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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노예(奴隸)의식에서 주인(主人)의식으로
    ▲ [사진=윤재은 기자] ‘노예(奴隸)의식에서 주인(主人)의식으로’ - ‘생산(生産)에 관여하는 노동만이 실체의 생산자라 할 수 있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제기된 실체의 문제는 존재의 문제를 넘어 ‘생산에 대한 주체의 질문’이다. 생산이란 노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생산해 내는 것인데, 생산에 관여하는 노동만이 ‘실체의 생산자’라 할 수 있다. 생산된 실체의 주인이란, 생산된 것의 원인이며, 그것이 있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노동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생산해내는 생산의 주체적 활동이며, 고귀한 과정이다.신은 말(Logos)을 통해 세계를 만들었다. 신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노동의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6일간의 노동은 힘든 노동이었으며, 하루를 쉬어야 할 정도의 노동이었다. 따라서 신의 속성을 담고 있는 창조주도 노동을 통해 생산에 참여한 후 휴식을 취하셨다. 그리고 신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창조된 실체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이 ‘주인의식’이다.전지전능한 신의 노동에서 얻어지는 자연의 모든 생산적 실체는 신의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땀과 노력으로 세계는 생산되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주인은 결국 신인 것이다. 신 앞에 한없이 나약하기만한 인간이 창조적 실체인 신에 의지하는 것은, 이 세계의 주인이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생산의 원인이며 세계의 주인인 것이다.우리가 사는 세상도 신의 생산적 관계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땀방울과 노동으로 만들어진 생산 대상은 생산에 참여한 자가 주인이다. 생산자는 자신의 노동과 땀방울로 대상을 만들고 그 결실을 통해 세계를 이끌어간다. 이처럼 생산자의 의식이 대상의 주인이 될 때 이것이 ‘주인의식’이다.만약, 농부가 밭을 갈아 감자를 생산해 낸다면, 생산된 감자는 농부의 것이다. 농부는 자신의 땀과 노동을 통해 감자의 생산에 참여하고, 감자는 생산의 단계를 거쳐 실체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산된 감자는 농부의 소유가 되고, 농부는 자신의 소유인 감자를 팔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다. 세계의 주인이 신인 것처럼, 감자의 주인은 농부이다.이처럼 생산의 주체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주인의식의 세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생산의 주체가 주인이 되는 세계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자본이 생산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모든 생산의 대상을 자본의 가치로 평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의 주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본의 주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이렇게 자본이 주인이 되는 세계에서는 생산의 주체인 노동은 주인의식으로부터 소외받게 된다. 소외받은 노동은 감자의 주인에서 감자의 ‘생산자’로 전락한다. 주인의 역할에서 생산자의 역할로 전락한 농부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 가치를 평가 저하시켜버린다. 왜냐하면, 농부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생산성의 고귀함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은 자신의 의지보다 사회의 시스템과 거대한 자본의 위력 때문이다.노동과 생산은 고귀한 것이며, 생산적 사회에서 꼭 필요한 활동이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를 모르는 탐욕자의 눈에 노동은 착취의 대상이 된다. 적정한 노동의 대가보다 값싼 임금을 통해 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려는 탐욕자의 눈에 노동은 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생산의 실체인 생산자보다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가 승리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힘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노예의식의 생산자는 그러한 처지를 자신의 무능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노예적 삶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깨어있는 주인의식은 그러한 사회적 현실을 극복하려고 한다. 정당한 노동과 생산을 통해 적정한 이익이 보장되는 사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노예의식에서 주인으로의 의식은 깨어있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의식이다.사회는 공동체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노동가치에 대한 관리부실로 사회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생산에 참여한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대가를 적절히 받고, 자본을 투자하는 자본가가 자신의 투자비용을 적절히 받는다면, 이러한 사회는 이상사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투자한 자본의 비율이 노동과 생산의 가치보다 과도하게 많게 되면, 그 사회는 불평등한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고대 철학자 플라톤(Plato)은 국가론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하는 공산사회를 이상국가의 틀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인간의 탐욕을 모르는 이상적 생각일 뿐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사회는 신분사회로서 언제나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다. 강한 자가 생존의 법칙에서 항상 상위의 그룹에 들어가고, 약한 자는 자신의 노동과 생산을 적절히 평가받지 못하는 하위계급에 속해 있었다.이러한 신분의 차이는 민주사회에서 타파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의 내면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자본과 권력에 따라 이러한 경향이 조금씩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신분제도는 반드시 없어져야할 편견이다.인간이 모두 평등하고 행복한 이상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노동과 생산의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는 사회이어야 한다. 그리고 계급과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사회이어야 한다. 노동은 생산의 원인이며, 생산은 삶의 원인이기 때문이다.이념의 논쟁이었던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 속에서 주인과 노예의 의식을 보았다. 그는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가 노예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노동 가치를 보지 못하고, 주인에게 의지하는 노예의식을 보았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불평등한 현상 속에 사로잡힌 노동자들의 삶을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들의 노동에서 얻어진 생산 의식을 보았다.마르크스의 이러한 외침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노동과 생산의 가치에 대한 부르짖음이었다. 노동의 가치로 얻어진 생산의 가치는 땀 흘려 일한 그들에게 있다는 부르짖음이었다. 마르크스가 바라본 노동과 생산은, 사회에 있어 고귀한 열정이며, 사회의 구심점이었다. 노동이 없이는 생산이 가능하지 않고, 생산이 없이는 인간이 살수 없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생산의 대가가 노동자에게 돌아가기를 바랐다.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각자의 역할에 맞는 노동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투자한 노동의 대가는 적절히 보상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노동의 정당한 대가가 없는 사회는 불안사회가 되고, 분노사회가 된다. 이러한 분노는 사회의 불안을 야기하며, 개인의 파괴를 넘어 가족과 국가의 파괴를 초래하게 된다.국가는 노동의 가치가 살아있고, 적절한 생산과 분배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땀 흘려 일하는 생산자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주인의식으로 탈바꿈해야 하며, 자본으로 부를 축적한 사업가들은 공평하고 정당한 분배를 통해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요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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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7-11
  • [윤재은 공간철학] 저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리라!
    ▲ [사진=윤재은 기자] ‘저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리라!’ - ‘우리가 죽인 것은 파란 하늘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죽였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그대는 땅만 보고 걷는 대지의 인간인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도시의 이방인! 초(秒)를 다투는 자본의 쳇바퀴 속에서 기계화 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단 한번만이라도 저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리라! 수없이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기계의 톱니바퀴 속으로 또 끌려가 버리고 만다.도시화 된 세계는 ‘해의 시간(Sun’s Time)’을 ‘기계의 시간(Machine’s Time)’으로 바꾸어놓았다. 해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으로 신이 우리에게 허용한 노동의 시간이다. 아침을 맞이하여 생산에 참여하고, 저녁을 맞이하여 휴식을 얻으라는 신의 명령이며, 계시인 것이다.하지만 기계의 시간은 그러한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의 시간 속에서 인간은 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땀 흘리고, 또, 땀 흘려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기계의 시간 속에서 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기계소리에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왜냐하면, 그들에겐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기계적 인간은 해의 인간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인정을 받으려고, 하늘을 한 번도 여유롭게 바라볼 시간적 여유가 없다. 기계적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은 해의 시간 속에 사는 인간보다 자본을 더 많이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힘이며, 생산이다. 하지만 자본의 풍요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본의 무게를 중용(中庸)의 무게로 바꾸어 놓지 않는 한, 자본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황금열쇠가 될 수 없다.해의 시간은 자본의 욕망보다 인간의 삶에 무게를 둔다. 삶의 가치를 생산의 가치보다 존재의 가치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해의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땅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생산의 즐거움 속에서도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이 우리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은 우리들의 꿈이며, 희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다.도시화의 세계 속에서 회색으로 앞을 가려버린 하늘을 보면 우리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의 상징이었던 파란 하늘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앞을 알 수 없는 회색 하늘만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가? 회색의 도시에서 갈길 잃은 우리는 언제쯤 파란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을까?비가 내리기를 기도할 뿐이다. 비가 내리면 잠시나마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인간이 망쳐버린 환경을 신의 눈물로 씻어낼 때 우리는 잠시나마 파란하늘을 볼 수 있다. 이 순간만이라도 신으로부터 주어진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린 시절 하얀 도화지위에 파랑색 크레파스로 마음껏 하늘을 색칠하곤 했던 것이 꿈만 같다. 그 꿈은 이제 꿈이 아니고 현실이기를 바랄 뿐이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하늘의 색을 잊어버렸다. 하늘의 색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늘을 버렸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을 죽였다. 우리가 죽인 것은 파란 하늘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죽였다.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희망을 죽여 버렸다.이제 우리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위에 회색으로 물들인 하늘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처럼 회색을 하늘색으로 알고 자랄 것이다. 얼마나 슬프고, 암울한 현실인가? 욕망을 쫒으려다 희망을 놓쳐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신의 의지로 태어난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축복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자연은 보여주고 있다. 기계의 시간 속에서 삶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한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자연은 보여주고 있다.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택할 것인가? 혹독하고, 어두운 그늘에서 물질적 욕망을 쫓을 것인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산업화를 거부하고, 오염물질의 생산을 거부하는 친환경적 국가들의 정책을 보라! 그들은 물질적 욕망에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를 아는 자들이다.그들은 생산성의 촉진과 도시화보다 생산의 질을 생각한다. 많은 물질이 생산된다 해도 환경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파란 하늘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물질과 자본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종과 배려의 마음이다.각 나라마다 환경의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물리적 안전뿐 아니라, 환경적 안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은 요구하고 있다!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파란 하늘을 되돌려 달라고. 그것은 최소한의 국민적 요구이며, 명령이다. 생존을 위한 명령이다.통치자와 행정부는 이러한 국민의 요구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은 끊임없는 발전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호하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다.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일해야 하고,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생산마저도 지속가능한 생산이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는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에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환경을 살리고,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아무리 바쁜 일상이라도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져야한다. 하늘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기계의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이다. 자신의 삶이 기계의 그림자가 되어 끊임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에 멈추게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무지의 인간이다.물질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중함을 의식하고 절대정신으로의 기차를 갈아탈 수 있는 희망은 헤겔(Hegel)의 절대 정신뿐이다. 우리의 의식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 눈앞에 놓인 회색의 도시를 푸른 하늘의 세계로 되돌리는 것은 변증법을 통해 예측해야 한다.헤겔은 말한다. 우리의 역사란 우리의 의식을 통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는 것을, 헤겔의 절대정신 속에서 삶을 위한 생산을 말하고, 과도한 생산을 통한 환경의 파괴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합을 통해 지속가능한 생산성만이 인간의 행복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친환경 정책으로 새롭게 다가올 대한민국을 기대해 본다. 나는 파란 하늘을 보고 싶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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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6-27
  • [윤재은 공간철학] ‘바다의 경제(Sea’s Economic)’를 모르면, 경제를 말하지 말라!
