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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명장] 백용식 “1200년전 동탑사리구 2년넘게 제작, 재현”
    ▲ 백용식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리함 공예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많거든요.” 참 소박하다. 금속공예, 사리함 제작부문으로 한국예술문화명인에 선정된 백용식 명인이 밝힌 바람이다. 어찌 보면 ‘변화’보다는 ‘일관(一貫)’이 더 어렵다. 더구나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던 전통공예 분야에서 일관되게 한다는 것은 특히나. 그렇기에 백용식 명인의 바람이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또한 지금까지 일관되게 전통공예를 하고 있는 그가 대단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정도600년 기념 공예품 경진대회’ 금상(1996), ‘우리공예 한마당 큰잔치’ 대상(1996), 국회문화 체육 공보위원장 표창 수상(1996), 한국 청소년지도자 금속공예부문 수상(2009) 등 공모전 수상은 물론 대형 사찰의 사리함을 제작해 오고 있다. 서울에 위치한 백용식 명인의 공방을 찾아 사리함과 금속공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백용식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 백용식, 연꽃 사리함 ■ 사리함을 아시나요?  사리함,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조금은 생소할 수 있다. ‘사리함’은 ‘사리(舍利)’를 담는 함을 말하는데, 사리는 유골을 화장한 뒤에 나오는 구슬 모양의 담석이다. 원래는 석가모니의 유골을 뜻했으나 현재는 스님들을 화장한 뒤 나오는 담석을 말해, 사리가 곧 오랜 공덕의 결과라고 이해하면 된다. - 주로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예전에는 사리함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리함의 수요가 많지 않다 보니 사리함만으로는 공방을 운영할 수 없어서 금속공예 등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은 식기들, 차기 세트 등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고 있어요.” - 그럼 원래는 ‘사리함’만 만드셨던 건가요. “네. 주종이 사리함이었어요. 하지만 사리함만 고집하기에는 공방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해 변화를 시도한 거죠.” - 사리함 제작 의뢰는 얼마나 들어오시는지. “요즘도 사찰에서 쓰긴 하지만, 거의 없어요. 뜸하죠.(웃음)” - 사리함의 종류는 어떻게 되나요? “사리함의 종류는 딱 구분 짓을 순 없어요. 스님들이 사찰에서 쓰여질 용도에 맡게 주문을 하면 그 주문대로 제작을 하는 방식입니다. 사천왕성, 연꽃, 사찰 내에 있는 탑 등 그 분들의 취향에 맡게 주문한대로 제작을 해요. 맞춤제작인 셈이죠.” - 사리함 크기도 다양한가요. “다양해요.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종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각각이죠. 탑 형식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원형도 있고, 서찰의 대웅전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서 하는 것들도 있거든요.”  ▲ 백용식, 금탑사리함 ■ 화려하고, 화려하고, 화려하다! 감은사지 동탑사리구  - 의뢰받은 것 외에 작품으로 사리함을 만들기도 하시죠? “그렇죠. 제가 좋아서 만드는 작품들이 있죠. 여유시간이 생기면 사리함 작업에 열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그 중 가장 대표작을 꼽자면. 경주 동탑사리구라고 우리나라 사리함 중에 제일 훌륭하고 가장 만들기 어려운 사리함이 있어요. 1200년 전에 만든 동탑사리구가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오랜 시간에 부식이 되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에요. 그 사리함을 한 교수님께서 1:1 비율로 책자를 기록하셨는데, 그 것이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있습니다. 그 기록을 일일이 열람해서 그대로 재현을 했어요. 그 작품이 저의 대표작이죠. 굉장히 화려하고 제작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 제작 과정이 기간은 어느 정도 인가요? “저 혼자 모두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로 한 작품이었어요. 총 3사람의 손을 거쳐 2년 2개월 정도 제작했어요.”  ▲ 백용식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 공예와 함께 한 삶 - 어떤 계기로 사리함을 만들기 시작했나요. “21살 때 얻은 첫 직장이 사리함 공방이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거죠.” - 불교신자인가요? “네. 불교신자로서 불교문화가 익숙하다보니 사찰에 가더라도 편하고, 그래서 사리함과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만들 때는 어렵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고 있고, 그래서 좋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나 싶어요.” - 작품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정교함이죠. 의뢰하는 분들이 원하는 부분을 빨리 캐치해서 정확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 지금까지 공예를 해오면서 가장 고마웠던 분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아무래도 제가 첫 직장으로 사리함 제작을 처음 시작했을 때 도와주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스승님이 가장 감사하죠.” - 공예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동탑사리구 완성 됐을 때 정말 뿌듯했어요. 물론 다른 작품들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된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죠.”  ▲ 백용식, 통도사 대웅전 사리함 외함 및 내함 - 공방 꾸려나가시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요. 뭐 지금 공예 하는 분들이 다들 어려워요.” - 공방 운영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아이들 공부 때문에 외국에 나간 적이 있어 그 동안 몇 년 쉬었어요. 그 뒤 귀국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계속 해왔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재기하는데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도 잘 견뎌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죠.” - 외국에 있을 때는 작업을 전혀 못 하신건가요? “못 했죠. 아이들 뒷바라지 열심히 했어요. 공예를 다시 하고 싶단 생각 많이 했어요.” - 힘들어 관두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사실 없다고 하기엔 그렇고.(웃음) 있었죠. 금전적으로 힘들기에 다른 일을 하려고도 생각해봤지만,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은 이 일 만의 매력이 있어서 입니다. 결국 다른 일은 한 적은 없었어요.” - 그 매력이 뭔가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오롯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다른 일들은 생각도 안 나고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힘들 때도 있지만 할 때만큼은 너무나 행복해요.” “둘째딸이 미술을 전공했는데, 제 일을 많이 도와주고 이 일을 좋아해요. 저를 이어 하고 싶다고 하니까요.(웃음) 딸이 함께 해주니 힘도 되고, 도움도 많이 받아요.” - 따님처럼 다른 청년들도 전통에 관심이 많으면 참 좋을 텐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세대보다 보는 것도 많고, 아는 지식도 많기 때문에 빠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통을 재해석할 수 있을 텐데 관심이 많이 없으니 아쉽죠. 음식만이 아니라 공예에도 수작업에서 나오는 손맛이 있는데, 아직 그 손맛을 모르고 있죠.(웃음)” - 화려한 은 식기들을 보니 실제로 사용하기 보단 고이 보관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하하. 그래도 은 식기를 사용하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요. 은은 해로운 물질이 있으면 검하게 변하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임금님 수라상에는 꼭 은수저를 사용해 음식 안에 독이 있는지 확인했을 정도니까요. 요즘은 은으로 된 차기 세트를 많이 사용하는데, 은 주전자에 물을 마시면 은이 물을 정화해 차 맛이 좋아요.”  ▲ 백용식 [사진=양문숙 기자] ■ 한국전통공예가 여러분, 힘내세요! - 한국예총의 제1회 명인으로 선정되셨는데,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좋고, 고맙죠. 공예에 대한 관심,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해요.” “공예인들이 공예에만 열중하도록 하고, 전통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려면 정부의 지원이 꼭 있어야 해요. 대부분의 공예인들이 여유롭지 못 하거든요. 공예를 발전시키고 전승해야 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부의 지원책이 없어요. 정부 지원으로 사양되어 가는 전통공예를 살려야 해요. 전통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공예가들이 안정적으로 공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해요. 그래야 전통이 발전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 한국공예예술가협회에서도 활동하고 있죠? “협회 활동에 전적으로 나서서 참여하지는 못 하지만, 공예인들이 뜻을 모으는 자리에는 함께 하려고 해요.” - 함께 전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아쉬운 마음이 있어요. 전통공예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작업하는 분들이 많이 없거든요. 아무래도 정부나 사회적으로 전통공예가로서 인정을 받아야 성취감도 올 땐데 그런 여건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보니 그런 것 같아 아쉬워요. 전통공예가, 제대로 인정받는 날이 꼭 오면 좋겠어요.”  ▲ 백용식 [사진=양문숙 기자] ■ 오늘도 열심히 살자 - 앞으로 사리함공예,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스스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변화한다면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안 좋았던 상황들도 있었지만, 한 길로만 계속 해나가니 지금까지 할 수 있었거든요.” - 새로운 변화를 위해선 공부도 계속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계속 배우게 되죠. 다른 분들의 새로운 작품을 봤을 때 그 완성품을 보고 제작과정을 추측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며 배워요.” “일본 공예가 발달이 많이 되어 있어요. 일본은 정부의 전통 지원이 탄탄하기 때문에 공예가들이 시간도 많이 투자하고 정교하게 만들거든요. 훌륭한 작품들을 보면 아무래도 더 배우려고 하죠. 하지만 제가 만드는 것도 정성을 들여 정교하게 만듭니다.(웃음)” -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좌우명이라기보다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자’라는 마음가짐이에요. 무엇이든 그게 가장 중요하죠.” ▲ 백용식 [사진=양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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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6
