸포대 근무 경험은 없었지만 필자의 포대지휘는 빠른 시간내에 궤도에 올랐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4-26
  • [나의 공군 이야기 (21)] '닭장'에서 군생활의 진로를 바꾸다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그러던 중, 그 해 가을에 공군본부에서 필자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문서가 하달되었다. 즉, “내년에 비행장에 배치되어 있는 육군 대공포 부대가 공군으로 전군된다. 이에 대공포 부대 운영 요원으로 근무할 지원자를 받는다.” 라는 내용의 문서였다. 선발되면 ‘대공포 운영 요원’으로 특기가 바뀌는 것이다.   문서를 받아보고는, 주위의 동료, 선배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공포 부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에 선뜻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선배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년에는 대공포 부대가 공군으로 소속이 바뀌고, 몇 년 후에는 육군 방공포사령부 전체가 공군으로 전군한다더라.” 물론 당시 이 얘기가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얘기가 실현된다면 지금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군산 발칸 포대장으로 부임 후 00 사격장에서 [사진=최환종]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며 주사위를 던지다   필자는 특기 변경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검토했다. 오산 기지로 부임한 이후 가끔 ‘회의’를 느끼면서 ‘강원도 부대와 오산기지에서의 통신 장교 생활을 고려해볼 때 과연 내가 통신 장교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금년 같은 생활이라면 미래가 없었다.   심사숙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물론 위험부담은 있겠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특기 변경을 신청하자!!! 그리고 정비과장과 처장에게 ‘특기변경 신청’을 보고했다. 그때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 한 명도 같이 특기변경 신청을 했다. 한 사무실에서 두명의 장교가 특기변경을 신청하자 정비과장과 처장은 적잖게 당황했던 것 같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리고 필자를 설득하려 했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처장이 결재를 했고, 문서는 공군본부로 올라갔다. 이후에도 몇몇 선배들이 필자를 찾아와서 ‘특기 변경 신청 철회’ 설득을 했다. 필자가 특기 변경을 할 경우에 필자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 지금은 상황이 어렵지만(당시 선배들은 필자의 상황, 즉 중령 과장과 대위 선임장교간의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관계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등등의 얘기를 하면서.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서 걱정해줬던 그분들에게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상태였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특기 변경 명령이 하달되었다.   특기변경 명령이 하달된 그날부터 육군 방공포병학교로 ‘방공포병 교육’을 받으러 갈 때까지 약 2~3주간은 일과 시간 이후에는 과장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과장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무 말도 안했다(안한게 아니라 못했을 것이다). 오산기지로 부임한지 거의 1년 만에 정상 퇴근을 했고, 퇴근 후에 동기생, 선후배들과 만나면서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초순의 어느 날, 육군 방공포병학교로 특기교육을 받기위해 입과했다. 당시 선발된 대공포 운영요원은 다양한 특기에서 선발이 되었고, 소위부터 중령까지 각 계급별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때 육군 방공포병학교에서 교육받은 인원들이 몇 년 후에 육군 방공포병사령부가 공군으로 전군하게 되면서 ‘공군 방공포병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당시 교육을 받던 위관 장교 중 여러 명이 훗날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육군 방공포병학교에 입과한 우리는 잘 짜여진 교육 일정에 따라서 새로운 교육 내용에 집중했다. 모두들 육군 대공포 부대 인수 요원이라는 책임감에 열심히 공부했다. 다만 학과장과 숙소여건은 좋지 않았는데, 학과장은 연병장 한구석에 설치된 비닐하우스 안이었다. 거기서 교육을 받았고 숙소는 학교 인근의 여관을 이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건이 열악하더라도 강원도 부대에 비하면 모든 것이 호텔 수준이었다. 우리는 비닐하우스로 만들어진 학과장을 ‘닭장’이라고 불렀고, 그 ‘닭장’ 안에서 교육받은 초창기 소수 인원들은 대공포 최초 인수요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끈끈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군생활을 같이 했다.   ■군산 비행장 발칸 포대장으로 부임, 막중한 책임감과 기대감이 교차   약 0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근무지가 분류되었다. 필자는 중서부 지역의 ‘군산’ 비행장 발칸 포대장으로 결정되었다. 군산이라. 지난해에 오산기지에서 근무하면서 예하 부대에 헬리콥터를 타고 출장갈 때, 헬리콥터가 잠깐 들렸던 곳이다. 그 이외에는 군산에 가본 적이 없다.   4년 전에는 임관하자마자 전투복에 군용 잡낭을 둘러메고 그저 막연한 심정으로 강원도로 부임했지만, 이번에는 마음 자세가 다르다. 육군 대공포 부대를 인수하는 동시에 그 부대의 지휘관으로 가는 것이다.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눌렀지만 새로운 임무에 대한 기대로 마음은 가벼웠다.   공군본부에서 신고를 마치고 군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공군 장교 정복에 여행용 가방을 들고! 군산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부대 정문 앞까지 갔다. 택시에서 내려서 가방을 들고 정문으로 가려는데 한 미 공군 병사가 경례를 하며 가방을 들어 주겠다고 한다. 참고로 오산, 군산 기지는 한미 합동 공군 기지로서, 건물은 다르지만 한국군과 미군이 같이 근무하며 서로 긴밀하게 협조를 한다.   ■첫 날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잠들어   후에 군산 기지에 근무하면서 느낀 점은 군산기지가 오산 기지보다 작아서 그런지 한.미 간에도 가족같은 분위기였다(그 당시에는 그랬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그 미군 병사가 부대정문 앞에서 장교 정복 차림에 가방을 들고 있는 필자에게 경례를 하며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군산 기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기분이 상쾌했다.   정문에서 부대 당직계통에 필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즉시 차량이 나왔고, 미리 준비된 장교숙소로 향했다. 당분간 필자의 직속상관이 될 모(某) 소령이 필자를 반갑게 맞으며 부대장 신고는 내일 아침이니 오늘은 푹 쉬라고 한다.   그날 밤은, 푹신한 침대에서 앞으로 다가올 업무를 생각하며 기분좋게 잠이 들었다. 마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알프스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간 첫날 별을 보다가 잠들었듯이.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4-20
  • [나의 공군 이야기 (20)]강원도 떠나 오산 기지로, 신임 정비과장이 불러온 '암흑시대'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3번 째 겨울을 맞이하고 다음해 1월 말이 되었다. 역시 혹한, 폭설과 싸우던 어느 날, 상급부대에서 전출명령이 내려왔다. 대대장이 필자를 대대장실로 호출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네! 가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게!” 막상 전출명령을 받아보니, 기쁜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교차했다. 두려운 마음이란 다름 아닌 ‘과연 상급부대에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동안 작은 부대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일까? 어느새 우물안 개구리가 되었음을 느꼈다.   오산 기지에서 대위로 진급한 후인 어느 여름날 사무실에서 [사진=최환종]   중대원들이 환송 회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곳 강원도 부대에서 3년간 강풍, 혹한, 폭설 등 힘든 추억을 안고 떠나면서 ‘다시는 이쪽으로 오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급부대로 향했다. 상급부대 위치는 ‘오산 기지’이고, 새로 주어진 직책에서 1년간 생활은 강원도 부대와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해 연말에 필자의 진로가 바뀌게 된다. 여러 가지가 복합된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강원도에서 3년 생활했더니 '강원도 사투리' 입에 배    한편, 강원도에서 3년을 생활하면서 몸에 배인 것은 ‘강원도 사투리’다. 필자가 처음 강원도 사투리를 접했을 때는 그 억양이 매우 낯설었다. 필자가 처음 접한 강원도 사투리(억양)는 때로는 상대방을 하대하는 말 같기도 하고, 의문문 같기도 하고, 문장이 끝난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갈 때가 많았다.   초기에는 강원도 사투리에 적응이 안되었는데, 강원도 부대에서 근무한지 몇 개월이 지나면서 필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가 강원도 억양으로 바뀌었음을 강원도가 고향인 동기생이 얘기해서 알게 되었다. 그 동기생 왈 “언제 강원도 사투리를 배웠어?”   강원도를 떠난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6.25 당시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았는데 등장인물들은 강원도 사투리를 정말 잘 구사했다. 순간 오랜만에 듣는 강원도 사투리가 무척 반갑고 정겨웠다. 임관 이후 3년간 강원도에서 근무할 때는 느끼지 못하였지만(그리고 떠나면서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원도 사투리에 익숙해지고, 강원도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느꼈다.   오산기지 첫 보직은 '정비과 선임장교', 업무 적응에 어려움   강원도 부대를 떠나서 상급부대가 있는 ‘오산 기지’로 가게 되었다. ‘오산 기지(또는 ‘오산 비행장’)는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대부분이 평택시(과거에는 송탄)에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산 비행장’으로 불리게 된 배경은 미군들이 ‘송탄’이라는 발음이 어려워서 발음이 쉬운 인접 도시인 ‘오산’을 비행장 명칭으로 불렀다는 데에 기인한다고 한다. (필자는 앞으로 ‘오산 기지’라고 표현하겠다.) ‘오산 기지’는 필자에게는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오산 기지에서 소위 시절을 제외한 전 계급의 직책에서 근무했었고, 그만큼 오랜 기간 생활했고 정도 많이 들었다.   1월 중순에 오산기지의 상급부대로 가서 보직 신고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어진 직책은 ‘정비과 선임장교’! 새로운 직책을 부여받고, 의욕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대대에서 하던 업무와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의 업무는 차원이 달랐지만, 빠른 시간내에 업무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과 중위 계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봄이 되면서 정비과장(중령)이 새로 부임했는데, 신임 정비과장이 오면서 필자의 생활은 암흑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당시 필자는 중위, 과장은 중령! 계급 차이도 차이지만, 정비과장의 업무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다. 보고서를 작성해서 가져가면 글씨를 못 쓴다느니(당시에는 손으로 글씨를 써서 기안했다), 철자가 틀렸다느니 등등 부서원들(필자보다 계급이 낮은) 앞에서 필자가 무안함을 느낄만큼 지적을 하는 것은 수시로 있었고, 가르쳐 주는 것은 없었다.   낮에는 사라졌다 나타나는 신임 정비과장, 불합리한 야근 많이 해    그리고 낮에는 어딘가 사라졌다가 오후 3~4시쯤 되면 사무실에 와서 그때부터 이것저것 점검하면서 일하라고 다그치는데, 그때 의미없고 불합리한 야근을 참 많이 했다. 일과 후 퇴근(자유시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해는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Summer time’ 제도를 시행했는데, 필자는 출근은 일찍하고 퇴근은 기약이 없는 그런 한 해를 보냈다. 그러다보니 오산 지역 동기생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퇴근 이후 자유시간은 거의 없었다. (당시 오산 기지의 다양한 부대에서 근무하는 필자의 동기생들은 대부분 퇴근 이후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필자의 사무실 분위기를 아는 동기생, 선배들이 가끔 찾아와 차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유일한 마음의 휴식시간이라고나 할까? 간혹 야근(?)을 일찍 마치고 나갈 때 과장이 필자에게 ‘술 한잔 하자’고 할 때가 있었다. 나는 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그러나 그 술자리에서도 해괴한 지적 내지는 자기자랑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술값을 과장이 내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상급부대 업무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당연히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관을 헤쳐나갈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군대가 ‘상명하복’을 생명과 같이 여긴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불합리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내 능력이 이것 밖에 안되나? 매일 지적이나 받고.’ 하는 생각을 여러번 했고, 엄청난 회의감을 많이 느꼈던 한 해였다. 누구나 그렇듯이 군 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어려울 때가 여러 번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군생활 중 가장 어려운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정비과 선임장교였던 그 해’를 꼽는다.   어느덧 여름이 되었고, 필자는 대위로 진급했다. 대위 계급장을 전투복에 달면서(그때는 필자가 손으로 바느질을 해서 달았다), 계급에 대한 많은 중압감을 느꼈다. 그런데 대위 진급 이후에도 ‘회의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내가 통신특기 장교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3-30
  • [나의 공군 이야기(19)] 강원도에서의 초급장교 생활④ 포효 못했던 맹수의 심정과 아찔했던 침투훈련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리스트] 강원도 부대 생활이 어느덧 3년차로 접어들었다. 부대 생활은 계절별로 똑같은 일과가 반복되기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자연과의 싸움도 웬만큼 적응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혹한, 폭설, 강풍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2년차 봄에 공군작전사령부 전투태세 검열을 받은 이후에는 대대장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부대원들과도 한층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부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답답했다. 큰 부대에서 보다 많이 배우고 익혀서 더 높이 나래를 펴고 싶은데, 이렇게 작은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내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규모가 큰 부대에서 근무를 해야 장비(레이다)에 대해서도 더 많이 배우고, 대인관계도 더 넓힐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통신 특기를 부여받은 다른 동기생들은 2년차에 접어들면서 모두들 큰 부대로 전속하였으니 필자가 답답해 했던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연말에 부대내에서 중대원들과 함께 [사진=최환종]   타부대 전출은 2년 차 가을에 얘기가 있긴 있었다. 같은 대대급 부대라도 임무와 장비에 따라서 일하는 수준이 다른데, 그때 전출이 예정되었던 부대는 대대급 부대 중에서도 임무 중요도가 상위권에 속하는 부대였다. 물론 장비도 다르고. 그 부대에 가면 장비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중대장 이하 중대원들과 전출회식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며칠 후에 ‘전출 취소’라고 통보가 왔다. 이유는 모른다.   그때 심정은 참으로 답답했다. 필자가 유배를 간 것도 아니고 강원도 골짜기에서 3년째 근무라니!  당시 대대장은 앞서 ‘영하 55도일 때 순찰을 지시’했던 분인데, 대대장에게 면담 신청을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대대장은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보더니 필자에게 ‘이미 결정이 나서 방법이 없다. 1년간 나와 같이 더 근무하자’라는 취지의 말을 하며 필자를 다독였다. (이로부터 1년 후 이 대대장의 도움으로 상급부대로 보직을 옮기게 되었다.)   필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3년차 근무에 매진했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은 ‘야생에서 뛰어다니지 못하고 우리에 갇혀있는 듯한, 마음껏 포효하지 못하는 맹수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답답한 심정이었다.   한편 3년차도 혹한, 폭설, 태풍 등의 악기상과 싸우면서 지나갔고 어느덧 겨울이 다가왔다. 예년과 같이 초겨울의 어느 날, ‘독수리 연습’이 실시되었고, 필자가 근무하는 부대에도 ‘가상 적 침투훈련’ 날짜가 하달되었다. 침투훈련 날짜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대대장이 특별 지시를 하였다. “금일 야간에 장교 1개조가 가상 적이 되어 부대 밖에서 부대로 침투하는 훈련을 실시한다.” 가상 적 침투조에 필자도 선발이 되었는데, 부대에서 오래 근무했고 지형지물을 잘 아는 장교를 포함해서 선발하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있었다(이 대대장은 ‘영하 55도일 때 순찰을 지시’했던 그분이다). 필자가 당시 이 부대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장교였으니 당연히 선발되었다.   그날은 월광이 50%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은밀 침투하기에는 상당히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야간 기온 강하에 대비해서 복장을 단단히 갖추고 부대 밖으로 나갔다. 중대원들은 “잘 침투해 보세요!”라며 격려 반, 농담 반으로 얘기한다. 가상 침투조는 3명으로 구성되었고, 필자가 제일 막내였다. 가상 침투조 3명은 침투 지점을 3군데 지정하고 부대 외곽 멀리 나갔다 다시 접근하기로 하였다(철조망 5미터 이내로 근접하면 침투에 성공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대원들도 어디가 취약한지 알고 대비했기에 침투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일몰 후부터 부대 밖으로 나가서 거의 밤 12시 쯤에 상황종료가 되었다. 상황종료가 될 즈음, 우리 침투조 3명은 추위와 눈 때문에 매우 지친 상태였다. 당시 위치는 부대 반대편 끝이었다. 부대 반대편 끝에까지 간 우리는 이제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데, 여기서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   즉, 필자의 부대는 당시 육군 부대와 인접해 있었고, 축구장으로 표현하면 축구장 반은 필자의 부대이고 나머지 반은 육군 부대였다. 하프라인이 두 부대의 경계선이고, 철조망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부대의 정문은 하프라인 한쪽 끝에 인접하여 각각 위치하고 있었고(즉, 하프라인 한쪽 끝을 점 A, 다른 한쪽 끝을 점 B라고 하고, 각 부대 정문은 점 A 부근에 인접하여 있다고 생각하자),  별도의 후문은 없었다.   지형 특성상 부대를 외곽에서 한바퀴 돌아보려면, 부대 정문(점 A)으로 나간 후에 반시계 방향으로 가서 부대 반대편(점 B)까지 갔다가 다시 시계방향으로 부대 정문(점 A)으로 돌아와야 한다. 물론 육군 부대 쪽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그쪽은 지형이 더 험하다. 또 지뢰도 매설되어 있었다.(그러나 당시 우리는 지뢰매설이 단순히 기만용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부대 반대쪽 끝까지 간 우리는 부대 복귀 방법을 놓고 잠시 토론은 했다. 1안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자. 2안은 육군 부대 쪽으로 돌아가자(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뢰는 없다고 생각했다). 3안은 이 지점에서 철조망을 넘어가자. 토의결과 시간을 가장 아낄 수 있는 3안으로 시행했다. 대학때 산악반이었던 선배 장교가 시범을 보이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철조망을 넘어서 부대로 복귀했다.   한편, 2안을 시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지뢰가 실제로 매설되어 있음을 몇 년 후에 알았고, 부대원이 실수로 지뢰지대에 들어 갔다가 지뢰를 밟아서 부상당한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육군 부대는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 공군으로 소속이 바뀌었고(이 얘기는 후에 자세하게 언급하겠다), 필자가 장군으로 진급하고 여단장이 되었을 때 그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소설 같은 우연이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3-23
  • [나의 공군 이야기 (18)] 강원도에서의 초급장교 생활③ 멘토가 된 대대장과 스나이퍼 스토리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리스트] 강원도 부대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도 있었고 좋은 점도 있었지만,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는 훌륭한 분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즉, 필자가 군생활 하는 동안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았던 선배 장교를 알게 되었고, 지금도 만나서 격의없이 지내는 동료 장교들을 사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후에 지휘관 임무를 수행할 때 멘토가 되었던 분은 체감온도 영하 55도일 때 장교들에게 순찰을 지시했던 대대장, 그분이다. 이 분은 사관후보생(현재는 학사장교)으로 임관한 분으로서 이 분의 지휘 스타일은 처음에는 엄격하게만 보았다. 그러나 이 분의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교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많이 배웠다.   훈련 후 중대원들과 함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진=최환종]   예를 들면, 어느 조직이나 ‘규정’이 있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까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규정에 명시되어 있지 않거나 애매한 경우에 일부 지휘관(또는 상급자)들은 결정을 유보하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분은 본인이 가진 권한과 책임 내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주저없이 시행하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내가 책임진다. 시행하라.” 이런 식이었다. 물론 불합리한 것은 위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분이었다.   훗날 본인이 지휘관 임무를 수행할 때, 필자가 사관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것과 더불어 나도 모르게 이 분의 지휘 스타일을 따르고 있음을 느꼈다.   ■ '정의'를 실천했던 군의관 장 대위, 지금은 명망있는 의사로 활약   친하게 지낸 장교 중 1명은 군의관인데, 필자가 군생활을 하면서 본 훌륭한 군의관 2인 중 한명이다. 군의관 중에 그렇게 직업의식(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책임감 있는 군의관은 거의 못보았다. 부대 군의관인 '장 모(某)' 대위는, 일과 중에는 군의관으로서 환자 진료에 충실함은 물론이고 가끔 버릇없는 병사들이나 복장 위반하는 병사가 있으면 현장지도는 물론, 불응하는 병사일 경우에는 헌병반장(중위)에게 얘기해서 잘못된 점을 시정토록 하는 ‘정의’가 살아있는 장교였다. 그러다보니 대대장도 당연히 군의관을 신뢰하였고, 우리들도 좋아했다.   군의관 ‘장 모(某)’ 대위는 일과 이후에는 늘 책을 보면서 공부를 했다. 이 분은 전역 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00병원에서 중요 직책을 역임하였고 지금도 명망 있는 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필자는 군의관 ‘장 모(某)’ 대위와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 인생의 선배인 그에게 여러 가지 많은 조언을 들었고, 룸메이트가 매일 저녁공부를 하니 필자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영어 공부라던가 독서 등은 군의관 ‘장 모(某)’ 대위에게 받은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지금도 만나는 장교는 2명이 있는데, 두 장교 모두 학사장교 출신으로 단기장교로 근무했다. 한명은 필자와 동기급으로 인사장교였고, 다른 한명은 필자보다 1년 후배 기수로서 보급장교였는데, 서로 나이가 엇비슷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셋이서 같이 강원도 부대에서 같이 근무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거친 환경에서 동고동락하면서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고, 지금도 가끔 만나 골프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필자가 부대 배치받은 다음 해 봄, 부대는 공군작전사령부 전투태세 검열을 받게 되었다. 부대 특성상 작전분야를 제외한 부대원의 전투태세 검열 주 내용은 제식훈련, 총검술 등 기본군사훈련 과목이 주가 되었다. 당시 장교중에 필자가 가장 막내이자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라는 이유로 필자가 기본군사훈련 전 과목에 대한 교관 및 지휘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본군사훈련 전 과목을 지휘하면서 부대 부사관 및 병사들과 많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약 한 달간의 준비를 거쳐서 드디어 검열 당일이 되었다. 검열대상으로 무작위 선정된 부대원들을 지휘하여 한 과목씩 무사히 진행해 나갔다. 3번째 과목이 되자 검열관은 필자를 보더니 “또 귀관이 지휘하나?” 하면서 씩 웃는 것이었다. 기본군사훈련 모든 과목 검열을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으로 사격 평가에 들어갔다.   ■ 스나이퍼 수준이었던 필자의 사격 실력, 총구에서 나가는 탄두 볼 정도로 시력 좋아   필자는 권총 사격자 명단에 포함되었고, 38구경 권총으로 사격을 실시했는데, 검열관은 그해 검열한 부대중에 필자의 사격점수가 가장 우수한 점수라고 얘기했다. 옆에서 사격을 지켜보던 부대장은 이 얘기를 듣자 얼굴이 환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필자에게 특별휴가(4박 5일)를 주었다. 세상에! 난 내 임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휴가라니! 검열관과 부대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검열이 종료된 후 필자는 오랜만에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뵈었다.   사격 얘기가 나왔으니, 그 당시 필자의 시력과 사격 성적을 잠시 얘기하자면, 거의 스나이퍼(Sniper) 수준이었고, 시력도 좋았다. 시력이 얼마나 좋았는가 하면, 중위때 필자가 사선에서 사격 통제를 할 때였는데, 타 장교가 권총사격 시 38구경 권총 총구에서 탄두가 나가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권총 총구에서 탄두가 나가는 것을 본 것은 이때가 유일한데, 그 만큼 필자의 시력이 좋았다. (필자는 지금도 시력이 2.0이 나올 때가 있다.) 중위 때는 20대이고 공기 좋은 산속에서 생활했으니 시력이 매우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초원에 사는 몽고 사람들의 시력이 어머어마하게 좋다는 얘기같이.   그리고 M-16 소총, 권총(38구경) 사격은 합격 불합격이 문제가 아니고 부대원 중에 누가 1등이냐 2등이냐를 다툴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표적지 한가운데에 담배를 붙여놓고 사격해서 순위를 정할 만큼 사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자는 전역할 때까지 공군 지상사격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공군 지상사격대회 출전자는 무작위로 선발하는데, 필자는 그 무작위 명단에 선발되는 행운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3-19