    ▲ [사진=윤재은 기자] ‘바다의 경제(Sea’s Economic)를 모르면, 경제를 말하지 말라!’ - ‘독식(獨食)의 경제를 넘어 상생(相生)의 경제로’(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이러한 질문은 생명을 갖는 모든 생태계의 본질적 질문이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살아있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는 삶을 소유하는 모든 생명체의 기본 욕구이며, 필연적 욕망이다.인간사회에 있어 생존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와 집결된다. 경제란 자본을 통해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노동과 생산에 의해 경제가 발생된다. 노동과 생산은 판매를 통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의 구심적 동력이 된다.‘경제’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며, 자본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기반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은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자본의 욕구는 생산과 분배의 욕구를 넘어 축적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축적의 욕구는 욕망이 되고, 욕망은 갈등이 된다. 인간이 축적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욕망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나온다.인간의 욕망은 자본사회에서 두 가지로 발전한다. 하나는 ‘공유하는 욕망’이며, 다른 하나는 ‘소유하는 욕망’이다. 공유하는 욕망은 자본의 경제에서 서로의 배려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공유의 경제학에서 배려는 자신에 대한 절제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함께 사는 사회로 발전한다.그러나 소유하는 욕망은 나에 대한 배려만 있을 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의 상태에서 타인은 경쟁의 대상일 뿐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는 갈등의 사회이며, 적대적 사회이다.‘현대 사회는 생존사회이다.’ 생존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자기욕구이다. 자본주의의 경제에서 자본은 생존이며, 삶의 도구이다. 최소한의 인간은 최소한의 삶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이며, 정당한 요구이다. 국가는 이러한 삶의 요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국가의 존립목적이 구성원에 대해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국가는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유지시켜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경제정책에서부터 시작된다. 국가는 국민경제의 밑바탕이 되어야 하며, 국민은 그 밑바탕에서 경제활동을 하게 된다.하지만 국가의 경제 정책이 편중되거나 정의롭지 못하면 그 국가는 갈등국가가 되고, 국민의 행복지수는 저조할 수밖에 없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공평한 경제, 희망이 있는 경제, 함께하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공평하고, 희망 있고, 함께하는 경제가 되기 위해선 ‘바다의 경제학(Sea’s Economic)’을 배워야 한다. 지구표면의 70.8%를 차지하는 바다의 경제는 육지의 경제와 사뭇 다르지만 그 근본은 하나이다. 바다는 살아있는 생태계를 유지하면서도 3단계의 경제체제가 자연의 섭리를 통해 잘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바다경제의 1단계는 ‘플랑크톤 경제(Plankton Economy)’이다. 바다경제의 최소단위인 플랑크톤은 바다 생태계의 기초경제이다. 바다에 서식하는 모든 생태계는 플랑크톤의 먹이사슬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바다 경제의 밑바탕이 되며, 상위 포식자인 피시(fish)의 먹이가 된다. 바다에 피시가 살 수 있는 것은 플랑크톤이 있기 때문이다. 플랑크톤은 바다경제의 생태계가 유지되는 원인이다.육지경제의 플랑크톤은 노동자이다. 생산의 주체가 되며, 모든 생산의 기초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육지경제의 기초가 된다. 육지경제의 모든 생산과 분배는 이들의 땀방울 수만큼 생산되고 분배된다. 이들은 육지경제 생태계의 근본이며, 원인이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건에도 만족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들의 경제적 활동요구는 인간의 기본권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요구이다. 그리고 이들의 노동은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다.바다경제의 2단계는 ‘피시 경제(Fish Economy)’이다. 물고기들은 바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중 하위생태계인 플랑크톤을 통해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플랑크톤의 작은 경제체계엔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고래나 상어와 같은 상위포식자의 그룹에도 관심이 없다.이들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바다 속의 중심 세력이 되어 플랑크톤을 흡수하고, 상위포식자의 생존을 유지시킨다. 플랑크톤의 죽음을 통해 얻은 피시의 삶은 고래의 삶이되고, 바다는 끊임 없이 순환의 경제체계로 살아간다.육지경제의 피시(Fish)는 샐러리맨(Salaryman)들이나 중소기업들이다. 이들은 육지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며, 국가경제의 주춧돌(Foundation stone)이다. 하지만 이들은 임금 노동자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그렇다고 슈퍼부자(Super rich)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이들은 자본주의 경제체계 속에서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며,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룹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목표가 있고, 안정과 성공이라는 두 갈래의 길을 꾸준히 가는 그룹이다.바다경제의 3단계는 ‘고래 경제(Whale Economy)’이다. 이들은 물고기이 아닌 포유류이지만 바다생활을 하면서 최상위의 포식자에 들어간다. 이들은 몸집이 너무 커서 엄청난 물고기를 먹어야 산다. 물고기가 플랑크톤을 먹는 양은 비교도 할 수도 없다.이들은 엄청난 피시(fish)들의 희생을 통해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간다. 이들의 생태계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고래가 아니라 피시이다.육지경제의 고래(Whale)는 대기업이다. 대기업은 국가경제의 모든 것을 좌우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다. 이들의 경제활동은 개인의 경제활동을 넘어 국가 경제까지를 좌우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그룹(group)군에 들어간다.이들은 소수의 그룹 군을 가지고도 다수의 그룹을 리드한다.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육지경제의 큰 방향을 결정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들의 잘못된 판단은 수많은 피시와 플랑크톤에게 삶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육지와 바다의 3가지 경제군은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만족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와 함께 성장해야한다. 만약 고래와 같은 포식자가 자신이 배고프다고 플랑크톤과 피라미 같은 물고기를 다 잡아먹는다면, 바다의 생태계는 혼란을 휩싸이며, 피시(Fish)류 들의 멸종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피시의 종말은 결국 상위포식자인 고래의 종말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플랑크톤과 피시(fish)가 존재하지 않는 바다경제의 생태계를 생각해보라! 아무리 최상위의 포식자인 고래라 해도, 먹지 않고는 살수 없다. 그들의 몸 규모는 너무 커서 작은 플랑크톤이나 피라미로는 배를 채울 수 없기 때문에, 피시의 종말은 결국 자신의 종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고래의 종말에도 작은 규모의 플랑크톤이나 피시는 결국 살아남는다는 것이 바다경제학의 교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작게 먹고도 살아남는 법을 자연으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이처럼 대기업이 혼자 살겠다는 욕망으로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의 영역에 진출하여, 그들의 생존수단을 먹어치운다면, 처음에는 그들의 배가 부를 수 있지만 그 결말은 결국 대기업의 피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대기업은 한번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 엄청난 경제적 파장을 가져오지만 소규모의 경제주체는 피해를 최소화해 다시 살아남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소상공인이 몰락한 사회에서는 중소기업이 몰락하게 되고, 중소기업이 몰락한 사회에서는 대기업 자신의 몰락으로 갈 수 밖에 없다.바다경제에서 배웠던 배려와 만족의 생태계가 바다경제의 생존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육지경제에서도 각자의 경제규모에 맞는 경제활동은 육지경제의 생태환경을 유지시키는 기초가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큰 기업이 중간 기업의 영역을 탐내고, 중간 기업이 소상인의 영역을 탐내는 것은 육지경제계의 생태계를 망치는 것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 조그마한 탐욕이 큰 화를 가져오는 것처럼 대기업은 대기업으로서의 영역에서 큰 크림을 그리고,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의 영역에서 국가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때, 그 국가는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국가가 될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경제체계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땀방울을 흘릴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현대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라! 가난에 허덕이거나, 삶이 무게가 무거워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우리는 국가에게 힘을 주었고, 국가는 그 힘을 우리 모두를 위해 적절히 사용하기를 바란다.관념주의의 완성자 헤겔(Hegel)은 ‘힘의 의지’를 강조한다. 힘의 의지는 의식에서 나오며, 자기의식의 발현이 힘의 발현이 된다. 자기의식의 발현은 절대정신에서 가능하며, 국가는 절대정신의 기틀아래서 경제정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힘은 어디서 나오는 가? 국가의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의 국가에게 힘을 담보 맡기어 보호받기를 원한다. 보호받고자 하는 모든 국민들을 위해 국가는 힘의 의지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정의로운 국가는 정의롭게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힘이며, 힘의 의지이다.만약, 대기업이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의 영역을 탐낸다면 국가는 힘의 의지로 그것을 통제해야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사회이며, 희망이 없는 국가는 망한 국가이다.아름다운 지구의 별에서 태어난 우리! 내 한 몸, 내 한 가족 지켜 줄 수없는 국가라면, 그 국가는 국가의 역할을 포기한 국가이다. 광활한 바다에서 서로 배려하며 자신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저 위대한 바다의 경제를 배우라! 그리고 말하라! 국가는 서로의 배려를 통해 상생으로 나아가는 국민경제의 나침판이라고!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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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6-02
  • [윤재은 공간철학] 인간(人間)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 [사진=윤재은 기자] 인간(人間)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 “묻고도 답을 들으려 하지 않는 나, 듣고도 말하지 않는 너”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대상은 의심할 수 없는 실체이다. 세계의 모든 대상은 항상 공간적이며, 시간적이다. 공간과 시간 앞에서 모든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며, 실체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 앞에서 현재라는 대상이 된다.현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체이다. 만약, 현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된 상태에서는 세상 모든 것은 부정된다.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은 말한다. 현재는 존재이며, 실체인 것이라고...현재의 나는, 지금의 나이며, 세계의 나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세계, 우주, 실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계는 스스로의 나에게 질문한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 질문은 단순하다.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눈먼 자의 세상에서 세계는 암흑이듯이, 삶의 가치를 모르는 자의 눈에 세계는 또 다른 암흑이다. 어둡고, 어두운 세계의 터널에서 빛의 상쾌함을 맛 볼 자 누구인가? 우리는 암흑의 그림자와 빛의 그림자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짧고도 긴 우리의 운명과 함께 한다.삶은 선택하는 자의 것이며, 선택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삶의 가치를 시간의 가치에 둘 것인가? 아니면 삶의 가치를 물질적 욕망에 둘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세상에 있어 가치 있는 것은 그 가치의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삶의 가치는 살아 있는 동안 빛나는 것이지 죽은 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겨있지 않다.세계의 어떤 거부(巨富)라도 이러한 세계의 원리에서 빗겨나갈 수 없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모두에게 삶의 시간은 공평하다. 삶은 시간의 가치에서 동일하고, 물질적 가치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물질적 가치로 판단한다. 시간이 물질이 될 때, 세계는 물질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고귀한 정신은 자기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의식으로 바뀌어간다. 물질이 시간의 가치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이제 세계는 삶의 가치에 있어 물질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통해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물질과 의식의 전쟁에서 끝까지 생존할 자는 누구인가? 물질은 시간이 가면 소멸하는 것이며, 죽음을 통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순수한 정신은 영원한 것이며, 불멸하다.물질의 가치는 시간에 따라 잠들어 버리지만, 정신이 갖는 고귀한 의식은 영원히 잠들지 않는 우주와 같다. 신은 물질을 통해 실체를 만들지만 실체의 존재의미는 의식에 있는 것이다. 의식과 물질 앞에서 고개 숙이는 자들과 당당한 자들을 볼 수 있다. 고개 숙이는 자는 비굴하고 나약한 자이며, 당당한 자는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개척해가는 자이다. 삶의 가치는 자신의 의식에 있으며, 절대적 정신 속에서 신과 함께 있다.국가, 사회, 자본이라는 구조 속에서 물질은 자본이고, 힘이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인간은 물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하지만 물질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능한 많은 물질은 사회인으로서 우리에게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이 과하면 의식은 안정에서 욕망으로 변해간다.물질이 욕망이 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세계이다. 세계는 말한다! 우리의 앞에 두 개의 빛줄기가 있다고. 그 두 개의 빛 줄기중 하나는 희망과 행복의 빛줄기요, 다른 하나는 불행과 고통의 빛줄기이다.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빛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생겨나고 소멸한다. 헤겔(Hegel)의 힘의 의지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그 빛을 더 발한다. 의식의 힘! 그리고 절대 정신의 힘은 세계의 빛이고 희망이다. 희망의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의 그림자만 보는 인간은 세계의 시간이 암울함이지만, 헤겔의 정신으로 희망의 빛을 보는 사람에게 세계는 환희, 축복 그리고 은총이 된다.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세계의 나는 고독한 존재이고, 외로운 존재이다. 우주의 거대한 자연 속에서 세계의 이방인처럼 자신의 고귀한 존재를 모르고,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하지만 인간이 우주와 자연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인간은 그저 그렇게 사는 인간이 아니다. 생각하는 인간은 ‘삶의 의미’에 많은 무게를 두고 사는 인간이다.생각하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한다. 나의 정신을 내 육체에서 떼어내어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육체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리고 묻는 나는 대답하는 너에게 답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묻고도 답을 들으려 하지 않는 나, 듣고도 말하지 않는 너” 속에서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나는 세계이며, 존재이다. 그것도,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이다. 세계는 나의 존재 속에서 현실이 되고, 실체가 된다. 세계는 말한다. 그대의 몸속에 흐르는 피의 흐름을 통해 고동치고 있는 삶의 가치를 찾으라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는 아니라는 말처럼, 세계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절대적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난다.조그마한 것에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게 빛의 세계, 정신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 곳을 향하는 우리의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그 걸음걸이는 시간의 속도와 동일하다. 어떠한 폭풍우와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발걸음은 세계의 기지개가 되고, 희망이 되고, 빛이 된다.세계여! 그대들이 그렇게 찾고자 했던 행복의 실체는 그대의 정신에 있으며, 순수한 의식의 절대정신 속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을 구하는 자... 그대이며! 그것을 구할 자... 그대뿐이로구나!.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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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5-17
  • [윤재은 공간철학] 셸링: 자기의식의 세계에서 자연은 ‘유기체적 무의식’이다.