  • [한국의 명장] 서예가 문관효 “한글은 한 마디로 예술이에요”
    ▲ 서예가 문관효가 병풍에 쓴 훈민정음 언해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중국에서는 붓글씨를 ‘글씨가 곧 법이다하는 뜻으로 서법(書法)’이라 불러요.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수양을 하는 것이라 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붓글씨 예술이라 봐요. 서예와 한글의 매력은 바로 ‘글씨’도 ‘예술’이라는 거예요.” 2013년 10월 9일. 22년 만에 공휴일로 지정된 한글날이 567돌을 맞아 여기저기 한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무수히 많은 반대 세력에도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께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은 지난 22년의 세월 동안은 그런 생각들에 무심하지 않았나 반성이 되기도 했다. 지났다고 잊지 말자. 한글의 고마움! 세종대왕이 전세계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청농 문관효 서예가를 만났다. 그를 찾아간 곳은 문관효 서예가의 서예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 한국미술센터였다.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세종대왕 얼을 담은 ‘청농 문관효 서예전’ 이번 서예전이 뜻 깊은 이유는 그가 지난 3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8M에 이르는 훈민정음 언해본 서예작품을 완성해 걸었기 때문이다. 문관효 서예가가 선보인 ‘훈민정음 언해본’은 기존의 한자 중심의 문헌과는 다르게 한글 중심의 붓글씨로 써 단순히 붓글씨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을 한자보다 더 크게 써서 민족의 정신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뜻을 높이 산 작업이다. 다시 말해 한글의 사랑을 듬뿍 담은 것이다. 또한 ‘2013 대전 국제 푸드앤 와인 페스티벌’에 (주)한국와인이 생산한 오디와인도 볼 수 있는데, 와인병에 붙여진 ‘동행’이 그의 작품이다. 딱딱한 분위기 속에 서예전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렇게 와인에 쓰여진 서예도 볼 수 있고, 네모가 아닌 원에 쓰여진 서예도 볼 수 있는 볼거리 풍성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 이번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15세기에서 19세기 한글의 전통에서 넘어와 21세기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 우리 세대에 우리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한글을 썼어요. 다시 말해 전통을 살려서 현재의 한글을 만들귀한 여러 가지 시도들을 볼 수 있는 전시죠.” - 전시를 개최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올해 회갑이기도 하고, 붓을 잡은 지도 50년 정도 돼요. 그 정도 되다보니깐 남들이 안 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는데,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고 나서는 ‘이거다’ 한 거죠. 그런데 언해본을 처음 볼 당시에는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못했어요. 2010년 직장을 그만 둔 뒤에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서예 강의를 했습니다. 하면서 느낀 것이 교육적인 측면에서 조명을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생각이 맞아 언해본을 전문으로 쓰게 된 거죠.” - 언해본은 어디서 어떻게 보게 됐나요.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할 때는 남의 작품을 보지 않고 꼭 원본을 보러가요. 공모전 준비를 위해 중앙도서관을 애용하는데, 다른 자료를 찾다가 언해본을 보게 됐죠. 그게 20년 전이에요. 20년간 누군가 쓰면 안 쓴다는 생각으로 지켜봤고, 회갑전시 하기 전 까지 아무도 안 쓰면 내가 한 번 써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쓰게 된 겁니다. 하지만 원본과 똑같이 쓰려고 하진 않았어요. 예전에는 한문을 가지고 한글을 설명하다보니 한문을 크게 쓰고 한글을 작게 썼지만, 지금 21세기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 한글이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한글을 앞세워 써보자고 생각을 한 거죠. 우리글이 참 멋있어요.(웃음)” - 또 원본과 다른 점이 있나요? “훈민정음을 제일 처음 쓴 ‘해례본을 보면 모음이 점으로 처리됐고, 13년 뒤에 발표한 언해본에서는 모음이 짧은 선 처리로 나왔어요. 그래서 8M 언해본은 선으로 했고, 병풍 작품은 점으로 썼어요. 뭐라도 다르게 하고 싶었거든요.” -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아무래도 언해본이겠죠? 작업 일화가 있을까요? “그렇죠. 3년 전부터 시작해 정성을 쏟은 작품입니다. 작가 한명이 작업을 하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이 분야에 뛰어난 학자의 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훈민정음에 박식하고 저를 도와줄 수 있는 학자를 찾는데 만 6개월이 걸렸죠. 중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대학교 교수까지 정말 수소문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세종대학교 김슬옹 교수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학자는 찾았지만, 전화번호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분이 출간한 책을 보고 무작정 출판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쉽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시진 않았지만 제가 이런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 그 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며 교수님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께 전화가 왔고, 그렇게 만나게 됐죠. 어떻게 학자도 생각하지 못 한 작업을 서예가가 생각해 낼 수 있냐고 놀라시더니 이렇게 완성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 언해본은 이번 전시뿐만이 아니라 서예가 인생에서도 가장 대표작이겠네요. “그럼요.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해 온 작품 중에서는 대표작이라 생각합니다. 완성한 순간 정말 뿌듯했어요. 올해 567돌 한글날인데 오늘 날까지 한글을 앞세워 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니 더 자부심을 느껴요. 하지만 반면에 쓰면서 힘들기도 했어요.” - 어떤 부분에서 힘드셨나요. “글씨가 고문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전문 지식이 많지 않아 어려웠죠. 그래서 김슬옹 교수님께 자문을 많이 구했어요. 혼자 할 순 없고, 교수님과 계속 같이 할 수도 없으니 자문을 구하고 작품으로 옮기고 하는 과정들이 어려웠죠.” “10번 이상을 다시 썼어요. 쓰다가 방점하나 잘 못 찍으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으니까요. 아무래도 한문과 한글을 바꿔서 쓰다보니까 실수가 많았죠. 지난 5월~6월 즈음에 글을 다 썼어요. ‘아 드디어 완성했다’고 생각하고 배접을 하는데, 그 때 먹이 번져버렸어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다시 칩거하면서 몰두했습니다.” - 어디서 칩거하셨나요. “연구실이 있는데, 이 작품 할 때는 집에서 했어요. 연구실에서 하면 아무래도 방문객이 많아요. 못 오게 할 순 없으니, 집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열중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남이 하는 거 다 하면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자제를 하면서 정말 몰두 한 거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정말 작업만 했어요.” - 한 종이에 쓰신 건가요? “8M가 조금 넘는데, 저렇게 큰 종이가 없어서 종이 4장을 이어서 했습니다.”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즐기다보니… - 언제 처음 붓을 잡으셨나요. “제 고향이 진도인데, 할아버지께서 학식이 높으신 외지 사람을 모셔다가 우리 집에서 서당을 운영하셨어요. 마을 청년들 모아다가 겨울 농한기에 글을 알려주셨죠. 할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는 데 최소한 10살은 넘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형들, 삼촌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공부하는 방에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래서 만 10살을 꼭 채우로 10살이 되던 해부터 붓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 10살 되기 전부터 글을 빨리 배우고 싶으셨나요? “그럼요. 글 읽는 소리 들으면 참 재밌었어요. 어린 시절에 부엌에서 불을 지필 때면 옆 공부방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요. 그럼 부지깽이로 글 읽는 소리에 맞춰 아궁이를 치기도 했죠. 우리 가락이 참 재밌잖아요? 글 읽는 소리에도 그런 가락이 있어서 신났어요.” - 청농체를 개발하셨는데, 어떤 배경에서 하게 되셨습니까. “사실 개발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워요. 즐기면서 쓰다 보니까 이 글씨가 써진 거지, ‘서체를 개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 게 아니거든요. 뭐든지 작가는 무의식중에 무언가 만들어진다고 봐요.” - 서예가로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첫째는 즐겨야 돼요. 뭐든지 즐기면 안 되니까요. 예술의전당 아카데미에서 서예 수업을 하는데, 정말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 들이 오세요. 