  • [나의 공군 이야기](17) 강원도에서의 초급장교 생활② 추운 여름에 만난 '반면교사(反面敎師)', 선풍기 찾다 야전잠바 요구한 검열관
    ▲ 눈 쌓인 어느 따뜻한(?) 겨울. 선배 장교와 함께 [사진=최환종] 어느 일요일 아침 날이 밝지 않아? 밤새 내린 눈이 장교숙소 전체를 덮어[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초급장교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 지역은 겨울철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부임하던 날(4월 중순인데도), 마을의 시외버스 정류장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고 지난 회에 얘기를 했는데, 필자가 그곳에 근무할 당시 가장 눈이 많이 내렸던 기억은 따로 있다.두 번째 겨울의 어느 일요일 오전! 필자는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눈을 떴다. 그런데 아직도 창밖이 어두웠다. ‘아직 해가 안떴나?’ 하고 더 잤다. 한참을 자다가 다시 깨어서 창밖을 보니 아직도 어둡다. ‘이상한데’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시계를 보니, 시간은 낮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장교숙소 현관으로 가보았다. 순간 처음 보는 광경이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려서 눈이 장교숙소 지붕을 덮고, 숙소 현관도 눈이 쌓여 밖으로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상황실에 전화를 해서 눈이 얼마나 왔는지 확인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장교숙소(1층 건물) 전체를 눈이 덮을 정도니 적설량이 최소한 1.5 m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전부대가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영내에 있는 전 병사는 이미 부대내 제설작업(주요 통로 개척작업 위주)을 하고 있었다.   1.5m높이로 쌓인 눈을 삽으로 치우며 장교숙소와 내무반 사이 길을 뚫어  그날 장교 숙소에는 필자와 야간 근무를 한 장교 1~2명이 있었는데, 상황실에서는 제설작업에 치중하다보니 필자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 장교숙소와 내무반 사이의 통로개척 제설작업이 시작되었다. 장교숙소와 내무반 사이의 거리는 대략 농구장 두 개 정도의 거리였는데, 이 거리를 삽으로 제설작업(폭 1.5 미터 정도의 통로)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병사 두어 명이 비교적 눈이 적게 쌓인 지역을 돌아와서 장교들과 합류 후, 제설작업을 했다. 내무반쪽과 장교숙소 쪽에서 각각 눈을 퍼내며 통로개척 제설작업을 하는데 약 3 ~ 4시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도 바람은 불지 않았고, 삽으로 눈을 퍼내다보면 땀이 나서 야전상의를 벗을 정도였다.   제설작업 중간에 눈구덩이(정확히 표현하면 양 옆으로 눈이 어른 키만큼 높이 쌓인 통로 속)에 앉아 있으면 편안한 느낌이었다. 쉬면서 건빵과 물로 점심식사를 대신했다. 에스키모인들이 이렇게 살았을까? 그리고 드디어 양쪽에서 눈 치우던 병사들과 서로 만났다. 매일 보는 병사들인데도 얼마나 반갑고 흐뭇하던지. 병사들과 진한 전우애를 느꼈다.   강추위와 제설작업 등으로 힘겨웠던 경험은 지휘관의 소중한 자산돼돌이켜보면, 그 당시 겪은 추위, 눈 등은 그때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그때 겪은 추위나 제설작업, 식수 문제 등 여러 가지 경험은 필자가 이후 부대를 지휘할 때 정말 귀중한 자산이 되었는데, 그러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의 작전수행, 또는 부대원들의 애로사항이나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한 예이다.요즘 TV에서 가끔 “시베리아(또는 알래스카)에서의 생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그때 생각이 나서 출연자의 고통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 당시에 그런 추위와 눈을 경험한 결과, 요즘은 일기예보에서 “금년들어 첫 강추위! 오늘 최저 영하 10도!” 이렇게 얘기를 하면, 속으로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봄날이네!”. 물론 필자가 체감하는 온도는 춥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영하 10도는 추위도 아닌 것이다.겨울의 추위가 어느 정도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부대내 BX(육군은 PX라고 한다)는 인행계장 소관인데, 친하게 지내던 인행계장이 어느 날 이런 푸념을 하는 것이다. “BX 창고에 있는 소주가 모두 얼어서 터졌어...” 당시 소주 도수는 24도로 기억한다. 24도라면 왠만한 추위에는 얼지 않을텐데, 얼마나 추웠으면 소주가 얼어서 소주병이 터졌을까. 대단한 추위였다.    여름에 찾아온 공군본부 검열관, 선풍기 찾다가 야전잠바 요구해 부대사정도 모르고 검열하겠다는 상관은 존중받을 수 없어기상에 따른 에피소드는 한가지만 더 얘기하고 마무리하려 한다. 아마 둘째 해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8월의 어느 여름날, 공군본부에서 검열팀이 온다고 연락이 왔다. 인근 비행장을 거쳐서 필자의 부대로 오는데, 헬리콥터 편으로 온다고 한다. 헬리콥터로 온다는 것은 헬기 운용이 가능한 ‘양호한 기상’이라는 얘기다. 그날 기상은 보기 드물게 맑은 날씨였고 시정은 매우 양호했다. 바람도 구름도 없었고. 따라서 제 3자가 보았을 때 경치가 매우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8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전상의를 착용하고 있었다.중령이 선임자인 검열팀은 대대본부에 도착하여 상황실에서 부대현황 브리핑을 받았다. 브리핑 도중에 검열관이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들은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근무하니 좋겠구나!” 자기들은 격려한다고 한 것 같은데, 우리들은 순간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필자의 부대는 1년 중 안개일수가 80% 이상이고, 부대 업무의 많은 부분이 추위와 자연과의 싸움인데, 날씨 좋은 날 헬기를 타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 정도라니. 우리는 거의 동시에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당신들도 여기 일주일만 있어보시오. 그런 얘기가 나오나!’브리핑 이후 복도에서 우연히 필자를 만난 검열관은 “중위! 날씨가 더운데 선풍기 없나?” 하는 것이었다. 하긴 자기들은 무더운 여름날에 인근 비행장에서 있다가 왔으니 더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부대는 한여름에도 야전상의를 입고 다니는 부대인데, 선풍기가 있을리 없다. 필자는 “부대에 선풍기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러자 검열관 왈 “어떻게 부대에 선풍기도 없나? 형편없는 장교구만!” 표현을 점잖게 해서 그렇지 검열관의 말투는 필자를 경멸하는 욕설이 섞인 말투였다. 황당했다. 공군본부에서 올 정도면 예하부대 사정을 잘 알고 올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얘기를 하다니.......한 시간 정도 후에 다시 그 검열관과 마주쳤다. 그리고 필자에게 묻는다. “중위! 야전잠바 없냐?” 이번에는 추운가보다.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다. 그때 그 ‘검열관’들의 언행은 필자에게 좋은 교훈이 되었고, 이후 필자는 타군 또는 타부대 검열을 가거나 지휘순찰을 갈 때 절대 그런 ‘무책임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장교, 부사관들에게도 그 얘기를 들려줬다. 그런 ‘무책임한’ 언행을 하지 않도록.   틈틈이 공부했던 영어가 많은 도움이 될 줄은...한편, 부대로 숙소를 옮긴 이후, 퇴근 이후에는 몇 백 미터 떨어진 숙소에 가서 생활을 하니 저녁에 가용시간이 많이 남았다. 물론 주말에는 가끔 인근 도시에 가서 목욕도 하고 밀린 빨래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부대로 복귀했지만, 타부대로 이동할 때까지 주로 부대 내에서 생활했다. 그 부대에서 근무기간은 거의 3년이었고, 그중 2년여는 부대 장교숙소에서 생활했다.장교숙소에서 거주한 기간에는 일과 이후에 비교적 책도 많이 보았고, 영어 공부도 했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인터넷 강의 같은 좋은 교보재가 없던 시절이라 영어 공부는 예전에 보던 영어 참고서, 영어 회화 카세트 테이프 등을 이용해서 공부를 했다. 그때는 영어 공부를 하면서 언젠가는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때 틈틈이 공부하며 기초를 닦은 것이 후에 많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2-27
  • [나의 공군 이야기](16) 강원도에서의 초급장교 생활① 영하 55도에서 소변이 어는 방식을 실험하다
    ▲ 겨울철 어느날, 부대 주변 계곡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선택한 '마을 자취', 음주 잦아져독서와 자기개발 위해 부대안 장교 숙소로 이사[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자대 배치 후, 필자는 부대에 인접한(인접했다고 하지만 부대에서 마을까지는 트럭으로 40~50분, 걸어서 3~4시간 거리이다) 마을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통제된 생활을 하다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으니 굳이 부대 안의 장교 숙소에서 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지만, 일과 이후에는 부대를 벗어나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에 자취를 선택했다. 그러나 마을에 살다보니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어려웠다. 퇴근 후에는 선배 장교들이나 중대원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많았고, 이들과 어울려서 음주 또는 당구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내 생활이 없다시피 했다.자대 배치 후 6~7개월 정도가 흐른 시점에서 ‘도대체 내가 뭘하고 있지? 매일 술이나 마시고...’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되겠다. 부대로 숙소를 옮겨서 퇴근 후에는 책도 보고 공부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부대장의 허락을 얻어, 며칠 후에 부대 안의 장교숙소로 짐을 옮겼다.부대안의 장교숙소는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부대는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때로는 저산소증(Hypoxia)이 생긴다고 할 정도로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난방이나 급수 문제는 오히려 병사들 내무반이 더욱 좋았다. 여기서 잠깐 그 지역의 기후를 얘기하면, 겨울은 9월말에 시작해서 다음해 5월 중순까지 지속된다.즉, 9월 말 정도에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한겨울에는 평균 기온이 영하 20도 내외다. 거기에 강풍까지 불면 체감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뚝 떨어진다. 그리고 5월 중순까지 눈이 내린다. 정말 기나긴 겨울이다. 돌이켜보면 강원도 부대에서의 생활은 추위나 눈, 강풍 등을 비롯한 자연과의 싸움이 가장 컸다.부대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안개(산 밑에서 보면 구름)가 많았고, 이런 환경이다보니 늘 습기가 많았다. 옛날 이야기를 보면 신선들이 구름속에서 살고 또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은 구름속에서 사는 것이 무슨 신선놀음을 하는 줄 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안개(산 밑에서 보면 구름)가 많은 지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습기와의 싸움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숙소내부와 피복류는 늘 눅눅하고, 장비(특히 전자 장비) 관리에도 엄청 많은 신경이 쓰인다. 사람 몸에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장교 숙소는 병사 내무반보다 시설이 열악그래서 일부 24시간 운영부서에서는 1년 내내 경유 난로를 가동(난방 및 습기 제거 목적)했고, 또 겨울이 일찍 시작하는 관계로 9월부터는 부대 전체가 난방을 시작했다(때로는 8월 말부터도). 물(식수 및 생활용수)도 부족했다. 지하수 또는 지표수를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기간에 한번씩 제한급수를 하는 여건이었고, 장교들도 개인별로 양동이 한 개에 물을 받아서 일주일 정도를 사용했다. 이 물로 식수 및 세면을 하는데 이용했다.화장실의 경우 수세식 화장실은 있으나 물이 부족한 관계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대부분 야외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겨울철에 야외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또다른 고통이었다.또한 그곳은 여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8월 한여름의 일주일 정도(서울에서 폭염이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영상 10도 내외에 안개가 끼어 있을 때가 많아서 체감온도는 낮았고, 그래서 여름철에도 늘 야전잠바를 입고 생활해야 했다. 온수 공급은 거의 없었기에 한여름에도 샤워를 하려면 30분 정도 운동을 해서 신체 온도를 높인 후에 해야만 했다.따라서 겨울철은 물론이고 한여름에도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 후, 끓인 물을 찬물에 섞어서 냉기만 겨우 없앤 물로 머리를 감던가 제한적인 샤워를 해야했다. 혹자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반문한다. 공군에도 그런 부대가 있느냐고.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군에도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열악한 환경을 가진 부대가 있었다.고지대에 위치해 체감 온도 55도로 떨어지기도추운 날씨와 관련해서는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가장 추웠던 날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즉, 두번째 겨울의 어느 날 아침! 상황보고 시간에 기상파견대장(상사)이 그날의 기상을 보고한다. “대대장님! 현재 기온은 섭씨 영하 35도, 풍속 25~30노트! 따라서 현재 체감온도는 영하 55도 이하입니다.”영하 55도라는 수치도 체감온도 환산표에서는 더 이상 환산할 수 있는 데이터(섭씨 영하 35도, 풍속 25~30노트)가 없기에 환산표에 있는 최저치인 영하 55도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즉, 실제 체감온도는 더 낮을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말에 모두들 눈이 동그래진다. 이 부대 창설 때부터 근무했다는 부사관도 이런 추위는 처음이란다. 이에 대대장이 지시한다. “현 시간부로 초병 등 최소 근무자를 제외하고 건물 밖 출입을 금지한다. 단, 장교들은 2명씩 조를 편성해서 야외 순찰을 실시해서 혹한에 따른 피해가 있는지 또는 피해가 예상되는지 확인하라!”영하 55도라! 생전 처음 듣는 수치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대대장님의 지시인데 즉각 이행해야지. 장교들은 조를 편성해서 부대를 돌아보았다. 한편 필자는 순찰에 앞서서 전투복 안에 겨울 내의는 물론이고 체육복까지 껴입고, 방한모에 스키 파카(뒤집으면 흰색인 겨울 위장용 파카인데, 보온기능은 없다고 봐야 한다)까지 입고 순찰에 나섰다. 그러나 역시 영하 55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건물 밖을 나선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도 뼈속까지 추워지는 느낌이 온다. 춥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 이런 세상에...순찰돌던 선배장교와 함께 '소변 실험' 실시, 만화책의 '오류' 확인아무튼 부대를 한바퀴 돌아보고 이상유무를 확인한 후에 대대본부로 향했다. 이미 몸은 걸어다니는 ‘동태’ 수준이다. 북극이나 남극 탐험가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대략 상상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추위와 고통 속에서도 머릿속에 반짝하는 것이 있었으니, 어릴때 만화책에서 보던 장면이 생각났다. 즉, 극심하게 추운 곳에서 소변을 보면 소변을 보는 순간 얼어붙는 장면이었는데, 같이 순찰을 하던 선배 장교에게 제안을 했다. “0중위님! (소변 보는)실험 한번 해볼까요? 순찰도 끝나가는데!” 같이 있던 선배 장교는 킥킥 웃으면 그러자고 했다. 체감온도 영하 55도, 야외에서 소변을 보면 언제부터 얼기 시작할까?실험 결과 소변은 땅에 떨어지면서 얼기 시작했다. 즉, 몸에서 배출될 때는 체온 때문에 얼지 않다가 땅에 닿으며 튀는 순간 얼음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만화책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영하 55도의 고통은 잊고 서로 웃고 있었다. 한편, 장교숙소의 난방은 전기히터로 천장에서 더운 바람이 나오는 구조였는데, 24시간 가동되는 것이 아니고 일과 이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한번에 1~2시간씩 두세번 가동하는 식이었다. 건물의 외벽이 얇아 단열효과는 거의 없어서 히터 가동이 끝나면 방안의 온도는 빠르게 내려갔다.밤새 추위에 시달리다 따뜻한 병사 내무반으로 달려가그런데, 그마저도 히터 가동이 안 될 때가 있었으니 그때는 야외 혹한기 훈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환경에서 잠을 자야했다. 즉, 외부에서 공급되는 전기가 강풍 등으로 중단될 때가 있는데, 이때는 부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비상 발전기를 가동하여 부대 내에 전기를 공급한다. 그러나 장교숙소는 전기공급 우선순위가 가장 낮아서 상황에 따라서는 전기 공급이 안 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는 전기히터 가동도 안되고 전기장판도 작동이 안되니 자다가 추워서 잠을 깬다.새벽녘이 되면 실내 온도는 거의 영상 2~3도 정도로 떨어진다. 추위가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그때 많이 경험했다. 기상 시간이 되면 몸은 웅크려져서 마치 거북이가 손, 발, 머리를 자기 몸 안에 넣고 있는 그런 형태가 된다. 24시간 난방이 되는 병사 내무실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는 없고, 빨리 출근 시간이 되어서 사무실에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음에 계속)·예비역 공군 준장·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1-29
  • [나의 공군 이야기](15) 초급장교 생활① 희망을 품고 부임한 첫 임지에서 깨진 고정관념들
    ▲ 소위 시절, 복장을 보니 8월 한여름에 촬영한 사진 같다 [사진=최환종]강원도 첫 임지로 가는 길에 대설 만나 시간 지연 무슨 일이 생겨도 시간 엄수? 군대도 사람 사는 곳[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이란 우연의 연속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이제까지의 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이끌려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첫 임지에서 3년간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것들이 앞으로 필자에게 주어지게 될 많은 임무와 연관이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작전사령부에서 보직을 부여 받은 후, 필자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임지로 향했다. 그해 4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 필자는 전투복 차림에 무거운 군용 잡낭(Duffle bag. 아마도 ‘f’ 발음이 어려웠던 사람들에 의해서 ‘더블백 또는 따블백’으로 불려왔던 것 같다)을 들고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원도 00지역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작전사령부에서 발급한 부임증에는 ‘00년 0월 0일 20시까지 00부대에 부임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그날 서울은 약한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시외버스 안에서 졸다가 밖을 보니 주변이 온통 흰색이었다. 순간 ‘강원도는 비가 흰색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잠을 깨고 다시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에! 4월 중순인데 눈이 오다니.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 남들이 잘 모르는 공군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흥미진진한 ‘나의 공군 생활’이 ...잠시 더 졸다가 눈을 떴는데, 버스가 서 있었다. 고속도로 위에. 무슨 일인가 하고 상황을 보니, 고속도로 제설 작업이 지체되어서 차량들이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었다. 거북이 걸음으로 버스가 운행하다가 중간 휴게소에 들렀다. 이미 시간은 18:00. 이런 운행속도라면 부임증에 적혀 있는 20시까지 부대에 도착은 어림도 없다.공중전화로 부대에 전화를 걸어서 “신임 소위인데, 눈 때문에 도로가 막혀서 20시까지 갈수 없다‘고 얘기를 했더니 상대방은(누구였는지, 계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걱정하지 말고, 부대 근처 마을에 오면 전화하란다. 생도 4년간 ’시간 엄수‘를 철저히 교육받고 생활화했던 필자는 너무 여유 있는 대답에 잠시 적응이 안되었다.눈은 계속 내렸고, 거북이 걸음으로 가던 버스는 마침내 부대 근처 마을의 작은 버스 정류장에 멈췄다. 그때 시간이 대략 21:30. 눈은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부대에 전화를 해서 지금 도착했다고 하니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부대로 출근하란다. 당시 필자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군(軍)은 시간엄수가 생명인데 이렇게 해도 되나???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그날 밤에 부대로 갈 수 없음을 확인한 필자는 마을에서 가장 깨끗해 보이는 여관을 찾아 짐을 풀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이 양초를 하나 준다. 정전이 되었으니 방에 촛불을 켜라고. 마을 도로에는 가로등이 켜 있었는데, 이 여관만 정전인가보다. 다시 60년대 시골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4월 중순에 내리는 눈, 부임시간에 별 관심 없는 부대원, 여관에서 주는 양초 등등... 신임 장교의 눈에는 많은 것이 신기했다.모두 '엄한 상급자'? '자상한 ' 중대장도 있어여관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받아보니 필자가 배치받은 부대의 중대장(즉, 필자의 직속상관)이라 하면서, 00다방에 있으니 나오라고 한다. 직속상관 명령인데 즉각 나가봐야지. 재빠른 동작으로 옷을 갈아입고, 00다방에 가서 중대장을 만났다. 중대장 얘기인 즉, ‘오후부터 눈이 많이 내려서 퇴근 버스 운행이 중지되었고, 중대장은 필자가 오늘 부임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필자를 만나기 위하여 걸어서 퇴근했다’는 것이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상급자는 엄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런 분이 있다니. 이래저래 그날은 필자의 ‘공군에 대한 관념’이 바뀌어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리고 중대장이 필자에게 묻는다. ‘최 소위! 맥주 한잔 하겠나?’. ‘네, 감사합니다.’ 그날 저녁은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부대로 가는 트럭(정확히 표현하면 트럭과 버스를 합한 그런 형태다)을 타고 부대로 향했다. 전날 확인한 사항이지만 부대는 마을과는 꽤 떨어진 곳에 있고, 마을에는 부대원 가족들이 거주하는 군 아파트가 있을 뿐이었다.부대에 도착했다. 같은 중대의 선임장교가 대대본부에 가서 신고준비를 하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대대본부가 어떤 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건물이 창고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부대는 전시(戰時)에 이동을 하는 부대라 모든 건물을 조립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사관학교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사항들이다. 더구나 필자는 비행단은 가봤어도 이런 소부대는 가본 적이 없기에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을 출발하면서 놀라움의 연속이다.전자장비 관련 보급이 첫 업무, 영관급된 후 그 가치 깨달아혈기왕성한 신임 소위가 소부대에 가자마자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이 부대는 전자통신 관련 부대로서, 지상전투가 아닌 ‘첨단 전자장비’를 운용하는 것이 주임무인 부대에서 신임소위는 작은 부서의 ‘관리자’였을 뿐이다. 필자에게 처음 1년 간 주어진 임무는 전자장비와 관련한 보급 업무였다. 처음에는 보급 업무가 대단히 따분하고 ‘나는 통신 장교인데, 이런걸 왜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훗날 영관 장교가 되면서 이때의 보급 업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보급 업무의 흐름을 안다는 것은 계급이 올라갈수록 필자에게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특히 중령 진급 후,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할 당시, 연합작전계획을 공부하면서 전쟁수행에서 ‘군수(보급)’의 비중이 엄청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수업무를 경험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군수(보급)의 개념을 이야기하면 ‘의식주 정도를 지원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볼 때 ‘군수’는 실로 어마어마한 개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전쟁 = 군수’라고 할 정도다.한편 부임 후에 필자에게 주어진 중대장의 첫번째 지시사항은 ‘관련 규정’부터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하고 있는 업무가 규정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술 잘먹는 장교가 일도 잘한다"는 속설이 군림하던 시절한편, 사관학교 4년간 술, 담배 등을 하지 않았던 필자는 임관 이후부터 술을 배웠다.사관학교에서는 3금(禁) 제도가 있는데, 이에따라 생도생활 4년간 세가지(술, 담배 등)는 금지사항이다. 그러나 담배는 배우려 해도 몸에서 받지 않았는데, 담배를 배우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술도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담배는 그야말로 백해무익하다고 하지 않는가.그 당시 분위기는 ‘술을 잘 마시는 장교가 일도 잘한다’는 다소 억지스런 주장이 인정되던 때였다. 필자도 일과 이후에는 마을에서 선배 장교들과 ‘누가 누가 술을 많이 마시나’ 하는 경쟁을 벌이다시피 했다. 어떤 면에서는 강원도에서의 초급장교 시절이 필자의 군 생활 기간 중 가장 마음 편할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1-20
  • [나의 공군 이야기](14) 중등비행훈련의 '뼈아픈' 기억과 개인적 미숙함