    ▲ [사진=윤재은 기자] 셸링 : 자기의식의 세계에서 자연은 ‘유기체적 무의식’이다. - 자연철학은 삶의 가치를 높이는 ‘철학의 원리’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삶의 하루하루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먹고, 자고 활동하는 시간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스스로의 질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망각하고 자본화되어간다. 스스로의 주체가 무엇인지 모르고 ‘나는 자본 때문에 산다.’라고 외치고 있다.자본은 삶의 수단으로 인간들의 약속에 의해 만들어진 노동의 단위이다. 노동이란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짐승들이 들판으로 나가 먹이를 사냥하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모든 짐승들은 생존을 위해 활동이 필연적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에도 규칙이 있다. 인간처럼 많은 것을 축적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다.하지만 인간의 활동은 짐승의 활동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처럼 살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과다한 움직임이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소중한 시간을 부의 축적을 위해 모두 사용해 버린다. 그렇게 축적된 부의 가치는 삶의 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젊음의 열정을 부의 축적으로 다 소비해 버린 노년의 삶은 비참하고 참혹하다. 이러한 노년은 넘쳐나는 물질에 둘러싸여,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두 손으로 그것들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후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다.자본에 대한 욕망은 시간 앞에선 부질없는 짓이다. 시간은 물질을 탐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시간의 가치와 활용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현명한 지(智)자는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고 삶의 가치를 질(質)에 두는 반면, 욕(慾)자는 끝없는 물질을 추구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삶은 확실히 다르다. 그리고 그 가치도 다르다. 그것의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다.물질주의로 치닫는 현대사회에서 삶의 지혜를 사고, 파는 은행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의 가치를 은행에 맡겨놓고 그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사용하는 지혜의 은행은 자본을 담보로 성장하는 은행보다 훨씬 더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은행일 것이다.독일의 자연주의 철학자 셸링은 지혜의 은행과 같다. 그는 낭만주의에 근접한 자연철학자로 독일의 관념론을 완성하는데 지혜를 팔았다. 그가 판 지혜는,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셸링의 자연철학은 자본주의 철학과 달리 정신에 그 깊이가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정신에 기반 하는 것처럼, 자연 상태와 자본 상태에서 어떠한 길을 갈 것인가는 자신의 의지와 정신에 달려있다.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은 셸링에게 신성(神性)으로 나타난다. 셸링은 이러한 철학적 기반을 철학적 사유의 제1근본 원리 속에서 발견한다. 셸링에 있어 자연은 무의식적 지성을 발견하는 장이였으며, 자연발생의 대상에 대한 최고의 목표는 자각적 정신이다.자각적 정신의 존재로서 인간은 실체하는 것이고, 정신은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하나이다. 자연으로부터 창조된 무의식적 실체에 대한 신의 개념은 의식적 지각의 정점으로서 정신의 개념이 설정된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기물은 각각의 원질에 따라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산출되어진다. 우리의 정신도 자연의 산출과 같이 지식의 기반이 되는 인식은 정신을 통해 수많은 판단이 된다. 하지만 우리 자아의 바깥에 있는 인식은 용납되지 않는다.시간과 현상에 따라 사라지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자연 속에서 무의식적 자아를 통해 무의식적 정신이 된다. 셸링이 주장하는 자연철학은 경험적 지각이나, 인식이 아니고 정신적 실재론이다. 이러한 지식의 실재적 주장은 관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관념론이면서도 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 실체적 자아에 있어 피히테의 주장처럼 자아는 실체를 가지지 않으며, 순수한 활동성이었다.정신이 갖는 무의식적 자아는 실체를 넘어선 정신이며, 이것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실체의식은 그 어떤 것 속에 존재한다. 셸링의 자연철학은 동일성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정신과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자연과의 동일성은 셸링철학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형이상학적 사상이다. 실체의 논쟁이 되는 자연의 대상과 우리들의 생각에 존재하는 대상의 자아는 하나의 동일체이다.자연과 정신의 두 가지 조건은 본질적으로 하나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서 자연의 외부에 의해, 혹은 정신의 내부에 의해 한계 지워지지 않는다. 실체에 대한 절대적 진리는 ‘정신의 자연’과 ‘자연의 정신’에 동일하게 내재되어 있다.  셸링은 정신의 무의식적 창조활동을 주장한다. 자연은 자아의 관념적 산출력으로부터, 무반성적인 상태에서, 어떤 무의식적 힘으로부터 발생된다. 정신의 창조적 원리는 자아의 인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인식을 넘어 의식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선험적 세계이다.자연은 빛의 본질처럼 실체를 담고 있다. 만물의 생산에 근원적 힘이 되는 능산적 자연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시작되었지만 셸링은 이를 실체의 범신론만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대상과 정신의 대상이 하나라는 선험적 세계 속으로 끌어들였다.셸링의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이 세상의 빛 아래 존재하는 모든 자연의 대상과 대상의 실체인 정신을 통해 오성으로 깨닫게 한다. 살아있는 유기체적 자연이 세계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는 하나의 정신으로 지배되어야 한다. 셸링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에서 정신의 실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셸링이 말하는 능산적 자연의 정신은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적 사유와 같은 길을 간다. 실체의 판단이 되는 객관성은 정신의 내부에 그리고 물체의 외부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두 개의 것들이 분리되어 생각되어진다면, 실체의 영역은 영원히 파헤치지 않는 무덤이 될 뿐이다.셸링의 정신에서 나오는 영원한 내적 대상원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세계의 원형을 따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정신적인 형상의 원리이지만, 셸링의 이데아는 자연과 정신이 하나로 합쳐진 실재적 원형이라 할 수 있다.실체적 이데아는 현상방식에 따라 신의 정신이 자연의 대상을 통해 인간의 인식 속에 들어온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정신 속에서만 인식되고, 실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을 빌려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정신적 관념의 근거는 뿌리를 내린다.유한한 것을 통해 무한한 것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그이 이론은 선험적 관념의 뿌리에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모든 사물이 갖는 존재의 공통된 속성은 신안에 있고, 신의 존재방식은 자기의식에 있으며, 절대자의 존재와 실체의 속성이 동일하게 인간의 정신에서 완성되는 것이다.과학으로 알게 된 모든 관념의 세계가 반드시 기계론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과학의 한계는 과정과 결과가 인식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모든 진리의 결과라 말할 수 없다. 과학은 언제나 결과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기체로서 자연은 그 시작을 자연의 실체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대상의 자연과 정신의 자연을 하나의 영혼으로 묶어두고 그 속에서 절대자의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유기체는 사물의 원리이며, 자연의 원리이며, 존재의 원리이다.셸링은 정신이 세계에서 어떻게 자연의 생명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대상의 물질에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실체에 대한 질문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으로서, 합리적 이성이나, 경험적 이성의 모든 것에는 우리의 관념을 형성하는 보편자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자연 속에서 정신은 창조적인 에너지이며, 무의식적 정신이다. 자연의 모든 산물은 무기적 정신이 자기의식을 향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며, 이러한 길이 순수한 관념의 실체이다.바쁘게 돌아가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오늘도 짧은 시간이나마, 먼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기를 바래본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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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3-17
  • [윤재은 공간철학] ‘피히테: 원칙(原則)’은 존재가 아니고 행동하는 양심에 달려있다
    ▲ [사진=윤재은] ‘피히테: 원칙(原則)’은 존재가 아니고 행동하는 양심에 달려있다 :행동의 양심에 있어, 원칙은 하늘에 두고, 행동은 대중을 향해야 한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의 의식은 행동의 원천이다.’ 행동은 의식으로부터 시작되어 결과로 나온다. 행동하는 의식이란 정의로운 의식이며, 순수한 의식이다. 행동하는 의식이 물질의 세계와 맞물리면 사심이 되고, 대의와 맞물리면 정의가 된다. 행동의 양심에 있어, 원칙은 하늘에 두고, 행동은 대중을 향해야 한다. 순수한 의식은 대중과 결합하면 힘이 되기 때문이다.인간의 의식을 기능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세계의 뒤처진 사고에서 나온다.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는 이러한 뒤처진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선 행위 자체의 자아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행동하지 않는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를 앞선다. 세계에 홀로선 우리의 자아는 행동하는 자아를 통해 세계로 나갈 수 있다.자아는 홀로 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하는 자아여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함 속에 얼굴을 숨기는 것과 같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행동하기를 겁내지만, 행동하는 자는 말에 앞서 그것을 실행한다. 하지만 행동에는 정의의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은 자신만의 규칙이어야 한다.그 규칙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정의로 와야 한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정의롭지 않으면, 행동은 멈춰야 한다. 한번 날아간 화살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동은 확신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 확신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확신이어야 한다.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의 자아는 우리 바깥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행(事行)’ 속에 존립한다. 사행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지만 모든 사실에 앞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 활동’이다. 우리가 믿는 어떤 사실도 궁극에 가면 의심을 낳는 것은 사실에 대한 정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경험과 의식을 통해 얻은 관념은 시장의 우상에서는 확실성을 갖는 것 같지만, 시장으로부터 벗어나면 많은 의구심을 낳는다. 그러한 의구심은 본질을 희석하며, 혼돈을 가져오고, 결국엔 대중과 자신의 파멸을 가져온다.존재하는 자아는 욕망적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자아 속에서 발생한다. 그 자아는 그 자신 속에 순수하게 내재되어 있는 자아여야 한다. 존재의 문제에 있어 행동하는 자아는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에 대한 근본 문제에서 행동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보다 근본적일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자신을 속이고 세계를 속이기 때문이다.피히테는 칸트의 혁명과도 같은 선험적 이성의 자유우위 사상을 하나의 혁명으로 보고 그 사상을 학문의 제1원칙으로 세웠다. 그는 행위의 자기의식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서, 자기의식 그 자체가 확실히 선행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도 기억시킨다.피히테의 자기의식 중 비아(非我)의 정립은 자아(自我)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아의 정립은 자아와 비아의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의식에 있어 주관과 객관은 자아와 비아의 관계처럼 명확하다. 서로 다른 의견은 주관과 객관으로 대립되며, 이러한 의견은 자기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다.하나의 원칙에 있어 주관과 객관은 상대방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하나의 의견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관이 되기도 하고, 객관이 되기도 한다. 의식의 행동에 있어 실천적 의식이나 이론적 의식이나 두개의 관련성은 기본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피히테의 자아와 비아의 관계는 나와 다른 것의 관계를 통해 나의 자아를 구하는 것이다. 자아의 첫 번째 행위를 행동이라 부르고, 두 번째 행위를 인식이라고 부른다. 행동은 실천적 이성이며, 인식은 이론적 이성이다.피히테의 자아는 비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원칙은 대중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정립한다. 절대적 자아는 자아와 비아를 통해 구성된 이론적 자아와 자아의 편에서 비아를 규정하는 실천적 자아로 구분된다.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는 비아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자아를 정립한다. 이렇게 정립된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원칙과 양심에 따라 실천하는 자아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내가 아닌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만 내가 아닌 타자가 보이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내가 우선이고, 내가 주인이며, 내가 모든 것의 진리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러한 판단과 결론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요란한 지식은 부족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처럼, 원칙 없는 행동은 무지함에서 나온다.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된 후 가능하다. 자신의 무지함을 모르는 인간에겐 반성보다는 우매한 욕망이 앞선다.피히테의 말처럼 실천적 자아의 활동성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노력은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한 극복을 말한다. 이러한 극복은 용기 있는 절제와 같아서 원칙이 우선되어야 한다. 원칙 없는 대화와 타협은 사소한 이익에 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원칙 있는 소신은 불의에 타협하거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확신에 찬 소신이 흔들린다면, 그 소신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원칙과 소신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은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선과 악은 하나의 세계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색채와 같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색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빛의 세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빛은 모든 색을 하나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 있어 원칙, 소신, 노력은 실천적 자아의 완성체이다. 세계의 악은 선이 있는 곳에서만 있을 수 있고, 강력한 저항은 평화가 있으므로 돌출되는 것이며, 원칙에 대한 반대는 원칙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원칙과 행동하는 양심의 본질은 자기 자신 속에 있으며, 그것은 자기반성을 통해 완성체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원칙의 완성은 진행형의 속성이 아니고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자기반성을 통한 실천자는 원칙과 소신에 있어 무한한 가능태를 열어놓아야 한다. 어떠한 목표에 대한 절대적 실재성이 아니고, 정립된 실재성만이 그 목표를 확신 있게 밀어붙일 수 있다. 원칙의 실천자는 대상의 실체에 속지 말고 자신이 원칙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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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2-17
  • [윤재은 공간철학] 영웅은 태어날 때 ‘운명’보다 자신의 ‘의지’를 믿는다.
    ▲ [사진=윤재은 기자] 빛이 없는 길이라면 그 길에 빛을 비추고, 빛이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을 멈추지 말고 달려라 - 영웅은 태어날 때 ‘운명’보다 자신의 ‘의지’를 믿는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빛이 없는 길이라면 그 길에 빛을 비추고, 빛이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을 멈추지 말고 달려라.’ 자기에게 주어진 세계의 법칙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길이 험하고, 외롭더라도 한 번 정한 그 길은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한다.세계의 길은 언제나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 길은 난관이 있고, 고통이 있고, 불안이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 길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신은 그 길을 인간이 걷게 하였고, 인간은 그 길에 빛을 비춰야 했다.두려움이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행동하는 것에 있지 않다. 행동은 이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 같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순수한 욕망으로 이성을 억누를 때도 있다. 세계는 잠들고 외로운 것 같지만, 결코 혼자일 수 없다. 잠들어 있는 세계를 깨우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잠들어 있는 영혼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며, 외로운 자들에게 ‘동행’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승자와 패자의 길은 똑같은 길속에 있다. 승자는 그 길에서 길을 묻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지만, 패자는 그 길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에서 주저하고 만다.칸(Chingiz Kahn, 1162경-1227)중의 칸 ‘징기스칸’은 수많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계의 꿈(夢)’을 보았다. 그 꿈은 정복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제국의 건설, 세계의 통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보았고, 그 길속에서 목숨이 다하는 날 까지 그 길을 갔다.그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배가고파 들쥐로 생명을 유지했으며, 남과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이 그의 삶이며, 직업이었다. 그는 학문을 배운 적이 없어 이름조차 쓸 줄 몰랐기에, 남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 조언을 통해 세계를 얻었다.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칼과 화살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끝까지 살아남았다. 죽음이란 나약하고, 배부른 자들의 사치에 불과하며, 투쟁의 역사에서는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승리하는 것이었다.거대한 대륙의 통일을 꿈꾸는 ‘징기스칸’에게는 죽음마저 사치스러운 것이었으며, 나약함이 가장 큰 적이었다. 나약함은 다른 강한 적을 만나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마음 속에 걱정이라는 번뇌가 생겨나기 때문이다.‘징기스칸’은 그러한 나약함과 번뇌를 그 길의 어둠 속에 묻어버리고, 그리고 그 길에 불을 밝혔다. 그 불을 통해 빛을 본 수많은 사람과 역사는 그를 ‘징기스칸’이라고 불렀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길에 빛을 비추고, 멈추지 않고 그 길을 달려가는 것이다.’영웅은 태어날 때 운명보다, 자신의 의지를 믿는다. 따라서 영웅은 자신의 의지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을 거침없이 달리며, 침묵하는 영혼들을 깨운다. 혁명의 역사는 영웅 혼자 쓰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것이다.그러나 함께 간다는 것을 모두 다 같이 가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역사에 있어 함께 간다는 것은 동지와 가는 것이지, 적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신(God)이 세계에 빛을 만든 것은, 그 빛을 통해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동지와 적을 구분시키기 위해 만드신 것이다.역사를 쓰려는 영웅들의 신화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는 형제이지만,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한번 생각이 다른 사람을 동지로 만드는 것은, 철로 금을 만드는 것과 같고, 언젠가는 또 다른 반목을 가져오기 때문에 동지가 될 수 없다.몽골의 역사에서 징기스칸과 자무카의 숙명적 운명처럼 적과 동지는 서로가 가고자 하는 길이 같은 길일 때만 가능한 것이지, 그 길이 다를 때는 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어둠의 광야에서 역사의 길을 가고자하는 자라면, 나약함에서 벗어나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자신의 의지가 역사의 의지가 되고, 대중의 의지가 되어, 조그마한 불씨가 횃불처럼 타오를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야 한다. 아무리 영웅이라도 동지들이 없으면 혼자서 역사를 쓸 수가 없다. 역사의 이름은 영웅 혼자를 말하지만, 역사의 과정은 영웅의 동지들에 의해 만들어진다.‘징기스칸’역사에 기름이 되어 혁명의 불을 밝혀준 19명의 전사처럼, 변치 않는 의리와 믿음이 있는 동지들은 영웅이 써내려가는 역사의 주인인 것이다. 함께 가는 역사, 함께 쓴 역사, 이러한 역사가 진정한 역사이며, 가치 있는 역사인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함께 가는 길이라면 외롭지 않다. 비록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지거나, 고난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영웅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역사의 길을 가기위해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사건이란 관심 없는 사람들을 관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 혁명의 원동력을 가동시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관심 있는 일에는 열정을 갖지만, 관심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관심이란 대중들을 토론의 광장으로, 생각의 광장으로, 혁명의 광장으로 나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철학자의 열정에서 보면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말하는 4가지 우상(종족, 동굴, 시장, 극장)은 이성으로서 경계해야 할 우상이지만, 영웅의 역사에서는 인간의 심리적 호기심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커다란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와 대중의 욕구를 알아야 한다. 대중은 사건에 좌우되는 우상과 같다.대중의 욕구를 모르고 커다란 이상만을 이야기할 경우 대중은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꺼버린다.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영웅의 기질과 꿈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하나씩 흩어져 있는 인간은 큰 힘을 발휘 못 하지만, 뭉치면 커다란 힘이 되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대중에 다가서는 길!그 길은 역사의 길이며, 영웅의 길이다. 그 길에 동지가 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들 때 우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영웅은 그들이 다가 설 수 있도록 그 길을 비춰주어야 한다. 빛을 비추면, 그것은 ‘사건(事件)’이 되고,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된다. 영웅은 그들의 힘을 빌려 역사를 쓰면 된다.- 영웅이 되려는 자들이여!-영웅이 되려는 자들이여!그대의 주위를 돌아보라!자신의 주위에 동지가 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발굴하여, 그들이 하나 되게 하라! 그들의 소리가 메아리가 되고, 함성이 되어, 역사를 쓰려는 사람들의 백지 위에 글을 쓰는 사람들의 펜(Pen)이 되게 하라!역사는 사심(邪心)의 눈으로 바라보면 불행이 되고, 진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행복이 된다.영웅이 되려는 자여!그대는 왜?자신이 영웅이 되겠다고 주장하려 하는가?그대가 영웅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대중에게 말하라!당신의 이야기를 ‘영웅의 역사’라고 기술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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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6-01-05