그 분들께 항상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붓 끝에다가 풀어버리세요. 2시간 즐기다 가세요’라고 해요. 즐기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다음은 늘 생각해야 돼요. 모든 글을 볼 때 어떻게 쓸까를 생각해야 하는 거죠. 예를 들어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무수히 많은 간판을 보잖아요. 그런걸 보면서도 ‘나라면 어떻게 쓸까?’라고 생각하고, 좋은 쓰임이 있다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새기고, 집에 와서 한 번 써보는 거죠.”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한글 567돌, 22년 만에 공휴일로 “우리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도 어떻게 우리가 우리글을 등한시하고 있었는지…정치하는 분들이 잘못한거라 생각해요.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킬 때 솔직히 욕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글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디서 대접을 받겠어요? 그래도 정말 이제라고 공휴일이 되어서 늦었지만 참 다행이고 감사하단 생각을 합니다.“ - 선생님께 한글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 한글은 한 마디로 예술이에요. 제가 붓으로 표현해보니깐 그야말로 예술이에요.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예술이 돼요. 한자에 비해 한글은 단조로워서 작품을 하기에 심심하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 단조로움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찾아내야죠. 그게 작가의 몫이에요. 어떻게 표현하고 구성하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지니까요. 한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예술적인 글씨를 우리가 표현을 못 했을 뿐이지 단조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정말 세종대왕님이 세계에서 그 보다 더 훌륭한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 은어, 신조어 등 요즘 청소년들의 한글 파괴…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잘 못 된 거예요. 특히 교육정책이 잘 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에는 당근과 채찍이 꼭 필요해요. 잘못한 아이들에게는 우리 서당에서 훈장님께서 쓰신 회초리를, 잘한 아이들에게는 아낌없는 칭찬으로 교육을 해야 요즘 청소년들의 잘못된 언행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아직도 푸르다…청농(靑農) 문관효 - 가장 좋아하는 글귀를 꼽자면. “이 전시에 있는 글귀들이 다 제가 좋아하는 글이긴 한데, 한 가지만 꼽자면 ‘함께 즐겨라’라고 말 할 수 있겠네요. 독불장군은 없어요. 뭐든지 둘 이상이 함께 동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즐기는 걸 빼먹을 순 없죠.(웃음) 즐거워도 같이 즐거워야지 한 사람만 즐거우면 나머지 사람이 괴롭지 않겠어요?” - ‘청농’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요. “푸른 청(靑), 농사 농(農)을 쓰는데 푸른 농사를 뜻 합니다. 황농(黃農)은 이제 수확을 앞둔 늙은 농사로 비유하자면 (청농)농사가 푸르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거예요. 언제나 젊게 지금처럼 작업을 하고 싶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계획을 딱 정해놓고 가기 보단 오늘 하루 즐겁게 즐길 거리를 만들자는 생각이에요. 그렇게 살면 1년 후, 2년 후, 어느 시기에 기회가 왔을 때 제가 바로 할 수가 있거든요. 늘 노력해야 해요.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는 노력이 아니라, 즐기면서 노력하자.” - 서예가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제가 만든 작품을 단 한 점이라도 역사에 남기고 싶어요.” - 이 언해본이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건 역사가 평가해 주겠죠.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활동을 할 거예요.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서예가 문관효가 8M 훈민정음 언해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양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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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0
  • [한국의 명장] 한경화 “한지공예, 감상용 아닌 실생활용품일 때 더욱 빛나”
    ▲ 한지공예 한경화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한지공예를 하면서 느껴지는 한지의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도 물론 너무 좋지만, 한지공예는 감상용이 아닌 실생활에서 쓰일 때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한지공예의 매력이죠.”  한지공예가 한경화가 말한 한지공예의 매력처럼 전통공예에 무관한 사람이라도 한지공예만큼은 한 번쯤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그 만큼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공예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한지공예’의 역사는 다른 공예에 비해 그리 길지 않다. 조선 후기에 들어 시작된 것으로 보는 한지공예가 이처럼 짧은 역사(상대적으로)를 간직한 이유는 조선시대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왕가나 귀족층만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귀하디 귀한 한지가 지금은 가장 친숙한 전통공예로 변했다니. 한지공예가 더욱 궁금해졌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한지공예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한경화 공예가를 찾아갔다. 한지로 만든 함에서부터 조명, 경대, 항아리, 그릇까지 다양한 종류의 한지공예품으로 가득한 공방에서 한경화 공예가를 만나 그녀의 한지 이야기를 듣고 왔다.  ▲ 한지공예 한경화 [사진=양문숙 기자]■ 한경화, 한지공예가가 되기까지… - 원래 손재주가 좋으셨나요.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대표로 미술대전에 나가서 여러 번 수상하기도 했고요.” - 한지공예와의 첫 만남, 어떻게 시작됐나요. “1998년도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한지공예’ 책 한 권이 눈에 띄었어요. 그 책에 구매한 것이 첫 인연이었죠. 책에는 한지공예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 나왔는데, 그 중 한지공예로 만드는 접시를 만들어 봤어요. 그 당시 건축미술과 인테리어 설계일을 하고 있던 터라 집에는 늘 일러스트보드지가 있었거든요. 그 두꺼운 종이를 이용해 책에서 설명해 주는 대로 따라 만들었죠. 기본 재료들에 대해 잘 모르던 때라 집에서 간단히 만들었었던 기억이 있어요.” - 한지공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결정한 때는 언제인가요. “그렇게 책을 보며 처음 한지공예를 만들다가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98년부터 김영옥 선생님께 한지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잠도 안 자고 연습했어요. 아침 9시 공방 문이 열리기도 전에 나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밤10시가 지나고 나서야 스승님과 함께 퇴근했거든요. 그렇게 한 달 동안 밤낮없이 배우고 연습해서 1년 과정의 사범 과정을 한 달 만에 끝냈어요. 그렇게 스승님께 맹훈련을 받고 스승님 공방에서 작은 강사일을 하면서 다짐했어요. ‘최고가 되어보자’라고.(웃음)” - 스승인 김영옥 선생과는 어떻게 연이 닿았나요. “어떻게 보면 운명적으로 만났어요. 한지공예를 제대로 배워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그 시절에 선생님의 공방을 우연히 지나가게 됐거든요. 무작정 들어가서 한지공예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우게 됐습니다.”  ▲ 한지공예 한경화 [사진=양문숙 기자]■ 생활 속에 스며들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한지공예 - 주로 하고 있는 한지공예에 대한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일단 한지공예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어요. 한지공예는 ‘오색전지공예’로 불렸는데 한지를 다양한 색으로 염색해 오동나무나 미송나무로 된 목재나 두꺼운 종이로 만든 골격에 여러 겹으로 붙여 만들고 전통문양을 오려붙인 ‘색지공예’, 한지를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꼰 다음 매듭을 지어가면서 엮어 형태를 만든 ‘지승공예’, 한지를 잘게 찢어 물에 불린 뒤 풀을 섞어 다양한 모양의 틀이나 그릇 위에 덧붙여 만드는 ‘지호공예’ 등이 있어요. 그 중에서 저는  오색전지공예를 주로 합니다.” - 공예를 하면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있다면. “원칙을 벗어나지 말자라는 주의에요.” “원칙을 벗어나지 말자라는 것은 원형을 파괴하지 말자라는 뜻과도 같죠. 전통공예의 본질적인 형태들이 시대를 거치면서 국적 불명의 디자인으로 변형이 되고, 그런 디자인이 마치 한국적 디자인으로 오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조상의 숨결이 녹아있는 전통공예를 계승하는 우리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라 생각합니다. 전통을 현 시대에 맞게 디자인하고, 그 디자인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려면 반드시 그 디자인을 하게 된 ‘이유’가 명확해야 해요. 전통과 현대를 같이 상생시키면서 서로 다름이 없이 하나가 되게끔 하는 것이 제일 큰 고민이자 숙제라고 생각해요. 또 무분별한 디자인 카피는 자신의 작품과 더 나아가서는 한지공예의 맥을 끊어 버리게 되는 것이 될 수 있어요.” - 한지공예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한지공예는 두꺼운 합지나 목재위에 한지를 붙여 만드는 공예인데 그냥 단순히 종이만 붙이는 기술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색채학, 시대에 따른 트렌드 변화, 새로운 디자인, 문양, 등 여러 가지의 정보를 습득하고, 생각하고, 또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제게 맞는 디자인으로 변형해야 해요. ‘힘들다’고 표현하긴 그렇지만, 매일 같이 해야 하는 일이라 힘들기도 하면서 가장 중요해 놓칠 수 없는 부분이요. 그 모든 것들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어야 반듯한 한지공예품이 탄생되거든요.” -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무엇일까요.