    ▲ 1년 전, 팔라우(Palau) 상공에서! 바다색이 환상적이다. 중등비행 훈련때 광양만 상공에서 보았던 남해 바다도 깨끗하고 환상적인, 연하고 투명한 에메랄드색이었다. [사진=최환종] 즐거웠던 초등 비행훈련과 달리 '긴박했던' 중등비행훈련[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초등 비행훈련 중반 이후에는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고 즐겁게 비행훈련을 즐겼는데, 중등비행훈련 입과해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느낌이었다. 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날, 중등 비행훈련에 입과했다. 오전에 00 비행단으로 출발할 때는 모두들 자신감 있고 활기찬 분위기였는데, 이상하게도 비행단에 다가오면서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행교관들의 우리를 맞이하는 분위기도 초등 비행훈련 대대와는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숙소를 배정받고 다음 일과를 준비했다.다음날, 기본적인 행정 처리와 더불어 정밀 신체검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학술교육! 공부해야 할 양이 초등비행훈련에 비해서 두세 배 이상 많아진 것 같았다. 암기해야 할 것도 많고. 당시 중등비행훈련은 ‘T-37C’ 라는 쌍발 제트엔진 항공기를 사용했다. T-41B 와 가장 큰 차이점은 엔진이 제트 엔진이라는 것이다. 항공기 시스템도 복잡했고. 항공기 외부점검은 물론 조종석 내부점검, 시동 절차 등 이륙하기 전의 기본적인 절차도 T-41B 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복잡했고 공부할 것도 많았다.고3때 만났던 선배 생도를 반갑게 해후, 신분은 '비행교관'소정의 학술교육 기간이 끝나고 첫 비행하는 날이 왔다. 중등훈련에서 첫 비행할때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미 초등훈련을 거친 이후라 자신있게 첫 비행에 임했다. 한편, 첫 비행에 배정된 교관은 안면이 있는 분이다. 다름아닌 고교 3학년때 ‘주말에 사관학교를 안내해줬던 그 생도’가 비행교관(중위)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러나 고교 선배라고 마냥 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항공기 시동을 걸고, 유도로(taxi way)에 진입하는데, 교관은 필자에게 적정 속도를 맞추어 활주로까지 taxi(항공기가 이륙 직전 또는 착륙 직후에 활주로에서 천천히 달리는 것을 말함)를 해보라고 한다. 이정도쯤이야 하고 생각하며, 자신있게 대답하고 taxi way에 진입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유도로 상에서 방향유지가 잘 안되었다. 교관이 쳐다본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지상에서 taxi 하는 방법이 T-41B와 약간 다른데 필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륙 후 훈련공역에 도착해서, 비행교관은 나에게 마음대로 비행기를 조종해 보라고 한다. 마음대로 조종해봤자 기본적인 상승, 강하, 선회 등등인데(실속 등등의 과목은 아직 비행기 특성을 모르니 함부로 못했다), 수평선회를 할 때 고도계가 마구 요동을 친다. 필자는 기종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니 아직 익숙하지 않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잠시 후, 교관이 어떤 기동을 보여줄까 묻기에 루프(loop, 공중회전) 기동을 보여 달라고 했다. 교관은 필자를 한번 쳐다보더니 루프를 하였다. 5~6G 정도의 중력 가속도가 몸에 가해지는 것을 버티면서 말로만 듣던 루프를 체험했다. 첫 비행은 나름 뿌듯한 기분으로 마치고 돌아왔다.건강에 문제 생겼지만 제대로 대처 못해 아쉬워 한편, 중등비행 훈련에 입과할 즈음해서부터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휴가 기간에 뭘 잘못 먹었는지, 아니면 훈련 비행단이 바뀌면서 마시는 물이 몸에 맞지 않았는지, 중등비행훈련 입과 이후에 계속해서 위장(胃腸)이 좋지 않았다. 식사 후에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잦았고, 의무대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고교 3학년 때도 위염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었는데,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위장(胃腸)이 좋지 않으니 답답했다.자연스레 학술교육 집중도가 떨어졌고 체력도 떨어짐을 느꼈다. 위장은 이후에도 가끔 문제를 일으켜서 업무에 힘들 때가 있었다. 특히 지휘관 임무를 수행할 때 주로 발생했다. 신경성인가? ... 지금 같으면 비행교관에게 건강 문제를 얘기하고 비행차수를 연기해달라고 건의한다던가 집중 치료를 받는 등의 조치를 강구해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비행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했을텐데, 그때는 그렇게 할 생각을 못했다. 돌이켜보면 답답한 상황이었다...T-41B와 T-37C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중등훈련 초기에 적응하기에 조금 어려웠던 것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었다. 처음 착용하면 약간의 고무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에도 적응을 해야 하고, 약간의 공중기동을 하면 호흡이 가빠질 때가 있는데, 처음에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심호흡하기가 다소 불편했다. 물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되었다.한편, 요즘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훈련 상태가 교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로 물리적인 스트레스(당시 군복무를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은 ‘물리적인 스트레스’가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가 많이 가해졌다. 중등훈련 당시에 ‘물리적인 스트레스’가 심할때는 며칠 동안은 조종석에 앉을 때마다 정말 조심해서 앉아야 했다. 전투조종사(또는 제트 훈련을 받는 학생 조종사)가 조종석에 앉을 때는 낙하산을 메고 앉는데, 이때 좌석에는 방석같은 사각형의 두툼한 물체를 깔고 앉는다. 조종석의 '생존키트'가 물리적 스트레스 되는 아이러니이 두툼한 물체는 생존키트(Survival kit)로서, 그 안에는 비상탈출시 생환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무전기, 비상식량, 신호탄 등등)이 들어있고, 이 생존키트는 낙하산 하네스와 연결되어 있어서 비상탈출시에 조종사가 땅(또는 수면위)에 착지 후에 생존키트를 열어서 필요한 물품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생존키트에 들어있는 물품들 때문에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평소에 그 위에 앉을때도 엉덩이에 뭔가 뾰족하거나 둔탁한 것이 닿는 느낌이 있는데(잘못 앉으면 비행 내내 불편하다), ‘극심한 물리적인 스트레스’이후에 생존키트위에 아무 생각없이 앉게 되면 (울퉁불퉁한 표면 때문에) 많은 통증을 느낀다.이러한 ‘물리적인 스트레스’는 초등훈련때는 레크레이션 수준이었으나 중등훈련때는 도가 지나칠 때가 가끔 있었다...아무튼, 중등훈련 첫 비행 이후 비행시간은 늘어나는데, 필자의 비행수준은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필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교관의 기대에 미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건강문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다... 이 글(중등 비행훈련 부분)을 쓰는 며칠 동안은 그때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만큼 중등 비행훈련은 필자에게 있어서 너무도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20-01-08
  • [나의 공군 이야기](13) 중등비행훈련, 특기교육 그리고 졸업식의 파노라마
    ▲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후 진행된 졸업반지 증정식 [사진=최환종]중등훈련 중에 착륙바퀴 내려오지 않아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언젠가 하와이에서 C-172로 단독비행을 할 때였다. 해질 무렵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착륙을 위한 접근을 하고 있었는데, 관제탑에서 ‘타 항공기에 비상 (emergency)상황이 발생해서 그러니 잠시 현재 위치에서 holding 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 순간 갑자기 중등비행 훈련 시절이 생각났다.한번은 이착륙 훈련 중에 Landing gear(착륙바퀴) down이 되지 않았다. 즉, 착륙하려면 바퀴가 내려와야 하는데, 동체 안에서 바퀴가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그때 T-37 C 비행시간이 7~8시간 정도 되던 때였다. 비행교관도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순간 필자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교관이 하는 조작을 잘 지켜보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동체착륙을 하면 되지 않겠어?’ 이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비행교관이 몇 가지 조작을 한 후에 다시 Landing gear down lever를 당기니 착륙바퀴가 내려왔다. 착륙바퀴가 정상으로 내려갔는지 여부는 조종석 계기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항공기 비상상황’이라고 하면 엔진 고장 등에 의한 불시착을 주로 생각하는데, 위와 같이 착륙 바퀴가 내려오지 않거나, 무전기 고장, 플랩(Flap. 고양력 장치의 일종) 비정상 작동 등 정상적인 항공기 운항에 저해되는 상황이 모두 포함된다.비행 중 통신두절 등 비상상황 겪으면서 안정감 얻어필자가 개인적으로 비행할 때 비상 상황이 발생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중 황당한 경우가 Radio failure(무전기 고장) 상황이었는데, 비행장 외곽 7~8 마일 정도에서, 아무리 관제탑을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착륙 단계라서 고도가 낮으므로 최악에는 휴대폰으로 관제탑에 연락을 하려했다(참고로 고도가 너무 높으면 휴대폰 통화가 안된다.필자 경험에는 3000 ~ 4000 ft 이상 고도에서는 통화가 안되었다). 혹시나 해서 계기판의 Circuit breaker를 reset 하고 교신을 시도하자 그제서야 관제탑과 교신이 되었다. 관제사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이런 비상상황을 여러 번 겪고 나면(이를 해결하면) 비정상 공중상황 조우시 훨씬 안정감 있게 대처할 수 있다.손 흔들어 주는 등산객은 비행중 최고의 위안한편, 그해따라 무더운 여름이 지속되었다. 그 당시 숙소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다만 학과장 내에만 대형 에어컨이 있어서 비교적 시원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항공기 조종석 내부에도 냉방기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조종석 내부 전체가 시원하지는 않고 국부적으로만 시원함을 느끼는 정도였다. 게다가 엔진 출력 정도에 따라 에어컨의 냉각기능이 차이가 생겼다. 즉, 100 %로 엔진 출력을 높이면 냉방기능이 좋아졌고, 엔진 출력을 줄이면(착륙 접근시 등등) 냉방기능이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비행을 마치고 내려오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제트 비행시간 12시간째이던가. 지리산 부근 공역에서 공중조작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려운 몇가지 공중조작 훈련을 마치고 다음 과목을 준비하면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봉우리에 사람들이 보인다. 등산객들이었다. 갑자기 교관이 조종간을 잡더니 산 정상 부근에서 배면비행을 한다. 몇 초간의 짧은 순간, 필자는 등산객들이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왠지 그들이 우리를 격려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행교관이 얘기한다. “(몇 초간) 휴식 잘 했지? 다음 과목을 진행하자”. 정말이었다. 몇 초간의 배면비행이, 등산객들이 흔들어 주는 손이 심신을 맑게 해주었다.어느 날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비행하기 전에는 훈련지역의 기상예보를 미리 확인하는데, 그날은 예보도 좋았고, 훈련 공역의 실제 기상도 좋았다. 대기중에 먼지도 구름도 없는 깨끗한 하늘에서 훈련비행 중이었고, 광양만 20,000 ft 상공에서 바라본 지상과 해상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이렇게 깨끗한 하늘과 같이 비행도 잘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면서 자신감의 저하와 함께 비행실력은 나아지지 않았다.비행적성 부적합 평가 받고 참담함 느껴초등 비행훈련 때는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고 즐겁게 비행훈련을 즐겼는데, 중등비행훈련 입과해서는 건강문제로 인한 체력저하 등등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느낌이었다.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는가...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행훈련은 계속 진행되었고, 드디어 평가일이 되었다. 교관과 같이 비행기에 탑승해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비행을 했다. 그러나 비행후 브리핑 결과는 좋지 않았다.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해서 재평가를 받으라는 내용의 디브리핑이었다.며칠 후, 다른 교관과 함께 재평가 비행을 하였다. 나름 재평가 비행은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행교관은 필자에게 비행적성이 맞지 않으니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취지의 설명을 하면서 브리핑을 마쳤다. 초등 훈련 때같이 한번 더 기회를 달라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참담했다. 공군에서의, 인생에서의 첫 실패라고나 할까...공군에서 조종사가 안된다는 것은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나이어린 4학년 생도이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이제 생도대로 다시 돌아가서 나머지 학과 수업과 졸업식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때가 가을이었다. 4학년 가을...얼마 후 생도대로 돌아와서 다시 생도 일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졸업식이 있는 다음해 4월 초까지 시간은 필자에게는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희망도 꿈도 없는...그해 겨울에 교육사령부로 특기교육을 받으러 떠났다. 필자는 통신 특기를 신청했고, 통신 특기를 부여 받았다. 다음해 2월 말까지 특기교육을 마치고 생도대로 복귀했다. 3월 초가 되어서는 각종 특기 교육을 받던 모든 동기생들이 모였다. 졸업식 전까지 약 한 달 동안 생도대에서 임관전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기간에는 졸업식 예행연습 및 장교임관에 따른 각종 교육을 받았다.4월 초에 졸업 및 임관식이 거행되었다. 한 시간 정도의 졸업식이 진행되었고,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는 모든 졸업생이 단상에서 그 유명한 옆걸음으로 가면서 주요 귀빈 및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것이다. 지난 4년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 악수 장면이 나에게도 현실이 되었음을 가슴으로 느끼며, 주요 귀빈을 거쳐 대통령 앞으로 나아갔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필자가 대통령 앞에 서자 필자와 눈을 마주치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최 소위! 축하하네!’ 라고 짧고 묵직하게 격려의 말씀을 하였다. 필자가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사관학교 졸업 후 첫 임지는 '금시초문'인 강원도 지역 부대드디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가 되었다. 양쪽 어깨에는 소위 계급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 4년 간의 험난한 과정을 거친 후 얻은 영광(졸업 및 임관)인데, 왠지 허전했다. 비행훈련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는 느낌이었으리라.그러나 돌이켜보면 사관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4년간은 폭풍같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비록 비행훈련은 끝까지 마치지 못했지만,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멋진 군 생활을 하자고 필자 스스로에게 다짐했다.졸업식 이후에 며칠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 이후, 필자를 비롯한 다수의 동기생들은 작전사령부로 집결해서 약간의 행정처리 이후에 차후 보직을 부여 받았다. 필자가 가야하는 부대는 강원도 모 지역의 부대이다. 왠만한 공군부대는 생도 시절에 명칭이나 위치는 들어 보았는데, 이 부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부대이다. 그것 참.......(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19-12-31
  • [나의 공군 이야기](12) 4학년 생도생활의 절정, 최초 단독비행
    ▲ 전역한 다음해 여름, 필자는 지인과 같이 부부동반으로 하와이(오아후)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하루는 오아후에서 Cessna-172 항공기를 빌려서 지인 부부를 뒤에 태우고 오아후섬 일주비행을 했다. 호놀룰루 국제공항에서 이륙하여 와이키키 해변을 지나 오아후섬 동쪽과 북쪽 해안을 거쳐 북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활주로에 내렸다. 준비해간 샌드위치와 삶은 달걀, 커피를 마시며 30여분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호놀룰루 공항으로 돌아왔다. 비행하면서 바라보는 지상, 특히 해안의 풍경이 그림 같다. 공군인(空軍人)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사진은 착륙전 활주로에 접근하는 장면, 호놀룰루 국제공항 [사진=최환종]비행교관이 없어 빈 옆자리, 압박감이 온몸 눌러[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긴장된 가운데 비행훈련은 계속 진행되었고, 어느덧 단독 비행(Solo flight)에 대비한 평가 날짜가 다가왔다. 이 평가를 통과하면 단독비행을 나갈 수 있고, 초등비행 수료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다. 최초 평가에서도 많은 동기생들이 탈락했기에 동기생들은 ‘단독 비행전 평가’에 통과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그리고 ‘단독 비행전 평가’를 하는 날이 밝았다. 역시 긴장된 마음으로 평가 비행에 임했다. 긴장은 했지만 비행교관이 지시하는 과목을 대체로 잘 수행했다. 착륙 후 브리핑을 하면서 비행교관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얘기하면서 밝은 표정으로 ‘성공적인 최초 단독비행을 준비하라’고 했다. ‘단독 비행전 평가’에 통과한 것이다.그리고, 최초 단독비행의 날이 밝았다. 컨디션을 최상으로 하기 위해서 단독비행 전날은 푹 잤고, 상쾌한 마음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기상조건은 좋았다. 최초 단독 비행은 ‘이착륙 단독 비행’이었다. 주기장에서 비행기 시동을 걸었다. 엔진의 소음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느껴진다.Taxiway를 거쳐 활주로에 다가서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몰려온다. 수없이 연습한 이착륙인데 왜 이렇게 새롭게 느껴지는지. 평소에는 비행교관과 같이 비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오늘은 비행교관이 내 옆에 없다. 허전하다. 옆에 있던 비행교관이 없으니 실수하면 의지할 사람도 없다. 갑자기 비행교관이 그리워졌다. 오로지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온몸을 눌렀다. 이륙 전 최종 점검을 마치고 활주로에 다가섰다. 긴장 끝에 이륙하면 자유의 느낌 엄습 , 착륙 후엔 성취감 만끽드디어 이륙허가가 떨어졌고, 엔진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서서히 비행기가 앞으로 전진한다. 이륙 속도에 이르러 조종간을 뒤로 살짝 잡아당기자 비행기는 부드럽게 공중으로 올라간다. 자유롭다. 이륙 전에는 혼자 비행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더니 공중에 혼자 떠 있으니 표현할 수 없는 자유를 느낀다.적정 고도에 이르러서 선회한 후에 고도를 맞추고 활주로와 나란히 비행하였다. 활주로 주변의 지형지물이 눈에 익숙하다. 어느 순간 자신감이 생긴다. 그리고 착륙전 마지막 선회! 모든 것이 교육받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모든 제원 정상! 활주로 끝이 시야에 들어왔고, 원활한 착륙을 유도하는 대대장님의 목소리가 헤드셋으로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활주로에 접근! 착륙 속도에 맞추고 적당한 강하각을 유지하며 활주로 중앙으로 접근했다. 온몸의 신경은 조종간과 활주로에 집중되어 있다. 잠시 후 바퀴가 쿵 하고 활주로에 닿는다. 착륙했다. 해냈다. 이때의 성취감과 만족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속도를 줄여 주기장으로 향했고, 비행교관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최초의 단독비행! 10 여년 후에 ‘또 다른 성격의 단독비행’을 했지만 이날 ‘최초 단독비행’의 기억과 감동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초 단독비행을 다녀온 이후에는 비행훈련에 자신감이 붙었고, 비행훈련 자체를 즐겼다. 비행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느낌이었다.이후 단독비행은 2~3회 정도 더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비행교관과 동승하여 비행교육을 받았는데, 단독비행이던 동승비행이던 비행이 기다려졌다. 가끔 날씨가 나빠서 비행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공중조작 훈련 중 '실속'현상 이겨내며 교관과 신뢰 쌓아어느덧 초등비행훈련도 중반을 넘어섰다. 이착륙 단독비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공중조작 훈련이 중점이 되었다. 공중조작 훈련중 기억에 남는 것은 실속(失速, Stall)훈련이다. 실속이란 항공기의 받음각을 일정각도 이상으로 증가시키면 날개 표면에 공기 흐름의 분리가 생겨 비행 속도가 줄면서 항공기가 하강하는 현상으로서, 이런 훈련을 하는 이유는 항공기를 조종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도한 받음각을 유지하다가 실속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항공기를 강제로 실속 상태에 빠뜨려서 실속을 경험하고, 또 실속에서 회복하는 절차를 연습하는 것이다.항공기가 실속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항공기 기수가 갑자기 땅으로 향하면서 조종사는 ‘마이너스 G(Gravity, 중력)’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느낌은 청룡열차를 타고 올라가다가 갑자기 내려올 때 느끼는 그런 불쾌한 느낌이다. 이런 불쾌한 느낌은 직접 실속에 진입하는 조종사는 미리 그런 느낌을 예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불쾌하나, 동승한 조종사나 승객은 매우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된다.한번은 실속 훈련을 하는데, 실속 진입시 경사각이 조금 깊었던 것 같다. 즉시 회복절차를 실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즉각 자세 회복이 안되고 경사진 방향으로 회전을 계속했다. 순간 스핀(SPIN)에 들어갔나 하고 생각을 했다. 약간 긴장은 되었으나 회복절차를 재확인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1~2회 회전한 기체는 회전을 멈추고 정상 자세로 회복이 되었다.필자와 교관은 서로 쳐다보았다. 교관도 잠시 당황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머지 과목을 수행하고 기지로 돌아왔다. 그 이후 수료할 때까지 필자의 비행교관은 비행하면서 나에게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날 필자가 실속(또는 SPIN) 회복하는 것을 보고 필자를 믿었던 것 같다. 빨간 마후라 선물받으며 초등비행훈련 수료시간은 흘러 어느덧 초등비행 훈련 수료일이 다가왔다. 많은 종류의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훈련 수료가 아쉬웠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고 비행하는 것이 좋았다.초등훈련 수료식 전날, 학생조종사 몇 명이 담당 비행교관님을 모시고 조촐한 저녁식사를 했다. 비행교관은 우리들에게 덕담을 해주면서 우리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다음날, 초등훈련 수료식이 있었고, 비행대대장이 우리에게 “빨간 마후라”를 기념으로 주었다. 아직 조종학생인 우리에게 의미는 없지만.그리고 며칠 후, 필자를 포함한 동기생들은 부푼 가슴을 안고 00비행단으로 향했다. 이제 중등 비행훈련에 입과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Cessna-172'는 Cessna사(社)에서 만든 4인승 민수용 항공기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항공기이며, ‘T-41B’는 미 공군에서도 초등비행 훈련용으로 사용했다.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19-12-18
  • [나의 공군 이야기](11) 4학년 생도 피말리는 초등비행훈련, 천국과 지옥을 오가
    ▲ 꽤 오래전에 필자가 영관장교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둘째 딸을 Cessna-172에 태우고 비행을 했다. 뒷좌석에 앉아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딸의 얼굴이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몇 년전, 성인이 된 둘째 딸을 태우고 비행을 했다. 공중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조작을 했는데, 딸은 즐거워만 한다. 하늘에서 갖는 부녀간의 흐뭇한 시간이었다. 사진은 10여년 전 어느날, Cessna-172로 비행 중인 필자. 조종석이 매우 좁다.[사진=최환종]초등비행훈련의 최대 난관은 공중에서 수평잡기[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첫 비행은 교관의 설명과 시범을 보는 것으로 대부분 이루어졌고, 필자에게는 비행교관이 가끔씩 조종간을 잡아 보라고 했다. 그때 교관은 필자가 공중 상황에 적응하는지 여부를 보는 것 같았다. 첫 비행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비행훈련이 시작되었다. 이착륙 훈련과 공중조작 훈련이 병행되었는데, 생전 처음 해보는 비행인지라 용어 익히기도 어려웠고, 공중에서 자세 잡는 것도 어려웠다.참고로 공중에서는 수평 자세를 잡는 것이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처음에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사람은 지상에서는 자신의 자세를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자기가 누워있는지, 경사진 곳에 서 있는지 등등. 그러나 공중(3차원 공간)에서는 그런 자세를 파악하기가 처음에는 어렵다.필자도 처음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공중에서 수평을 잡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180도 방향으로 고도 1,000 ft를 유지하며 비행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지시된 방향 및 고도 유지가 대단히 어렵다. 방향을 맞추면 고도가 틀려지고, 고도를 맞추려 하면 방향이 어느 순간에 틀려진다.많은 사람이 3차원 공간에서의 감각이 익숙하지 않으므로 처음에는 대부분 같은 경험을 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3차원 공간에 적응을 하게 되지만. (선배들의 얘기에 의하면 비행은 학과 성적이나 운동 신경과는 별개라고 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해도 공중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일까 늘 궁금했다) 아무튼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공중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피말리는 비행훈련, 공중조작 훈련 등서 탈락하면 생도대로 돌아가야 첫 평가서 "생도대로 돌아가라"는 교관에게 '단호한 의지'로 반박한편, 비행훈련에 입과한 이후에도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은 매일 계속되었고, 비행 전에 실시하는 아침 브리핑 시간은 비행교관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긴장의 연속이었다. 특히 비상조치 절차 숙지는 본인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항이므로, 교관이 질문하지 않더라도 정확하게 숙지하여야 하는데, 교관이 질문할 때 즉각 대답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비행교관으로부터 잘못된 부분을 매일 수차례 지적받고 시정하면서 이착륙 훈련과 공중조작 훈련에 집중하는 가운데, 어느덧 최초 평가일이 다가왔다. 여기서 탈락하면 생도대로 돌아가야 한다.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모든 군사훈련이 그렇듯이 비행훈련을 받을 때도 많은 평가가 있다. 최초 평가, 단독비행전 평가, 무슨 무슨 평가 등등. 수 많은 평가를 통과해야 조종사가 될 수 있는데, 초등훈련의 최초 평가는 그 많은 평가 중에서도 첫 평가이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이 평가에 통과해야 초등훈련 수료에 한발 다가선다.노심초사하는 가운데 최초 평가일이 밝았다.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항공기 외부점검을 마치고 시동을 걸었다. 최초 평가는 이착륙과 공중조작을 하면서 조종학생의 조종 능력 내지는 적응력을 평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따라 너무 긴장해서인지 실수가 조금 있었다.잠시 후 비행교관의 목소리가 뭔가 못마땅한 눈치다. 그러더니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얘기를 한다. “생도 ! 고생하지 말고 생도대로 돌아가지 그래!” 순간 긴장했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지. 나는 비행교관에게 “생도대로 돌아가지 않겠다. 방금 전에 했던 조작을 다시 해보겠다”고 나름 내 의지를 보이며 강력하게 얘기했다. 천년 같은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잠시 침묵하던 교관이 필자에게 지시한다. 약간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러면 12시 방향에 보이는 산으로 수평 비행해 봐라. 현재 고도 잘 유지하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현재 고도를 유지하면서 교관이 지정한 방향으로 접근했다. 잠시 후, 비행교관이 얘기한다. “알았다. 열심히 하라”.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착륙 후에 최초 평가를 받은 동기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행교관이 내 의지를 시험해본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리고 그 생각은 맞는 것 같았다. 초등훈련에 입과한 조종학생이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다들 비슷한 조건일텐데. 초기에는 ‘의지’도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되겠지...다음날부터는 이착륙 훈련이 중점적으로 실시되었다. 지금은 오랜만에 비행을 해도 이미 비행이 몸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비행을 즐길 수 있는데(물론 Cessna-172 기종에 국한된다), 당시는 착륙이 너무도 어려웠다. 어떤 날 '최고의 비행'으로 칭찬듣고 다음날 '최악'으로 질타받아 비행하면서도, 비행 후 브리핑할 때도 교관에게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갑자기 비행이 잘 되었다. 즉, 이착륙 단계에서 맞추어야 할 속도, 고도 등의 제원을 계기판의 눈금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맞추며 비행을 했던 것이다. 비행교관은 공중에서도 칭찬하더니 착륙 후 브리핑을 하면서도 칭찬이다. “여러분! 오늘 000 생도만큼 해봐라!” 지나가던 다른 교관도 한마디 거든다. “000 생도! 오늘 매우 잘했다면서?” 어느새 비행대대에 소문이 다 났나보다. 쑥스럽게도...그러나 다음날 비행은 죽을 쑤었다. 그러자 비행교관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온몸을 질타한다. “어제는 잘하더니 오늘은 왜 그러나?”, “여러분! 오늘 000 생도 같이 하면 안돼!” ........하루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이었다. (다음에 계속)* 'Cessna-172'는 Cessna사(社)에서 만든 4인승 민수용 항공기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항공기이며, ‘T-41B’는 미 공군에서도 초등비행 훈련용으로 사용했다.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19-11-28