  • [윤재은 공간철학] 칸트의 선험적 직관(直觀)은 ‘본질’이다
    ▲ [사진=윤재은 기자] 짐승은 소리치지만 역사를 쓰지 못하고, 인간은 침묵하지만 역사를 만들어 낸다 : 칸트(Kant, Immanuel)의 선험적 직관(直觀)은 ‘본질’이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모든 이성은 직관(直觀)에 의해 관계한다. 직관은 우주와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성의 관계는 직관에 의해서 이다. 인간세계에서 어떠한 생각에 옮고/그름 혹은 정의/불의 등의 기준이 되는 판단의 대부분은 이성에 의존하지만, 직관만 못 하다. 이성은 사유가 동반된 마음에 있는데, 이러한 마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직관이다.직관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이유는 그것의 대상이 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실체란 ‘있는 것, 밑바탕, 그 무엇’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은 질량을 포함한 어떤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것은 이성과 대비해서 대상이라고 하는데, 대상은 세계에 실체 하는 한에서만 생겨난다. 생겨남의 근거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것에 대한 실체로서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대상이 없다면 실체도 없다.대상의 실체는 마음으로 들어온 어떤 것들이 결합하고, 종합하여, 그것에 의해 유발되는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표상의 인식능력을 감각, 또는 감성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성과 감각은 대상의 실체를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하며, 이렇게 전달된 마음은 대상의 이성을 마음  속에 주어지게 만들고, 마음은 감성을 통해 이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성은 오류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잘못된 이성은 이성이라기보다, 제한된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사회적 이성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직관보다 지식이 우선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거나, 주장이며, 학설일 뿐이지만, 지식으로 무장된 이성은 그것을 인용하여 자기를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작된 이성은 그것을 확실성으로 믿어버리고, 모든 사실의 관계를 그것으로부터 시작한다.사회적 이성에 의해 주어진 지식, 경험, 판단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자기모순으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그 주장의 오류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장이란 어떤 사건에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것일 뿐 절대적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록 속에서 주장하여 왔던 많은 역사들은, 그들의 일반적 주장이거나 편견일 뿐이다.‘절대적 진리란 변치 않는 정의에 있는 것’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의견에 치우치는 주장은 자기 궤변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궤변은 지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짐승의 공허한 메아리이며, 편견으로 가득 찬 욕망의 덩어리이다. 욕망의 덩어리는 부패한 고깃덩어리와 같아 악취를 뿜어내며, 날파리만 날아들게 할 뿐 순수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인간과 짐승의 역사에서 ‘짐승은 소리치지만, 역사를 쓰지 못하고, 인간은 침묵하지만 역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진정한 역사이며, 순수한 선험적 역사이다. ‘역사는 대상의 기록이 아닌 정신의 기록이다.’이처럼 짐승과 인간의 역사적 다리(Historical Bridge) 위에서, 하나의 의지는 편견과 오만에 의해 서로 다른 끝을 향하게 된다. 하나의 의지는 두 개의 의지가 되고, 의지의 실체는 무너져버린다. 이렇게 무너져 버린 역사적 다리는 인간의 의지를 연결할 수 없게 한다. ‘소통(疏通)이란 하나의 다리 위에서 두 개의 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눈을 하나의 다리로 통합시켜주는 것’이다. 소통(疏通)은 짐승이 인간 되기를 거듭하는 순수의 길이며, 직관의 길이다. 순수는 직관의 본질을 통해 얻어지는 완벽함이며, 정의이다.지식에 의해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은 공허한 메아리 속에서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 한다. 이러한 논쟁은 우리가 원하는 길(Way), 바로 그 길을 찾지 못한다. 그 길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직관에 있다. 그 길을 여는 문은 그 길속에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문제의 대상으로부터 발생되며, 문제의 해결은 지식이 아닌 직관에 의해 풀어져야 한다. 직관으로부터 그 문제의 본질이 설명되면, 해결의 방법은 문제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인간의 모든 사유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지식보다는 직관에 의지해야 그 문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지식으로 그 문제를 보게 되면, 남의 견해를 보고 자신의 견해인양 주장하는 꼴이 된다. 이처럼 우스운 꼴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직관은 다르다. 특히 순수직관은 직관의 영역 중 가장 높은 단계로서, 그것의 본질을 보는 최상의 이성을 말한다.인간이 자기의 주장에 있어서는 강하면서, 남의 주장은 얕잡아보고, 우습게 보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확실성으로 믿고, 타인보다 자신이 우수하다고 믿는 자만(自滿)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순수직관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는 나의 주장과 다르게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연의 법칙은 신의 법칙이며, 운명의 법칙이다. 신의 의지와 세계의 운명을 어떻게 인간이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인간으로서 직관을 순수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자신의 정신을 자신의 육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정신을 육체의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신의 육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고, 궁극에 가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참회의 눈물은 깨달음의 눈물이 아니고, 그동안 오만하고, 무지하며, 거짓으로 살아온 반성의 눈물이다. 인간은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며, 순수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칸트(Kant)는 인간의 마음이 대상에 의해 유발되는 한에 있어 우리의 마음은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불완전한 감각을 통해 직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경험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인간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불확실의 대상을 우리는 실체라고하기보다 현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현상은 대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 실체일 수는 없다. 실체란 반드시 존재하여야하기 때문이다. 실체의 문제에서도 직관은 실체를 알아가는 인식의 문이다.하나의 현상에서 인간의 감각이 대응하는 것을 칸트(Kant)는 현상의 진료라고 불렀다. 현상의 진료란 감각의 대응에 따른 대상의 발현으로 후천적 경험으로 만들어지고, 사라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대상의 관념이 아니라 순수한 관념을 실체의 범주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실체는 내부 감각에 속하는 어떤 관념도 포함하지 않는 대상을 말하며, 이것을 순수라고 말한다. 순수는 직관의 영역이며, 그 자체가 불완전한 이성을 넘어선다.감각을 넘어서 인간의 마음과 순수형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현상되는 모든 자연의 실체가 이러한 관계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관계는 직관에 의해 파악되어지고, 실체화되어진다. 인간의 마음이 가지게 되는 이러한 직관을 순수직관이라고 한다. 순수직관은 감각적 사고에 의해 오류 될 수 있는 우리의 관념을 보다 더 명확하게 하여주는 지혜의 열쇠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성의 오류가 말하는 지식의 한계를 보면서 / 차가운 대지의 텐트에서 / 가느다란 바람에 휘날리는 불꽃을 보며 / 나는 괴로워했다. / 삶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오늘 하루도 / 나는 / 나의 길을 가고 싶다. >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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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12-23
  • [윤재은 공간철학] 칸트의 선험적 표상으로서 ‘공간(空間)은 밑바탕이다’
    ▲ [사진=윤재은 기자] 칸트(Immanuel Kant)의 선험적 표상으로서 ‘공간(空間)은 밑바탕이다’ : 공간은 실체의 범주라기보다는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표상이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존재와 실체의 문제는 대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공간과 대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대상은 외부의 공간과 관계하며, 실체한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공간과 관계하는 대상은, 경험을 인식하게 하지만 실체화 될 수는 없다. 실체는 일시적 유형으로 나타나는 대상의 경험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 유(有)여야하기 때문이다.공간은 외적 경험을 통해 추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밑바탕으로서 근원적 현상이다. 형이상학적 학문에 있어 대상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밑바탕에 무형의 공간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은 실체의 범주라기보다는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표상이다.공간은 외적 표상으로서 자연의 속성을 담고 있지만, 실체로서 인식되어지지는 않는다. 실체는 질료에 의한 양태이어야 하며, 존재 자체여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형태는 시간에 의해 통제를 받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살아져버리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반드시 실체가 아닌 것은, 실체의 밑바탕엔 보편성이 존재하여야하기 때문이다.만약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대상은 사라지지만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간은 선험적 표상으로 밑바탕이기 때문에 대상의 존재여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공간은 대상의 현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선험적 표상이며, 대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원인이다.공간이 인식에 있어 표상이 되는 것은 대상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대상의 관계를 추론하는 보편적 개념을 넘어선 순수이성으로, 선험적 순수직관 영역이다.공간이 갖는 유일성은 대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모든 보편자들은 서로의 실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에 공간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공간은 대상의 실체를 알리는 밑바탕이 되며, 무(無)이지만, 유(有)를 보여주는 그 어떤 것의 밑바탕이다.인간의 경험은 다양한 공간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동일한 공간의 밑바탕에서 실현되어지기 때문에 공간은 단일한 표상으로서 밑바탕인 것이다.칸트의 순수이성과 선험성은 대상의 실체를 알기위한 형이상학적 접근으로, 실체의 본질을 알기위한 밑바탕의 선험적 표상을 먼저 인식하여야 한다. 선험적 직관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이성의 오류를 인식하는 것이며, 올바른 선험적 이성을 통해 실체의 밑바탕인 공간을 인식하여야 한다.공간의 무한성은 선험적이어야 한다. 공간은 무한하며 밑바탕에서 시작되지만 수많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눠진 부분의 공간도 나눠진 객체의 대상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속성으로서 표상되어지기 때문에 공간은 유일한 하나이다. 이러한 공간의 근원적 표상은 대상에 앞선 선험적 직관으로 인식되어진다. 이렇게 선험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바로 공간(空間)이다.공간이 유일하고 밑바탕이라 하더라도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체란 어떤 무엇임인데 그 무엇임은 보편적 형태를 갖는 대상(對象)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적 직관이 공간의 표상을 인식한다 할지라도 대상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이성은 실체와 존재를 말 할 수 없다. 결국 공간은 선험적 표상이지만 실체가 될 수 없으며, 실체는 대상이어야 하는 것이다.대상의 자연은 수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져 공간속에 존재하게 되고, 이러한 대상의 끝없는 반복은 대상의 경험적 실체보다, 보편적 실체로 자리한다. 인간은 이러한 인식의 기반에서 대상이 실체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객관적 속성은 운동과 정지를 반복하며, 끝없이 진화하지만 실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체는 시간에 따라 생겨나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체란 보편적이어야 하며, 항상 그 자체여야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온 실체의 문제는 창조의 정의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신의 창조 없이 어떠한 대상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대상은 신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이 된다.대상의 근원으로서 신은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수많은 대상을 자연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신은 만물의 창조원인이며, 실체의 원인이다. 그리고 신의 창조에는 공간이라는 선험적 표상이 선행되어야 한다.공간은 스스로 존재의 근원을 만들지만, 스스로는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사물의 존재적 근원으로서 표상될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공간을 통해 인식되어지기 때문에 공간은 존재의 밑바탕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밑바탕으로서 공간은 칸트가 말하는 순수직관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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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11-30
  • [윤재은 공간철학]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선험적(先驗的) 인식’
    [사진=윤재은 기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선험적(先驗的) 인식’ :경험적이지 않은 인식은 ‘순수인식’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에게 있어 일반적 인식은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험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은 인식을 통해 기억되어진다. 경험적 만남은 인식에 우선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한다.하지만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제한된 감각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한된 경험은 많은 판단의 오류를 낳게 된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건이나 현상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과 판단을 내어놓는 것을 보면, 인간의 인식이나, 경험은 정의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익이나 입장에 의존한다고 보여 진다.세상에 드러난 사실은 경험의 한계에서 느끼는 것일 뿐, 그 너머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순수의 마음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면, 그 세계는 천국의 세계요, 진리의 세계이다. 하지만 타락한 욕심과 명예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인간에게는 이러한 세계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성공이라는 욕망만이 보일 뿐이다.비록, 그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그 순간만은, 그 욕망의 고리를 잡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선한 마음을 억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박한 욕망은 진리와 정의를 외면한 채 자신만의 논리로 세계의 역사를 써 내려가려 한다. 하지만 역사의 눈보라는 차가운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냉혹한 비판의 바람을 일으키며, 순수의 의지를 일깨운다.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학문은 더 이상 대상의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악이 된다. 학문과 정의가 대상의 이익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경험은 체험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진리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 경험이 선험성과 결합하면, 이러한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 선험성은 인간이 순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과 같은 것이다.경험에 의한 후천적 인식이 경험적 인식인데 반해, 선험적 인식이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인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험적 인식 중에서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인식을 순수인식이라고 한다. 순수인식이란, 말 그대로 어떠한 경험에도 의지하지 않고 순수한 선험성에 의존하여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순수인식의 범주에 들어있는 것은 필연성을 담고 있다. 빛은 순수인식의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빛은 현상만으로도 순수하다. 빛에 의한 어둠과 밝음은 현상일 뿐, 이것을 가지고 빛의 순수성을 판단할 수 없다. 빛은 순수함 자체로서 밝음이며, 선함이다. 모든 곳을 비추면서도 어떤 대상을 갖지 않고, 오직 현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빛은 정의이며, 순수이다.세상의 모든 어둠은 빛의 현상을 가로막거나 보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다. 빛은 세계이며, 진리이며, 선함이다. 이러한 빛은 경험적 인식으로 보지 못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있다. 경험적 인식은 바로 앞의 것만을 바라볼 뿐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이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눈앞에 당면한 문제만을 바라볼 뿐, 그 이후 다가올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낮과 밤이 있다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느끼는 인식이지만 순수한 인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낮과 밤의 차이는 인간의 시각적 경험에 의해 느껴지는 현상으로, 경험을 통해 나타나는 인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경계를 넘어, 보다 순수한 이성으로 낮과 밤을 바라본다면, 이러한 낮과 밤의 차이는 위치와 장소의 차이일 뿐 진리의 영역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직관을 통해 본질의 차이를 바라본다면, 낮과 밤의 차이는 어둡기의 차이일 뿐 하나인 것이다.선험적이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인식의 기준으로, 경험에 기반 한 일반적 이성으로는 바라볼 수 없는 순수영역에 속한다. 순수의 영역은 물질적이지 않고, 기억 적이지 않으며, 형태적이지 않다. 순수란 이성의 깊은 수면 위를 거니는 바람과 같아, 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촉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순수인식과 경험적 인식의 차이는 무엇인가? 경험적 인식은 대상의 성질을 경험하면서 나타나는 인식인데 반해 순수인식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태어났지만,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필연성을 내포한 선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필연적이란 명제는 선험적 명제가 되는 것이다. 