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균형’이에요. 물론 문양을 어떻게 얼마나 잘 오렸느냐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색배합, 그리고 조화 등을 고려해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자칫 잘못해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건 혼자만의 공예품 일 수밖에 없어요. 요즘엔 그런 식의 공예품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어서 안타까워요.” - 공예를 시작한 이후 가장 뿌듯하거나 보람된 순간은 언제였나요. “제게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전국공모전에 출품하여 크고 작은 상들을 받을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그리고 그들이 한 가정의 ‘주부’에서 ‘작가’로 이름이 등재되고, 가족들에게 자랑스런 아내이자 엄마로 비춰지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보기 좋아요.” - 한지공예의 가장 큰 매력을 꼽자면. “한지공예란 가벼운 종이로 실생활에 필요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이에요. 한지공예는 감상용이 아닌 생활용품으로 쓰일 때 그 가치를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한지공예는 그저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완성되고 나서도 생활 속에서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죠. 물론 만들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지의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도 빼놓을 수 없는 한지공예의 매력이고요.”  ▲ 한지공예 한경화 [사진=양문숙 기자]■ 한지공예, 함께 즐겨요! 한경화는 한지공예 작품에만 매진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한지공예를 나눌 수 있는 활동들도 겸하고 있다. 한지 문양에 관련된 도서를 4권이나 출간한 저자이기도 하고, 쇼핑몰 ‘한지하우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한지하우스’는 단순히 ‘쇼핑몰’은 아니다. 한지공예 노하우를 비롯해 공모전, 전시회 등 한지공예와 관련된 소식들을 나누는 한지 공유의 공간이다. 또한 천사의모후원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 한지공예 재료를 후원하고 있으며, 해마다 열리는 연등축제에서 한지공예체험부스를 운영해 그 수익금을 양로원에 기증하는 봉사활동을 9년째 계속 해오고 있다. 또한 소속협회 상관없이 자발적 참여로 진행되는 격년제 전시회 ‘마움아띠 30인전’을 인사동에서 개최하고 있다. ‘마움아띠’는 마음을 나누는 친구라는 뜻의 순 우리말로 올해 벌써 3번째 전시를 가졌다.  - 어떤 이유로 책을 출간하게 됐나요. “한지공예로 만든 작품을 더욱더 빛내 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문양’이에요. 문양을 어떻게 기물과 조화롭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이전까지는 그냥 스승님이 주시는 복사된 문양을 오려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기물의 형태는 다양해도 그것에 시문된 문양들은 모두 비슷비슷했죠. 다행히 저는 인테리어 설계 일은 해서 일러스트레이터, 캐드, 포토샵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잘 다룰 수 있어 문양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다양한 문양들을 담은 책을 출간하게 됐고, 제가 출간한 책으로 좀 더 풍부하게 문양을 표현하게끔 하고 싶었어요.” - 인테리어 설계 일을 한 것이 한지공예에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네. 특히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문양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요. 워낙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보니깐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을 즐겨 해요. 디자인, 생상, 골격, 문양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컴퓨터로 기획하죠. 스케치를 해서 컴퓨터로 작품을 디자인하면 아무래도 시행착오를 덜 겪거든요.” “또 건축미술을 하면서 익혔던 색상배합들도 도움이 되고요. 워낙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 했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디자인 하고 색상 입히고 하는 일들을 즐겨 해요. 그런 습작들은 늘 스크랩을 해서 모아 놓고 나중에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다시 디자인을 정리하고, 바로 실전에 응용을 하기도 하죠. 지금은 대학에서 디지털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한지공예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한지하우스는 어떤 목적으로 설립하게 됐나요. “제가 한지공예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인터넷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어요. 한지공예를 배우고 싶어도 특정한 곳에만 가야지만 배울 수 있었죠. 문득 ‘그럼 지방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한지공예를 어떻게 배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작업 중에 모르거나 궁금한 부분을 서로 나누어 공유하고, 또 각종 공모전에 대한 정보를 나누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포털사이트에 ‘한지하우스’라는 카페를 개설하게 됐고, 그 한지하우스가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거죠. 한지공예 카페로는 가장 오래 됐어요. 벌써 13년 됐으니까요. 그렇게 커뮤니티 형태의 카페를 운영하다 2011년에 한지하우스 쇼핑몰을 개설했고, 지금은 각 학교에 한지공예 재료를 공급해 주기도 합니다. 또 사업장이 하나 더 늘어 ‘한지하우스’(www.hanjihouse.com)와 ‘한지와 빛’(www.hanji4u.com)을 같이 운영 하고 있습니다.” - 한지공예 수업도 진행하시나요? “네. 일주일에 하루 수업을 하고 있어요. 멀리 지방에서 한지를 배우러 오시는 분들을 위해 수업을 해요. 청주, 광주, 양평을 비롯해 지방 곳곳에서 한지공예를 배우고자 하시는 분들이 찾아 주세요.” - 한지공예 수강생들은 어떤 분들 위주로 접수를 받나요? “취미반은 운영하지 않아요. 전문적으로 한지공예를 배우고자 하는 분들만 수업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작품 활동, 출판, 사업체 운영, 수업 외에 또 하시는 일이 있으신지. “간간히 지방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작품을 보시고자 할 때 같이 작품 보면서 상담해 드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지방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수도권 보다 한지공예 관련 정보에 약해서 본인들이 작품 주문을 받았을 때 난감해 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 드리죠.” - 작품 활동 이외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힘들진 않으신가요? “힘든 점은 없어요, 인복이 많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잘 해내가고 있습니다. 제 위에 한지공예 선생님들께서 일선에서 큰일들을 해 주셔서 저희 세대들이 활동하기에 많이 편해요.” - 이런 다양한 활동들이 작품을 만드는데도 도움이 되겠죠? “네. 마음가짐이 늘 새로워 져요. 저희 분야만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참된 생각으로 작업 하시는 선생님들을 뵐 때 마다 흐트러졌던 마음도 다시 다잡고 그런 마음가짐이 약이 되어 더욱더 제 작품에 매진을 하게 되거든요. 가끔은 놀고 싶기도 하고 쉬고 싶다가도 저보다 더 힘들게 작업 하시는 어르신들을 뵈면 정신이 번쩍 들어요.(웃음)”  ▲ 한지공예 한경화 [사진=양문숙 기자]■ 한지공예, 함께 나눠요! -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미치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 전통을 하는 한 사람으로써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전통은 늘 열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왜냐하면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형태이고, 공급자체가 소량이다 보니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고, 비싼 가격에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니 수입원이 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있기 때문이죠. 저소득 공예작가들에게 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통공예를 살리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전통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야 하는데, 배우는 데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 많아요. 그런 측면에서 정부가 지원을 해준다면, 수강생들을 무료로 배울 수 있고, 강사들도 일자리를 찾을 수 있고, 재료판매업자들도 수요가 생기니 경제적으로 좋을 것 같아요. 노인복지관이나, 도서지역, 아동복지시설 등 소외되어 있는 저소득층에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곳에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 앞으로 한지 공예의 전망은 어떠할까요. “밝아요. 단, 우리가 우리의 한지를 많이 사용할 때의 이야기에요. 다시 말해 한지공예 하시는 분들이 전통한지와 중국산 한지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결코 한지공예의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없어요. 현재 국산 한지가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산한지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싸고, 그 만큼 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한지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요. 이렇게 한지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면 결국 전통한지 제조업자들은 수요가 줄어 더 이상 한지 생산을 못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중국한지가 더 밀려들어 와 전통한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중국산 종이로 만든 한지공예만 남게 되겠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한지공예 하시는 분들 만이라도 우리 종이를 써야 해요. 