  • [나의 공군 이야기](10) 4학년 생도생활의 절정 '초등비행훈련'의 추억
    ▲ T-41B와 유사한 Cessna-172 type 항공기. 이 사진은 필자가 전역 후에 개인적으로 비행할 때 촬영한 사진이다. 비행훈련 때의 사진은 남아 있는 사진이 없다. [사진=최환종]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가끔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이런 생각을 했다.저 비행기는 어떤 사람이 조종하고 있을까?[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사관생도에게는 생도생활 4년 간 의식주(衣食住), 학습에 필요한 교재 등 모든 것이 국비로 지원된다. 게다가 소정의 교육수당까지 지급되어 사관학교 4년간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다.그리고 임관 후에는, 본인의 사관학교 성적과 근무성적이 우수하면 국비로 석사, 박사 과정까지 공부할 수 있다. 교육비가 만만치 않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떤 면에서는 사관학교에 진학하는 자체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또한 군 생활을 하면서 사회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거나 경험하기 어려운 사격, 낙하산 강하, 비행훈련 등 각종 고급 훈련을 이수할 수 있고, 최첨단 무기체계와 장비 등을 다루며,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특히 가장 멋지고 고귀한 일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가! 모험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사관학교와 군(軍)은 육, 해, 공군 모두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의 적성에 맞아야 하겠지만.한편, 모든 것이 국비로 지급됨에도 불구하고, 1학년 때 어떤 선배 생도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정말인줄 알았다.) 즉, 집안이 부유한 어떤 선배 생도는 학기가 바뀔 때마다 '등록금'을, 교재를 사야 한다고 '교재비'를, 사격훈련 한다고 '실탄 비용'을, 낙하산 강하 기초훈련 받을 때는 '낙하산 비용' 등등을 부모님께 받아서 사용했다는데...그러면 비행훈련 받을 때는 비행기 값도 받았을까? 아니면 연료비라도 ???말을 재미있게 하는 선배 생도의 얘기에 모두들 배꼽 잡고 웃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한편, 시간이 흘러 3학년 생도생활도 무사히 마치고 어느덧 4학년 생도가 되었다. 4학년 생도로 진급했을 때의 기분은 그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최고 학년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생도생활이 불과 1년 밖에 남지 않았고, 이제 1년 후면 장교로 임관한다는 생각에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1년 선배들의 졸업식을 마치고, 이제 남은 것은 비행훈련이다. 조종사 신체 등급에 적절한지를 판단하는 정밀 신체검사와 ‘G(Gravity) 내성 훈련’(조종사는 급격한 공중기동시 중력가속도로 인하여 조종사 몸무게의 6~9배 또는 그 이상에 달하는 압력을 받는데, 이를 견디는 훈련)등 비행훈련에 입과하기 전에 받는 절차는 3학년 말에 모두 완료했다.4학년 늦은 봄에 초등 비행훈련 과정에 입과4학년 늦은 봄, 드디어 초등 비행훈련 과정에 입과했다. 그동안 선배들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비행훈련! 당시의 비행훈련은 초등, 중등, 고등 비행 훈련 등 3개 과정으로 구분되어 진행되었다. 정든 생도대를 뒤로 하고 비행교육대대(이하 비행대대)로 향했다. 막연하게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던 비행대대의 분위기는 첫날부터 엄격했다.초등 비행훈련에 입과한 우리는 ‘조종학생(student pilot)’으로서 생도대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생활했다. 초등비행훈련은 당시에는 ‘T-41B’라고 하는 ‘Cessna-172’ 항공기보다 성능이 향상된 단발 프로펠러 항공기를 사용했다. ‘T-41B’는 단발 프로펠러 엔진, 고익(High wing), 기본적인 계기판을 가진 4인승 훈련기이다. 지금 보면 단순한 비행기이지만 당시에 처음 비행기를 접한 필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학술대대에서 이론 교육을 마치고 비행기 시동과 비상절차 등등을 암기한 후에 첫 비행에 나섰다. 물론 비행교관과 함께. (비행훈련은 조종학생과 비행교관의 1:1 교육으로 진행된다.)4인승 훈련기로 첫 비행, 조종간에 손만 대고 비행은 '교관 몫'항공기 외부 점검을 마친 후에 조종석에 앉았다. ‘T-41B’ 조종석은 조종학생과 비행교관이 나란히 앉는 구조인데(조종학생은 좌측에, 비행교관은 우측에 앉는다), 생각보다 좁았다. 덩치 큰 교관이 앉으면 어깨가 닿는다는 말이 실감났다.조종석에 앉아서 비행교관으로부터 기본적인 설명을 들은 후, 첫 시동을 걸었다. 지금이야 비행기 타고 여행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비행기를 타 본다는 것이 귀하고 드물었던 만큼 비행기 시동을 건다는 자체가 엄청 긴장되고 신기했다. 자동차 운전면허도 귀한 시절이었으니...절차대로 여러 개의 스위치를 조작하니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교관의 설명과 시범에 따라 방향타를 조종하여 활주로로 나갔다. 그리고 이륙! 물론 이륙부터 착륙까지 비행교관이 조종간을 잡았고, 필자는 조종간에 손만 대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조종간을 살짝 당기자 비행기는 가볍게 이륙엔진 출력을 최대로 하자 비행기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이륙 속도에 이르러 조종간을 뒤로 살짝 당기자 비행기는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뭔가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공중으로 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륙이 간단하다. 어떤 선배는 이륙하자마자 속이 메스껍다는데, 필자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첫 비행하는 날은 기상이 좋아서 아주 편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공중에서의 느낌은 매우 편안했는데, 3차원 공간에 떠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마치 잘 닦여진 고속도로 위를 덜컹거림 없이 미끄러지듯 달리는 것 같았고, 때로는 속도감이 있는 듯, 때로는 속도감이 없는 듯, 여러 가지가 복합된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최초의 비행은 공중상황이 어떠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다음에 계속)* 'Cessna-172'는 Cessna사(社)에서 만든 4인승 민수용 항공기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항공기이며, ‘T-41B’는 미 공군에서도 초등비행 훈련용으로 사용했다.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초빙교수(현재)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 나의 공군 이야기
    2019-10-31

동영상뉴스 검색결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최종회) 아내와 함께했던 오끼나와 다이빙의 추억
    전역 직전 오키나와 휴가여행서 아내 '허락'받고 설레였던 다이빙[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그러고 보니 필자가 전역한 이후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꽤 많이 다녔다.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오끼나와도 가봐야 할 곳 중의 한곳으로 포함시켰는데, 오끼나와는 버킷 리스트 작성 이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이다.필자가 전역식을 하고 전역일 까지 약 3주간의 휴가가 주어졌고, 그때 필자는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가까운 오끼나와로 며칠간 여행을 갔다. 단, 여행가기 전에 아내에게 양해를 구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스쿠버 다이빙이었다. 아내가 오전에 호텔에서 쉬는 동안 필자는 다이빙을 한다는 조건이었고, 아내는 조금 못마땅해하면서도 동의를 했다.여행 시기는 12월 중순. 갈 때는 겨울옷을 입고 갔는데, 오끼나와는 초여름 날씨라 얇은 옷을 입고 다녔다. 오끼나와에서 첫날은 호텔 투숙 후에 근처를 돌아보고,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다이빙 센터를 찾아서 예약을 했다. 약 2년 반 만에 하는 스쿠버 다이빙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발살바(Valsalva)가 제대로 될까하는 걱정도 들었다. ▲ 다이빙 보트 위에서 수면 휴식중인 필자 [사진=최환종]빵을 뿌리면 '닭'처럼 몰려드는 물고기들, 큰 놈이 손가락을 물기도오끼나와에서 둘째날 오전,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예약한 스쿠버 센터 강사와 만나서 장비를 착용하고 배에 올라, 오끼나와 본섬의 북서쪽 해안으로 가서 다이빙을 했다(다이빙 포인트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그날 다이빙을 두 번 했는데, 수심은 5~6 m, 다이빙 시간은 각각 17분, 11분, 수온은 23도였다.오랜만에 한 다이빙이라 물속에서 불필요한 동작이 많았고, 그에 따라 공기 소모량이 많아서 다이빙 시간이 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5mm 수트를 입어서 큰 추위는 느끼지 못하였는데, 잠수복 또한 오랜만에 입고 벗는데 정말 힘들었다.아무튼 오랜만에 바다에 들어갔고, 처음에는 약간 추운 듯 했으나 곧바로 추위를 잊고, 다이빙에 열중했다.오끼나와의 바다 속은 맑고 투명했다. 수중 시정은 10m 내외. 이제까지 경험했던 제주도나 동해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주위에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지나다니는데, 강사가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나에게도 준다. 빵조각이다. 강사가 빵조각을 손에 들고 조각을 내어 뿌리니 물고기들이 달려든다.그 모습이 마치 마당에 모이를 뿌리면 주변에 있는 닭들이 모여드는 그런 모양새다. 나도 똑같이 하니까 나에게도 물고기들이 몰려온다. 이런 장면은 잡지에서나 본 듯한 광경인데, 직접 하니까 재미있기도 해서 강사가 가지고 있던 빵을 더 달라고 해서 모두 뿌렸다. ▲ 다이버 주위로 몰려드는 물고기들 [사진=최환종]그런데, 약간 덩치가 큰 녀석이 다가오더니 빵조각뿐만 아니라 내 손가락까지 문다. 물고기가 배가 고팠나 ? 열대지방의 식인 물고기도 아닌데. 혹시 광견병 아닌 광어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수중 환경에 집중하고 있었다.두 번의 짧은 다이빙이었지만, 새로운 수중환경에서 다이빙을 했다는 것이 즐거웠다.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훌륭한 수중 시정도 좋았고, 다이빙 내내 각종 물고기와 바다뱀이 다니는 것을 보는 즐거움 또한 컸다. '장롱면허' 아내에게 다이빙 유혹, 안타깝게 포기셋째 날도 오전에 다이빙을 하러 갔는데, 이때는 아내도 같이 갔다. 아내도 다이빙 자격증은 있지만, 그동안 다이빙을 할 기회가 없었기에 거의 ‘장롱 면허 다이버’다. 장비를 착용하고 아내와 같이 바닷가에서부터 걸어서 들어가는데, 물이 점점 깊어지자 아내는 너무 춥다고 다이빙을 포기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인데, 아무리 오끼나와가 초여름 날씨라지만 수온 23도가 따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할 수 없이 나와 강사만 바다에 들어갔다. 이날 다이빙한 포인트는 그저 깨끗한 바다였고 볼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오끼나와 바다에서 다이빙을 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한편, 스쿠버 다이빙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시행하면서 본 결과, 오끼나와도 다이빙 여행을 가기에 꽤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에서 가깝고(비행시간은 2.5시간 내외), 수중환경도 훌륭한 것 같다. 오끼나와 본섬 뿐만 아니라 남서쪽의 케라마 제도 등도 좋은 곳이라고 한다. 다이빙 비용은 필리핀보다 조금 비싼 것 같으나 접근성 등 여러가지를 종합해 보았을때 다이빙 여행을 가기에 적당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오끼나와 다이빙 때부터 Gopro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의 즐거움 시작 한편, 오끼나와 여행 때부터 Gopro 카메라를 사용했다. 호텔 수영장에서 처음 사용해 보았는데, 화질도 좋고 사용 편의성이 훌륭했다. 그래서 여행과 다이빙 내내 Gopro 카메라를 사용했고, 저녁에 호텔에서 촬영한 동영상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영상 편집을 독학으로 배워서 나만의 스쿠버 다이빙 동영상을 편집할 수 있었고, 그 후로는 다이빙을 다녀올 때마다 다이빙 동영상을 편집해서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또다른 즐거움이 되었다.오전 다이빙, 오후 관광 형태의 오끼나와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침에 필자와 아내는 호텔 발코니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오끼나와에 다이빙을 하러 다시 오겠다는 생각을 하며, 공항으로 향했다. (끝)에필로그...지난 6개월간 “바다속 10m에서 풍류를 즐기다”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기고했던 내용은 지난 몇 년간 필자가 스쿠버 다이빙 여행을 다녔던 기록으로서, 필자의 소중한 다이빙 기록이며, 스쿠버 다이빙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앞으로도 스쿠버 다이빙은 계속할 것입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모아지면 그때 다시 지면에서 뵙겠습니다.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9-01-17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3) 보홀의 가르침② “자만은 재앙을 부른다”
    돌고래 구경하고 첫 날 다이빙 포인트의 '매력'에 다시 끌려가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동안 필자는 맑고 깨끗하고 수중시정이 정말 양호한 ‘명경지수’와 같은 바다를 여러 곳에서 경험했기에 왠만한 수중시정은 필자 마음에 들기 어렵다. 어느덧 바다를 바라보는 몸과 마음과 눈의 수준이 높아졌다.명경지수와 같은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면 심신이 상쾌함은 물론, 바다와 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보홀에서의 다이빙은 운좋게도 수중시야가 좋아서 상쾌하고 즐거운 다이빙을 할 수 있었다. ▲ 산호와 물고기떼 [사진=최환종]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돌고래가 많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해당 지역에는 벌써 관광객을 실은 서너 척의 배가 도착해 있었다. 잠시 후 돌고래 몇 마리가 나타나서 배 주위를 돌아 다녔다. 듣기로는 그 지역에는 이른 아침 시간에 “돌고래떼”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실제로 돌아다닌 것은 대여섯 마리뿐, TV ‘동물의 왕국’ 등에서 보았던 수많은 돌고래 무리를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그래도 배 주위에서 자기들을 보란 듯이 헤엄쳐 다니는 돌고래를 보면서, 그들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에 표현할 수 없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돌고래 무리들이 떠나고 우리는 다시 다이빙 포인트로 향했다. 바다는 잔잔했고, 수중 시야 또한 좋았다. 그런데, 어제 다이빙 했던 포인트가 너무 환상적이어서 그럴까? 이날 첫 번째 포인트는 어제 포인트에 비해서 다소 평범한 포인트였다. 그래서 두 번째 다이빙은 어제 갔던 포인트로 다시 갔다.다시 간 포인트는 역시 훌륭했다. 어제 갔던 포인트라서 그런지 주변 지형지물이 친숙한 느낌이다. 형형색색의 산호와 물고기들을 보면서, 때로는 물고기들을 따라 다니면서 보홀 바다속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 말미잘과 흰동가리. 푸른 바다색이 환상적이다 [사진=최환종]점심 식사 후에 세 번째 다이빙을 했는데, 이 포인트는 조류가 약간 있는 포인트다. 먼저 수심 5미터 정도로 내려가서 바위를 붙잡고 일행을 기다렸다. 일행이 모두 내려온 후에는 조류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며 주변 경관을 둘러 보았다.몇 년 전에 필리핀에서 조류를 타면서 다이빙한 이후 처음인데, 그때는 시야가 탁해서 큰 감동을 못느꼈는데, 이번에는 시야도 좋고 조류가 적당해서 다이빙은 물론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도 좋았다.세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배위로 올라오는데 아쉬움이 컸다. 이렇게 좋은 바다를 놓고 떠나야 한다니... (보홀에서의 첫 다이빙은 일정상 이틀로 만족해야 했다.)다음날 배를 타고 다시 세부로 나와서, 세부에서 다이빙을 하루 더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 인천서 직항로 타고 다시 보홀 찾아, 항공료 비쌌지만 배삯은 절약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다이빙 팀이 결성되어서 보홀을 찾았다. 다이빙 팀은 필자 또래의 지인들로 구성되었는데, 필자만 빼고 모두들 최근에 다이빙에 입문한 다이버들이었다.이번에는 인천에서 보홀까지 직항을 이용했고, 인천에서 새벽 2시 반 쯤에 출발, 보홀에는 아침 6시 반 정도에 도착했다. 항공권은 조금 비쌌는데, 인천에서 세부까지 가는 항공료와 세부에서 보홀까지 가는 배삯 등을 합한 금액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보홀(탁빌라란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가니 다이빙 리조트에서 나온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다. 리조트에 도착해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아침식사를 대충하고 바로 바다로 나갔다.그런데, 첫날 수중 시야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지난번에 왔을때는 시야가 좋았는데. 강사에게 물어보니 보홀에서 수중시야가 가장 좋은 시기는 3~6월이라고 한다(우리가 갔을 때는 7월 중순이었다). 다이빙 관련 자료(인터넷이나 월간지 등)와는 차이가 나는 대답이다.게다가 다이빙 기간 중 거의 매일 비가 내렸고 약간의 바람과 파도가 있어서 쾌적한 다이빙을 하기에는 무리인 그런 기상 조건이었다. 다이빙을 다니면서 날씨 복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아무튼 쾌적한 조건은 아니지만 바다속에서 느끼는 절대적인 평안함과 자유, 그리고 바다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즐기며 다이빙에 집중했다. 이번 다이빙은 Balicasac 섬 뿐만 아니라 Momo beach, Doljo beach(Panglao 섬 부근) 등 여러 곳에서 했는데, 기상 상태 때문에 쾌적한 다이빙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다이빙 하기 전 같이 간 지인과 함께 기념촬영. [사진=최환종]다이빙에 빠져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옛날에 어느 나무꾼이 신선들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데 꼭 그런 식이다. 어느덧 다이빙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날은 이번 다이빙 여행 기간 중 가장 기상이 좋은 날이었다. 마지막 날이라도 기상이 좋아 상쾌한 마음으로 다이빙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 귀여운 '니모' 즐기다가 동행한 초심자 놓쳐 부력조절 잘못한 초심자, 다이빙 보트와 충돌 위기 겪어마지막 날, 첫 번째 다이빙은 Momo beach에서 했다. 최대수심 20m, 다이빙 시간 43분, 수온 29도, 수중 시야는 좋았고, ‘개북이’와 ‘니모’도 많이 보였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수중에서 ‘니모’를 보고 있으면 그 귀여운 동작에 시간 가는줄 모른다.잔압계를 보니 공기가 50바 정도 남았길래 안전정지 수심으로 올라가려는데 귀여운 ‘니모’들이 노니는게 눈에 띄었다. 아직 공기가 여유 있어서 초보자 버디는 필리핀 강사에게 맡겨놓고 니모를 보러 갔다. 동영상도 촬영할 겸 해서.이때 수심은 5미터 내외. 니모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안전정지 할 수 있는 수심이다. 그렇게 3~4분 정도 있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주위를 돌아보니 근처에 있어야 할 버디가 안보인다. 강사도 안보이고. 서둘러서 수면으로 올라와서 버디를 찾았다. 필리핀 현지인 강사와 버디를 발견하고는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초보자인 버디는 필자가 니모를 보러 간 사이에 부력조절을 잘 못해서 점점 상승하고 있었고, 근처에서 버디 쪽으로 다이빙 보트 한척이 접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본 강사는 즉시 상승해서 버디를 잡아야 하는데, 버디에게 내려오라고 수신호만 했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다이빙 보트는 버디 근처에서 멈춰 섰다고 하는데... 아무일 없었으니 다행인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그때 필자와 버디는 너무 화가 나서 배위에 올라와서 현지인 강사에게 따지니 얼굴만 숙이고 있을 뿐이다. 잠시 후에 한국인 강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한국인 강사 또한 당황할 뿐이다.잠시 후에 화를 가라 앉히고, 현지인 강사에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안전이 최우선이다.”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리고 이날의 상황이 필자에게도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나도 되뇌었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절대 자만하지 말자 !!!”수면 휴식 후에 다이빙을 두 번 더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장비를 세척하고 잠시 쉬었다가 해가 질 무렵에 다이빙 팀 모두가 해변의 식당으로 갔다. 맥주 한잔과 함께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며칠 동안 다이빙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하는데, 며칠 사이 모두들 다이빙의 고수가 된 느낌이다.다음날 우리는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보홀 바다속을 생각하면서 잠에 빠져 들었다.(다음에 계속)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9-01-09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3) 보홀 다이빙① 그 많은 수중생물은 어디서 왔을까