일반적 경험은 여러 사람들의 보편성을 만들어 내지만, 그러한 경험의 보편성은 한계와 오류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경험의 보편성이 만들어 낸 것 중, 어떤 가능한 예외도 없는 엄밀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경험적 보편성은 선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인간에게 있어 보편적 선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험만으로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험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인식의 근거이지만, 모든 것이 아니고,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경험의 한계가 순수인식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통한 순수인식이어야 하며, 선험성에 의한 절대 인식이어야 한다는 점이다.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선험적인 순수원칙들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본질적 원리와 원인을 알아가는 생각의 길이며, 사유의 길인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순수인식 능력은 태어나면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식의 정의로운 판단 기준은 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범주에서 인식되어야 한다.인간의 경험에 존재하는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 사과는 물질적으로 시간에 의해 언젠가는 사라져버리는 물질이지만, 이것은 개별성에 의한 사과가 물질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담보로 사과가 가지고 있는 대상의 실체, 또는 대상이 속하는 실체에 대한 공간과 성질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이는 제거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과라는 대상이 갖는 실체의 개념을 대상으로 환원하지 않는 이상, 사과의 실체는 인간의 선험적 인식 능력 속에 자리 잡히게 되고, 이는 실체의 보편성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된다.인간의 인식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이성의 힘으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은 선험성이 인식의 기초위에 서야만 한다. 우리의 이성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선험성에 의한 선험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철학자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4.22 ~ 1804.2.12.)이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적 판단근거의 한계와 오류를 순수이성으로 바라보며,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순수한 이성의 사용을 통해 그릇된 이성의 판단오류를 바로잡고 싶어 했다. 칸트의 삶은 시계와 같은 삶이었으며, 명확한 지성의 탐구만이 학문의 길이라고 판단한 사람이었다.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형이상학의 길은 인간이 배부른 돼지의 길을 들어서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이었으며, 우리가 존재하는 원리와 원인을 생각해보고 판단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에 의해 제기된 실체의 문제는 합리적 이성과 경험적 이성을 넘어선 순수이성으로, 인간이기에, 인간의 굴레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의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선지 철학자들의 노력을 단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치부하는 것은 배부른 돼지우리에서 세계를 보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하는 아둔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깨어나라! 그리고 눈을 떠라! 세계는 깨어있는 자의 것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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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10-14
  • [윤재은 공간철학]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인상(印象)과 관념(觀念)’
    ▲ [사진=윤재은 기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인상(印象)과 관념(觀念)’ : 관념의 한계를 넘어 ‘나는 구름처럼 살고 싶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관념(觀念)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같다. 자연 상태에서의 구름은 자유이며, 명예이며, 생명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구름은 정체되어있지도 않고, 하나의 형상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구름은 수시로 변화하며 다양한 모양으로 자연을 이롭게 하고 비(雨)를 만들어내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살아가게 한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구름에 의존하며, 구름은 생명의 근원인 물(水)을 만들어내어 생명체의 전도사 역할을 한다.구름이 자유인 것은 어떤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구름은 하늘을 떠다니며 수시로 변화하고, 정체(停滯)되지 않는다. 구름이 정체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구름이 자유를 찾아 끝없이 떠다니는 것은 ‘정체되지 않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구름도 정체되면 썩게 된다. 하지만 구름은 정체된 적이 없다. 자유를 갈망하는 선지자의 열망처럼 구름은 항상 자유를 향해 항해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구름은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여 자유를 찾는다. ‘자유는 구름처럼 가볍게 사는 것이며, 구름처럼 정체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삶은 구속이며, 속박이며, 방종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의 삶은 구름처럼 계속 변화되어야 한다. ‘나는 구름(雲)처럼 살고 싶다.’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가벼운 것은 구름이다. 구름은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가볍게 한다. 자신이 가볍다는 것은 번잡한 번뇌(煩惱)가 없다는 것이다. 가벼운 구름에 무언가를 채우려하면 그것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하지만 구름은 채우려하지도 않고, 잡으려하지도 않고, 탐하려 하지도 않는다.구름은 비움의 미학을 통해 깃털보다 가볍게 세상을 살아간다. 인간이 명예롭게 사는 것은 구름처럼 가볍게 사는 것이다. 많은 부귀와 영화(榮華)를 원하지도 않는다. 명예는 구름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고귀한 품위이며, 품격이기 때문이다.앞만 보는 인간은 수평적 시야의 것을 탐하기 때문에 물욕이 생겨 무거워진다. 하지만 구름은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에 공간에 머물고, 몸을 가볍게 한다. 하늘에 머무는 구름은 지상의 것들을 탐하지 않는다. 오직 배품만이 있을 뿐이다. 그 배품은 물이다. 명예를 아는 사람은 배품이 있는 사람이며, 배려의 미덕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배품의 미덕을 아는 것은 몸과 정신을 가볍게 하는 것이며, 명예롭게 사는 방법이다.구름이 생명인 것은 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세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는 물에 의존하고 있다. 물은 생명이며, 삶이다. 이처럼 삶의 근원은 구름에서 만들어지고 구름에 의존한다. 구름은 비를 통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살린다. 구름이 만들어 내는 생명성은 존재의 의미를 넘어 은총(恩寵)이다. 만약 지구상에 신의 손길이 있었다면 그것은 구름이 만들어내는 물이 원인이었을 것이다.인간의 관념은 구름과 같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이 구름과 같이 가벼운 심상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이러한 심상은 인간이 경험하고 체험한 인상에서부터 기록되어진다. 인상과 관념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구름과 같이 가벼운 심상에 머물게 된다.관념에 있어 단순관념의 구름은 보편화되지만 구름의 종류로 들어가면 다양한 생김새와 활동성이 달라진다. 우리가 매일 보는 구름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름은 우리의 머리 위를 떠있으면서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난다.하늘은 하층운, 중층운, 상층운으로 나뉘는데 상층운은 지상으로부터 6~13km까지의 높이에 있는 구름들을 말하며, 새털구름, 비늘구름, 털층구름이 있다. 중층운은 지상으로부터 2~7km까지의 구름으로 양떼구름, 높층구름, 비층구름으로 나뉜다.그리고 지상으로 부터 가장 낮은 층의 구름인 하층운은 지상으로부터 2km까지의 구름을 말하며 층쌘구름, 안개구름이 있다. 그리고 수직운은 지상으로부터 13km의 구름을 말하며 천둥과 번개를 만들어 내는 쌘구름과 비, 천둥, 우박을 내리게 하는 쌘비구름이 있다.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것은 구름의 종류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고 모양과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은 구름과 같아 심상의 종류에 따라 관념의 개념이 바뀐다. 인간의 관념은 구름과 같아 수많은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형상의 관념은 마음속에 있다.인간의 행동은 모든 경험들의 총체를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론 내린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에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관념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구름으로서, 생각의 구름이 모여 만들어 내는 형상들이다.관념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이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로크와 버클리를 통해 시작된 경험론은 데이비드 ‘흄’의 인상과 관념을 통해 완성된다. 버클리에 의해 제기된 지각은 ‘흄’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으로 통합되고, 지각은 다시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된다.‘흄’이 말하는 인상은 경험의 사건이 되는 감각을 통해 인간과 직접적 사건이 되며, 사건은 인상을 통해 각인되어 관념화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각들은 시간성 안에서 사건이며, 사건은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원인이며, 원인에 의해 제기된 사건은 결과를 인식하는 관념이 된다.인간이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인간의 오성(悟性), 지각(知覺), 그리고 인상(印象)과 함께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판단의 관념은 사유와 추론을 통해 인상의 경험들을 기억해내는 마음이다. 인간의 머릿속에 내재되어 있는 심상(心想)은 인간의 관념과 동일한 것이다.인간의 판단과 지식의 근거에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관념은 단순한 사건의 인상들이 모여져 판단의 근거가 되는 관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의 단순관념은 인상의 강도에 따라 내재된 심상이 되기도 하고, 상상이 되기도 한다. 단순한 관념은 하나의 보편적 사건이나 대상에 의해 생겨나지만, 이러한 단순 관념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복합 관념은 사건들의 나열이며, 대상들의 집합이다.관념은 보편적 심상의 묶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 묶음 속에는 단순 관념들의 경험적 실제가 복합화 되어 관념화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한 복합화를 통해 감각적 경험을 넘어선 심상(心想)적 경험을 추론하게 되고, 이러한 관념을 상상관념이라 한다. 흄의 이야기처럼 인상은 관념에 선행하며, 관념은 인상의 선행 사건을 통해 형성된 마음속의 심상이다.관념의 원인이 되는 인상은 대상과 사건에서 시작되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 기억이 되고, 기억은 인상의 되풀이되는 반복을 통해 관념의 실체들로 작용한다. 관념의 실체들은 인상의 강약에 따라 대상의 관념이 뚜렷하거나 희미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의 이중성은 인상에 선행하는 사건의 강약에 따라 심상에 기억되어지고, 이러한 기억은 많은 인상들과 결합하여 상상과 기억을 통해 관념으로 표출된다.‘흄’은 기억의 통로들 속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기억은 시간과 사건의 터널에 의존하지만, 기억이 반드시 인상의 순서에 따라 저장되어지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단순관념들의 인상들이 희미한 기억으로 시간에 잠들어 버릴 때 상상력을 통해 연결되어지고, 이러한 상상과 연합의 성질들을 유연한 심상의 힘이라고 보았다.관념의 세 가지 성질은 유사성, 근접성, 원인과 결과로 나뉘는데, 관념은 보편자의 속성을 하나만 경험해도 보편자의 부류를 쉽게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단순관념으로 심상에 남아있는 관념이 연합을 통해 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러한 단순관념들의 연합을 복합 관념이라 한다.복합 관념은 연합을 통해 관계되어지고, 단순관념의 유사성, 근접성, 인과관계에 따라 그 관념은 결정된다. 이러한 관념의 연결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연결에 시간이 존재하게 된다. 사건과 결과는 인과율에 따라 관념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어 인간의 판단기준이 되며, 심상이 된다.‘흄’은 지식의 근원이 되는 학문의 난해함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인간오성의 본성을 면밀히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판단이 되는 지식의 난해함을 해결하는 길은 불완전한 이성의 판단을 명확히 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정립이 필요한데 흄의 인상과 관념은 지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존재는 유한한 인간사에 있어 배부른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근원을 이루는 실체에 대한 단순한 질문하나가 인간의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의 실체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며 살아가는 생명체이다. 반성이 없는 인간이라면, 그러한 인간은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타락함을 안식으로 알고 살아가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나약한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라. 그 구름은 자유이며, 명예이며, 생명이다.나는 구름처럼 살고 싶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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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0
  • [윤재은 공간철학] 존재하는 것은 지각(知覺)되는 것이다
    ▲ [사진=윤재은 기자] ‘존재하는 것은 지각(知覺)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삶의 가치는 세상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타자(他者)에 의해 묻거나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질문이며, 평가이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생에 있어 삶(Life)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질문은 삶의 가치를 묻는 질문이다. ‘삶의 가치는 세상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타자(他者)에 의해 묻거나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질문이며, 평가이다.’ 세상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인간은 삶의 주체로서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루하루의 삶이 모두 다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인간사 속에서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인간의 삶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삶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살기위해서 일하고, 먹고, 자는 일상의 반복으로 삶의 전부를 소모해 버리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삶의 문제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를 넘어 가치의 문제로 자신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자신에 의해 삶의 가치를 평가 받기 위해서는, 삶의 자세를 바르게 설정하여야 한다. 삶의 자세는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이 무엇인지를 직시(直視)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삶을 직시하는 자세에는 3가지의 규칙이 있다. 첫째는 ‘시간(時間)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행복(幸福)의 의미’를 아는 것이며, 셋째는 ‘만족(滿足)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삶의 자세 중 첫 번째인 ‘시간(時間)의 소중함’은 그 어떤 것과 비유될 수 없는 삶의 근본 요소이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 안에서 존재하게 되는데, 시간은 이러한 존재의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인간은 가장 소중한 근본 원인을 쉽게 망각하고 다른 것에서 무언가를 구하려 한다. 우주의 원리이며, 신의 섭리인 시간은 어떠한 물질적 대가를 원하지 않고 인간에게 삶의 근원을 제공한다.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을 운명(運命)이라 한다. 운명은 태어날 때 예측(豫測)의 시간 안에서 태어나지만 죽음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죽음은 시간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삶의 의미는 죽음으로 가지전에 이루어진 시간과의 관계이다. 삶의 문제에 있어 죽음은 그 끝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하고 무섭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간에게 올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순간을 잘 살아야 한다.이렇게 하루하루를 잘 사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것이며,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으로서, 삶의 의미를 생(生)의 보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시간의 의미를 모른 채 물질적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시간의 소중함을 물질적 집착에 소모해 버린다.물론 인간이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기본적 욕구인 의(衣), 식(食), 주(住)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정한 시간을 투자하여 인간의 기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이 물질을 과다하게 모으거나, 욕심으로 발전하면, 시간은 삶의 가치를 변질시키거나, 타락, 후회와 함께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 부유함도 죽음 앞에 서거나, 시간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부질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삶의 의미에 있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인생을 행복하게 이끌기 위한 첫 번째 요소이다.삶의 자세 중 두 번째인 ‘행복(幸福)의 의미’를 아는 것은 소소함에서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숲속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아침에 눈을 떠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등등은 소소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일상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우리들의 삶이다.만약 이러한 일상이 어떠한 사건이나 상황으로 그것을 맛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인간은 불행이 무엇인지를 그 순간부터 알게 된다. 가장 단순하고 사소한 것들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커다란 어떤 것에서 찾으려 하지만, 행복은 소소한 일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우리들이 매일 하는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의 요소들이 존재한다. 내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내 의지로 숨 쉴 수 있다는 것,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이 우리들 곁에 있다.우리는 이렇게 많은 행복의 조건들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면, 그것 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삶의 의미에 있어 행복은 내가 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사소한 일상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발견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삶의 자세 중 세 번째인 ‘만족(滿足)의 의미’를 아는 것은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마음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우주와 같아 세상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물질이든 비 물질이든 우리의 마음은 채울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무한성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마음에 무한한 행복을 채우는 것은 사소한 나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다.만약 우리의 마음이 조그마한 것에도 감동하고, 그것을 행복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은 수많은 행복으로 연결된 고리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라면, 세상 어떤 것을 주어도 그 마음을 채울 수 없어 행복의 연결고리를 보는 대신에 채움의 고리만 보게 되고, 그러한 채움은 자신의 육신뿐 아니라 정신까지 병들게 해서 후회와 회환(回還)만을 가져오게 된다.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은 아는 현명한 인간이라면, 만족(滿足)은 쉽게 찾아오지만, 만족을 모르고 타락한 영혼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면, 어떠한 것을 채워줘도 만족 할 줄 모른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불어가고, 정신이 타락하며, 차오르는 물질에 갇혀 결국엔 죽음의 끝자락에 서서 그것을 놓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삶을 마감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적당한 선에서 그것에 만족하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삶의 의미를 아는 것은 삶의 의미를 지각(知覺)하는 것으로서, 아무리 좋은 이상(理想)이나 꿈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서 숨 쉬는 인간이어야 한다. 살아서 숨 쉬는 인간은 아무리 커다란 이상과 꿈을 갖고 있는 사자(死者)보다 행복하다. 행복은 살아 있어야 느낄 수 있고,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지각하는 것(Esse est percipe)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지각하는 한에서 관념이고, 존재이고, 실체인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지각하는 인간으로 진화된 그의 개념은 존재의 본성과 의미의 중요성을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지각으로 돌렸다.버클리의 지각은 감각적 사물들의 실체는 지각 속에서 파악될 뿐, 어떠한 추상적 생각에서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도 지각하는 자아 속에 모든 행복과 불행히 교차하는 것이므로, 삶의 행복도 지각되는 것이며, 지각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지각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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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7-06