그래야 수요가 늘어 공급도 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가격도 지금 보다는 절충해서 낮아 질수도 있고 더 다양한 한지가 개발되어 공예품 적용에도 좋을 것이라 봅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숨어있는 작가들을 위한 ‘마움아띠’ 전시를 꾸준히 하고 싶어요. 마움아띠 전시는 그냥 독학으로 한지공예를 하시는, 어찌 보면 ‘아웃사이더’들의 전시에요. 1~2년간 작품을 만들어 전시를 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또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한지공예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고 싶어요. 여건이 되어 갤러리를 하나 만들게 되면 무상지원전시도 할 거예요.” “내년 2월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전시계획이 있어요. 이번 마움아띠 전시회에 같이 출품하셨던 일본선생님께서 주최 하시는 전시인데, 저희 한국작가들도 같이 참여하기로 했거든요. 그 전시가 끝나고 6월에는 마움아띠 전시 4회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무료배포 문양책을 만드는 거예요.(웃음)” - 한지공예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신가요? “저의 스승님이 제게 가르쳐주신 것은 한지공예의 기술이 아닌, ‘나눔’이었어요. 제가 스승님께 한지공예를 배울 때만해도 스승이 좋은 문양을 제자에게 무료로 주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우리 스승님께서는 좋은 문양이 있으면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거든요. 너무 감사하죠. 저도 스승님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요. 무엇이든 말이죠.(웃음)” ▲ 한지공예 한경화 [사진=양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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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02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전통 매듭’으로 못 하는 게 없어요”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저는 어디까지나 매듭쟁이니깐, 매듭 갤러리, ‘황주 갤러리’를 만든 거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매듭갤러리가 없거든요. 10월 초에 정식 오픈을 하면 다양한 종류의 매듭을 전시를 할 거에요.” 현재 한국 전통 매듭을 이야기하는데 황순자 명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현재 한국 매듭공예 연합회 5대 회장이다. 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 상임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직접 세운 황주(晃晝) 매듭 갤러리 대표이기도 하다. 또한 지난 5월에는 한국예술문화 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 왜 ‘전통 매듭’하면 그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지 납득이 갈 것이다. 도심과는 공기부터 다른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황순자 명인의 ‘황주 갤러리’를 찾았다. 오는 10월 오픈을 앞두고 있어 완벽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매듭은 물론 전통악기, 전통의상 등 다양한 전통 분야가 어우러져 있어 그의 ‘전통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국내최초의 매듭 갤러리가 될 ‘황주 갤러리’, 1층은 강의 및 세미나 등을 위한 다목적 공간, 2층은 작업실이자 갤러리, 3층은 살림 집이다. 매일 3층에서 2층으로 출근한다는 황순자 명인, 그의 매듭이야기를 들어보자.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사진=양문숙 기자]■ 매듭쟁이 황순자 - 전통매듭을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전통매듭이라고 하면, 모든 전통 기물에 쓰이는 매듭을 말해요. 예를 들어 전통악기인 나각, 징, 해금 등에도 모두 쓰이고, 가구나 의상 등에도 쓰이는 것이죠.” - 매듭의 종류가 다양한가요? “매듭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매듭의 쓰임새는 정말 무궁무진해요. 다양한 쓰임새로 매듭이 사용될 수 있게 하려는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래야 한국의 매듭이 살아납니다.” - 주로 하고계시는 작업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전통 매듭을 밑바탕에 깔되, 현대에 맞는 디자인을 해요. 그래야만 현대인들도 전통매듭을 이해하고, 예쁘다고 느끼고, 선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너무 ‘전통’만 고집하면 사람들이 전통매듭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사양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통과 현대를 항상 같이 가져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사사한 故김주현 명장 선생님께서도 항상 매듭을 오래하려면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반드시 해야한다고 말씀해주셨죠.” - 현대적으로 쓰이는 전통매듭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전통매듭은 정말 많은 곳에 쓸 수 있어요. 휴대폰 줄에도 쓸 수 있고, 모빌로 만들 수도 있고, 작은 주머니에도 매듭을 달았어요. 정말 많아요. 다양하게 개발해 상품화 시킨 것도 많아요. ‘신혼방’이라는 브랜드로 공방도 가지고 있어요. 상품화 시킨 매듭을 판매하는 곳이죠. 상품을 정식으로 등록해서, 아직까지는 수입이 많은 편이에요. 거기서 번 돈으로 연구반 수업에 더 열중할 수 있고, 좋은 작품 만들어 기증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거죠.” - 매듭을 만드는 방식이 옛날과 지금,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옛날에는 실 염색하는 사람, 끈 묶는 사람, 매듭을 짓는 사람, 밑에 수술을 만드는 사람이 다 따로 있었어요. 4명이 합심해서 하나의 매듭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따로 하는게 더 힘들다 보니깐, 제가 혼자 다해요.(웃음)”  ▲ ‘한국의 명장’ 황순자와 그가 만든 염주 [사진=양문숙 기자] ▲ 나각에 달린 매듭 (황순자 작품) ▲ 황순자 매듭 작품들■ 매듭은 만능? 뭐든지 가능하다! - 특이한 작품 소개를 해주신다면. “염주를 만든 것이 있어요. 실을 가늘게 짜서 손수 108염주를 다 뜬 거예요. 정성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 작업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108염주라고 해서 108개만 만드는게 아니고, 200개 이상을 만들어서 그 중 예쁘게 된 것 108개만 골라내거든요.” - 이렇게 실로 만든 염주가 과거에도 있었나요? “아니요. 제가 만들어 본거죠. ‘매듭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매듭으론 못 하는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런거 저런거 다 해본 거예요.” - 해외에서도 전시를 많이 하셨는데, 해외 반응은 어떤가요. “영국에서 한국 매듭을 보여줬을 때가 매듭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에요.” “영국 런던 문화원에 문화재 선생님들과 함께 갔어요. 저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섬유 부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서 함께 가게 된 거죠. 문화원에서 매듭을 쫙 진열해놓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제 매듭을 보는데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정말 뿌듯했어요.” “외국인들은 한국 매듭을 잘 몰라요. 저는 아무리 먼 데 가더라도 가장 멋지고 큰 작품을 손수 들고 가요. 외국인들에게 한국 매듭의 많은 걸 보여주고 싶어요.” - 해외전시에서 좀 더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면. “일단 저는 해외에 나가면 꼭 한복을 입고 가요. 같이 간 회원들도 마찬가지고요. 한복에 노리개도 달고, 매듭으로 만든 목걸이도 착용합니다. 전시 뿐 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매듭을 알리기 위한 방법이죠. 영국에 가서도 한복을 입고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녀서 사진도 많이 찍혔어요.”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사진=양문숙 기자]■ 매듭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매듭쟁이’라 얘기한 황순자 명인은 단지 매듭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故 김주현 명장에게 매듭을 사사한 것을 시작으로, 故 김계순 인천시 문화재에게는 침선을 사사했으며, 故 장순례 후수전승자에겐 망수를 사사했다. 이와 더불어 자수예술대학, 배화여자대학교 등에서 전문과정을 수료하며 전통 매듭을 위해 다방면으로 뛰었다. “매듭공예 연합회를 창단하고, 중국, 일본, 한국의 매듭을 한 데 모은 ‘국제 매듭전’을 하기 시작했어요. ‘국제 매듭전’을 하면서 그동안 배운 것 외에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매듭을 위한 공부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그는 현재 매듭공예 연합회 회장 등 맡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제자들에게 매듭을 알려주고 있으며, 끊임없이 전시를 개최하고도 있다. 매듭을 위해서라면 뭐든 열심히다. “점점 매듭이 그 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어요. 또 80~90년대 까지는 정부 지원이 정말 전무했어요. 그러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정부 지원도 조금씩 늘고 있죠. 저도 국비로 공부를 했고, 그 이후로는 제가 자원봉사로 매듭 강의를 해주고 있죠.” - 여기서 수강생을 받아 매듭을 가르치기도 하나요. “수강생을 직접 받아서 하지는 않고요, 중소기업청 - 소상공인진흥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매듭 강의를 듣는 수강생 중에 잘 하시는 분만 따로 받아 연구반을 맡고 있어요. 연구반 수업을 받는 수강생이 현재 8명입니다.” - 그 수강생들은 ‘전통매듭’을 전문적으로 하려는 분들인가요? “그렇죠. ‘매듭’이라는게 쉽게 생각하면 그냥 ‘전통매듭’인데, 매듭도 일종의 과학이고, 많은 공부가 필요해요. 작품 하나를 만들려면 균형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길이, 기장, 색상 등 가르칠게 많은 거죠.” - 공모전에도 많이 참가하셨나요? “제가 상에는 큰 욕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많이 참가하지는 않은 편이죠. 그런데 재밌는 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공모전에 출품은 못해보고 바로 심사로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웃음)” - 한국, 중국, 일본이 참여하는 ‘국제 매듭전’, 각 국가마다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중국은 색상이 다양하지 않아요. 