    필리핀 세부의 작은 섬, 손꼽히는 다이빙 명소 ‘보홀’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스쿠버 다이빙 관련 자료를 검색하면서 “보홀”이라는 지명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보홀”이 어느 나라에 있는 지명인지 잘 몰랐다. 해외 다이빙에 눈을 뜬 이후, 자료를 찾으면서 가장 답답할 때는 스쿠버 다이빙 월간지 등에서 다이빙 관련 지명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인지 잘 모를 때였다. 다이빙 관련 명소를 소개할 때 “이 지명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위치한 다이빙 명소이다”라고 설명하면 초보자에게 아주 좋을텐데... 요즘은 ‘어디’하면 대충 알아듣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세부적으로 자료를 확인한 결과, 보홀(Bohol)은 필리핀 세부(Cebu)의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이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다이빙의 명소이고... 등등. 그럼 가봐야지. 그런데 보홀은 가는 방법이 간단하지가 않았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세부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두 시간정도 동쪽으로 가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길면 지루하고 힘들다. 비행기 여행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고속버스 같이 중간에 휴게소에 내려서 쉴 수도 없고...(작년부터 인천에서 보홀까지 직항이 생겼다.)▲ 갖가지 색상의 물고기떼 [사진=최환종] 지난해 봄, 드디어 다이빙 팀을 구성해서 보홀로 향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부로 가서, 항구 근처의 호텔에서 몇 시간 잠을 자고는 다시 배를 타러 항구로 갔다. 보홀로 가는 배안은 냉방이 너무 잘 되어서 약간 두툼한 봄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보홀에 도착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이빙 강사와 합류해서 곧바로 다이빙 포인트로 향했다. 다이빙 포인트는 보홀 섬의 남서쪽에 있는 작은 섬, ‘발리카삭’에 있는데 이 섬 주변에 있는 다이빙 포인트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포인트라고 한다. 첫 다이빙 포인트 명칭은“Golden garden”. 최대 수심 17.1 m, 다이빙 시간 32분, 수온 28도, 시정은 입수할 때 있었던 약간의 부유물만 제외하면 매우 좋았다.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근처에 거북이가 해초를 뜯고 있는 것이 보인다. 보통은 물속에서 한참 다니다가 거북이를 봤는데, 여기는 들어가자마자 거북이가 있다. 이후 다이빙 하는 내내, 여기저기서 여유롭게 노닐고 있는 거북이를 볼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인 강사가 하는 말이 재미있다. 여기는 거북이가 동네 강아지 같이 하도 많아서 ‘개북이’라고 한단다. 그럼 영어로는 뭐라고 하지??? 아무튼 그 말에 모두들 파안대소했다. 첫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난 후 “여기는 이제까지 내가 가본 곳 중 최고의 다이빙 포인트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보홀 바다 속은 훌륭했는데, 그동안 여러 곳에서 봤던 수중 생물을 한 장소에서 모두 본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마치 수중 생물 종합전시장에 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고, 다이빙 내내 맑고 깨끗한 물속에서 다양하고 예쁜, 형형색색의 수중생물을 보고 있으려니 물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였다. 두 번째 다이빙도 환상적인 수중 환경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다속에서 있었다. ▲ 산호위에 앉아 있는 Frog fish. 산호와 거의 구별이 안된다 [사진=최환종]거북이는 ‘개북이’라 불릴 정도로 많지만, 언제 봐도 반가운 녀석들이고, 처음 보는 Frog fish(이 녀석은 산호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얼핏 봐서는 산호에 붙어 있는 수중 식물 같아 보였다. 강사가 가리켜서 가만히 보니 못생긴 물고기다. 사람이 옆에 가도 도망가지도 않고, 제자리만 지키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산호(어떤 산호 군락은 여러 가지 색상의 보석을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작고 귀여운 니모(Anemone fish), Trumpet fish, 무리를 지어 다니는 노란색 물고기 등등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용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적당히 칼로리를 소모해서 출출하기도 하지만,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깨끗한 하늘과 맑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동료 다이버들과 같이 하는 점심 식사는 ‘모든 것이 훌륭하다’는 표현 이외에는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 같다. 수면 휴식 중에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바다를 바라본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바다에서 용궁을 보고, 또 맑고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수면휴식 중에 바라 본 다이빙 포인트 주변의 섬과 바다 [사진=최환종] 세 번의 다이빙을 모두 마치고 숙소로 왔다. 샤워를 하는데, 수압이 상당히 약하다. 수압이 약한 호텔에 갈 때마다 다음에는 수압이 센 호텔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출이 더 많아야 하겠지만. 해가 질 때쯤 해서 해변의 식당가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약간의 해산물과 감자튀김, 맥주 한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이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날따라 모기가 많다. 모기향을 피우면 좋겠는데, 모기향은 없고... 새벽부터 피곤했지만, 훌륭한 바다속 풍경을 얘기하면서 보홀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저물었다. (다음에 계속)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12-19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2) 팔라우 다이빙④ 밀키웨이와 세븐티 아일랜드를 조망한 꿈같은 48분
    다이빙 못하게 된 지인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신들의 정원'을 조망[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팔라우에서 넷째 날이 밝았다. 계획대로라면 오늘이 팔라우 다이빙 마지막 날이다. 그러나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필자 혼자 다이빙을 즐기기에 미안해서 오늘은 지인과 같이 공중에서 팔라우를 돌아보기로 했다.호텔 프런트에서 비행기로 공중을 돌아볼 상품을 찾아서 항공사에 예약을 했다. 다만, 팔라우에서는 필자가 미국 연방 항공국(FAA)의 조종사 자격증으로 비행기를 빌릴 수 없으므로 각자 관광객 요금을 내고 공중 관광을 즐겨야 했다. 1인당 요금이 꽤 비싸지만,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팔라우를 공중에서 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아침 식사 후에 항공사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항공사로 갔다. Cessna-182 항공기를 여러 대 보유하고 있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작은 항공사다.비행코스는 여러 개가 있는데, 하나는 ‘German Channel’까지 가서 다시 돌아오는 코스고, 다른 하나는 가장 남쪽에 있는 ‘펠렐리우 섬’까지 가서 돌아보고 오는 코스다. ‘펠렐리우 섬’은 2차 대전때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였고, ‘German Channel’ 남쪽에 위치해 있다.우리는 펠렐리우까지는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German Channel’까지 가서 다시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다.즉, 공항에서 이륙 후 남서쪽으로 비행해서 ‘German Channel’을 지난 후 다시 공항으로 돌아오는 경로(약 40분 소요)인데, 우리가 다이빙했던 포인트는 물론이고, 가보지 못한 ‘Jelly fish Lake(최근 알 수 없는 이유로 해파리가 집단 폐사해서 다이빙 금지 구역이 되었다고 한다)’, ‘Seventy Islands’ 등을 공중에서 볼 수 있는 경로였다.비행할 때 항공사에서 제안한 옵션은 조종석 좌우측 문을 떼어내고 비행하자는 것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바깥 풍경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바깥 바람을 피부로 느껴보자는 취지라는데, 추가 요금을 내는 조건이다.물론 필자는 거절했다. 안전상 도움이 될 것이 없었고, 굳이 좌우측 문을 떼어내면서까지 비행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래서 “나는 예비역 공군 장교인데, 안전상 내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며 정중히 거절했다.젊은 미국인 조종사가 조종을 했다. 보통 항공기를 빌려서 비행할 때 필자가 좌측석에 앉아서 비행을 하는데, 이날은 지인에게 비행기 조종을 잠시나마 경험하게 하려고 우측석에 앉게 하고 필자는 뒤에서 경치 감상과 사진 촬영을 했다. (좌우로 두 명의 조종사가 앉게 되어 있는 조종석에서, ‘좌측석’은 기장이 앉는 자리이고, 우측석은 부기장이 앉는 자리이다)날씨는 쾌청해서 비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기상예보는 돌아올 때 쯤 해서 약간의 강수가 예보되었는데, 비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 공중에서 바라본 Milky Way [사진=최환종]난생 처음 조종간 잡은 지인, 수평-선회 비행 성공적으로 수행조비행기가 이륙하고 어느 정도 고도가 되자 공항 주변 마을과 주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 다이빙 할때 보트에 탑승했던 항구 등을 보면서 남쪽으로 비행했다.공중에서 보는 풍경은 눈으로 보는 그 자체가 ‘그림’이다. 필자가 아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색상의 맑고 푸른 바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계속 펼쳐진다. 여기서는 매일 비행을 해도 지겹지 않을 것 같다.Milky way 상공에서는 한 바퀴 선회 비행을 했다. 오늘 다이빙 센터에서는 우리를 제외한 다른 다이버들이 밀키웨이에 가서 스노클링과 머드팩을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비행하고 있는 시간과 다이빙 센터에서 밀키웨이에 갔을 시간이 비슷할 거 같아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오후에 다이빙 강사에게 물어보니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우리가 비행했던 비행기였을까?)‘German Channel’ 까지 가는 동안 조종사에게 부탁을 해서 지인이 잠시 조종간을 잡도록 했다. 물론 잠깐이지만 수평, 선회 비행을 하도록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했다. 착륙 후에 지인에게 ‘조종간을 처음 잡았다는데, 감각이 대단하다’라고 했더니 지인은 좋으면서도 수줍은 표정이다.비행하면서 우리가 다이빙했던 포인트들을 짚어 보았다. 조종사는 여기서 오랫동안 비행을 해서 그런지 다이빙 포인트도 꽤 알고 있었다. 다이빙했던 포인트를 공중에서 다시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Jelly fish Lake’ 상공에 이르러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Jelly fish Lake’에는 오랫동안 천적이 없어서 촉수에 독이 없게 된 해파리가 살았다는데, 접근 금지가 되었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에 공중에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 공중에서 바라 본 Seventy Islands [사진=최환종]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빗방울 속에서 '공중 여행' 마무리공중에서 보는 팔라우는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또 이런 풍경을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두고자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비행기는 공항에 접근하고 있었다. 항구가 보이고 호텔들이 보이더니, 저 멀리 활주로가 보인다. 활주로에 접근할 즈음해서 우리의 팔라우 여행이 끝나가는 것을 아쉽다고 하는 듯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윽고 비행기는 부드럽게 활주로에 내렸다. 꿈같은 48분간의 비행이었다.다음날 새벽, 우리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수중 시정이 조금 좋지 않았고, 새로 구입한 카메라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다이버들의 성지’, ‘신들의 정원’에서 보낸 시간은 잊지 못할 귀중한 시간이었다.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필자는 팔라우에서의 다이빙을 생각하면서, 다음에 더욱 멋진 다이빙을 기대하면서,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다음에 계속)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12-06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2) 팔라우 다이빙③ 거만한 상어 그리고 나폴레옹피쉬와 함께 춤을
     난파선 포인트는 볼거리 적지만 빠지기 어려운 단체행동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팔라우에서 셋째 날이 밝았다. 아침 식사 후에 지인은 호텔에 남고 다른 다이버들과 같이 다이빙 포인트로 향했다. 첫 번째 포인트는 난파선 포인트다. 2차 대전 말기에 침몰한 일본 군함이라고 한다. 최대 수심 27.2 m, 다이빙 시간은 38분, 수온은 29도, 수중 시정은 보통 이하였고, 부유물이 많았다. 하강하면서 먼저 눈에 띄인 것은 난파선의 흉물스런 마스트였다. 난파선 주변에는 약간의 산호와 쏠배감팽(Lion Fish) 정도만 눈에 띄였을 뿐 그다지 볼만한 수중 생물은 없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난파선 다이빙은 별로 즐겁지 않다. 단체로 가는 다이빙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먹이 채가는 상어들 처음 목격, 자기보다 큰 다이버들과는 거리 둬 두 번째 포인트는 ‘Virgin Blue Hole’. 최대 수심 31.5 m, 다이빙 시간은 37분, 수온은 28도, 수중 시정은 양호했다. 둘째 날 갔던 ‘Blue Hole’과 비슷한 느낌의 포인트다. 바닥까지 내려가서 위를 바라보면 마치 우물 입구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 Virgin Blue Hole 바닥에서 올려다 본 입구 [사진=최환종]   위를 바라볼 때 수심이 깊어짐에 따라 주변의 푸른 빛이 달라지니 신비감마저 든다. 하강하면서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을 볼 수 있었고, 바닥으로 내려갔는데, 저 멀리 뭔가 움직인다. 옆에 있던 다이버가 수중 랜턴을 비춰보니 작은 상어다. 역시 사람에게 다가오지 않고 저 멀리 사라진다. 이때는 수중 시정이 양호해서 상어를 잘 볼 수 있었다. 세 번째 포인트는 ‘Blue Corner’. 최대 수심 16.1 m, 다이빙 시간은 36분, 수온은 29도. ‘Virgin Blue Hole’에 이어 수중 시정은 양호했다. 여기서는 입수하기 전부터 다이빙 보트 주위를 상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상어 크기는 사람보다 조금 작은 정도로 보였고, 보트 선장이 생선을 던지니까 그것을 먹으려고 상어가 달려들었다. 상어가 먹이를 채가는 장면은 처음 봤다. 입수하면서 보니 상어들이 저만큼 비켜간다. 자신보다 큰 물체에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 Virgin Blue Hole 바닥에 있는 대왕조개 [사진=최환종]   상어를 관찰하기 위하여 상어들이 다니는 지역에 갔다. 조류가 세서 조류걸이를 하고 상어를 관찰했는데, 조류에 움직이는 몸을 안정시키랴, 상어 구경하랴, 촬영하랴,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려니 촬영이 원만하지 않았다. 상어들은 다이버들과 거리를 두고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 상어가 다이버들과 거리를 두고 오가고 있고, 조명이 충분치 않으니 선명한 영상을 얻기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봐줄만한 영상을 얻었다. 상어들은 거만하다고 보일 정도로 아주 여유있고 무게있는 자세로 유유히 바다속을 다니고 있었다. 사이판에서 거대한 물고기 떼를 봤을 때 느낀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거대한 농어 나폴레오 피쉬, 크고 험악한 외모지만 온순 상어와 작별하고 출수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제법 큰 물체가 다가온다. 가까이에서 보니 다이빙 잡지에서 많이 봤던 바로 그 녀석, ‘나폴레옹 피쉬’다. 상어를 본 감동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이 녀석을 보게 되었다.   ▲ 나폴레옹 피쉬 [사진=최환종]   나폴레옹 피쉬는 농어목 놀래기과에 속하는 어류로써, 놀래기 어류중에서도 가장 큰 물고기라고 한다. 이 물고기가 성장하게 되면 수컷의 경우 머리가 툭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래서 ‘Humphead 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고, 이 모습이 마치 나폴레옹의 모자같이 생겼다고 해서 ’나폴레옹 피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험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무척 온순해서 사람을 잘 따른다고 하는데, 어느 기사를 보니 다이버와 친해지면 다이버 뒤를 동네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닌다고 한다. 이녀석은 아직 우리와 친하지 않은가 보다. 거리를 두고 유유히 다닌다. 나폴레옹 피쉬를 뒤로 하고, 팔라우에서의 마지막 다이빙을 아쉬워하며 보트위로 올라왔다. 보트 위에서 팔라우의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을 보면서, 신선한 바다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항구로 돌아왔다. (다음에 계속)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11-15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2) 팔라우 다이빙② 발살바하고 다이버의 특권 누리다
     둘째 날 다이빙 포인트는 ‘Blue Hole’. 발살바의 소중함 깨달아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둘째 날, 다른 다이버들과 다이빙 포인트로 향했다. 첫 번째 포인트는 ‘Blue Hole’. 바다 한가운데 우물 같이 깊게 파여진 곳인데, 나중에 공중에서 보니 그곳이 주변에 비해서 유난히 짙은 파란 색이다. 최대 수심 28 m, 다이빙 시간 31분, 수온 29도, 시정은 어제보다는 한결 좋았다. 이 포인트는 입수해서 우물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바닥까지 하강을 하는데, 다이버들이 하강하면서 수면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을 촬영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강을 시작하면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필자는 다이빙할 때 가끔 수심 3 m 정도에서 한쪽 귀가 발살바가 잘 안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금방 해소되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이날 첫 번째 다이빙때는 발살바에 시간이 걸렸다. 귀중한 공기는 자꾸 소모되었고, 따라서 다이빙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압력 평형이 이루어진 후에는 물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유영을 즐겼다.   ▲ Blue Hole에서 하강중인 다이버들 [사진=최환종] 명경지수를 즐기는 시간은 다이버의 특권 두 번째 포인트는 ‘Blue Corner“. 최대 수심 23.3 m, 다이빙 시간 39분, 수온 29도, 시정은 무척 양호했다. 팔라우에 와서 처음으로 접하는 깨끗하고 맑은 바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거북이와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다이버들을 반겨준다. 그동안 필자는 맑고 깨끗하고 수중 시정이 정말 양호한 ‘명경지수’와 같은 바다를 여러 곳에서 경험했기에 웬만한 수중 시정은 필자 마음에 들기 어렵다. ‘명경지수’와 같은 바다에서 다이빙하는 것은 다이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 필자를 바라보고 있는 바다 거북 [사진=최환종] 가오리와 흰동가리에 이어 상어 출현 세 번째 포인트는 ‘German Channel’. 최대 수심 18.2 m, 다이빙 시간 39분, 수온 29도, 시정은 비교적 양호했다. 여기서도 가오리, 흰동가리 등 각양각색의 물고기들과 바다속 풍경이 나를 반겨준다. 특히 상어가 가까이에서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하와이에서 다이빙할 때 바위 밑에서 잠자고 있던 어린 White tip 상어를 본 이후로 처음 보는 상어다. 여기서 본 상어는 제법 커 보였다. 나중에 다이빙 강사 말을 들어보면 사람보다 크지는 않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보면 오히려 피한다고 하는데, 상어 자신보다 크면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다에서 조난당했을 때 상어에게서 공격을 당하지 않으려면 발목에 넥타이 등을 묶어서 상어보다 크게(길게) 보여야 한다고 교육받은 것이 생각났다. 강사가 자기 뒤편에 지나가는 상어와 같이 보이게 촬영해 달라고 해서 촬영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시정이 좋지 않고 상어가 꽤 멀리 있어서 선명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물고기들. 노란색이 눈에 띈다. [사진=최환종] 부상으로 다이빙 못하게 된 지인 위해 '공중' 팔라우 감상을 선택 둘째 날은 첫날 보다는 양호한 수중 시정으로 인하여 쾌적한 다이빙을 즐길수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다이빙 포인트 이름이 ‘German Channel’이다. 왜 팔라우에 ‘German’이란 지명이 있을까? 팔라우의 역사를 간략히 보면, 태평양의 여러 작은 섬나라들이 그렇듯 팔라우도 서구열강의 영향 아래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지화를 시작으로 팔라우는 독일, 일본이 약 50년간 점령했었는데, 독일이 팔라우를 점령했던 관계로 이런 명칭이 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팔라우는 필리핀에서 동쪽, 괌에서 남서쪽에 있는 작은 섬나라로써, 공식명칭은 팔라우 공화국(Republic of Palau)이고, 인구는 21,000여 명이다.) 다이빙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지인은 병원 진료를 마치고 숙소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동네 병원에 가서 두 시간 기다렸다가 10 여분 진료받고 왔다는데, 결론은 당분간 ‘다이빙 금지’라고 한다. 지인도 황당하겠지만, 필자도 답답한 심정이었다. 몇 달 동안 계획을 세우고 왔는데, 한사람이 부상을 당해서 다이빙을 못하게 되었으니. 물론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 흰동가리 무리 [사진=최환종] 이날 저녁, 우리는 시내 식당에 나가서 지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다이빙 얘기,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필자 혼자 다이빙을 계속하기에는 미안해서, 다이빙 이외에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서로 상의한 끝에 셋째 날까지는 필자만 다이빙하고, 넷째 날은 다이빙은 취소하고 팔라우를 공중에서 돌아보기로 했다. 필자도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   ■ 최환종 (崔桓種)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10-30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2) 팔라우 다이빙① ‘신들의 바다 정원’에서 배운 다이버의 깨알상식
    '신들의 바당 정원'이라는 닉네임 가진 남태평양의 소국 팔라우환상적인 바다를 기대한 '그라스랜드'포인트, 봄철이라 부유물 많아 곤혹(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2년 전에 스쿠버 다이빙 버킷 리스트 “남태평양 스쿠버 다이빙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니, ‘팔라우(Palau)’가 눈에 띄었다. “신들의 바다 정원”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팔라우는 전 세계의 다이버들에게 성지로 여겨진다고 한다. 얼마나 환상적이기에 그런 수식어가 따라 다닐까 하는 생각에 버킷 리스트에 포함시켰다.그리고 지난 봄, 드디어 지인 한명과 같이 팔라우로 다이빙을 가게 되었다. 고맙게도 지인이 여행사를 통해서 예약을 모두 진행해서 필자는 그저 다이빙 장비만 챙겨서 가면 되었다.일요일 저녁에 인천공항에서 출발, 새벽에 팔라우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은 약 5시간. 다이빙 리조트에 도착해서는 몇 시간 잠을 자고, 첫 다이빙에 나섰는데, 역시 새벽에 도착해서 아침 일찍 나가는 다이빙은 피곤하다.첫 날, 첫 번째 다이빙은 ‘그라스 랜드’라고 불리는 포인트로 갔다. 보트를 타고 50분 정도 걸려서 포인트에 도착했고, 이동 시간 50분이 조금 지루했다. 아마 이제까지 다이빙 하면서 가장 긴 시간을 이동한 것 같다.보트도 작아서 앉아 있기도 불편하고. 또 작년 여름에 다이빙을 하고는 꽤 오랜만에 다이빙을 하려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크기가 작고 다루기 쉬운 Gopro 카메라 대신에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다루어야 할 버튼도 많은 올림푸스 TG-5를 들고 바다에 들어가는데 그것도 부자연스러웠다.입수 후 하강을 시작하면서 아래를 보는데, 수중 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입수 전 브리핑에서 강사가 요즘 수중 시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다이빙은 최대 수심 23.6m, 다이빙 시간은 37분, 수온 29도, 전반적인 수중 시정은 보통 이하였고, 부유물이 많았다.환상적인 수중환경을 보러 팔라우에 왔는데 사정이 이러니... 게다가 올림푸스 TG-5가 수중 촬영에 최적화되었다는 말을 듣고 구입 후 팔라우에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는데, 수중 시정이 썩 좋지 않아 깨끗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 다이빙 포인트 주변의 섬과 바다와 하늘과 구름 [사진=최환종] 팔라우 바다 사정은 12월~2월이 최상급첫 번째 다이빙 후, 강사에게 팔라우의 바다속 시정이 가장 좋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12월에서 2월(최대 3월 중순) 사이가 가장 최적기라고 한다. 다이빙 관련 자료(인터넷이나 월간지 등)에서는 ‘12월에서 4월까지가 최적이라고 하더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런 기사를 봤다면서, 왜 그런 기사가 게재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인터넷이나 월간지에 게재되어 있는 다이빙 관련 자료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시정이 좋지 않으면 다이빙의 만족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필자가 다이빙을 좋아하는 이유가 명경지수와 같은 맑고 투명한 물속에서 평화로움과 여유를 느끼는 것인데. 아무튼, 비록 시정이 생각보다 좋지는 않지만 만족스러운 다이빙을 하고자 다이빙에 집중했다.둘째 다이빙 포인트 '시야스 터널'에선 각양각색의 물고기와 '가든 일'을 즐겨두 번째 다이빙 포인트는 ‘시야스 터널’. 최대 수심 33.9m, 다이빙 시간은 32분, 수온 28도, 전반적인 수중 시정은 ‘보통 이하’. 세 번째 다이빙 포인트는 ‘울롱 채널’. 최대 수심 18.7m, 다이빙 시간은 37분, 수온 28도, 전반적인 수중 시정은 역시 ‘보통 이하’였다.수중 시정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잔잔한 바다와 각양각색의 물고기, 바다 거북 등은 필자에게 바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가든 일(Garden eel)을 보았는데, 이번처럼 가까이 가서 보기는 처음이었다.Garden eel은 뱀장어목 붕장어과의 동물로써, 모랫바닥에 파고들어 꼬리를 모래 구멍에 넣은 상태에서 머리와 몸을 밖으로 길게 빼고 살아가는데, 머리만 내놓고 지나가는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산다고 한다.포식자가 나타나거나 위험을 느끼면 구멍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고, 먹이를 먹을 때조차 구멍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동영상에 Garden eel이 있는데, 영상이 흐려서 식별하기가 조금 어렵다) ▲ 상승중에 갑자기 나타난 물고기떼 [사진=최환종] 수중촬영 영상 결과가 미흡, 새로운 카메라 사용법은 다이버의 필수지식오랜만에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고,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숙소에 와서 장비를 세척하고, 방에서 수중촬영 결과를 확인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영상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수중 시정이 썩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아직 새로운 카메라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카메라 기능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히 공부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동안 Gopro 카메라로 수중 촬영을 많이 해봤기에 너무 자만했다. 오히려 지인이 새로 장만한 Gopro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이 더 깨끗하고 볼 만했다.수심 30m까지 급하강했던 지인은 눈 부상당해 다이빙 일정 포기한편, 같이 간 지인이 눈에 부상을 입었다. 지인은 첫 번째 다이빙에서 물에 들어가자마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수심 30m 정도까지 순식간에 하강을 했다고 한다. 이때 눈 부상을 우려해서 마스크를 벗었고, 다이빙을 마치고 보니 처음에는 눈이 약간 충혈된 정도라 걱정을 안했다고 한다.그러나 저녁이 되니까 눈의 실핏줄이 터진 것이 점점 확대되어서 눈의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태에서는 다이빙을 진행할 수가 없다. 결국 지인은 귀국할 때까지 다이빙은 못하고 산책과 독서 등으로 지냈다.둘째 날, 아침 식사를 하고 다른 다이버들과 다이빙 포인트로 향했다. 지인은 현지 병원에 간다고 했다. 지인을 호텔에 남겨놓고 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팔라우가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10-12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1) 잠수복이 필요없는 괌에서 미군 중령과 다이빙