  • [윤재은 공간철학] ‘지식(智識)과 관념(觀念)’ -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의 총체(總體)이다
      [사진=윤재은] ‘지식(智識)과 관념(觀念)’ –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의 총체(總體)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 상태에 들어서면, 지식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인간에게 있어 지식이란?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의 집합 일뿐 진리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이란 경험을 통해 얻어지고 습득되어진 관념의 집합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일 뿐이다.지식과 기술의 차이는 관념과 실천의 차이이다. 지식은 말이나 글을 통해 습득되어지거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로서, 인간의 관념에 의존한다. 인간의 관념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정의 내리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에 기반 한다. 그러나 기술은 실천은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용성을 동반한다.유용성을 동반하지 않는 기술은 기술에 속하지 않는다. 기술은 실천을 동반하여 대상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에 지식보다 단순하고 솔직하다. 기술이 지식보다 솔직한 것은 기술은 인간의 육체와 시간, 그리고 땀방울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이 기술보다 솔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식도 그것의 근원은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지식이 근원을 벗어날 때 순수성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지식이 순수성을 벗어나면, 오만과 왜곡이 되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 사회 상태에서의 지식은 정의를 갈구하지만, 타락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배어나오는 지식은 왜곡되어지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지식은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오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지식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생각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마음속의 관념이다. 지식이 확실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은 마음이 정의로 와야 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 자기 의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기 의존성은 지식의 기반을 정의의 발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편의와 이익의 속성에 두기 때문에 본질에서 벗어난다. 사회의 지식인들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르게 설전을 벌이는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 라기 보다 양심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보아야 한다.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지식은 신의 속성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기원이 신의 창조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인간의 지식은 신의 행위가 발아(發芽)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경험을 통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자연의 수많은 속성들은 인간의 경험을 유발하는 원인이며, 관념의 근거가 된다. 자연 상태에서 관념은 인간의 기본적 속성을 경험으로 이끌어,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된다.인간의 지식 기반은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로 구분되는데, 인간의 의지에 따라 지식의 기준은 자연 상태가 되기도 하고 사회 상태가 되기도 한다. 자연 상태에서의 지식은 스스로 생성되는 자연의 속성처럼, 자연의 현상에 의존하여 관념화된다. 이렇게 형성된 관념은 순수한 관념으로 자연과 같다. 자연은 삶을 살아가는 근원으로서 지식과 관념의 형성에 순수성을 기반 한다. 하지만, 사회상태의 지식은 도덕, 규칙, 법률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분법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분법적 판단은 선과 악, 옮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등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면, 하나의 사건에 서로 다른 의견이 대립을 이룬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되는 지식의 기반이 사회 상태에서 하나의 정의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의존적 관계에 따라 주장으로 변질된다.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진실 속에 있어야 한다.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거나, 거짓이 진실이 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병들면 그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병들게 되고, 결국은 파멸에 이른다. 지식은 이러한 병들은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약이어야 한다. 지식이 정의롭지 못하고 자기 의존적이라면, 그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며, 불행한 국가인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 상태에서의 지식은 양날의 칼날처럼 정의와 불의의 상태를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편의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지식이 정의의 길 위에 서 있을 때 사회는 사회로서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지식은 기술을 넘어 이상(理想)이 될 수 있다.인간의 지식이 관념의 근거이며, 모든 인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이다. 그는 인간학적인 인식론으로서 인간 오성론(Human understanding)을 제시하며, 인간의 판단은 오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오성의 근거로 지식과 경험을 들고 있다. 로크는 인간으로서 인식은 경험을 통해 형성되어지는 것이지, 천성적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있어 지식의 근원은 경험이며, 경험만이 관념의 총체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그가 말하는 오성의 직접 대상은 관념에서 시작하는데, 관념은 경험에서 그 지식이 형성된다. 그는 관념을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으로 나누고 단순 관념(Simple ideas)은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지는 1차적 성질로 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가 단순 관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복합 관념(Complex ideas)은 단순 관념이 모여서 이루어진 집합 관념으로 조합과 확장을 통해 단순 관념을 추상화하는 개념이다. 단순 관념은 대상의 사물이나 사건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관념인데 반해, 복합 관념은 단순 관념들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추상적 관념이다.로크의 오성은 인식론을 기반으로 경험을 통한 관념이다. 관념은 오성의 대상이면서 오성 안에서 감각과 지각을 통해 이루어진 경험이다. 로크는 모든 관념은 경험을 통해 얻게 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로크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본유관념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도 어른들이 갖고 있는 관념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본유관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을 통해 관념을 습득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말한다.인간의 의식 안에서 관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대상이 물질 안에 있고, 물질은 대상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며, 현상이기 때문에, 물질과 대상은 인간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지식의 기반위에 있어야 한다. 지식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중심을 잃게 되면, 판단의 기준이 엉뚱한 곳을 향하게 된다. 이처럼 지식이 지식의 순수세계에서 그 본질을 훼손한다면, 지식은 지식으로서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로크가 말하는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는 지식과 관념은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과 관념이 정의롭지 못하면, 지식과 관념은 이익과 거짓으로 가장된 언변에 불과할 뿐이다. 지식이 지식으로서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지식은 분명히 이로운 것이지만, 거짓과 이익에 활용된다면, 지식은 본질을 벗어나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뿐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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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6-18
  • [윤재은 공간철학] ‘인간의 경험과 오성(悟性)’
    ▲ 사진=윤재은 기자] ‘인간의 경험과 오성(悟性)’ : “경험은 인간 지식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삶에 있어 깨달음은 자각(自覺)하는 것이다. 자각이란 자신의 형편이나 처지를 스스로 깨달아 내면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란 편한 것, 좋은 것, 많은 것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며, 자각의 길보다 풍요의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인간의 생각은 마음속에 맺혀진 꽃봉오리와 같아, 그 향기를 발할 때 절정에 이르고, 타락할 때 악취를 품어낸다. 스스로의 자연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그 속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품어낸다. 세상의 모든 만물 중 스스로 아름다운 것은 자연뿐이며, 자연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자연은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고, 깨우치는 것은 오성(悟性)의 마음으로 세계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다.오성(悟性)이란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며, 관념(觀念)이다. 오성은 1689년 존 로크(John Locke)의 인간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나온 개념이다. 오성은 인간이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을 말한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에 근거하여,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사고와 판단의 근거는 인간의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경험은 인간 지식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다.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세상에 근거하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있지 않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크는 경험에 의해 갖게 되는 관념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있다. 대상의 사물이 있으면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근거를 확보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답은 “경험”만이 답할 수 있다. 우리가 갖는 모든 관념의 근원은 경험인 것이다.인간은 감각적 인식과 표상에 의해 주어지는 것만을 진리라고 말한다. 로크의 오성은 인간의 지식에 관한 탐구의 방법이며, 확실성을 말한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관념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데 환상, 개념, 종(種)에 의한 모든 것을 인간의 관념이라 말한다. 이러한 관념은 마음의 대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지식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다.인간의 내면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담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인간의 모습도 달라진다. 한편으로는 선(善)하고, 한편으로는 악(惡)한 두 개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신의 얄궂은 장난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세계의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자존(自尊)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과 의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판단할 수 있는 오성(悟性)의 올바른 사용에 있다.세계 속에 홀로선 ‘나’의 모습은 연약한 갈대처럼 바람에 휘날리며, 고독해 한다.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거대한 나무와 집들을 무너뜨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나약한 갈대의 존재는 거센 바람을 이겨내고 홀로 선다. 아무리 거센 바람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평온의 상태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평온은 마음에 근거하며, 마음은 이성적 사고에서 생겨난 관념이다. 마음과 관념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마음이 통하면, 관념은 마음과 함께 하나의 오성으로 나아간다. 오성의 기본이 되는 경험은 물질적인 것 같지만, 정신적이며, 관념적이다.인간의 삶은 거센 파고(波高)를 이겨내는 갈대와 같이 스스로에게 의지를 주어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할지라도, 그 어려움은 잠시 일뿐, 곧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삶 속에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 의지는 당당함에서 나온다. 세상에 홀로선 당당함은 올바른 오성에 의한 지혜의 바탕에서 나온다. 오성은 진리이며, 관념이며, 선(善)인 것이다.사람을 선(善)하게 만드는 것은 선한 오성이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마음이 악한 것은 오성이 오염되어 마음이 탁한 것을 말한다. 세상에 당당한 주체로 사는 것은 올바른 오성을 통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진리란 흔들림 없이 스스로 홀로 서는 것이며, 어떠한 말이나 글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 아니다. 세상에 고독자로서 당당함을 드러내는 것은 의지의 확실성을 통해 오성으로 호흡하고, 오성으로 말하는 것이다. 오성은 진리이며, 삶이며, 본질인 것이다.오성을 통한 당당함은 자만이 아니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깨어남이다. “세계 속에 홀로선 고독한 인간이여! 잠들어 있는 자아(自我)를 깨우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자! 세계는 그대 때문에 존재하고, 그대는 세계의 주인이다.” 세상에 버려진 그림자를 태양 빛 아래로 끌어내어 나의 주체, 나의 존재, 나의 삶을 실체하게 만드는 것은 그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스스로의 오성을 깨우는 아침의 메아리이다.세계의 주인으로서, 내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세상에 홀로선 나는 외롭지도, 어렵지도, 불행하지도 않는 당당한 존재이다. 세상에 보여 지는 모든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당당한 나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보자. 세계는 나약한 자에게, 비겁한 자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고, 오직 절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의지의 당당함으로 세계의 중심에 서면, 세계는 나의 것이요, 나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세상은 어둡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만도 않다. “세상은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터널”이며, 우리는 그러한 세계에서 삶을 살아가는 고독자이다. 고독한 삶은 어둡고 우울한 삶이 아니고 부조리함으로부터 벗어나 침묵하며,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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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4-30
  • [윤재은 공간철학] 사랑과 은총, 그리고, 모나드(Monad)의 결합(結合)