또 작은 매듭은 없고 대부분 큰 매듭만 있어요. 그러니깐 아주 섬세한 손재주를 요하지 않는 매듭이 많죠. 일본은 아기자기한 매듭이 많지만, 그 쓰임새가 다양하지 못해요. 우리나라만 왕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에 매듭을 달았기 때문에 쓰임새가 아주 다양하죠. 한 예로 요즘도 궁궐 앞에서 매일 하는 행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어요. 악기는 물론, 모자, 의상 등 전부 매듭이 달려있어요. 국제전을 할 때마다 한국 매듭만큼 이쁘고 섬세하게 만드는 매듭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사진=양문숙 기자]■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매듭에 빠지다 - 전통매듭은 언제부터 시작 하셨습니까. “고등학교 시절 가사 시간이 있었는데, 준비물을 사러 청계천에 갔다가 매듭에 매료되어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그 뒤에 故 김주현 선생님에게 매듭을 본격적으로 배웠어요. 선생님께 제가 매듭을 배우는 중간에 선생님께서 ‘명장’이 되셔서 너무 좋았던 기억도 있네요. 그 뒤로는 선생님께서 한국 매듭공예 연합회를 창단했고, 저도 창단 멤버로 시작해 지금은 제가 회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 자라온 환경이 매듭이나 염색 등과 관련이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 친정 엄마가 바느질하고 염색을 늘 하셨어요. 그걸 계속 보고 자라니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지금 저기에도 우리 엄마가 쓰던 미싱기도 있어요. 부모님 덕을 많이 본 거죠. 부모님도 그렇고, 좋은 선생님들도 많이 만나고. 제가 참 운이 좋아요.(웃음)” - 가족 중에 선생님을 따라서 매듭을 하시는 분이 있으신지. “아쉽지만, 제 조카만 매듭을 하고 있어요. 대신 제 동생이 바느질을 해요. 그래서 전에 제가 삼베에 전통염색을 하고, 동생은 바느질을 해서 반기문 UN 총장에게 드리기도 했어요. 동생이랑 같이 협력해서 일하니깐 너무 좋아요.(웃음)” - 한 눈에 봐도 엄청난 양의 작품들이 있네요. 다작하는 편인가요? “제가 지금 40여 년을 매듭을 했으니 많긴 하죠. 저는 전시나 공모전을 매년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할 수 있어요. 전시나 출품을 안하면 정체될 위험에 빠지죠.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해왔습니다.” - 그럼 하루 작업 일과가 어떻게 되십니까. “오전 12시까지는 컴퓨터로 공방일을 봐주고, 점심먹고 나서부터는 매일 제 작품을 만들어요. 또 틈틈이 공부도 계속 하고 있고, 매듭에 관련한 책을 준비중이라 집필도 하고 있습니다. 전통에 현대적인 요소를 섞어 다양한 매듭을 많이 선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아요. 주변에서 물어보곤 해요. ‘도대체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냐고’. 저는 새벽 1시전에 자본 적이 거의 없어요. 제 스스로 마지노선을 1시로 정해놨어요. 어찌됐든 1시까지 작업하자가 아니라, 어찌됐든 1시에는 억지로라도 자야된다고. 그렇게 정해놔도 하다보면 어느새 새벽 2시, 3시 금방 넘어가요.”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사진=양문숙 기자]■ 매듭, 좋은 곳으로 가거라 - 매듭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나요? “제가 욕심을 부렸다면 힘들었을텐데, 저는 크게 욕심을 갖지 않았어요. 공모전에 출품을 자주 내지도 않았고요. 너무 좋아서 하니깐 힘든 것 모르고 지금까지 쭉 해온 것 같아요. 지내고 나면 너무 즐거운 시절만 있네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지난해에 일본 동경에서 전시가 예정되어있었어요. 그런데 전시 1주일 전에 갑자기 지진이 나는 바람에 무산됐죠. 그래서 올해 다시 전시 요청이 들어왔는데, 올해에는 방사능이 또 문제네요. 그리고 미국에서도 전시를 열 계획이라 못 할 것 같아요. 한 해에 외국을 한 번나가야지, 힘들어서 두 번은 못가겠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동경 전시는 내년에 할 계획입니다.” -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나각(소라 껍데기로 만든 국악기) 같은 전통악기에 달 수 있는 매듭도 나중을 위해 만들어봤어요. 잘 만든 걸 골라서 덕수궁 같은 궁에 기증하고 싶어요. 지금은 좀 형편없는 걸 달고 있더라고요.(웃음) 기증해서 아이들에게 우리 전통악기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매듭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나중에 제가 한 작품들은 좋은 곳에 다 기증할 거예요. 젊었을 때 안구부터 해서 장기기증도 다 했는걸요.(웃음)” - 특별히 기증하고 싶으신 곳이 있는지. “아직 특별히 정한 곳은 없지만, 각 작품마다 쓰일 수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기증할 당시 상황을 봐야할 것 같아요. 각자 좋은 곳으로 보내졌으면 좋겠네요.”  ▲ ‘한국의 명장’ 황순자 [사진=양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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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04
  • [한국의 명장] 남상준 “단절위기 그림글씨 ‘혁필’, 美·日선 대우 받아요”
    ▲ ‘한국의 명장’ 혁필 남상준 [사진=강지연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글씨 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자체가 그림이고, 또 글씨에요. 참 독특하죠. 저는 이런 혁필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그런 혁필의 맥이 끊어져 간다는게 참 안타깝습니다.” 혁필(革筆)은 우리 민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서민의 생활문화양식을 대변하는 분야 중 하나로 문자도(問字圖)가 발전한 ‘그림글씨’다.  18세기 이후 조선시대의 서민들의 정서가 녹아있는 우리의 전통예술이지만, 현재 혁필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현저히 줄어 그 맥이 완전히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 혁필화가 남상준은 ‘멸종 위기’에 몰렸다고 표현되는 ‘혁필’을 그리며 미국, 일본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의 혁필을 전파하고 있다. 올해 87세의 나이지만,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남상준 화가를 서울에 한 카페에서 만나고 왔다.  ▲ 남상준 혁필화가가 인터뷰 도중 간단하게 혁필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강지연 기자]■ 그림이니 글씨니? 빠져나올 수 없는 혁필의 매력! - 혁필은 언제부터 그렸나요.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어요. 국전에 두 번이나 당선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혁필을 그리길래 옆에서 보고선 나도 한 번 그리고 싶다고, 알려달라고 했죠. 친구에게 배워서 그렸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잘하네? 내 밥그릇 뺐겠네’라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의 (국선에 2번아니 당선된)수준으로 나를 그렇게 볼 정도면, 내가 정말 혁필에 소질이 있나보구나 취미로 혁필을 시작하게 되었죠.” - 혁필을 그려보니 어땠나요. “1953년부터 60년까지 설오 김석하 화백으로부터 동양화를 사사했어요. 그 후 1961년에 처음 혁필을 배웠고요. 원래 동양화를 그려왔었고, 성격 자체가 워낙 차분하다보니 혁필화가 저랑 잘 맞았어요. 소질이 있다고 생각되어 자신감도 많이 생겼고요.” - 재능은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분의 영향을 받았나요. “예전에는 여자가 초등학교만 다녀도 집안 망한다던 시절이에요. 그런데도 저희 어머니는 서울 잠실에 위치한 정신중학교까지 나오셨으니 그 당시 엘리트였죠. 그런 어머니가 궁중체를 배우셔서 글씨를 아주 잘 쓰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 받은 것 같아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어요. 우리 누님이 시집가기 전에 수를 놓았는데, 그때 제가 밑바탕이 되는 글씨를 써주기도 했죠. 아주 어린 시절이라 제가 글씨를 써준다고 하면, 처음에는 누님이 제가 쓴 글씨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됐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가 제 글씨를 보시고는 잘 썼다고 해주셨죠. 그렇게 다시 저의 글씨를 본 누님은 그 다음부터는 저에게 글씨를 맡기셨답니다.” - 혁필을 민화의 한 종류로 보면 되는 건가요. “그렇죠. 그러나 민화나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들조차도 제대로 된 혁필화에 대해 모릅니다. 필화의 맥이 끊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 직접 지으신 ‘허운(虛雲)’이란 호(號)는 무슨 뜻인가요. “어린 시절 저의 호는 ‘인생은 아름다운 꿈이다’라는 뜻에서 미몽(美夢)이라 지었어요. 그러나 80해가 넘게 인생을 살고 보니 인생은 ‘미몽’이 아닌, ‘허운(虛雲)’이라 생각됩니다. 구름이 녹아서 비가 되고, 또 다시 구름이 되고, 그렇게 인생이란 것이 돌고 도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호를 ‘허운’이라고 바꿨어요, 불교의 윤회설과 비슷하지만,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 ‘한국의 명장’ 혁필 남상준 [사진=강지연 기자] ■ 혁필이 설 곳 없는 대한민국, ‘방랑화가’가 되다 “외국에서는 혁필을 인정을 해주는데, 우리나라는 예술로 인정을 안 해줘요. 미국에는 프리마켓도 많고, 아트쇼도 많아요. 그 곳에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은 ‘처음 개발한 것’이에요. ‘혁필’은 처음 개발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곳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죠. 그래서 그런 곳을 다니면서 돈 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외국은 밥 먹어도, 택시를 타도 팁을 주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잖아요. 한 번은 여행을 갔는데, 그 곳에서 만난 사람에게 기념으로 혁필을 그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당연하게 팁을 주더라고요. 그렇게 혁필을 그려주고 받은 팁으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죠.” 남상준 혁필화가는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에서의 활동이 훨씬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러주는 곳도 없고, 해외와 대우가 너무나 차이 난다. 그래서 요즘에는 해외, 특히 일본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 머무르고 싶지만, 혁필이 설 곳이 없는 곳에는 혁필화가가 서있을 곳도 없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방랑화가’라 부른다. - 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된 건가요. “제 친구들이 미국에 많이 살고 있어요. 