    저렴한 항공권 포착해, 괌에 사는 친한 미군 중령에게 연락(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스쿠버 다이빙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던 그해 가을에는 Guam(괌)을 가게 되었다. 10여년 전부터 업무상 서로 잘 알고 있었고, 필자를 잘 따르던 미군 장교(필자보다 10여 년 젊은 장교로서, 이름은 Jeffery Slown. 부인이 한국인이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꽤 깊다)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괌으로 가면서 기회가 되면 꼭 괌을 방문해 달라고 했었고, 괌에서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했으니 괌에서 다이빙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던 터라 적절한 시기를 보고 있었다.그러던 중 마침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괌으로 가는 항공권이 무척 저렴하게 나온 것을 발견했고, Slown 중령과 연락을 해서 방문 날짜를 정했다. 비행기는 오전에 인천에서 출발, 오후에 괌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Slown 중령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의 1년 반 만에 만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타지에 갔을 때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흐뭇하고 마음이 푸근한가!필자가 예약한 호텔까지 Slown 중령이 자기 차로 안내해 주었고 짐을 풀고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맥주 한잔하면서 그동안 지내온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날, 다이빙 센터에 가서 사전에 Slown 중령이 예약해 놓은 BCD와 납벨트, 충전된 공기통을 빌려서 Slown 중령 차로 다이빙 포인트로 갔다.괌의 중서부 해안 두 곳에서 다이빙, 따뜻한 수온 덕분에 잠수복 없이 입수첫날은 괌의 중서부 해안 두 곳에서 다이빙을 했다. 수중 시야는 첫 번째 포인트는 좋았는데, 두 번째 포인트는 바닥으로 갈수록 좋지 않았다. 입수하기 전에 Slown 중령이 수중 지형에 대한 사전 브리핑을 자세하게 해서, 필자는 지형과 나침판을 보면서 무난히 수중 항법을 할 수 있었다.물론 Slown 중령이 몇 번 다이빙을 했던 포인트라서 수중에서 방향을 잘 잡고 필자를 안내했기도 했지만. 첫번째 포인트에서는 해안에서 먼 바다로 나갈 때는 우리의 왼쪽으로 산호 절벽을 보면서 나갔고, 입수 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오른쪽으로 산호 절벽을 보면서 돌아왔다. 첫 다이빙은 최대수심 24.7m, 다이빙 시간 32분, 수온 29도였다.첫 번째 포인트에서 특징은 산호 색상이 필리핀 같이 화려하지 않고 어두운 색의 산호가 주로 보였다는 것이다. 산호 색상 면에서는 오아후 섬에서 보았던 그런 느낌이었다. 하나우마 베이 근처에서 다이빙 할 때도 화려한 색상의 산호는 거의 못보았고, 어두운 색상의 산호가 주로 있었다.거북이가 산호 사이에서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북이 등 색깔이 산호 색깔과 비슷해서 처음에는 식별을 잘 못했는데, 주위 환경에 익숙해지니 여러 마리의 거북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조류가 약간 있어서 한 장소에서 거북이를 오래동안 관찰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괌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다이빙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한편, 괌에서는 다이빙할 때 잠수복을 입지 않았다. Slown 중령 말이 여기서는 수온이 따뜻해서 보통 잠수복 대신에 수영복만 입고 다이빙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기에 수영복만 입고 다이빙 했다. 대신에 산호에 피부가 긁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필리핀도 수온이 따뜻했지만 산호에 긁힐 경우를 대비해서 잠수복을 입었다.) ▲ 첫번째 다이빙 후 필자와 Slown 중령 ⓒ뉴스투데이 수중관망대로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관광객들과 눈을 맞추기도첫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두 번째 포인트로 향했다. 꽤 오래전에 추락한 작은 비행기가 있는 포인트라고 했다. 최대 수심은 28.5m, 다이빙 시간 26분, 수온 29도였다. 그런데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시야가 점점 불량해져서 추락한 비행기 근처에 가서는 비행기 형태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크기나 형태를 보아서 ‘수상 이착륙 연락기’ 같았다. 비행기 주위를 겨우 둘러보고는 시야가 비교적 양호한 위로 올라왔다. 이 포인트는 하강할 때  중간 지점에 있는 큰 부채산호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포인트였다.첫날은 이렇게 두 번의 다이빙을 마치고, 저녁에는 이런저런 세상사는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했다. Slown 중령 말이 아마도 내년에는 다시 한국에서 근무할 것 같다고 했다.둘째날 역시 괌 중서부 해안에서 다이빙을 했는데, 이곳은 2차 대전 당시 폭탄이 떨어져서 물속에 큰 Hole이 형성된 곳이라고 한다. 명칭은 “PITI Bomb holes point”. 해안에서 접근하기 좋고 수심이 깊지 않아 초보자 교육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한다. 초보자 교육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해서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두 번 다이빙을 했는데, 최대 수심은 9.8m, 다이빙 시간은 각각 43분, 33분, 수온은 29도였다. 시야는 보통이었고, 해안에서 조금 멀리 나가니 사람들이 물속을 볼 수 있는 수중 관망대 같은 것이 보였다. 관광객은 그곳에서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었고 우리는 물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마도 서로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수중 관망대 근처에는 제법 산호 군락이 발달해 있었고, 그 주위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다니고 있었다. 편안한 다이빙 포인트였다. 바다속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물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태평양에서 제일 맛있는' 햄버거 즐기고 한국행 비행기 올라괌 여행 마지막 날, 공항 가기 전에 Slown 중령이 “태평양에서 제일 맛있다는 햄버거 가게”로 안내했다. 작은 가게인데,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드디어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다. 크기부터 예사롭지 않은 것이 “저렇게 큰 햄버거를 다 먹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크고, 맛 또한 최고였다. 다음에 괌에 가면 다시 가고 싶은 인상적인 햄버거 가게였다.“태평양에서 제일 맛있다는 햄버거”를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짧지만 즐거웠던 괌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공항에서 “내년에 한국에서 보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작별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그리고 일정상 괌에서 충분히 다이빙을 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다이빙을 기약하며! (Slown 중령은 그 다음 해에 한국으로 다시 부임해서 최근까지 근무했고, 얼마 전에 한국의 00기지에서 전역식을 했다.한국에 부임해서는 필자가 일하고 있는 지역에서 근무한 관계로 자주 만났는데, 조만간 한국을 떠난다고 하니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국적은 서로 다르나 그동안 공동의 임무를 수행한 연합군 장교로서, 업무 파트너이자 때로는 형제같이 지낸 사이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 전반부 동영상은 괌에서의 다이빙 동영상이고, 후반부는 지난번에 언급했는데, 작년에 사이판 라우라우 비치에서 다이빙할 때 보았던 “Fish ball” 영상이다.(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9-24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0) 사이판에서 다이빙⑤ B-29폭격기 잔해 속의 47분
    세계 2차대전 당시 B-29폭격기가 추락한 지점에서 보트 다이빙(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Eagle Ray 포인트 다이빙을 마치고, 수면 휴식과 점심 식사를 한 후, 다시 보트를 타고 B-29 포인트로 이동했다. 아침에 다이빙을 나설 때, 친구와 필자는 오늘 다이빙은 두 번만 하기로 했었는데, 다이빙 마지막 날이고 날씨도 좋아 보트 다이빙을 한번 더 하기로 했다. 그리고 간 곳이 B-29 포인트이다. 이 포인트는 2차 대전 당시 B-29 폭격기가 추락한 지점이다.친구는 다이빙을 시작한 이래 가장 안정된 자세로 입수했다. 그리고 우리는 강사의 안내에 따라 B-29 잔해가 있는 지점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각과는 달리 대형 프로펠러 두 개, 약간 남겨진 동체와 날개, 계기판을 포함한 조종석 등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 잔해가 2차 대전 당시 하늘을 주름잡았던 B-29 라니...조종석은 조종사 좌석과 비행 계기판이 형태만 갖추고 있었다. 필자는 2차 대전때 비행했던 이 비행기의 계기판을 둘러보면서 그 당시의 조종사들은 이러한 계기를 가지고 어떻게 비행을 했을까 잠시 생각했다.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강사가 손짓을 한다. 가보니 B-29에 장착되었음직한 기관총의 실탄을 보여준다. 크기와 형태를 봐서 12.7mm 탄(彈, Caliber 50 기관총탄)인데, 나중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결과 B-29는 자체 방어용으로 구경(Caliber) 50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Caliber 50의 의미는 구경이 0.5인치, 즉 구경이 12.7 mm 이라는 뜻이다. 50 미리 기관총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까지 바다속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음에 잠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B-29 잔해 근처에 있던 12.7mm탄 B-29잔해 주변에 다양한 어종은 없지만, 최고 품질의 사진 찍어수심 깊지 않아 긴 시간 동안 다이빙 즐길 수 있어B-29 잔해 주변에는 난파선 같이 다양한 어종은 없었다. 아마도 대형 난파선 같이 어류들이 둥지를 틀만한 적당한 곳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다만 근처를 다니며 작은 물고기와 몇몇 수중생물을 관찰할 수 있었고, 수심이 깊지 않아서(최대 8.3 m, 평균 6.5 m) 비교적 오랜 시간동안 다이빙을 즐겼다. (다이빙 시간 47분)이 지점에서 다이빙하면서 얻은 또 다른 소득은 수중 촬영을 하면서 올림푸스 TG-5의 수중 접사 모드를 많이 연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 날 다이빙 때는 하우징 렌즈에 습기가 서려서 제대로 된 사진을 촬영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날은 조명(햇빛, 수중 라이트), 조류, 하우징 렌즈 상태도 모두 양호해서 사진 촬영하기에 좋았다. 물론 아직 누구에게 보여주며 자랑할 실력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촬영한 사진중 비교적 좋은 품질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 늘 한쌍으로 다닌다는 물고기,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한편, 강사는 사이판에서 20여년간 다이빙을 했던 만큼 수중환경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양한 수중 생물(특히 엄지 손톱만큼 작은 투명한 새우, 게 등등)을 찾아서 보여줄 때는 바다속 어류들의 집주소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또 한가지, 강사의 사진 실력이 보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강사의 카메라는 조금 오래된 모델이고 별도의 조명장치도 없는데도, 몇몇 사진을 보면 순간포착은 물론 피사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오랫동안 바다에서 다이빙하면서 촬영한 경험도 무시 못하겠지만, 고가의 촬영장비도 없이 훌륭한 사진을 촬영하는 강사의 사진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아무튼, 이 강사와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다이빙을 하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다이버를 배려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강사라고 생각한다.그리고, 같이 동행한 친구는 첫날과는 확연히 달라진 자세로 바다속에서 다이빙을 즐기고 있었다. 가끔은 필자의 카메라를 받아서 사진을 촬영하는 여유도 보여주었다. 이제 웬만큼 수중활동에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물속에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며 유영하는 동안 어느새 공기가 30바 이하로 떨어졌다. 사이판에서의 다이빙이 끝나감을 아쉬워하며 안전정지 준비를 했다. ▲ 안전정지중인 친구와 강사 필자와 친구, 2명의 남자가 사이판에서 보낸 열흘은 '진정한 휴식' 안전정지를 마친 후, 대기 중이던 보트 위로 올라와서 스쿠버 장비를 벗었다. 그리고 친구와 강사, 필자 모두 다이빙을 즐겁게, 무사히 마쳤다는 의미의 악수를 나누었다. 바다는 오늘따라 유난히 맑고 푸르게 보였다. 사이판을 기억하라는 듯이.특히, 친구는 오늘 다이빙을 하면서 수중환경에 매우 잘 적응했음을 만족스럽게 느낀 것 같았고, 필자도 이제는 다이빙하러 갈 때 동행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는 사이판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친구와의 여행! 남자 둘이서 여행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친구들은 대부분 ‘매일 술이나 마시겠지’ 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그러나 열흘간의 여행은 매우 건전했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시간이었다. 친구와 필자는 이번 열흘간의 여행이 진정한 휴식을 취한, 심신의 갱신을 도모한, 값지고 흐뭇한 여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이런 기회를 만들 것이다.인천공항에 도착후 공항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친구와 필자는 다음 여행과 다이빙을 기약하면서 헤어졌다. 사이판에서의 멋진 다이빙을 생각하면서.(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9-18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0) 사이판에서 다이빙④ 화려한 열대 물고기와 육중한 매가오리를 함께 즐겨
    두 번째 다이빙 마치고 사이판 관광, 2차대전 당시 격전지 타포차우산 방문(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두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다음날은 또 자동차를 빌려서 사이판 섬을 한바퀴 둘러봤다. 이날은 사이판 섬에서 가장 높은 ‘타포차우’산에 올라갔다. 고도는 약 500미터. 정상에 오르니 구름이 많이 끼어 있어서 사이판이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2차 대전 당시 사이판은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당시 미군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가장 가까운 위치라 비행장을 건설하기에 알맞았다. 따라서 당시 사이판을 두고 미국과 일본군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타포차우산 역시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점령하려는 양측의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쉽게 올라갔지만, 군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당시 공격하던 미군이나 방어하던 일본군이나 그 지형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잠시 생각에 빠졌다.잠시 후에 북쪽을 제외하고는 구름이 걷혀서 사이판 섬을 잘 볼 수 있었다. 섬 전체가 한 손 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친구와 같이 정상에 서서 사이판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다이빙 포인트나 마을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사이판의 맑은 공기와 푸른 바다를 한껏 가슴에 담아두고 산을 내려왔다. ▲ 다이빙 나가기 전 보트 위에서 친구(왼쪽)와 필자 [사진=최환종] 기부금 내고 들어간 사이판역사박물관서 원주민 풍습 배워사이판 체류 기간 중 다이빙은 3일만 했다. 필자는 매일 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아직 초보라 매일 하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스케줄을 바꾸면서 지냈는데, 하루는 사이판 역사박물관을 가봤다. 여행을 가면 그곳의 역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생각이다. 관광용 지도를 보면서 물어물어 겨우 갔는데, 처음에 가니 문이 닫혀 있었다.한 30분 정도 인근 지역을 구경하다가 혹시나 하고 가보니 문이 열려있다. 입장료는 아니고 기부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기에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들어갔다. 그곳 직원이 우리한테 친절하게 전시 내용을 설명해준 덕분에 2차 대전 전후의 사이판 상황과 그 이전의 사이판 원주민 풍습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사이판에서 세 번째 다이빙은 보트 다이빙 선택몸길이 180센티인 매가오리 가족의 유영은 감동적사이판에서의 세 번째 다이빙은 서쪽 해안에서 보트 다이빙을 했다. 기상 상태 때문에 비치 다이빙은 안되고 보트 다이빙만 가용하다고 한다. 다이빙은 난파선 포인트, Eagle Ray(매가오리) 포인트, B-29 잔해 포인트 등 세 군데에서 했다. 컨디션을 회복한 친구는 사이판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다이빙을 준비하면서 첫 날보다 향상된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자신감에 차 있었다.세 번째 다이빙한 날은 오랜만에 해가 쨍쨍한 날이었다. 사이판에 와서 절반은 구름이 끼고 비가 흩날리는 날이었다. 처음에는 흐린 날씨가 싫었는데, 막상 해가 반짝 뜨니 햇빛이 뜨거웠다. 비로소 흐린 날이 좋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반면에 사진은 아주 상쾌한 색상으로 잘 나왔다. ▲ 난파선 주변의 다양한 물고기들 난파선 포인트는 수중 시정이 매우 양호했고, 난파선 주위로 각양 각색의 물고기들이 많이 지나 다녔다. 수중 시정도 좋고, 조류도 없고, 다이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친구도 본인의 자신감 이상으로 물속을 날아(?) 다니고 있었다. 벌써 중성부력에 익숙해졌나 싶을 정도였다.난파선 포인트를 마치고 수면 휴식 후에, Eagle Ray(매가오리) 포인트로 이동했다. 이곳은 아쉽게도 수중 시정이 다소 흐렸다. 약 10 m 정도 수심에서 강사가 정지하더니 가만히 어느 한 곳을 집중하고 있다. 무언가가 있다는 동작이다.어느 순간 희미한 실루엣이 점점 우리 앞으로 다가오다가 갑자기 그 형태가 뚜렷이 나타난다. 말로만 듣던 Eagle Ray 이다. 호흡기를 물고 있었지만 입에서 저절로 함성이 튀어 나왔다. 몸 길이가 180센티에 이른다는 Eagle Ray는 가족 단위로 행동하며 수줍음을 많이 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 가까이 오지 않고 우리와 거리를 두며 유영하고 있었다. ▲ Eagle Ray(매가오리) 약 15분 동안 Eagle Ray를 관찰하며 촬영했다. 시야가 다소 흐린 만큼 만족한 사진은 얻지 못했지만, 여러 마리가 유유히 유영하는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거북이가 유영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Eagle Ray가 떠나고 우리는 그 주변에서 또 다른 수중 생물을 관찰하며 20 여분을 더 수중에서 머무르며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만끽했다.(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예비역 공군 준장,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9-11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0) 사이판에서 다이빙③ 세계적 명소 그로또 포인트의 첫 날
    감기기운 있던 친구, 수압 이기기 위한 '발살바' 어려워 입수 포기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첫 다이빙을 한 다음날은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자동차를 빌려서 사이판 섬을 한바퀴 돌아봤다. 지도를 보며 다녔는데, 섬이 워낙 작다 보니 오후에 여기저기 다녔어도 해질 때까지 대부분 돌아봤다. 다음날 다이빙하기로 계획한 그로또 포인트(Grotto point)도 미리 가보았다. 이날은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약간 내리고, 파도가 거칠게 일어서 다음날 다이빙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다음날 아침, 하늘을 보니 구름이 끼어 있고, 바람 방향은 북서풍이었다. 그로또 포인트는 섬의 동쪽에 있으니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로또 포인트로 향했다. 다이빙 포인트중 세계적으로도 손꼽는다는 그로또 포인트는 ‘메이다이브 1968’의 창설자가 최초로 발견하였다고 한다.한편, 친구는 며칠동안 피로가 겹쳤는지 아침에 감기 몸살 기운이 있다고 했다. 필자가 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첫 다이빙하던 날 다이빙을 마친 후 조금 추웠다고 했는데 그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러한 상태로는 그로또 포인트 다이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친구에게 의향을 물어보니 친구 답변은 반반이다.다이빙 하고 싶기도 하고, 다이빙 하자니 컨디션이 걱정되고. 그래서 필자가 과감히 결정했다. 오늘 다이빙은 나만 하고 친구는 같이 가서 현장 견학이나 하자고. 필자가 친구의 상태를 우려했던 것은 감기 기운이 있으면, 유스타키오관(이관(耳管))이 막혀서(부어서) 발살바(Valsalva)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발살바(Valsalva)가 잘 안되면 귀에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 다이빙 전 친구와 기념사진, 뒤에 보이는 GROTTO 팻말 뒤로 108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뉴스투데이 다이빙을 할 때 수중에서는 수압 때문에 귀에 압착이 오면서 통증도 같이 오는데, 이는 가운데 귀(중이)의 압력과 바깥 귀의 압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이때 침을 삼키거나 입과 코를 잡고 날숨을 세게 쉬면(이 방법을 Valsalva 라고 한다) 압착을 해소할 수 있다. 비행기에서 고도를 높이거나 낮출 때, 빠른 기차를 타고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 귀가 먹먹해 지는 것도 가운데 귀(중이)의 압력과 바깥 귀의 압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주차장에서 다이빙장까지 108계단 내려가야아쉽지만 친구는 그로또 포인트 다이빙을 포기하고 위에서 견학하기로 했다. 현장에 가서 보니, 약간의 파도가 있었지만 다이빙은 가능한 상태로 보였다. 또한 다이빙 현장에는 지역 보안관이 와서 바다 상태(파도, 바람 등)를 보면서 다이빙이 가능한지 여부를 최종 확인하고 다이빙을 승인했다.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촬영장비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오늘은 좋은 수중영상을 얻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그리고 다이빙 입수 지점까지 108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여기서 한가지! 그로또 포인트 다이빙이 다 좋은데, 한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주차장에서 다이빙 입수 지점까지 108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또 포인트 안내 책자에는 계단이 100 몇 개라고 쓰여 있는데, 필자가 세어 볼 때마다 틀린다. 아마 오르내리기 힘들어서 중간에 잊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그저 ‘108 계단’이라고 부른다.) 내려갈때는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다이빙을 마친 후, 무거운 장비를 메고 올라올 때는 고행길이다.비오고 바람도 불었지만 바다속은 “명경지수(明鏡止水)”! 하지만 신비한 색상의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이런 고행(?)은 금방 잊는다. 전날의 우려와는 달리 약간의 파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중 시정은 양호했다. 입수 후 바닥을 내려다보니 투명하게 잘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외해 쪽을 바라보니 외해로부터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보인다. ▲ 외해로 나가고 있는 강사, 푸르스름한 빛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뉴스투데이 강사를 따라 그쪽으로 향하면서 주변이 점점 더 밝아왔고, 외해로 나가자 갑자기 바다가 환하고 밝아졌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바다 밖의 상태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약간 있었는데, 수중 시정은 무척 좋았다. 20년간 사이판에서 다이빙을 한 강사는 아마도 물 속 이곳 저곳을 자기 집 앞마당 같이 훤히 알고 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동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한 지점에서 수중 라이트를 비추는데, 눈에 보일까 말까 하는 작은 생명체부터 바위 틈에 숨어 있는 “랍스터”까지 보여준다.덩치 큰 흰동가리 수놈이 다이빙 강사 손가락을 공격외해로 나가서는 흰동가리가 사는 곳으로 가서 한참을 지켜 보았다. 말미잘 속에 숨어 있는 녀석, 그 주위를 쉴 새 없이 다니며 노는 녀석 등, 2~3마리가 한곳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강사가 말미잘 아래쪽에 살고 있는 작고 투명한 게를 보여 주려고 말리잘을 살짝 들어 올리는 순간 갑자기 덩치 큰 흰동가리 한 녀석이 강사의 손가락을 물려고 덤벼 들었다.흰동가리의 이런 행동은 처음 봤다. 다이빙 후 강사 설명에 의하면 흰동가리는 암수 한몸인데, 수놈이 죽으면 나머지 일행 중 한녀석이 수놈으로 성전환을 하고 덩치가 커진단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말미잘에는 덩치 큰 녀석 이외에 작은 녀석 두어 마리가 더 있었다. 작은 녀석들을 보호하려고 강사의 손가락을 깨물려고 했을까?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바다속 여기저기를 구경하다 보니 필자의 공기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강사의 보조 호흡기를 물고 출수 지점 중간까지 왔는데, 이날은 두 번의 다이빙 모두 공기가 부족해서 강사의 공기를 얻어(?) 마셔야 했다. ▲ 가까운 거리에서 흰동가리를 촬영하는 필자. 화면 우측에 보이는 흰동가리가 강사의 손가락을 물었다. ⓒ뉴스투데이 두 번의 다이빙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출수할 때 보니 파도 상태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파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강사도 더 이상 다이빙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이날은 두 번의 다이빙으로 만족해야 했다. 많이 아쉬웠다. 맑은 물속에서 편안하게 경치를 감상하면서 ‘다이빙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심심했을 텐데도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다른 다이버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현지 보안관과 대화하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필자는 ‘그로또 포인트의 멋진 모습을 나 혼자 봐서 미안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다음 다이빙은 이틀 후에 하기로 하고, 장비를 챙긴 후, 우리 모두는 다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9-03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0) 사이판에서 다이빙② 거북이와 니모 만난 ‘라우라우 비치’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라우라우 비치, 수심 완만해 초보에게도 적합한 다이빙 스팟거북이, 니모, 산호, 말미잘 등 볼거리 풍부초보 다이버, 신체활동량 많아 공기소모량 증가공기통은 보통 200바(bar) 충전해 시작, 50바에 출수 준비 사이판에서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었고 약간의 비와 바람이 예보되는 상황이었다. 다이빙 장소는 사이판 동남쪽에 있는 ‘라우라우 비치’. 다이빙 포인트는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접근하기가 비교적 쉽다.해안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다이빙 포인트까지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데, 이때 공기통을 메고 가는 약간의 수고로움과 입출수 시에 가끔 파도가 센 것을 만 제외하면 주변이 탁 트이고 수심이 완만하게 깊어지므로 마음 편안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수중 환경도 지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조류도 세지 않으며, 각종 물고기와 산호, 말미잘 등 볼거리가 많아 비교적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곳이다. ▲ 입수전 친구(왼쪽)와 강사(오른쪽). 