    ▲ [사진=윤재은 기자] 사랑과 은총, 그리고, 모나드(Monad)의 결합(結合) :‘실체의 대상은 소통의 모나드(Monad)로 세상의 결합이며, 세계의 결합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결합(結合)’이란 대상과 대상의 소통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점이 다른 점과 결합하면, 그것은 하나가 되는 일체(一體)이다. 하나의 점은, 점의 연결을 통해 선(線)이 되고, 선은 면(面)이 되며, 면은 입체(立體)를 통해 공간적 실체로 나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영원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엇인가의 대상은 점의 현전(現前)으로 만들어진 속성의 발현이다.점은 모든 실체의 시작점이며,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이거나, 분화로서 여럿이다. 점의 실체는 선(線)의 과정을 통해 대상이 되고, 대상은 점의 근원으로부터 산출된 선의 표현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는 점의 근원으로 시작하여, 선의 결합을 통해 세상의 대상으로 나타난다.점은 ‘결합’의 에너지가 없으면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점은 위치만을 가지고 있을 뿐 생성(生成)의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이 힘의 에너지와 결합하면, 점은 위치의 대상에서 실체의 대상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실체의 대상은 소통의 모나드(Monad)로 세상의 결합이며, 세계의 결합이다.점의 결합은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하며, 그 사건은 선(善)과 악(惡)을 넘어선다. 점의 시작은 하나일 뿐,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이 시간과 에너지로 결합되면, 점은 선(善)이기도 하고, 악(惡)이기도 하다. 점은 빛과 함께 대상으로 변화하고, 점은 선의 과정을 통해 물질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물질은 선(善)과 악(惡)을 동시에 담고 있는 세계의 질서이다.점의 생성은 창조의 빛과 함께 나타난다.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흑암(黑暗)의 시간을 생성의 시간으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점의 시작은 탄생의 시간이며, 존재의 시간이다. 점은 나이기도 하고, 우리이기도 하고, 세상이기도 하다. 점은 빛과 함께 세상의 일자(一者)로서 모든 것과 소통한다. 소통은 모나드이고, 모나드는 세계의 근원인 소통의 점이다.결합은 하나의 어떤 것이 또 다른 어떤 것과 합치는 것이다. 어떤 하나가, 어떤 하나로 남는 다는 것은, 어떤 하나가 어떤 ‘우리’로 남는 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라는 것은 공동체로서 세계라는 것이고, 세계는 우리로 결합된 자연인 것이다.결합은 ‘나를 우리로 만드는 힘의 에너지이며, 사랑이다.’ 사랑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결합’이다. 만약 ‘사랑’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고독’이며 ‘결핍’이다. 하지만 사랑은 고독과 결핍을 ‘우리’라는 결합의 미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오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세상의 어둠에 희망을 내려주는 ‘신’의 말씀과 같고,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과 같다.결합은 ‘생각의 깊이’와 ‘마음의 깊이’에 따라 결과를 달리한다. 생각의 깊이가 깊은 결합은 아름답고, 싱싱한 꽃처럼 향기를 품어내지만, 생각의 깊이가 얕은 결합은 추하고, 악취를 풍기는 썩은 고기와 같다. 생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의 모나드로서, 생각의 깊이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넘실대는 파도와 같고, 거친 파도위에 요동치는 배와 같다.생각의 깊이는 생각의 크기에 따라 그 사람의 크기가 결정되고, 그 사람의 성품도 결정한다. 생각은 인간의 행동과 마음을 모두 다 관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이 선함으로 가는 것은 생각의 배가 선함의 세계를 향하고 있음이고, 인간의 행동이 악함으로 가는 것은 생각의 배가 악함의 세계를 향하고 있음이다. 마음의 깊이는 생각의 깊이와 달리 온도가 있다. 마음은 따스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온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전부인 세계에서 온도는 삶의 과정을 이끌어 가는 마차와 같다.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한 따스한 마음은 이성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선(善)한 마음으로, 올바른 선마(善馬)를 추구하고, 차가운 마음은 악(惡)한 기운이 충만하여 통제되지 않는 욕망의 말과 같다.욕망의 말은 차가운 기운을 빼내 이성의 친구가 되게 하고, 따뜻한 기운을 더해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마음의 깊이는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아, 그릇의 크기와 용도에 따라 그 쓰임새와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있어 동일한 그릇이라고 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세계는 행복과 불행을 골라서 담아낼 수 있다.계몽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영혼의 위치를 한 점으로 보는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을 통해 세상의 어떤 것도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법칙을 발견하고, 모나드를 세계의 모든 원인으로 보았다. 이처럼 생성의 모나드는 세계의 모든 것이며, 생각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점이며,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신의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점의 활동은 신의 행위에 대한 발현으로서 모든 것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라이프니츠는 그의 결합법(De Arte Combinatoria)에서 문자로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모든 추론과 발견을 언어, 수, 소리, 색과 같은 요소들의 질서 있는 결합으로 보았다. 세계는 결합의 법칙을 통해 생겨난 실체이며, 존재인 것이다. 또한 세계는 잘 연결된 모나드이며, 꿈이다. 눈에 보이는 운동이 상상의 시간적 연장 개념 속인 꿈에 속한다면, 세상의 모든 결합과 운동은 단순한 운동의 결과이기보다, 모나드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꿈의 세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결합은 빛의 에너지처럼 긍정의 에너지와 운동을 통해 밝고 선한 세계로 나아간다. 빛이 저항을 적게 받는 경로를 통해 나아가는 순응의 법칙은, 빛의 통과 원인이 최종목적인 선(善)이나 근원을 지향하는 것과 같다. 모든 빛은 결합의 순수법칙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고 대상을 있게 한다.라이프니츠의 필연적 존재의 신은 우연을 포함한 모든 긍정명제에서, 술어는 주어개념 속에 포함된 개념으로서 실체이기 때문에 자연은 신의 개념 속에 포함된 술어인 것이다. 이는 만물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으로서, 우리의 정신에 보편화되어버린 관념을 새로운 결합의 모나드를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일깨워주고 있다. 신은 인간과의 결합을 통해 보이지 않는 추상적 실체를 세계의 존재로 일깨워줄 뿐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념 사이에서 소통과 결합을 통해 신과 인간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신은 인간의 사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시기부터 은총으로 주신 사랑 때문에, 세계는 신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다. 1697년 라이프니츠가 쓴 궁극적 근원에 관하여(De Rerum Originatione)에서 신과 인간의 결합은, 사물의 궁극적 근원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신은 자연과 하나로 결합하면서 영혼과 육체, 자연과 은총이라는 두 질서의 조화를 예정조화설처럼 피력하고 있다.신과 자연,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사랑과 은총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행복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세상의 깊이를 생각의 깊이와 마음의 깊이에 묻어두고, 사랑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오늘도 아름다움 것들의 결합을 꿈꿔보자!.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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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3-30
  • [윤재은 공간철학] 세상을 움직이는 ‘소통(疏通)’의 모나드(Monad)
    ▲ [사진=윤재은 기자] 세상을 움직이는 소통(疏通)의 모나드(Monad) :사람의 마음은 소통의 소리에 따라 요동치는 바다와 같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달한다는 것은 ‘소통(疏通)’에서 시작된다. 소통이란 널리 퍼지는 메아리와 같아 그 울림이 선하고 경쾌하면, 악기의 음색과 같아 황홀하고 웅장한 소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울림이 탁하고 천하면, 찢어지거나 깨지는 소리로 들려와, 사람의 마음에 동요(童謠)를 일으킨다. 사람의 마음은 ’소통‘의 소리에 따라 요동치는 바다와 같다.소통에 있어 웅장한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사랑을 싹트게 하지만, 천하고 깨지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폭력과 파괴를 가져온다. 하나의 소리가 두 개의 행동으로 변이(變異)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따라 소통의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소통의 ‘창(窓)은 마음과 소리에 의존한다. 마음은 추상적이고 형체가 없지만 정신 속에 실체하기 때문에 좋은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이 싹트고, 나쁜 마음속에서 나쁜 생각이 싹튼다. 빛의 실체로 태어난 세상은 사람의 마음과 같아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하지만 조금만 방향을 틀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불태워 버리거나 얼려 버릴 수 있다. 소통은 마음의 온도와 같아 좋은 소리로 소통하면, 듣는 사람을 감동시켜 선(善)하게 만들고, 나쁜 소리로 하면, 듣는 사람을 흥분시켜 악(惡)하게 만든다.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빛의 영향을 받는다. 세상은 빛에 따라 삶의 방식과 생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음은 빛의 온도에 따라 선과 악이 갈린다. 너무 센 빛은 사람을 흥분시켜 악을 행하게 하고, 약한 빛은 자신만을 아는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적정한 온도에서 서로와 소통하며 생존하듯이, 마음은 ‘중용(中庸)의 온도’를 통해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소통의 소리는 무형이지만 생명이 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소통이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것을 말한다. 소통의 소리는 정성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소리는 좋은 음악처럼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나쁜 소리는 남을 아프게 할뿐 아니라 자신을 아프게 한다.소통은 마음과 소리로 전달되는 대화의 기호이다. 전달을 위한 기호는 상대적이다. 상대방에게 좋은 기운을 전달하면 상대의 마음이 행복해지고, 나쁜 기운을 전달하면 상대의 마음이 우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사랑으로 하라.’ 가슴과 사랑으로 전달하는 소통은 기쁨과 희망이 되어, 대화의 대상뿐 아니라 사회를 따뜻하게 할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은 세계를 단절의 벽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도구이며, 기술이다.소통의 소리는 형상을 만들 수 없지만, 선한 마음으로 사용하면, 영혼처럼 깨끗하게 돌아와 실체화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이 타락한 마음과 결합하면, 선한 마음은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고 타락한 영혼만이 마음속에 남는다. 마음과 소리가 조화를 이루면 천상의 소리가 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화합할 수 없어 깨어지고 만다.‘소통(疏通)’은 마음과 소리로 구성된 살아있는 ‘모나드(Monad)’이다. 소통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서 ‘모나드(Monad)’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마음과 소리로 통하고 그것으로 이루어진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모나드는 창이 없으면서도 소통하는 소통의 모나드이다. 소통은 물질적 창이 필요하지 않고 마음의 창만을 필요로 한다. 마음으로 통하는 소통만이 진정한 소통이라 할 수 있다. 모나드는 넓이나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무엇으로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모나드는 최초의 실체이며, 이를 있게 한 근원적 실체이다.고대 혼합주의적 종교인 나스티시즘(靈知主義, Gnosticism)에서 모나드는 불가시적 무한 상태(Invisible Infinite God)의  초월적 신이 현현(顯現)할 때 그 첫 번째 존재상태의 신을 모나드라 하였다. 여기서 모나드는 창조의 모나드이며, 실체의 모나드이다. 모나드는 유대교에서 창조의 신비를 가르치는 카발라에서 아인 소프(Ain Soph: 무한의 빛)의 무한상태인 창조적 신이, 유한 세계의 존재계인 생명나무(Tree of Life)나 존재의 4계(Four planes of being)라는 아담 카드몬(Adam Kadmon)으로 현현하면서, 10개의 세피로트(Sephiroth)인 빛의 구체들 중 첫 번째 빛의 구체인 세피라(Sephira)의 케테르(Kether: 왕관)를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아인 소프(Ain Soph: 무한의 빛)와도 같고 플로티누스 (Plotinus, 205-270)의 일자(一者)와도 같다. 일자는 모든 것의 생성원인이며 근원인 것이다. 고대의 종교나 유대교를 넘어 합리주의적 사고의 라이프니츠까지 모나드는 모든 것의 빛이며, 실체의 근원인 것이다.모나드는 빛과 같이 소통하고 빛과 같이 생명을 나누어주는 창조적 실체이다. 하지만 모나드는 창조적 실체이면서도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소통으로서 자신의 실체적 의미를 나타낸다. 고대 동양철학자 노자는 도덕경에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도(道)라고 보았다. 그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고 말하였다. 도(道)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모나드이고 모나드는 창조의 실체로서 도(道)이다.신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은 선천적으로 착하고 선하다.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세계에 나오면 그 선함은 경쟁으로 바뀌게 되고, 그 경쟁은 비교의 대상으로 바뀐다. 경쟁은 항상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구분된다. 이기고 지는 것은 경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을 비교의 대상이 아닌 만족의 대상으로 바꾸면 그 결과는 달라진다. 경쟁은 누군가를 이겨서 성취하는 승리이지만, 만족은 자신과의 싸움에서만 이기면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소통은 자신과의 약속이며, 자신에 대한 관조(觀照)인 것이다.인간의 행동은 소통의 의지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선과 악은 소통의 방향성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 인생의 항로가 예측되어지거나 예정되어 있다면, 그 길에서 방향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마음과 소리처럼 정해진 방향이 없다. 방향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삶의 방향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사는 것은 마음과 소리가 들려주는 소통의 멜로디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소통은 ‘길(路)’이다. 소통은 삶의 길이며, 행복의 길이며, 국가의 길이며, 통치자의 길이며, 나의 길이다. 소통은 길과 같아 가는 길의 방향에 따라 천국의 문을 만날 수 도 있고, 지옥의 문을 만날 수도 있다. 천국과 지옥이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울타리에 존재하면서도 생각과 행동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선한 것은 ‘선마(善馬)’와 같아서 이성의 힘에 의존하고 보편적으로 선한 것만을 추구하며, 인간에게 해를 주지 않지만, 악한 것은 ‘악마(惡馬)“와 같아서 남의 것을 질투하며, 해가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21세기 소통의 길목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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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3-16
  • [윤재은 공간철학] 스피노자의 에티카(Ethica), 실체와 속성 - ‘자연(自然)의 속성’은 신의 본성을 대변하는 실체이다.
    [사진=윤재은 기자] ‘스피노자의 에티카(Ethica), 실체와 속성’ :‘자연(自然)의 속성’은 신의 본성을 대변하는 실체이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속성 중 ‘자연(自然)의 속성’은 신의 본성을 대변하는 실체이다. 자연은 수많은 속성으로 스스로 실체를 표현하지만, 그 표현의 속성은 유한하고, 남는 것은 또 다른 이름으로 태어난 속성들뿐이다.‘신과 자연, 자연과 신은 하나의 실체이며 같은 것이다.’ 스스로 피어나고 소멸하는 자연의 속성 속에서 세상 만물은 소생하고 소멸한다. 이와 같은 자연의 생성과 소멸은 인간의 삶과 같다.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난 인간은 소멸을 통해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 자연은 생성-소멸-생성의 과정을 겪으며 ‘코나투스(Conatus)’ 적 욕망으로 나아간다.자연이 보여주는 생명성은 신의 속성처럼 영원하다. 신은 무한한 실체로서 영원하지만, 인간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만약 신의 실체를 언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라 할 수 없다. 신의 고유한 속성은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자연 속에 있고, 그 실체는 속성들의 표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에테카(Ethica)처럼, 신은 무한한 실체이며, 무한한 실체는 곧 자연이다. 따라서 신은 곧 자연이며, 자연은 곧 신이다.자연에 존재하는 각각의 속성은 시간 안에서 유한하고, 시간은 모든 속성의 소멸 원인이 된다. 속성의 소멸은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유한한 속성들은 또 다른 속성들로 태어나면서 영원한 자연으로 남는다. 자연이 영원한 것은 신의 속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자연의 속성에서 생명은 가장 고귀한 속성 중 하나이다. 생명이란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생명이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삶에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생명은 모든 것이며, 존재이다. 생명이 없다면, 세상에 어떤 것도 없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종말을 말하는 것이다. 종말이란 세상의 모든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고, 내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종말은 세계의 종말이며, 신의 종말이다.세상에 있어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자신의 생명은 곧 자연이며, 자연은 곧 신이기 때문이다. 신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고, 마음은 신에게 향한다. 이러한 마음은 회귀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인 창조주를 그리워하고 의지하는 마음은 근원을 향한 회귀본능에서 나온다. 자연으로서 삶의 근원 중 하나인 인간은 회귀본능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인간에게 주어진 스스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거나,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생명의 가치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나 생각은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은 그 어떤 물질이나 욕망으로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생명의 소중함은 자연의 생명체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연의 생명은 너무나도 다른 형태의 속성들로 태어난다. 하지만 모든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스스로 소중히 생각한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은 생명의 가치기준이 살아있기 때문이다.물질주의적 사회에서는 생명의 소중함보다는 물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생명이 다하려는 순간에 다다르면 물질은 물질일 뿐 생명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의 생명이 물질보다 못하게 취급되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인간에게 있어 ‘살아있는 현재의 순간보다 더 소중하고 행복한 것은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축복이며, 은총이다.인간으로서 ‘현재’라는 순간은 일생이며, 영원한 삶이다. 현재의 시간이 없다면 영원한 삶도 없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순간, 숨 쉬는 순간, 그 순간의 호흡을 느끼는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은 삶에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시간이 삶 전부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자연은 우리의 스승이며, 동반자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자연은 스스로 표현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때문이다.자연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자연이 담고 있는 다양한 속성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자연, 무한한 빛으로 발산되는 색채의 자연, 음악처럼 아름다운 선율의 자연, 생명의 환희를 알리는 탄생의 자연, 계절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사계(四季)의 자연 등 무수히 많은 자연의 표현은 그 신비의 영역으로 인간을 몰입시킨다.이러한 자연에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으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자연과 하나 되려는 삶의 의지는 신의 의지에 다가서는 것이며, 선(善)의 의지이다. 선한 사람은 자연을 가까이하고, 악한 사람은 자연을 멀리한다. 자연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의지로서 선에 속한다.신의 속성으로 태어난 자연에서 그 속에 깃들어있는 신의 의지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선(善)한 눈이 있어야 한다. 자연에 표현된 신의 의지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인간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마음의 눈이 없으면 그것을 볼 수 없다. 마음은 자연의 모든 대상을 받아들이는 문(門)과 같다.빛은 자연에 수많은 색을 만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세상 어떤 예술가도 표현할 수 없는 색의 환희는 신의 의지로 표현된 자연만의 속성이다. 하지만 이처럼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의지(意志)는 같은 대상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아름다움이 있어도 볼 수 없거나, 좋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자연은 수많은 얼굴로 신의 속성을 표현하지만, 그것을 보려는 의지가 없는 인간에게 자연은 그저 수많은 속성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신과 자연, 실체와 속성의 언덕에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가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형이상학적 실체이념을 에테카(Ethica)를 통해 계몽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스피노자는 에테카에서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체계를 윤리학의 기본으로 보았다. 그는 자기 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연의 원인은 신의 본질이 자연에 내재되어 있으며, 신의 본성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중세의 신학에 의해 주장된 추상적 신의 실체가 봄의 새싹처럼 발아하여 계몽의 정신과 함께 자연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자연은 봄바람을 타고 피어나는 꽃처럼 각각의 속성들이 스스로 실체가 되고, 그 실체는 속성들의 성질을 통해 신의 실체가 된다. 스피노자의 무한성에 대한 사상은 실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신안에 있는 만물의 인식을 말한다.항상 우리 곁에 있는 자연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신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질화되어버린 정신이, 피폐한 영혼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는 길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길밖에 없다. 자연은 신을 대신해서 인간의 지친 영혼을 안식시켜준다. 육체가 힘들고, 정신이 피폐할 때 모든 번뇌를 버리고 자연으로 떠나보라. 그러면 자연으로 떠나는 그 걸음 속에서, 그 시간 속에서, 그 자연 속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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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1-29
  • [윤재은 공간철학] ‘백지상태(白紙狀態), 생각의 번뇌를 지우는 방법’ - 많은 번뇌(煩惱)를 줄이는 방법은 ‘생각의 단순함’에 있다.