친구 중 한명이 저에게 ‘너 혁필 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즘 혁필화가 아주 인기야’라며 혁필을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권유를 했어요. 그러면서 미국에서 구한 혁필을 보내줬는데, 너무 형편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간다면 더 각광을 받을 것 같아 미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 미국에서의 혁필은 어느 수준인가요. “혁필화는 미국에서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LA에서 처음 시작되어 퍼져나갔고,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인기가 많아요.” - 미국에서 활동하는 혁필화가는 대부분 미국인인가요?  “세계 어디가 됐든, 혁필하는 사람은 거의 다 한국 사람이에요. 하와이 와이키키 해안에 있는 호텔 앞에서 활동하는 혁필화가가 남미계미국인이고, 키웨스트에서 활동하는 혁필화가가 젊은 미국인여자였고, 그 외에는 전부 한국인이었어요.” “젊은 미국인여자는 서양식 이젤을 사용해 서서 혁필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저희는 대부분 앉아서 바닥에서 그리잖아요. 그 분이 그리는 걸 한 번 봤는데, 실력이 아주 형편없었어요. 대화를 해보니, 혁필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는 거예요. 돈을 준다고 해도 안 일려 준데요. 자기 밥그릇 뺏는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어떤 물감과 붓을 써야하는지, 재질은 어떤 걸 써야하는지 등 전혀 모르고 ‘무작정 따라하기’식으로 필화를 그리고 있었어요. 혁필을 그릴 때 안료를 써야하는데,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안료를 파는 단위가 드럼통 단위라 살 수가 없죠. 한가지색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300ml정도만 사도 1년은 충분히 쓰거든요. 저는 뭐 저 혼자 잘 살자는 주위도 아니고 해서 그 분에게 주소 알려달라고 한 다음에 서울에서 안료를 사다가 보내줬어요.” -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혁필을 선호하나요. “유럽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혁필을 써서 가고, 다음으로 일본사람도 많이 써가요. 혁필화가는 대부분 한국인인데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혀 안 써가요.” “유럽인들은 자기 이름을 혁필로 많이 써가요. 종이에 자기 이름을 쓰고 발음을 읽어주는데, 그 발음대로 한글로 써달라고 해요. 한국에서 온 작가가 한국의 그림을 한국의 글씨로 쓰는 것이 기념된다고 해서 한글로 써달라고 하는 거죠.” - 미국에서 활동할 때는 영어로 혁필을 쓰나요? “당연히 영어로 써주죠.” “원래 ‘혁필’이라고 하면, 한문으로 이름 써주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한문을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글로 혁필을 해요. 한문도 하긴 하지만, 될 수 있으면 한국에서는 한글을 많이 쓰려고 해요. 일본에 가면 일어로, 영어권 나라에 가면 영어로 혁필을 쓰죠.” -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본에 가게 된 계기도 따로 있나요. “하와이에서 혁필을 그렸는데,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사갔어요. 그러면서 일본에 가게 될 결심을 한 거죠. 미국보다 한국에 훨씬 가까우니, 왕래가 가능하잖아요. 그렇게 일본에서 활동한 지도 10년이 넘었네요.” - 일본과 미국에는 혁필이 없었나요. “거의 없었죠. 일본에서는 ‘꽃글자’(하나무지)’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무지개아트(rainbow art)'라고 불러요. 제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부르는 용어죠.”  ▲ ‘한국의 명장’ 혁필 남상준 [사진=강지연 기자]■ 단절위기에 처한 혁필! 해결방안은? - 민화로써 혁필이 빛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민화(民畵)라는 것은 작가 미상의 그림이라는 거지, 그림을 그린 작가가 없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왜 작가를 모를까요? 작가를 모르는 이유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옛 선비들은 글을 배워서 벼슬을 하는 것만이 최대의 목표였어요. 만약에 그림을 그린다면 벼슬을 하지 못했죠. 그래서 왕의 초상화까지 그리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양반축에 못 들어갔어요. 그러니깐 선비들이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도 이름을 쓰진 않았던거죠. 그림이 좋으니 그리긴 하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건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래서 민화라는게 생긴 거죠. 그림을 천대하던 풍토 때문에 민화가 빛을 못 본거죠.”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한 민화, 그 중에서도 필화의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이니깐 이제야 지원사업을 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은 필화에 대한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서 배우려고도 안하죠.” - 그럼 어떤 식의 지원을 원하시는 건가요. “일시적인 지원보다는 좀 더 혁필의 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지원을 해줬으면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인데, 사라져 가고 있다. 빨리 배워서 이어라’라는 식 보다는 ‘아 혁필로 이렇게 돈을 벌 수도 있구나. 비전이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거죠. 실제로 소개를 받아 젊은 친구가 저에게 혁필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오래 배우지 못하고 금방 그만뒀어요. ‘과연 이 혁필을 배워서 무얼하겠냐’는 생각때문이죠.” “사실 이런 얘기는 저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비춰질까봐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합니다. 그래서 아직 구체적으로 얘기해본 적은 없어요. 굳이 말을 한다면,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작게라도 자리를 마련해 줘서 그 곳에서 혁필화를 그리며 돈도 벌고, 명맥도 이어나갈 수 있겠죠. ‘혁필’은 무형문화재도 없습니다.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문화재지만, 그거라도 있어야 ‘혁필’로 꿀 수 있는 꿈이 생길 것 아닙니까. 저를 위해 혁필을 살리라는 게 아니라, 전통을 위해 혁필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위기에 처한 ‘혁필’에서 일시적인 지원은 큰 효과가 없습니다.”  ▲ ‘한국의 명장’ 혁필 남상준 [사진=강지연 기자]■ ‘혁필’ 그리는 재미, 보는 재미 - 한 작품을 그리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시나요. “2~3분이면 완성합니다. 그러니 순식간에 혁필을 그리는 과정을 보는 재미도 있죠.” “가만히 눈 여겨 보면, 경제가 나쁠 때는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걸 더 선호해요. 완성된 물건을 가져가는 것보단, 조금 기다려도 새로 만든 걸 좋아하는 거죠. 길거리에서 파는 떡볶이도 다 만들어서 포장해 놓은걸 사는 것보단 즉석에서 포장한 걸 더 선호하잖아요. 그래서 혁필도 주문한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써주는 묘미가 있는 겁니다.” - 혁필에는 대부분 꽃이나 새, 동물 등이 그려지는 동양적인 그림이 많은데, 선생님 작품에는 ‘돌고래’가 들어가는 것도 있네요. 돌고래는 어떻게 그리게 되셨나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알카포네(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카고 갱단의 두목, 1899~1947년)가 수감됐던 알카트라즈 형무소가 있어요. 형무소가 위치한 섬을 가기위한 항구 근처에는 돌고래가 엄청 많아요. 형무소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그 돌고래를 보고 너무나 좋아하죠. 아이들이 돌고래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개발한 거예요. 돌고래를 그리는 혁필화가는 없을 겁니다.” “제 작품에 나온 글씨들은 모두 제가 개발한 것들이에요. 저보다 혁필을 오래 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림을 먼저 배운 사람으로서 더 다양한 그림을 응용한 글씨들이 많다고 자부합니다.” - 혁필의 어떤 매력에 빠지셨나요. “화려하고, 빨리 그린다는 것이 혁필의 매력이죠. 너무 아름답긴 하지만,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그리는걸 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선 지루하겠죠? 조금 실수가 있더라도 화려한 그림을 빨리 그린 다는게 혁필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리다가 실수를 해도 사람들이 이해를 해주기도 하고요.(웃음)” “그리고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원하는 글씨를 써준다는 것도 매력이에요. 전 세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를 텐데, 마음대로 원하는 것을 써준다는 게 특징이죠.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원하는 글씨를 그리는 사람이 원하는 그림으로 그려준다는 것에도 큰 매력을 느낍니다. 아이들에게는 돌고래를, 여자들에게는 꽃과 새를, 남자들에게는 용이나 호랑이를 맞춰서 자유자재로 그려주는 게 재미있습니다.” - 지금까지 혁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지난 2005년도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한 박람회에 참가했어요. 혁필을 써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한문으로 글을 써주면, 그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니깐 빨리 쓸 수 있는 영어로 필화를 써줬습니다. 아침 9시에 밥을 먹고는 밤 11시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물만 마시며, 필화를 그렸어요. 화장실도 거의 안 갔죠. 저의 통역을 맡고 있던 통역사에게도 통역이 별로 필요 없으니, 제가 그릴 단어만 적어주고, 제가 필화를 그릴 동안은 액자를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1분도 아쉬운 상황이라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머리를 쓴 거죠.(웃음) 보통은 하루에 많이 그려야 50장 정도였는데 그날은 2백장이 넘게 그렸어요. 그렇게 그 박람회에서 하루에 대략 1천만 원을 벌었어요. 