방수 하우징을 열고 촬영했다. 라우라우 비치 ⓒ뉴스투데이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수중촬영용 장비도 모두 결합(카메라, 방수 하우징, 수중 랜턴 등)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기념사진(친구와 강사)을 찍었는데, 결과를 확인해보니 일부가 뿌옇다. 왜 그럴까?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방수 하우징을 열어 보니 하우징 렌즈 부분에 습기가 차 있다. 닦아내고 하우징을 결합하면 잠시 후에 다시 습기가 맺히기에 응급 방편으로 수경에 뿌리는 습기 방지제를 뿌리고 방수 하우징을 닫았다.지난 4월에 처음 이 장비를 사용할 때도 이런 문제가 없었기에 더욱 당황했다. 그리고 수중 촬영. 그러다 보니 사진 절반 정도는 영상 일부가 뿌옇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다음날 곰곰이 분석을 해보니, 스노클하면서 렌즈 캡 뒷 부분에 들어간 소량의 바닷물이 방수하우징 안에서 카메라에 전원을 켜자 증발하면서 하우징 렌즈에 습기가 맺혔다는 결론을 얻었다. 카메라 렌즈 캡 뒷 부분의 물기를 제거하고 난 후, 둘째 날 다이빙부터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또 하나, 바다에 들어가면서 고프로(Gopro) 카메라 전원을 켰는데, 몇 초 후에 카메라가 꺼졌다. 배터리가 방전이 된 것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야 하는데...결국 첫 날 다이빙에서는 고프로 카메라는 촬영을 못했고, TG-5 카메라 영상도 절반은 일부가 뿌옇게 된, 만족스럽지 못한 영상을 얻게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빙은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첫 날 다이빙은 수중 촬영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명경지수와 같은 바다, 필자와 친구를 반겨주듯이 우리 인근에서 유영하는 거북이, 언제봐도 귀여운 Anemonefish(일명 ‘니모’), 작은 규모의 물고기 떼(Fish ball, ‘전갱이떼’로 알고 있다) 등은 다이빙하는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물론 지난 5월 말에 갔던 동해안과는 다르게 따뜻한 수온(섭씨 28도)과 훌륭한 수중시정(대략 20~30m)은 다이빙하는 즐거움을 더욱 증가시켰다. ▲ 친구와 바다에 들어가기 전, 라우라우 비치 ⓒ뉴스투데이 같이 간 친구는 다행히도 바다속 상황에 빠른 속도로 적응하고 있었는데, 초보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애로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즉, 공기소모가 기성 다이버들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다이빙 강사나 다이빙 횟수가 많은 다이버들은 공기 소모량이 무척 적다.어떤 강사는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공기 소모량이 적다. 반면 친구는 공기가 빠르게 소모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사는 수중 환경(수심, 위치 등)을 알기에 조금 더 있어도 괜찮다고 수신호를 보내며 친구를 이끌고 있었다. 필자는 가장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사진도 찍고, 주변 경치도 둘러봤다.해안에서 하는 다이빙이라 보트 다이빙 할때보다 여유를 가지고 공기 잔량이 30 bar 정도 남았을 때 출수했다. 강사와 친구는 먼저 출수해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구는 공기 잔량이 거의 제로인 것을 보니, 출수하면서 신체 활동이 많았던 듯 싶다. 즉,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공기 소모량은 신체 활동량과도 관계가 있다.바다속에서 초보자들은 불필요한 동작을 많이 한다. 그러다보니 공기 소모량은 많아지게 되는데, 반면 경험 많은 다이버는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 오리발 사용도 효율적으로 하기 때문에 공기 소모량은 많지 않다고 본다. (공기통은 보통 200 Bar 정도로 공기를 충전해서 다이빙을 시작하고, 50 Bar가 되면 출수 준비를 한다.안전정지 및 기타 여러 가지 안전을 대비해서 그렇게 하는데, 필자는 수심이 깊지 않고 육지에서 가까운 해안에서 다이빙을 할 때는 가끔 공기 잔량을 최소로 남겨두며 다이빙을 한다. 사진 촬영하랴 바다속 구경하랴... 안전을 고려하면 조금 더 일찍 올라와야 하는데...) ▲ 말미잘 속에 숨어있는 흰동가리(Anemonefish 또는 Clownfish) ⓒ뉴스투데이 두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나오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와 강사, 필자는 아침에 인근 호텔 상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비를 겨우 피해 가며 먹었다. 비 내리는 가운데 바다를 바라보며, 비를 피하며 먹는 도시락은 오랜만에 경험하는 또 다른 추억이었다.세 번째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 바다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작은 규모의 Fish ball이 나타났다. 작년에는 수심 10여 미터에서 대규모의 Fish ball(아마도  몇 천 마리는 될 듯 싶었다)을 만나서 한참을 바라보고, 그들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TV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을 실제 보고 있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작년에 본 Fish ball 영상은 다음 기회에 소개한다)입수 지역은 아쉽게도 수중 시정이 좋지 않아 거리를 두고 전체적인 물고기 떼를 보기가 어려웠는데, 이나마 금방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수중 시정이 좋지 않아 깨끗한 영상을 얻지 못했다.)친구는 첫 날 다이빙을 시작할 때는 다소 긴장한 듯이 보였으나, 마치면서 보니 다이빙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초보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필자도 자격증 과정후 첫 다이빙때는 긴장했다. 첫 다이빙은 울릉도 서쪽 해안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나가서 했는데, 당시 파도가 꽤 높아서 입수, 출수 하기가 초보자로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특전사 출신 선배 장교가 이끌어서 첫 다이빙을 안전하고 무사히 마친 기억이 있다.이날 친구는 비치 다이빙이기는 하지만 다이빙을 시작하기 전에 긴장되는 마음은 똑 같았으리라 생각한다. 호흡은 잘 될까? 자세는? 공기량 조절은? 등등. 다이빙 이론과 실기 교육을 잘 받았고, 본인이 노력했던 만큼 친구의 첫 다이빙은 필자가 보기에도 훌륭했다. 성공적인 첫 다이빙을 마친 친구와 강사, 필자는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날의 다이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고, 친구의 목소리는 어느 때 보다도 자신감 있고 기운차고 기분 좋게 들렸다.(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8-27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10) 사이판에서 다이빙① 국제공인 자격증 받은 친구와의 추억
    사이판 가기 전 친구와 동해안에서 '번개팅'으로 다이빙20만원대의 저가항공 예약하고, 숙소는 가성비 좋은 시내 호텔로사이판의 다이빙 숍 메이다이브(MEIDIVE) 1968'에 예약, 일본인 주인의 성실성에 감동수중 촬영 카메라의 밧데리 충전같은 소소한 문제에도 신경써야(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지난 7월초, 가깝게 지내는 고등학교 동창생 한 명과 같이 사이판에 다녀왔다. 필자와 친구 모두 현직에서 퇴직하고 각자 제 2의 인생을 즐기며 평범하게 지내고 있다. 이번에 사이판을 가게 된 경위는 금년 초, 고교 동창 모임에서 누군가 “그동안 가족을 위해서 눈코 뜰새 없이 지내 왔는데, 동창들끼리 어디 조용한 섬에 가서 늦잠도 자고, 하고 싶은거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어떨까”라고 제안을 했다.갑자기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 어느 책에서 본 문구 같은데, 이러한 생각에 많은 친구들이 동의했고, 금년 여름에 사이판에 가기로 정했다. 여행 개념은 “사이판에서 한달 살아보기,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기 !”. 처음에는 4명이 가기로 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서 금년에는 두 명만 가기로 했다.모임 후에 즉각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했다. 요즘은 저가 항공사가 취항하는 곳이 많아 여행객들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항공권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는데, 우리도 저가 항공사를 선택했다. 1월 중순에 항공권을 예매했고, 가격은 20만원 전후. 숙소는 가라판 시내의 비교적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호텔로 예약했다.그러던 중 지난 5월 중순, 사이판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동해안으로 스쿠버 다이빙을 가자고 한다. 갑자기 왜그러지? 친구는 스쿠버 다이빙을 안한다고 알고 있는데...  사연인즉, 필자가 그동안 주입식으로 교육한 ‘스쿠버 다이빙 예찬론’에 영향을 받아서 개인적으로 수영장 실습과 이론 교육을 마치고, 자격증을 받기 위한 최종 다이빙을 가는데 필자에게 같이 가자고 한 것이다. 물론 사이판에 가서 필자와 스쿠버 다이빙도 같이 하려고 자격증에 도전한 것이다.이렇게 기쁠수가 !!! 동해안 수온을 확인하니 15도 내외란다. 수온은 낮지만 친구가 가자는데 가야지. 오랫만에 들뜬 기분으로 동해안으로 다이빙을 갔다.그러나 다이빙 첫날은 필자가 신은 오리발이 겨우 보일 정도로 바다속 시정이 좋지 않았다. 둘째날은 첫날보다 시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명경지수’와는 거리가 멀다. 수온은 15도로 5미리 잠수복을 입어도 한기가 몰려왔다. 그동안 따뜻한 열대 바다에 익숙해진 내 몸은 차가운 바다에 힘들어했지만, 친한 친구가 바다에서 첫 다이빙을 하는데 옆에서 보호(?)해 준다는 소중한 사명감으로 마음은 훈훈했다.이틀간 차갑고 시정이 나쁜 악조건에서 4회의 다이빙을 마치고 국제 공인 다이버 자격증을 받은 친구는 뿌듯하고 흐뭇한 얼굴이었다. 친구와 같이 동해안에 가면서, 친구가 필기시험을 준비하면서 공부한 다이빙 교재를 얼핏 보니 밑줄까지 쳐가며 정성껏 공부한 흔적이 보인다. 나이 들어서 다이빙을 배우는 만큼 사전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친구가 뿌듯하고 흐뭇할 만도 하다. ▲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30대 강사로부터 자격증을 받는 50대 친구 [사진=최환종] 그리고, 7월 초, 10일 간의 사이판 여행길에 올랐다. 다이빙 숍은 작년에 이용했던 숍으로 결정했다. 하와이 여행에서도 얘기했지만, 다이빙 숍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다이빙 숍과 강사의 역할은 수준 높고 안전한 다이빙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그동안 다이빙을 하면서 선택한 숍은 대부분 좋았다. 그중에 특히 생각나고 또 이용하고 싶은 다이빙 숍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한곳은 필자가 필리핀 세부에서 처음 다이빙할 때 이용했던 “뉴그랑블루”이고, 다른 한곳은 사이판의 “메이다이브(MEIDIVE) 1968”이다.필리핀 세부의 “뉴그랑블루”는 대한민국 해군에서 복무한 한국인이 대표이며, 강사진은 한국인 강사와 필리핀 현지 강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이빙을 진행하는 흐름이라던가 한국인 강사 및 필리핀 강사들의 행동을 보면, 매우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잘 훈련된 군대 조직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랜 군생활을 한 필자 마음에 꼭 맞는다.또한 필자가 갈때마다 같이 다이빙했던 ‘아닉’이라는 필리핀 강사는 필자가 세부에 두 번째 다이빙 갔을 때, 필자의 다이빙 습관을 기억하고 있어 놀랐다. 이러한 강사들의 전문성과 다이빙 샾의 깔끔함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뉴그랑블루”는 또다시 가고 싶은 다이빙 숍이다. (필자의 스쿠버 다이빙 기고문 3회에서 언급한 다이빙 숍이 바로 “뉴그랑블루”이다)사이판에 있는 “메이다이브(MEIDIVE) 1968”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다이빙 숍으로서, 1968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숍의 주인이자 강사는 일본인 여성으로 사이판에서 다이빙을 20년간 한 베테랑이다. 필자가 사이판에서 일본인 다이빙 숍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고객에게 매우 성실하다’는 점이었다.작년 봄에 사이판에서 다이빙을 했는데, 다이빙 샾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여러 개의 다이빙 숍을 고른 후, 최종 선택하기에 앞서 여러 숍에 대여섯 가지 질문(기상 예보, 수온, 가격 등등)을 포함한 이메일을 보냈는데, “메이다이브(MEIDIVE) 1968”에서만 모든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했고, 나머지 숍은 비용 얘기만 했다.또는 아예 대답이 없거나. 당연히 “메이다이브(MEIDIVE) 1968”을 선택했다. 다이빙 하면서도 다이빙 샾을 잘 선택했음을 여러번 느꼈고, 이번에 같이 간 친구도 만족했다. 언어는 강사가 영어를 사용하므로 불편함은 없었다.아무튼, 사이판 첫날은 새벽에 도착해서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서니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호텔에 가서 체크인하고 오전에는 잠을 잤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다이빙 샾에 가서 강사를 만나보고 내일 몇시에 어디에서 다이빙 할 것인지 등 간단한 사전 브리핑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호텔 주변을 돌아보고, 인근 해변에서 스노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 가라판 인근 해변. 저 멀리 마나가하 섬이 보인다 [사진=최환종] 이날 스노클링을 하면서 한 가지 실수를 한 것을 다음날 알게 되었다. 다음날 수중촬영에 사용할 카메라(올림푸스 TG-5)를 들고 해변에 가서 촬영을 했는데, 이때 렌즈 캡 안쪽으로 약간의 바닷물이 들어간 것을 몰랐다(귀국 후 AS 센터에 문의결과 렌즈 캡 안쪽으로 약간의 바닷물이 들어가도 카메라 기능에는 영향을 주지 않음을 확인했다).15미터까지 방수 가능하다고 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바다에서 가지고 다닌 것이 다음날 수중 촬영 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한 다음날 다이빙에 대비해서 Gopro 카메라 배터리 충전상태를 재확인했어야 했는데, 서울에서 충전했기에 재확인을 안한 것이다.이제까지 이런 실수는 절대 없었는데...저녁은 가라판 시내에서 간단하게 먹고, 다음날 있을 다이빙에 대비해서 맥주 한잔도 안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사이판에서 친구와의 첫날은 이렇게 저물었다.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8-16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9) 렌트비 260달러로 즐기는 하와이 오아후섬 ‘비행의 추억’
    FAA 자가용 조종사 면장 소지한 필자, 지인 부부와 소형 비행기로 하와이 명소를 조망하와이서 비행기 렌탈은 가성비 높은 레저, 1시간 30분 대여료가 1인달 60달러 꼴 비행경로는 와이키키 해변, 다이아몬드 헤드, 코코 헤드, 쥬라기 공원 촬영지, 진주만 등 명소 망라(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하와이에 머무는 기간 중 우리 가족과 지인 부부는 여러 종류의 야외활동을 같이 했다.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 골프 등등. 하와이는 날씨나 주변 여건 등이 야외활동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매일 매일이 새롭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소형 비행기를 빌려서 오아후 섬을 돌아보았다. 필자는 미국 연방항공국(FAA) 자가용 조종사 면장을 소지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영토에서는 비행기를 빌릴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비행기 렌탈 가격은 기종, 연식마다 다른데, 필자가 빌렸던 4인승 단발 항공기인 Cessna-172의 경우, 1시간당 대략 160~17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일반 관광객으로 타면 1인당 내는 가격이 그보다 더 비싸지 않을까 생각한다.공항근처의 작은 비행 클럽에 연락해서 Cessna-172를 빌렸고, 뒷좌석에는 지인 부부가 탔다. 참고로 필자의 부인은 멀미 때문에 소형 비행기 타기를 꺼려한다. 대형 항공기를 타고 외국에 갈 때도 반드시 귀밑에 멀미 방지약을 붙이고 탄다. 그래서 이날도 같이 비행은 하지 않았다.지인 부부는 한국에서도 Cessna-172를 필자와 같이 타고 비행한 경험이 있어, 작은 비행기를 타고 비행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날은 부드럽게 수평 비행만 하기로 했는데, 사연인 즉, 한국에서 비행할 때 필자는 지인 부부에게 ‘약간의 즐거움(?)’을 선사했다.‘약간의 즐거움(?)’이란 표현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다. 실제로는 비행 중에 청룡열차 같이 일정 고도를 오리락 내리락하는 공중조작을 했다는 얘기이다. 이때 두 분중 한 분이 조금 힘들어 했던 것 같다.(이런 공중조작을 하면 상승할때는 모르지만 하강할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느끼는 별로 좋지 않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틀리는데,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힘들어 한다.오랫만에 외국에서 하는 비행이라 부조종사 자리에 현지 조종사(일종의 Safety Pilot 자격으로)를 앉히고 비행했다. 비행경로는 호놀룰루 국제 공항에서 이륙하여 오아후섬 남쪽 해안(와이키키 등)을 따라 동쪽으로 비행하다가 다이아몬드 헤드를 지나 오아후섬 남동쪽 끝에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그리고 북쪽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비행 후, 오아후섬 북서쪽에 있는 작은 활주로(Dillingham airfield)에 내렸다. 오아후섬을 해안을 따라가면서 위에서 보면 바다와 육지가 어울려서 경치가 매우 좋다. 비행고도가 1500피트(ft) 내외(약 450 m 정도)이니 지상의 풍경을 보기에는 매우 좋은 고도이다.비행 경로상에는 와이키키 해변, 다이아몬드 헤드, 코코 헤드, 하나우마 베이, 마카푸 전망대, 카네오해 베이, 쥬라기 공원을 촬영했다는 이름 모를 계곡,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Sunset beach, Shark’s cove, 모쿨레이아 비치 공원, Dole plantation, 진주만 등 우리 귀에 익숙하거나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 우리의 눈을 만족시킨다.딜링햄에 내려서 주기장에 주기한 후, 비행기 그늘에 앉아 쉬면서 가지고 간 삶은 고구마, 삶은 계란, 샌드위치, 콜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행가서 먹는 삶은 계란, 콜라는 최고의 간식거리라고 생각한다.여기까지 얘기하면 우리가 무슨 ‘갑부’인 것 같이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공군에서 비행 훈련을 받았고, 그 교육을 바탕으로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자가용 조종사 면장을 취득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자가용 비행기를 우리나라에서 자가용 승용차 보유하듯이 많은 사람이 보유하거나 또는 빌려서 탄다. ▲ 둘째 아이와 비행하기 전에, 호놀룰루 공항 남쪽 주기장에서 [사진=최환종 기자] 비행기 렌탈 가격도 비싼 편은 아니다. 오아후섬 일주 비행을 하는데 소요시간은 약 1.5시간 정도였다. 타 비행장에 내려서 쉬는 시간은 비행시간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시간당 렌탈 비용이 160달러일 경우 1.5시간 비행했으면 240달러. 4인승이므로 4명이 분담하면 1인당 60달러이다.(FAA 규정상 자가용 비행기는 승객이 소요비용을 공동 분담하도록 되어 있다). 1.5시간 관광 비행 및 타 비행장에서 휴식까지 하고 1인당 60달러이면 얼마나 훌륭한 가성비인가!커피를 마시면서 동쪽 하늘을 보니, 글라이더와 낙하산이 보인다. 활주로 동쪽 끝에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업체가 있고, 그곳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스카이다이빙을 즐긴다. 필자는 사관학교 생도 시절 ‘낙하산 강하’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훈련 받을 때의 힘든 기억이 생각나서 오아후 섬에서 스카이다이빙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며칠 후 둘째 아이는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물론 스카이다이빙 교관과 같이 점프하는 것이지만.둘째 아이는 아빠도 같이 스카이다이빙 하자고 은근히 압박을 가했다. 교관도 같이 해보지 않겠냐며 권유하고. 그러나 “나는 한국 공군 예비역 장교인데, 사관학교때 충분히 훈련 받아서 이제는 흥미가 없네”라고 위엄있는 표정으로  대답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사실은 비행기에서 뛰어 내릴 때의 ‘그 느낌’이 싫어서 그런건데. 아무튼 둘째 아이의 용기 있는 행동에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휴식을 마친 후, 다시 이륙해서 호놀룰루 공항으로 향했다. 돌아올 때는 진주만을 향해서 내륙으로 비행했다. 저 멀리 진주만이 보이고, 착륙 장주로 진입했다. 그리고 착륙. 뒷 좌석의 지인 부부를 위해서 착륙을 매우 부드럽게 했다. 오아후섬 일주 비행을 같이 한 지인 부부는 요즘도 가끔 그 얘기를 한다. 좋은 추억이었고, 또 비행하고 싶다고. 나도 그렇다. 다음에도 또 하와이에 같이 가서 그런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며칠 후, 대학생인 둘째 아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같은 경로로 비행을 했다. 둘째 아이가 바깥 경치를 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이 즐거웠다.  둘째 아이를 태우고 하는 비행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8-10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8) 거북이와 함께 스노클링, ‘거리두기’는 필수
    오아후섬 북쪽 ‘Shark’s cove’, 맑고 투명한 물 속에서 형형색색 물고기와 거북이가 노는 곳스노쿨링은 다이빙보다 쉽고 아기자기, 가족과 함께 즐기는 '행복한 경험'(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하와이 여행 때 진정한 다이빙은 훌륭한 다이버들과 같이 했던 두번째 다이빙이었다. (첫 번째 와이키키 해변에서 했던 다이빙은 ‘와이키키 앞바다에 들어가봤다’는 의미만 두고 싶다.) 지금도 그때 다이빙한 동영상을 보면 다시 화와이에 가고 싶다. 언젠가는 또 갈 기회가 오겠지. 그때는 작은 아이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게 해서 부녀가 같이 다이빙하는 기쁨도 누릴 것을 기대한다.한편, 오아후 섬에 머무는 동안 다이빙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깨끗한 바다에 가서 서너 차례 스노클링을 했다. 가족과 함께 하기에는 스노클링이 보다 접근하기 쉽고 아기자기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장비도 간단하고, 다이빙과 같이 ‘수면휴식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적당한 해변에서 스노클링 하다가 피곤하면 잠시 쉬었다가, 군것질도 하고 다시 스노클링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오아후섬 도착 2~3일 후에 지인 부부와 같이 섬 동남쪽에 있는 하나우마 베이에 가서 스노클링을 했는데, 유명세에 비하여 수중 시야가 무척 좋지 않았다. 현지에 살고 있는 미군 장교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우마 베이가 꽤 오래 전에는 정말 맑고 투명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물이 흐려졌다고 한다. ▲ 하나우마 베이 ⓒ뉴스투데이 그 다음 날은 오아후섬 북쪽 해변으로 갔다. 거북이가 많이 사는 해변을 지나 ‘Shark’s cove’라고 하는 ‘작은 만(灣)’으로 갔는데, ‘만(灣)’이니만큼 파도는 거의 없었고 수심이 얕아 스노클링 하기에는 그만이었다. 게다가 물이 맑고 투명하여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Shark’s cove’는 현지에서도 스노클링 장소로 유명하다. 스노클링 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하나우마 베이보다 훨씬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지인 부부와 함께 그늘이 있는 적당한 바위 주변에 자리를 잡고, 바다로 들어갔다. 물 밖에서 보더라도 물속에 각양각색의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이 보였다. 수경을 끼고 물속을 관찰하며 앞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덩치 큰 녀석의 실루엣이 보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거북이’다.바다에서 거북이를 만나면 왠지 기분이 좋다. ‘십장생(十長生)’중의 하나라서 그럴까? 평소에 잘 접하지 못하는 바다생물이라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반나절 동안 스노클링 하면서 몇 마리의 거북이를 계속 봤다. 아마도 ‘거북이 가족’이 아닐까. 거북이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있는데, 미국인 가족들도 거북이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그러나 거북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사람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거나 만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여 거북이(다른 생물도 마찬가지)에게 가까이 가거나 만지지 않도록 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 ‘Shark’s cove’에서 스노클링 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오후 내내 거북이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같이 스노클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배고프면 가지고 간 과일과 햄버거를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작은 아이는 겁이 없는 편이다. ‘Shark’s cove’는 수심이 얕지만 그래도 해변에서 조금 멀어지면 수심이 3~5미터 이상 된다. 그곳에서도 겁 없이 잘 다니는 것을 보니 나중에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는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다.해가 질 무렵에야 스노클링을 마쳤다. 배도 고프고 숙소에 가려면 운전하고 1시간 가량 가야했기에, 아쉽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호놀룰루 시내로 향했다. 갈 때는 오아후섬 동쪽 해안을 따라서 갔는데, 이쪽 해안도로 또한 푸른 바다와 어울려서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Shark’s cove’는 지인 부부가 서울로 떠난 후에 우리 가족끼리 한번 더 갔다. 며칠 전과 똑같이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바다. 해가 질 때까지 물고기, 거북이와 같이 스노클링을 즐겼다.가족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 천국이 따로 없었다.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7-30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7) 버킷 리스트, 하와이 와이키키에서의 다이빙