    ▲ 사진=윤재은 기자 ‘백지상태(白紙狀態), 생각의 번뇌를 지우는 방법’ :많은 번뇌(煩惱)를 줄이는 방법은 ‘생각의 단순함’에 있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 생각은 삶을 살아가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지만, 생각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삶에 있어 생각의 양은, 그 양만큼 번뇌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가볍게 사는 것, 그것이 삶의 방향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며, 행복해지는 방법이다.자연은 생각의 양보다는 실천의 양을 중요시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실천보다는 생각으로 번뇌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버티기 위해 자신의 낙엽을 모두 떨어 뜰이고 앙상한 가지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버티면서 생의 무게를 줄인다. 이러한 몸부림은 어렵고 힘든 생의 환경을 버림의 미학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다.인간의 경험은 많은 것을 통해 마음을 채워가지만, 이렇게 채워진 마음은 생각의 근원이며, 관념의 근원이다. 하지만 잘못된 채움은 마음에 상처가 되거나, 번뇌가 되기도 한다. 채움이란 부족한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채워나가는 것이지만, 잘못된 채움은 번뇌만을 남길 뿐이다. 마음을 채운다는 것은 선한 것, 사랑스러운 것, 그리고 꼭 필요한 것만을 채우는 것이지, 소유욕을 채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많은 번뇌를 줄이는 방법은 ‘생각의 단순함’에 있다.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하는 것은, 그 복잡함을 단순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복잡한 문제의 근원은 단순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번뇌가 쌓인다면 생각을 없애면 된다. 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다면 마음의 지우개를 이용하여 생각의 백지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다. 생각의 백지상태는 생각을 단순화하여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의 하나이다.생각의 백지상태에 이르는 방법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단순한 생각은 단순한 삶을 이끌며, 단순한 삶은 단순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생각의 단순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념 속에 머물러 있는 많은 번뇌를 지워버리고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유도된 삶은 현재에 만족하며, 작은 것에 만족하고, 주어진 조건의 소중함을 깨달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삶을 살아가면서 생각이 많으면 복잡하게 되고, 복잡하게 되면 정확한 판단을 놓칠 수 있다. 생각이라는 것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그 난해함이 더해져서 복잡하게 얽히게 되고, 그렇게 얽힌 생각은 더욱 더 깊은 번뇌로 돌아온다. 번뇌는 너무 많은 생각에서 나오는 어두운 메아리와 같아, 그것이 커질수록 육체와 정신은 힘든 강을 건너야 하는 뱃사공처럼 힘든 노를 저어야 한다.삶의 과정에서 백지상태란, 법정스님의 무소유처럼 소유하지 않는 마음을 통해 소유욕과 물질욕으로 부터 해방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을 추구하고, 부족함에서 삶의 행복을 찾자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스스로 실천한 무소유의 삶은 소유로부터 시작된 무소유이다. 무소유란 소유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며, 이는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상대적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끝없는 소유욕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무(無)’를 바라본 법정스님의 해안은 소유욕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번뇌를 아무것도 없는 무를 통해 소유욕에 대한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일깨우려는 것이다.‘생각의 백지상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함이 아니고, 알고도 말하지 않는 용기 있는 침묵(沈黙)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번뇌를 지워내서 순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하얀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백지상태의 도화지는 많은 것을 그리고 채울 수 있는 순수의 공간이다. 순수공간은 발자국이 남겨져 있지 않는 하얀 눈의 언덕처럼 어떠한 잡념과 번뇌가 남겨져있지 않는 공간이다. 이렇게 비워진 백지상태의 공간은 생각에 따라 사랑과 행복을 채울 수도 있고, 번뇌를 채울 수도 있다. 신의 이름으로 비워놓은 백지공간은 채우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채워질 수 있다.자본주의로 팽배해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 순수한 인간으로 살아남는 길은 생각의 백지상태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물질과 정보는 우리들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 속에 정신적 빈곤은 삶의 무게를 짓누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의 혼돈 속에서 복잡한 정신 상태는 극단적 행동으로 발전하여 자살, 우울, 분노 등으로 폭발하고, 자신의 파멸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망쳐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막아주는 것은 마음의 백지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삶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해도, 그 순간을 넘기고,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이야기로 회자(膾炙)된다. 하지만 순간의 극단적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로 인해 표출된 행동은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낳을 수도 있다. 생각의 백지상태는 이러한 마음을 다스려주는 자기성찰로서, 생각하는 인간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계몽주의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부정확한 지식의 한계를 비움의 미학을 통해 모두 지워버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관념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생각의 한계를 백지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그의 정신으로 깨어난 계몽의 아침은 비워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는 백지상태의 계몽적 정신이며, 실천이었다.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생각의 단순화는 지식의 불안을 넘어 지혜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혜는 많은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명확한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의 힘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는 비움을 통해 채움을 이야기하고, 자만한 자는 채움의 끝을 모르고 또 다른 것을 채우려고 한다. 이러한 채움의 욕망은 번뇌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타락하게 된다.생각의 번뇌를 지우는 것은 소유로부터 벗어나 자유에 다다르는 길이다. 스스로 찾으려는 자유는 소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것에도 만족하고 삶의 가치에 만족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남보다 조금 더 있고, 조금 더 많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오늘 하루하루가 내 삶의 전부라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침 해를 바라보고 한 바퀴 돌아 어둠으로 돌아가면, 이것이 하루이고 인생인 것이다. 세상과의 이별이 다가오면 살아온 인생이 찰나(刹那)였다는 것을 깨우치지만, 더 늦기 전에 생각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오늘 하루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해야 한다. 하루하루의 삶이 아름다워지려면 생각을 단순화하고, 복잡할수록 지워내는 무소유적 ‘백지상태(白紙狀態)’가 되어보길 바란다. 생각의 백지상태에 도달하면, 보일 것은 보이고, 사소한 것은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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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5-01-06
  • [윤재은 공간철학] 삶에 있어 ‘생각의 방법(方法)’ - 삶은 인간의 생각에 따라 가벼운 구름 같기도 하고, 무거운 바위 같기도 하다
    ▲ 사진=윤재은 기자 삶에 있어 ‘생각의 방법(方法)’ : ‘삶은 인간의 생각에 따라 가벼운 구름 같기도 하고, 무거운 바위 같기도 하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삶을 살아가면서 생각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관장한다. 행복할 것만 같던 태동(胎動)의 삶은 세월이 가면서 번뇌가 되고, 무게가 된다. 신의 의지로, 빈손으로 온 삶의 세계에서, 채우기만 하려는 인간이기에, 삶에 대한 번뇌와 고독이 혹독하게 느껴진다. 나약한 존재, 부조리한 존재, 그리고 고뇌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인간을 행복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생각의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삶의 무게가 무거운 것은 생각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말하며, 삶의 무게가 가볍다는 것은 생각의 무게가 가볍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인간의 생각에 따라 가벼운 구름 같기도 하고, 무거운 바위 같기도 하다.’생각은 인간에게 생각하는 시간만을 주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는 지혜도 제공한다. 생각의 방식과 깊이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테레사의 수녀처럼 선한 인간의 모습이나, 법정 스님처럼 자신을 스스로 비우려는 빈자(貧者)의 모습은 생각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모습들이다.우주에 태어난 하나의 생명체로서 유한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가? 이와 같은 생각의 방법은 삶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판과 같다. 인간의 삶은 생각의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생각의 방법에 있어 첫째 요소는 ‘시간(時間)’이다.생명체로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생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시간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시간은 인간과 가장 가까이 있다. 신은 시간을 세상의 으뜸으로 정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의 차별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였다.시간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가치로 부여되었지만,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은 언제나 내 곁에 있기 때문에 소중히 다룰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생명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러한 시도는 공허한 욕망일 뿐이다.부조리한 부자는 욕심으로 시간을 채우고, 깨어있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은 불평으로 시간을 채운다. 이처럼 하나의 시간이 서로 다른 시간이 되는 것은, 그 시간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생각은 부자의 욕심과 가난의 불평을 모두 잠재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부자는 나눔의 행복을 아는 사람이며,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부자는 채움의 욕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생각 없이 사는 가난한 사람은 불평과 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생각을 가지고 사는 가난한 사람은 희망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간다.생각의 방법에 있어 두 번째 요소는 ‘방식(方式)’이다.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행동의 방식이 달라진다. 행동의 방식은 생각의 방식에 의해 지배되지만, 행동의 방식에 따라 삶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부유함과 가난함을 넘어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면서, 그 속에서 최선을 찾는다. 하지만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처지보다는 남들의 부유함과 행복함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불평한다. 이처럼 하나의 삶에 있어 두 개의 생각이 나오는 것은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그 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물질은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하지만 물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의 삶이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또 다른 재물을 탐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른다. 하지만 지혜로운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유용하게 쓸 줄 알며, 그 쓰임에서 행복을 찾는다. 물질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쓰임새가 행복을 만들기 때문이다.인간에게 있어 물질은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쓰는 방식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방식(方式)’은 삶의 가치를 높이는 생각의 실천이며, 행동으로서, 생각의 방법에 있어 두 번째 요소가 된다.생각의 방법에 있어 세 번째 요소는 ‘가치(價値)’이다.생각은 무형의 요소이지만, 행동은 유형의 요소로서,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면 ‘가치(價値)’가 창출된다. 가치에는 물질적 가치, 정신적 가치, 실천적 가치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삶의 가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삶의 가치는 생각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삶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삶을 위한 모든 것이고, 물질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물질을 위한 모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도 그 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듯이, 삶의 가치 또한 이와 같다. 삶의 가치는 생각의 가치에 따라 비례하며, 생각의 가치가 바른 사람은 삶의 방식 또한 바르게 설정된다.세상의 모든 고통과 행복도 생각에 따라 그 가치를 달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법’은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를 넘어 삶의 한부분이며, 조각인 것이다. 근대를 여는 한 선구자로서,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을 바꾼 선지자로서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방법은 현대인들에게 ‘생각의 방법’을 만들어가는 인생의 바이블(bible)이다.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속에 삶의 존재를 망각하는 순간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고독한 존재이며, 이방인이다. 우리에게 세상은 폭풍우였고,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삶의 방향을 잃은 삭막한 도시에서 우리는 어둠을 뚫고 빛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이방인이었다. 그 빛은 가로등이나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런 빛이 아니었다. 그 빛은 희망의 빛이요, 삶의 빛이었다. 차가운 겨울, 생명의 끝자락에 선 유태인의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은 생명이었다.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빛을 찾고자 하였다. 그것은 물질의 빛도, 욕망의 빛도, 명예의 빛도 아닌 삶의 빛이었다. 생각의 방법은 우리 인생에서 찾고자 하는 삶의 빛이며, 희망이다. 생각을 하고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걸어가야 할 구도(求道)의 길이다.젊음의 삶은 희망이었지만 노년의 삶은 고통이고 절망일 수 있다. 이러한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생각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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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은 공간철학
    2014-12-18
  • [윤재은 공간철학]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 ‘시간의 흐름에도 규칙(規則)이 있다는 것이다.’
    ▲ 사진=윤재은 기자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도 규칙(規則)이 있다는 것이다.(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도 규칙(規則)이 있다는 것이다. 규칙이란 ‘다 함께 지키기로 정한 사항(事項)이나 법칙(法則)’으로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시간의 규칙을 벗어날 수 없다. 삶은 ‘시간의 규칙’에 따라 그 흐름 속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항상 청춘일 것만 같던 젊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되어간다.이러한 현상은 인간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동·식물이 동일하다. 생(生)의 규칙은 시간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神)’과 같다. 신은 시간에 의해 생명을 부여하고, 부여된 생명을 마감하게 한다. 이처럼 시간은 신의 속성을 대변하는 ‘사건(事件)’으로서 결과를 동반한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창세기(創世記)와 같은 ‘사건(事件)’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사건은 규칙에 의해 일어나고, 그 규칙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신의 규칙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라는 규칙에 의해 그것들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신은 흑암(黑暗)으로 이루어진 혼돈의 세계에서 로고스(Logos)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의 세상을 창조하였다. 신의 창조는 아무것도 없음 가운데, 모든 것이 존재하는 기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 왔다가 잠시 머물다 사라져 버리는 ‘꿈’과 같은 것이다.창세기에서 신은 첫째 날 빛을 창조하고 빛을 통해 밝음과 어둠을 두시었다. 이렇게 창조된 밝음과 어둠은 하루라는 시간이 되었고 하루는 일생이 되기도 한다. 신은 둘째 날 궁창을 물과 물로 나누고 궁창을 하늘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셋째 날 신은 뭍의 물을 한곳으로 모아 땅과 바다로 구분하고 땅에 생명체를 부여하였다. 넷째 날 신은 태양과 달, 별을 만들어 낮과 밤을 관장하였다. 다섯째 날 신은 땅과 물에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만드시고 그 생명이 끝없이 번성하도록 만드시니, 세상은 수많은 생명체로 채워지고 세상은 삶의 세계가 되었다. 여섯째 날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은 모두가 쉬게 하였다.6일간의 사랑으로 태어난 세계는 신의 규칙(規則)이 만들어낸 세계로서 수많은 변화를 통해 오늘로 현존(現存)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창세기를 통해 신의 창조에도 나름대로의 규칙과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의 법칙은 ‘사건의 법칙’이요, ‘속성의 법칙’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시간의 사건은 세계가 스스로의 규칙에 의해 변화되고 지속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루하루 각각의 속성들이 세계를 채워가고 소멸되는 것은, 그 속성들이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지속되고 생성되는 ‘코나투스(conatus)적 욕망’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창세기 규칙에서 어떤 것의 창조를 위해서는 하나의 규칙이 형성되어야 하듯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존재해야 한다. 규칙 없는 삶과 세계는 무질서만이 남게 되어 혼돈스럽기 때문이다. ‘삶의 혼동’이란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을 말한다.인간에게 있어 삶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살아가는 삶과, 그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사는 사람과의 차이는 삶의 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의 항로로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에 남겨진 고독한 존재의 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항로에서, 지나가는 항해의 과정에 행복과 추억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삶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삶의 행복은 자신의 방식과 규칙에 따라 확실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몽주의의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의 학문으로서 실체적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정하였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었던, 믿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회의(懷疑)의 눈을 가지고 그 것의 실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룻밤의 유희를 불러오는 신기루로 보았고, 그것들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관념(觀念)으로 채워진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뽐내거나 주장하려 한다. 하지만 변치 않는 진리(眞理)는 신의 속성 속에 존재할 뿐 그 어떤 논리도 시간의 연장 속에서 거짓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관념의 유동적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자신만의 규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진리의 영역에 한걸음 다가서고자 했다.그는 세상의 변치 않은 진리는 ‘마음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빛의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그 빛을 볼 수 있는 규칙이 필요하였다. 그는 복잡한 세계 속에서, 수많은 지식과 상상 속에서, 자신이 굳게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어둠속에 묻혀 버렸다. 데카르트는 불확실한 어둠을 걷힐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고, 그러한 방법으로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는 4가지 규칙을 설정하였다.첫째, ‘명증성의 규칙’으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편견과 권위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내 자신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진리로 삼으려는 규칙이다. 그는 자신의 관념 속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확실하지 않는 관념은 이성을 현옥시킬 수 있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분해의 규칙’으로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그것을 작은 단위로 분류하여 그 해답을 찾는 것으로서,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행하겠다는 확고한 규칙이었다. 셋째, ‘열거의 규칙’으로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잡한 것으로 질서 있게 접근하려는 규칙이다. 넷째, ‘종합의 규칙’으로서 자신이 찾고자 하는 대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질서 있게 열거하여, 그 진리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말한다.데카르트는 4가지 규칙을 통해 자신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관념이라는 고리를 떨쳐버렸다. 그는 관념의 고리를 스스로 풀어헤치며, 진리의 범주에 도달 할 수 있는 실체를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실체, 그 존재는 인간의 생각이나 관념으로 해결하거나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지 않았다.데카르트의 노력은 오히려 의심만을 불러일으켜 회의(懷疑)하는 자아(自我)로 발전하며, 그 회의가 곧 그를 지혜의 의지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그의 말은 회의(懷疑)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거짓이 될 수 있지만, 의심하는 순간으로서의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명제를 깨달게 한다.데카르트가 발견한 진리의 코기토(Cogito)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삶의 규칙을 세우는 중요한 교훈이 된다. 세상에 태어나 명확한 삶의 목표를 정하고,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자신의 삶을 괴롭게 만들 때, 그 고뇌의 원인이 되는 문제를 하나하나 분해해보면, 그 해답은 문제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는 그 문제들을 작게 분해하거나 열거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판단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삶의 규칙은 어떠한 억압된 법칙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며, 약속이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회의적 질문이 우리들의 삶을 뒤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윤재은(Yoon Jae Eun)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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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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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투포토] 설악산 단풍 최절정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설악산 단풍이 붉은 물결을 이루며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설악산의 단풍은 지난 18일을 기점으로 최절정에 다달아 이번주까지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요. 지난 휴일에 수 많은 인파들이 설악산을 방문해 아름다운 단풍에 취했었습니다. 푸르른 녹색의 자연이 붉게 물드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지만, 그러한 현상은 우리들에게 시, 음악 그리고 커피의 내음을 연상시키게 해줍니다. 사계 중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단풍여행에 마지막 한주를 즐겨보길 바랍니다. 가을 단풍이 물든다는 것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2014-10-21
  • [뉴투포토] 자연은 순수하고 정직하다… 국회도 이와 같으면 좋으련만
    (뉴스투데이=윤재은 기자) 자연을 통해 맑고 순수한 자태를 드러내는 대한민국 중심 국회의사당.21일 오후 프란체스코 교황의 방문이 끝나고 떠난 후 몇일째 비가 내렸다.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국민들에게 드리운 슬픔과 우울함을 말끔히 씻어 내리려는듯 많은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며, 말없이 흐르는 한강과 국회의사당은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오늘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국회의 모습을 모든 국회의원들이 보여주길 기대한다.
    2014-08-21
  • [뉴투포토] 클로드 모네의 수련처럼 비온 뒤 수채화 같은 여의도 하늘
    (뉴스투데이=윤재은 기자)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워싱턴 D.C.에서나 볼 수 있는 풍광을 한강에서...21일 오후 몇일째 내리던 비가 그치면서 한강에서 바라 본 여의도의 모습은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Virginia Alexandria 에서 포토맥강 Potomac R. 을 건너 워싱턴D.C Washington D.C.를 보는 것 같은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처럼 비온 뒤 수채화 그림같은 여의도 하늘은 청정 그 자체이다. 이처럼 깨끗하고 맑은 하늘은 캐나다 밴쿠버 Vancouver 에서 자주 볼 수 있다.
    2014-08-21
  • [뉴투포토] 강원도 장호항, “가족과 힐링여행 떠나요”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한국의 작은 나폴리라 불리는 강원도 삼척의 장호항. 이곳은 푸른 하늘과 청정한 바다 풍경으로 가족과 함께 찾으면 힐링되는 곳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스노쿨링과 투명보트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 여행의 추억까지 덤으로 가져갈 수 있다.
    2014-07-11
  • [뉴투포토] 강원도 ‘장호항’, 바라만 봐도 시원한 ‘푸른 바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풍경을 자랑하는 강원도 삼척의 장호항. 이국에서 볼 수 있는 파란하늘과 맑은 청정바다가 이곳에 펼쳐져 있다. 무더운 여름 휴가철엔 스노쿨링과 투명보트 등의 체험을  하기위해 가족들과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2014-07-11
  • [뉴투포토] ‘한국의 나폴리’ 강원도 삼척의 장호항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한국의 작은 나폴리라 불리는 강원도 삼척의 장호항. 이국에서 볼 수 있는 파란하늘과 맑은 청정바다가 이곳에 있다. 여름 휴가철에 이곳을 방문하면 스노쿨링과 투명보트 등의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싱싱하고 맛있는 음식도 즐길 수 있다.
    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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