    24번 이사했던 군 생활, 가족과의 하와이 여행은 재충전 위한 버킷 리스트와이키키에서의 다이빙 성패는 다이빙 숍 선택에 달려미군장교의 조언과 인터넷 검색해 찾아낸 둘째 다이빙숍은 '신세계'를 선물와이키키 바다 속에는 세부와 달리 몽크바다표범,상어, 거북이 등 덩치 큰 생명체 많아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꽤 오랜 기간 군(軍) 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전역을 했다. 그때 필자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이제까지는 국가와 가족을 위해서 일했지만,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 일하고 봉사하겠다”고. 물론 그 범위에는 내 가족도 포함된다. 대위때 결혼해서 전역할 때까지 이사를 24번 했다. 장기간 군 생활을 한 분들은 ‘이사를 24번 했다’의 의미를 알 것이다.나를 위한 봉사로, 그리고 인생 2막을 위한 재충전을 위하여, 전역한 다음 해부터 필리핀 세부에서의 다이빙을 시작으로 다이빙 여행을 시작했다. 두 세 차례 해외 다이빙을 마치고 스쿠버 관련 잡지를 보면서, 세계의 유명한 다이빙 지역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 잡지 등에서 관련 자료를 조사하여 ‘스쿠버 다이빙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다.일명 “남태평양 스쿠버 다이빙 계획”.사실 오끼나와, 필리핀 등은 남태평양은 아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남태평양” 때문인지 이 용어가 매우 익숙해서 그렇게 명명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태평양 지역 스쿠버 다이빙 계획’이다.)태평양 지역의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 포인트별 다이빙 최적기, 접근성(항공편, 숙박 시설 여건 등) 등등을 조사하여 나만의 다이빙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은 지금도 계속 자료를 확인하면서 최신화하고 있다. (다이빙은 앞으로 체력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큰 사위도 직장이 안정되면 다이빙 입문을 적극 권유해서 같이 다이빙 여행을 다닐 계획이다.)문제는 비용이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다. 원하고 추구하면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는다.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할 즈음, 지인과 같이 부부동반으로 하와이를 가게 되었다. 버킷 리스트에 하와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자연스레 가게 된 것이다. 여행 목적은 가족과 같이 하와이 여행하기. 그동안 아이들이 초등학생때 이외에는 여행 한번 제대로 못갔기에, 큰마음 먹고 갔다. 다이빙은 많이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자격증과 잠수복, 수경, 오리발만 가지고 갔다. ▲ 첫 번째 다이빙 마치고, 얼굴에 마스크 자국이 선명하다. 뒤편에 앉아있는 이가 65세 미국인 다이버 ⓒ뉴스투데이 하와이는 그동안 출장 등으로 두 세번 갔던 터라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출장 가서는 여행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제대로 돌아보지는 못했다. 하와이에는 꽤 오래전에 용산에서 같이 근무하던 미 육사 출신 지인과, 필자가 현역 시절부터 업무 파트너였던 미군 장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사전에 연락을 해서 1~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호놀룰루 공항에서 미국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이전부터 필자와 잘 알고 지내던 미군 소령이 부인과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 필자가 온다고 상관에게 보고하고 나왔단다. 물론 그 상관도 필자가 잘 아는 장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하와이 체류 기간중에, 한국에서 업무 파트너였던 미 육군 장군이 자신의 참모 장교들(필자도 잘 아는)과 함께 내 가족을 위해 저녁 파티를 열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그날 저녁 정말 많이 마셨다. 덕분에 다음날 스노클링 하러 갈때 조금 힘들었지만.한편, 같이 간 지인 부부와 함께 오아후섬 곳곳을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다이빙도 했다. 그러나 다이빙 숍에 대한 사전 조사가 부족했다. 첫 다이빙을 와이키키 해변 앞바다로 나갔는데, 모래밭 이외에는 볼 것이 아무도 없는 바다로 간 것이다.두 번의 다이빙을 그렇게 마치고 나니 허탈했다. 결론은 다이빙 숍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내가 선택한 다이빙 숍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손님에 대해서 별로 성의가 없는 그런 다이빙 숍이었다. 렌탈 장비 상태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고. 더구나 지인 부부는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바다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인터넷으로 다시 검색을 하며, 미군 장교들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마침 다이빙 경험이 있는 장교의 조언과 인터넷 검색내용을 비교해서 적당한 곳을 찾았다. (다이빙을 마친 후에 아주 좋은 다이빙 숍을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전화로 예약하고 다음날 다이빙 숍에 가서 필자가 ‘전역한 한국 공군 장교’라고 얘기하자, 신분증 보자는 말도 없이 할인을 해 주었다. 필자가 어디서 무슨 근무를 했는지 물어보고, 자기도 어디서 근무했다는 등의 얘기를 하면서. 비록 할인금액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 땅에서 내가 군인이었음을 인정받는 흐뭇한 순간’이었다. 미국은 전시와 평시를 막론하고 여러 면에서 군인을(예비역도) 예우해 주는데, 우리나라와 많이 다름을 느낀다.각설하고, 나와 같이 바다에 들어간 버디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65세 미국 노인인데, 내가 외국인이고 하와이에서 다이빙이 처음인 것을 알고는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같이 다이빙한 대부분의 다이버가 지역 주민이었고 모두들 상대방을 배려하는 분위기에서 다이빙이 진행되었다.또한 다이버들은 바다속에서 쓰레기가 보이면 손으로 집어서 BCD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이빙을 마치고 배 위에 올라와서 배 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마치 자기집 정원을 손보는 것 같았다. 다이빙 강사 및 진행요원의 매끄러운 진행과 친절함은 물론 렌탈 장비의 상태까지 최상이었다.친절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멤버들과 하는 다이빙은 수중에서 더욱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다음에 오아후 섬에 갈 기회가 있으면 이 숍은 꼭 다시 이용하고 싶다)다이빙 장소는 다이빙 숍 인근의 ‘하나우마 베이“ 앞바다였고, 파도가 조금 높아서 출수할 때 조금 어려웠으나, 바다속 상태는 최상이었다. 훌륭한 시정과 적당한 수온(24~26도), 뜻밖에 만난 몽크바다표범(Monk Seal), 바위 밑에서 쉬고 있는 어린 White tip 상어, 곰치, 거북이, 트럼펫 피쉬 등 각종 물고기들이 유영을 하고 있었다.두 번의 환상적인 다이빙을 마치고 나왔고, 와이키키 앞바다에서의 실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첫 회에 게재했던 다이빙 동영상을 추가 편집해서 다시 올린다. 위 내용을 읽고 보면 안보였던 것이 보이리라 생각한다)다이빙 하면서 필리핀 바다와는 조금 다른 면을 발견했다. 필리핀(세부, 보홀 등등)은 여러 가지 색상의 산호가 많고, ’니모‘와 같은 작고 귀여운 물고기들이 많아 예쁜 정원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곳 바다속 지형은 바위가 많고 다소 무미건조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수중 생물들의 종류별 개체 수가 많고 덩치가 제법 커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다이내믹한 느낌을 주었다.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7-23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6) 사방 비치 ‘다이빙’에서 만난 ‘희열과 위험’
     다금바리의 일종인 그루퍼는 '니모'와 다른 색다른 느낌 줘 일본 해군 난파선 다이빙은 '오싹한 별천지' 체험 멀쩡했던 주호흡기가 갑자기 이상해져, 동료 도움으로 해결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학생 다이버 두분’이 자격증 취득 후 마닐라로 출발한 후, 나머지 3명은 이틀간 다이빙을 계속했다. 이때 조류 다이빙을 처음했다. 수심 25m 내외에서 조류를 타고 가면서 수중환경을 관찰했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수온은 27~29도. 중성부력을 유지한 채 조류에 몸을 맞기고 흘러가니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다만 그날따라 수중시정이 다소 흐린 것이 흠이었다. 조류가 약한 지점에서 잠시 머무는데, 갑자기 덩치가 큰 물고기가 나타났다. 이어서 대여섯 마리가 떼로 지어서 오는데, 동작이 아주 완만하면서도 힘이 있어 보였다. 혹시나 하고 가까이 오는 것을 지켜보니 생김새가 풍문으로 들었던 ‘다금바리’ 종류인 것 같았다. Gopro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수면 휴식 때 강사에게 물어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현지에서는 ‘라푸라푸(Lapu Lapu) 또는 그루퍼(Grouper)’라고 부르는데, 다금바리의 사촌 격이란다. 다금바리 사촌 격이라지만 말로만 듣던 다금바리 종류를 바다속에서 직접 보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덩치 큰 물고기의 몸놀림이 무게가 있고 여유 있어 보이는 것이 작고 귀여운 ‘니모(Anemone fish)’와는 느낌이 틀렸다. 난파선 다이빙도 했다. 필자는 왠지 난파선 다이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꽤 오래전에 했던 첫 난파선 다이빙때는 그 전날 과음을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난파선 안에 들어가서는 오싹함을 느꼈다(추위가 아닌). 더구나 팔라우 등지에 가면 2차 대전때 침몰했다는 난파선(일본 해군 전함) 다이빙 코스가 있는데, 침몰 당시 선원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아 난파선 다이빙이 내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날은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별 부담 없이 들어갔다. 형태는 해군 전함이 아닌 상선 같았다. 수중에서 난파선 안을 유영하다 보면 마치 ‘장애물 통과’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난파선 안팎을 돌아보면서 이 배는 전에 어떤 용도였고, 왜 여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난파선 안과 밖에는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지 여러 종류의 작은 물고기들이 많이 보인다.   ▲ 쏠배감팽(Lion Fish). 수심에 비해 광량이 부족해서 다소 어둡게 나왔다. ⓒ뉴스투데이  가끔은 Lion fish(쏠배감팽)도 보였다. 이 녀석은 여러가지 색상의 날개 같은 등지느러미가 달려있어서 물속에서 볼 때 예쁘게 보이고, 피사체로서 필자가 좋아하는 어류이다. 그러나 예쁘다고 이 등지느러미를 함부로 만지면 안된다. 등지느러미 촉수에 독이 있고, 이 녀석들은 이 촉수(독)를 이용해 먹이를 잡는다고 한다. 이틀 다이빙 중 반나절은 비가 약간 내렸다. 그러나 물속에서는 비오는 것을 모르고, 물 밖에서도 잠수복을 입고 있으니 비가 와도 신경쓸 일이 없었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 수면 휴식중 배 위에서 바라보는 ‘비 내리는 광경’도 운치가 있었고, 현지 스텝이 끓여준 배 위에서의 따끈한 커피 한잔은 서울 어느 고급 커피숍에서 마신 커피보다 훌륭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한 번은 조류 다이빙 도중에 다이빙 숍에서 빌린 주호흡기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이틀 동안은 좋았는데, 그날 다이빙 도중 어느 순간부터인가 공기를 들이마시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잠깐 멈춰서 호흡기 상태를 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동료 다이버가 상황을 눈치채고는 이상 없냐는 수신호를 보냈다.   ▲ 해마(海馬). 크기는 손바닥보다 작다. ⓒ뉴스투데이  주호흡기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보조 호흡기로 바꿔서 입에 물고는 다이빙을 계속했다. 만일 보조 호흡기마저 문제가 발생하면, 동료의 보조 호흡기를 입에 물고 다이빙을 해야 한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서도 다이빙은 반드시 두명이 짝을 이루어서 해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여행용 가방을 꾸리기 간편하게 잠수복, 수경 등만 가지고 다녔고, 호흡기와 BCD, 오리발 등은 현지 다이빙 샾에서 빌려서 사용했다. 그러나 렌탈한 호흡기에 문제가 생긴 후부터는 가급적 필자의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 총 4일간의 다이빙을 마치고 투명하고 멋진 푸른 바다를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사방 비치를 떠나 마닐라로 향했다. 늘 그렇듯이 다이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적당히 피로가 쌓인 상태이다. 집에 가서 피로를 풀며 푹 쉴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다이빙을 마치고 바다에서 나올 때면 늘 아쉽다.  그러기에 또 다음 다이빙을 계획한다. 바다속에서의 절대적인 자유와 평안함을 생각하며! 그리고 어떤 멋진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며!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7-16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5) 환갑 앞둔 지인들의 스쿠버 다이빙 입문기
    환갑을 앞 둔 두 명의 '초보 다이버', 첫날은 이론 교육과 수영장 강습 받아실습 다이빙을 마치고 나온 그들, 20대 청년처럼 환한 웃음지으며 만족감 표시(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전역 후 해외 다이빙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단체 밴드에 다이빙 동영상을 올렸고, 사석에서 다이빙의 매력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다이빙 입문을 은근히 권유했다. 얼마 후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2년 전 가을, 필자에게 수시로 주입식 교육(?)을 받은 지인들이 다이빙에 관심을 보였고, ‘두 분’(환갑을 앞둔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이 다이빙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하면서 새로운 ‘다이빙 팀’이 결성되었다. 두 분 모두 필자의 다이빙 예찬론을 들으며, 동영상을 보면서 다이빙에 이끌렸고, 골치 아픈 업무를 잠시 잊고 휴식을 갖고자 하는 뜻이었으리라.여기서 잠깐, ‘스쿠버 다이빙’이란 용어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흔히들 ‘스킨 스쿠버’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스킨다이빙과 스쿠버다이빙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잠수방법이다.스쿠버 다이빙(SCUBA Diving)은 수중 호흡장치(Self 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를 지닌채 부력 조절기, 즉 BCD(Buoyancy Control Device) 또는 BC(Buoyancy compensator)를 입고 잠수하는 수중 다이빙(underwater diving)이다. SCUBA는 원래 잠수장비를 가리키는 명사였지만 현재는 이 방식의 기구를 사용하는 잠수 활동 자체도 스쿠버로 일컬으며, 또한 형용사적인 언어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다이버가 등에 메는 통은 산소통이 아닌 ‘압축 공기통’이다. ▲ 필자가 입고 있는 것이 BCD, 등에 멘 것이 공기통. 공기통에 연결된 검은색, 노랑색 호스가 주호흡기와 보조호흡기 호스다. ⓒ뉴스투데이 스킨 다이빙(Skin Diving)은 공기통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산소 다이빙, 맨몸으로 잠수한다고 해서 스킨 다이빙이라 부르기도 한다. 스쿠버 다이빙처럼 각종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잠수하는 스포츠이다. 잠수복, Fin(오리발), Mask(수경), Snorkel(숨대롱) 등을 착용하고 잠수한다.다이빙 팀이 결성되고, 행선지는 Puerto Galera의 Sabang Beach(흔히들 ‘사방’이라 부른다)로 정했다.(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남쪽에 있는 바탕가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약 40~50분 거리에 있음). 세부는 두어 번 가봤기에 다른 지역도 가보고 싶었고, 이곳 수중 환경 또한 훌륭하다고 다이버 고수들한테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터넷 등에서 추가 관련 자료를 확인하고 예약을 진행했다.‘두 분’을 포함한 5명의 다이빙 팀이 마닐라 공항으로 날아가 늦은 밤에 도착했다. 다시 9인승 정도 되는 승합차량에 올라 서너 시간을 간 후, 바탕가스 항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사방으로 향했다. 사방에 도착하니 먼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동 간에 잠은 잤다고 하지만 의자가 불편하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도 아침식사 후에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이빙 샾으로 향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 같이 들뜬 기분으로. ▲ 다이빙 숍에서 바라본 바다. ⓒ뉴스투데이  다이빙 숍에 도착한 후, 강사들과 인사하고 ‘학생 다이버 두 분’은 이론교육에, 자격증을 가진 다이버는 체크 다이빙을 시작했다. 다이빙 숍 앞바다에서 체크 다이빙을 했는데, 수중 환경은 평범했다. 전날 수면이 충분하지 못해서인지 평소에 다이빙할 때보다 피로가 빨리 몰려왔다.한편 두 번의 다이빙을 마치고 오니 ‘학생 다이버 두 분’은 벌써 기본 이론 교육과 수영장 강습을 일부 마치고 중간 휴식 중이었다. 얼굴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 표정. 역시 수학여행은 학생 때나 환갑이 다 되어서나 다들 좋아하는 야외 활동이다. (필리핀이나 괌 등지에서는 이틀 과정으로 Open Water 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다.)첫날 소정의 이론 교육과 수영장 교육을 마친 ‘학생 다이버 두 분’은 다음날 바다에서의 다이빙 실습에 들어갔고, 나머지 인원은 다이빙 포인트로 이동해서 다이빙을 즐겼다. 상쾌한 수중 시야와 따뜻한 수온, 그리고 형형색색의 산호와 물고기 등.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다속에서의 절대적인 자유와 평안함. 그리고 수면 휴식 때의 천국과 같은 안락함. ▲ 다이빙 실습을 마치고 배에 오르는‘학생 다이버’ 다음날, 오전 다이빙을 마치고 ‘학생 다이버’들이 교육받고 있는 장소로 이동해서 그들과 합류했다. 바다에서 실습 다이빙을 마치고 보트 위로 올라오는 ‘학생 다이버’들의 얼굴은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마치 20대 청년으로 돌아간 듯한 그런 모습으로. 오후에 나머지 실습 다이빙과 필기시험만 통과하면 ‘두 분’은 이제 국제 공인 다이버가 된다.그리고 그날 저녁, 필기시험까지 무사히 치룬 ‘두 분’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가졌다. 아마 그때 ‘두 분’의 기분은 내가 ‘수영장 25m를 자유형으로 처음 수영했던 그날’과 비슷한 기분이었으리라. 다음날 아침 임시 자격증을 발급받은 ‘학생 다이버 두 분’은 업무상 먼저 마닐라로 출발했고, 나머지 3명은 이틀간 더 다이빙을 했다.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7-09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4) 다이빙 입문은 수영실력과 무관
    해군장교로 정년퇴직한 동기생 스쿠버 다이빙 권유받고 "집 사람 허락받아야 해"수영 못해도 스쿠버 다이빙 즐길 수 있어필자 권유로 60대 2명, 50대 2명, 40대 1명 등 5명 스쿠버 다이빙 입문해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다보니 자연스레 지인들에게 ‘다이빙 세계에 입문’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속에서 즐기는 풍류에 부담을 가지는 것 같다.다이빙을 권유할 때 돌아오는 가장 많은 대답이 “수영을 잘 못해서...”, “어릴 때 물놀이 갔다가 빠질 뻔해서... 지금도 물이 무서워...”, “육상에서 하는 등산이나 골프는 좋은데 물에서 하는건 부담되네...” 등등 점잖게 동참할 수 없음을 내비친다. 그러면 나도 점잖게 동의한다. “맞아. 물이 무서우면 적응하기 힘들지...”해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 동기생 중 ‘동참 거부 의사를 밝히는 대답‘은 대부분 다음과 같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는데, 또 바다에 가라구? 이제 그만 가련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다가 이런 대답이 나오면 그저 씩 웃는다. “나도 다이빙을 하고 싶은데 집사람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 집사람이 스쿠버는 위험하다고 적극 반대하네...” 이럴 때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처량하기까지 하다.도대체 지금 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부인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씩 웃으면서 그 친구 얼굴을 다시한번 쳐다본다. 하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부인의 허락은 당연히 받아야지. ▲ 필자의 권유로 다이빙 세계에 입문한 지인 ⓒ뉴스투데이  필자는 어릴 때부터 수영은 잘하지 못했지만 물은 좋아했다. 다이빙의 세계에 입문할 당시 필자의 수영 등급을 굳이 언급하자면 C 등급이었다. (A:최우수, B:우수, C:보통, 그럭저럭 물에는 떠 있음, D:물도 사람도 서로 싫어함). 즉, 수영 형태야 어쨌든 수영장(25m 길이) 끝에서 끝까지 가라앉지 않고 가는 수준이었다.그래서 처음 다이빙 숍에 갔을 때 첫 질문이, “수영은 잘하지 못하는데, 다이빙을 배울 수 있는가?”였다. 강사는 “물만 무서워하지 않으면 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했다.(수영 못한다고 다이빙을 망설이는 모든 분들에게 위 글을 강조해서 말씀 드리고 싶다. “수영을 잘하지 못해도 다이빙은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즐기는 다이빙은 NAVY SEAL 같은 해군 특수부대 임무가 아니기에)그로부터 몇 년 후, 지방에서 근무할 때인데,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인근 대학교에서 체육관(수영장을 비롯한 각종 체육 시설)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한다고 한다. 그것도 30% 할인까지. 기회가 왔다 싶었다. “이번 기회에 수영을 체계적으로 배워보자. 일주일에 이틀이라는데 퇴근하고 가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영장에 등록을 했다(등록하고 보니 사우나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수영장 초급반에 들어가서 수영장 벽을 붙잡고 “음파 음파(수영강습을 받아 보신 분들은 무슨 용어인지 아실거다)”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 정도면 내 스스로 정상적인 호흡을 하면서, 자유형으로 수영장 25m 거리를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3개월이 지나도록 자력으로 25m는 커녕 호흡도 안되었다.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물이 나를 싫어하나?......”.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호흡이 되었고, 자유형으로 25m를 수영해서 갔다.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25m를 내 스스로 호흡을 하면서 가다니!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몇 차례 자유형으로 수영장을 왕복하고,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저녁, 정말 맛있게 맥주를 마셨다. 아주 뿌듯한 느낌으로.그 다음부터 필자의 수영 실력은 일취월장. 그 다음날 50m 왕복이 되더니  100m, 200m, 300m 수영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1.5km를 자유형으로 수영(쉬지 않고)할 수 있게 되었다(수영장 왕복 횟수를 세다가 잊는 경우도 있었으니 1.5km를 더 갔을 수도 있다). 그때는 한강도 건널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도를 보고 한강에서 가장 폭이 좁은 지역을 보니 폭이 1km 정도 되는 구간이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다.그래서 요즘은 누가 수영 얘기를 하면, 눈을 지그시 감고 듣다가 추임새를 넣는다. 아주 무게 있는 말투로. “나도 예전에 이 정도 수준까지 했어”라고 한마디 한다. 물론 수영의 고수가 들으면 이 또한 하찮겠거늘...그러면, 필자는 다이빙 경험이 엄청 많고, 상당한 고수인가? 아니다. 이제 겨우 초보자 수준을 벗어났을 뿐이다. ▲ 필자의 Advanced Open Water Diver 자격증 필자가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다이빙을 시작한 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현역 시절에는 임무 수행상 자주 다이빙 여행을 가지는 못했다. ‘장롱 면허 다이버’라고나 할까... ‘가뭄에 콩나듯’ 다이빙을 했다. 정기적인 수준 유지 다이빙은 꿈도 못꾸었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다이빙 가면 장비 결합이 서툴때도 있었고, 수중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먹는 경우가 있었다.바다속에서의 절대적인 평안함과 자유, 다이빙 후의 상쾌한 기분 등은 전역 이후 100여 회의 다이빙을 하면서 점점 그 깊이가 더해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물론 현역 시절에도 간혹 그런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만족감은 아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그저 수중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좋았었다.한편, 그동안 지인들에게 다이빙 입문 권유를 한 결과 5명이 다이버 자격증을 취득했다. 나이별로 보자면 60대 2명, 50대 2명, 40대 1명 등이다. 이중에는 필자가 지휘관으로 모시던 사관학교 선배님이 한 명, 고등학교 동창생이 한 명 있다. 모두들 첫 다이빙을 마치고는 환상적인 수중환경에 매료된 얼굴들이다. ‘국제 공인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7-02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3) 필리핀 세부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바다 속
    그 많은 ‘니모(Anemonefish 또는 Clownfish)’들이 말미잘 주위에서 노니는 ‘절대 평정’ 감상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사전 조사 및 현지 예약을 마치고, 1주일 후에 후배와 함께 세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전 조사하면서 보니, 국내에 저가 항공사가 여러 개 생기면서 항공료가 많이 저렴해진 것을 알았다. 10년 전 같으면 항공료 부담이 많았을텐데.)다이빙 숍 인근의 다소 허접한 현지 숙소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다이빙 숍으로 갔다. 한국인 강사들 및 필리핀 현지 강사들과 인사 후, 다이빙 전 브리핑을 하고 샾 인근의 바다로 들어갔다. 필리핀에서의 첫 다이빙이자 일종의 체크 다이빙! ▲ 세부 앞바다에서 다이빙 중인 필자 [사진=뉴그랑블루/뉴스투데이] 당시 다이빙 조건은 최대 수심 18.2 m, 다이빙 시간 28분, 수온 28도, 수중시정 15m 이상! 그리고 바다속에 산재해 있는 각종 산호, 형형색색의 물고기 등등. 특히 제주도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흰동가리(영화 “니모를 찾아서”로 유명해진 그 물고기 “니모”, 영어 명칭은 “Anemonefish 또는 Clownfish”)가 여기에서는 동네 강아지만큼 많았다. 그 많은 ‘니모’들이 말미잘 주위에서 노닐고 있는 모습이라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첫 다이빙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용궁이 여기 있었네!” 그동안 명경지수와 같은 바다를 찾았는데, 드디어 찾았다. 훌륭한 수중시정과 따뜻한 수온, 그리고 용궁과 같은 물속 풍경! 감동이었다. ▲ 산호와 바다뱀 (다이빙 숍 대표가 같이 다이빙하면서 촬영). [사진=뉴그랑블루/뉴스투데이] 오후에 다이빙을 두 번 더 했다. 수중에서 펼쳐지는 감동의 연속! 세 번의 다이빙을 마치고, 바다속에서의 절대적인 평안함과 감동을 간직한 채, 다이빙 숍으로 돌아왔다.잠수복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바다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쪽빛 바다와 파란 하늘, 저 멀리 하얀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잔의 커피. 바다와 하늘과 구름이 커피의 향과 함께 모두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 다이빙을 마친 후 바라본 바다와 하늘과 구름 [사진=뉴그랑블루/뉴스투데이] 바다속에서의 풍류! 그리고 절대적인 평안함과 자유! 그리고 다이빙을 마친 후, 상쾌한 심신으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그 느낌! 이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로운가!그래서 필자는 다이빙을 즐긴다. 그리고 다이빙을 사랑한다. (다음에 계속)            - 최 환 종  (崔 桓 種) -   ·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 예비역 공군 준장 · 공군사관학교(전자공학), 한양대 대학원(전자공학) 졸업
    • 이야기쉼터
    • 칼럼
    • 최환종의 스쿠버 다이빙
    2018-06-25
비밀번호 :

주요기업 채용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