제가 그리고 있으면서도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 특별히 좋아하는 문구가 있나요. “워낙 많아서 한 가지 고르기가 애매하네요.” “아, 일본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일본 백화점에서 필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30분 동안 계속 제가 그리는 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더니, 자신이 원하는 데로 글을 써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알겠다며 어떤 글이냐 물으니, ‘학귀무유(鶴亀舞遊)’를 써달라고 했어요. 우리 한자, 일본 한자 통틀어 1만자를 넘게 알고 있지만, 처음 듣는 소리였어요. 뜻을 유추해보았죠. 학 학, 거북 귀, 춤 출 무, 놀 유. 학과 거북은 일본에서 우리의 십장생과 같이 장수를 의미하는데, ‘학과 거북처럼 천년만년 춤추며 즐겁게 살자’였어요.” “이 일이 있고 1주일 정도 후에 다른 장소에서 또 혁필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한 여성이 또 자신이 원하는 글을 써달라고 했어요. 어떤 글을 써줄까 물으니,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고 대답했어요. 함께 해, 늙을 로, 한가지 동, 구멍 혈. 부부가 평생을 살다가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구멍(무덤)에 묻힌다는 뜻이죠. 대부분 ‘백년해로’라는 말을 더 많이 써서 저도 ‘해로동혈’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었죠. 얼마나 가정적이고, 열녀같은 말이라 느꼈는지. 참 멋있다 생각했죠.” “그 여성분이 간 다음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기다란 종이에 비둘기를 하나 그리고는 ‘학귀무유 해로동혈’이라고 썼어요. 두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글을 보고선 기분 좋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지나가던 한 사람이 뭐가 그리 좋아서 그 글을 보고 웃느냐고 물어서 대답해줬죠. 일주일 전에 만난 남자와 방금 만난 여자, 연고가 없는 사람이겠지만 그 두 사람이 한 말을 겹쳐놓고 보니 참 멋있어서 그렇다고. 그랬더니 그 분이 너무 좋다고 방금 쓴 그 글씨를 자기한테 팔라고 해서 팔았어요.” “혁필을 쓰다보면 이렇게 제가 모르던 좋은 글들을 계속 만난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학귀무유 해로동혈’이에요.” - 젊은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요. “그나마 혁필로 이 나이에도 전 세계를 누리고 다닐 수 있는 거죠.” “저는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서 법 공부도 했고, 검도와 유도를 2단씩 따기도 했고, 정치계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동양화를 그리기도 했죠. 일반적으로 보면 저는 ‘인생의 낙제생’이에요. 뭐 하나 진득하니 해서 노후대책을 해 둔 것도 없고, 자식도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혁필’을 만나 전세계를 다니고 있죠.”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여행이에요. 전 세계 어딜 가도 이 혁필 붓 하나만 있으면 무전여행을 할 수 있어요. 필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여행할 수 있으니까요. 돌아간다면 더 빨리 혁필을 진득하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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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7
  • [한국의 명장] 이익종 “옻칠 소반은 상품 아닌 전통작품”
    ▲ 이익종 [사진=강지연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45년 동안 알려지지 않고 소반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는 숨어서 한 게 아니라 감춰졌을 뿐이에요. 문화재에 지정된 소수에게만 지원되는 혜택이 묵묵히 ‘전통’을 이어오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함께 나눠졌으면 좋겠어요.” 소반(小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단어다. 소반은 좌식문화가 자리 잡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이던 주방가구로, 작은 상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서양의 입식(立式)문화가 들어오면서 각 가정에 식탁이 소반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소반은 점차 잊혀져갔다. 물론 가정에 소반을 하나 정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용하는 일이 많지 않다보니 저렴한 소반을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중에게 외면 받은 소반을 끝까지 잊지 않고 45년이란 긴 시간을 고수해오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이익종이다. 서울의 도심을 살짝 벗어나자 곧바로 한적한 동네에 다다랐다.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이익종 명인이 몇 십년동안 한결같이 소반을 만들어 오던 작업실이 위치한 곳이다.  ▲ 이익종 [사진=강지연 기자] ■ 오직 한 길만… 이익종은 15살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소반을 만들고 있다. 무려 45년이란 세월을 옻칠 소반을 만드는데 보낸 것이다.  - 어릴 때 주변 환경이 전통이나 공예에 관련이 있으셨나요. “제 고향이 충남 대천이에요. 동네 형님이 서울 올라와서 이걸 하셨어요. 그래서 기술 배운다고 저도 서울 올라와서 처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행보사’라고 옻칠 소반을 크게 하던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오래 있었죠.” - ‘행보사’에서 기술 배우고 나와서 자신만의 공방을 차린 건가요. “아니에요. 기술 배우고도 거기서 37년 정도 계속 일했어요. 거기서 있다 보니 다른 사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기술배우고 일만 했죠. 그러다 공장이 힘들어져서 문을 닫았는데, 저는 이것 말고는 한 게 없잖아요. 그래서 계속 한 거예요. 혼자 한지는 3~4년쯤 됐네요.” “그런데 행보사에서도 혼자 작업했어요. 다른 사람들 다 나가고 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그러다 결국 나와서 이렇게 또 혼자 작업을 하네요.” - 하남시에 터를 잡으신 이유는? “‘민예사’라고 한 50년 된 공예 공장이 있었어요. 같은 업종이다 보니, 같이 ‘행보사’에 있었던 제 친구가 그 곳에 있었어요. 그 인연으로 자주 왔다갔다 했고, 그 곳도 문을 닫아 공장이 비어있으니깐 저보고 쓰라고 해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 처음 배울 당시에는 ‘소반’을 많이 사용했나요. “그때는 거의 소반을 썼죠. ‘행보사’ 공장도 초반에는 거의 소반만 만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소반이 다 죽었죠. 식탁문화가 발전해서 소반을 안 쓰니까요.” - 소반을 사용하던 예전에도 ‘옻칠 소반’이 주를 이뤘나요. “네. 소반 중에서도 옻칠 소반이 가장 많았어요. 다른 칠을 한 것도 있긴 하지만, 초반에 사용한게 옻칠이다 보니 옻칠이 가장 많았죠.” - 40여년 전에 작업하던 그때와 지금, 작업환경은 달라지셨나요. “옻칠을 하면 칠이 나무에 착색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전에는 착색 물감이 없었어요. 그래서 돼지의 피인 ‘선지’를 발라서 착색시키기도 했어요. 요즘에는 물감이 잘 나와서 선지를 쓰지 않죠.(웃음) 그 외에는 칠이 기계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 소반 종류도 여러 가지 있는 것 같은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소반 종류로는 나주반, 해주반이 가장 유명해요. 지역을 따라 그 종류나 나뉘기도 하고, 안다리, 개다리상 등 소반 다리 모양에 따라서도 나뉘어요. 또 팔각상, 육각상 등 상 모양에 따라서도 나뉘니깐 종류가 아주 다양해요.” “옻칠은 좀도 안 먹고, 음식을 담아두면 오래두어도 상하지 않아 좋아요.” - 작업하시는 것도 설명해주세요. “일단 원료는 검은 색 옻칠을 제외하고는 전부 일본에서 수입한 원료를 사용합니다. 옻칠하는 붓은 인모(人毛)를 사용해요. 붓도 일본 건데, 국내산은 일본 제품에 비해 품질이 아직 뒤떨어지긴 하지만, 우리나라 붓도 팔아줘야 하니까 국내산도 사용하고 있어요.(웃음) 칠을 한 다음에는 수분기가 있는 곳에서 18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하며 건조를 시킵니다. 옻칠은 한 번하는게 아니라 5번~6번 정도 발라요.” “옻칠할 때는 옷도 다 벗고 칠해요. 칠하면서 옷에 있는 미세한 먼지들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최대한 먼지가 안들어 가게 하기 위해서죠.” - 붓이 굉장히 오래되 보여요. 얼마나 사용하셨나요. “글쎄요. 하여튼 오래 됐어요.(웃음) 10년 이상은 된 거 같네요. 이게 연필마냥 붓심이 끝까지 들어있고, 겉에 나무는 깍아서 쓰기 때문에 더 오래 쓰죠.” - 옻칠 소반의 매력을 꼽자면. “단연 색깔이요. ‘옻칠이 핀다’고 하는데, 쓰면 쓸수록 색이 달라지니까요. 옻칠은 때가 덜 타고, 비누칠을 안 해도 잘 닦여요. 옻칠한 나무는 물에 담가놔도 물을 잘 안먹어요.” - 처음 색을 바르고 2~3년 후면 옻칠이 핀다고 하는데, 옻칠이 핀 이후에는 색의 변화가 없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 이후로도 조금씩 속 펴요. 처음 칠할 때는 검은 색으로 보이지만 점점 적갈색으로 변합니다.”  ▲ 이익종 [사진=강지연 기자] ▲ 이익종 [사진=강지연 기자] ■ 힘들지만 가장 기쁜 일 '소반을 만드는 명인'으로 이익종의 공방을 찾아뵈었는데, 소반을 비롯해 옻칠한 쟁반, 가구 등 소반 외에 다양한 품목이 눈에 들어왔다. 소반을 주로 만들고 있지만, 수요가 워낙 적다보니 다른 품목도 함께 작업한다고 한다. 재정상 다른 품목은 미리 만들어 놓지 않고, 주문을 받아 제작한다. 한 마디로 소반만으로 먹고 살 순 없는 현실이다. 이익종과 함께 소반을 만들어 오던 옛 동료들은 모두 이 분야를 떠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평생 옻칠만 해오던 동료들은 당장 먹고 살아가야 하기에 공사장에 뛰어들었다. 옻칠을 하던 그들은 이제 건물에 페인트칠을 한다. “동료들은 돈 안 되니깐 나와서 딴 거 하라고 하죠. 소반 놓고 나와도 잘 산다고.(웃음)” - 동료들의 말에 작업을 관두신 적은 없으신가요. “집안 살림이나 생활 중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나갔겠죠. 그런데 그런 큰 시련이 없어서 작업을 관둔 적이 없어요. 딸 하나 키워서 (시집)보내고 나니, 저 혼자서는 돈 들어갈 때도 마땅히 없잖아요. 이게 아직까지 옻칠 소반을 잡고 있던 계기 같아요. 만약에 가족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당장 병원비(목돈)가 필요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큰 일이 있었다면, 당장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했을 수도 있었겠죠.” - 점차 소반을 안 쓰는 현실에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소반을 주로 만들다가 안되니깐, 요새는 숟갈, 주각, 도마 등 생활용품을 많이 만들어요.” - 소반 만드시다가 힘들어서 처음으로 다른 걸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소반에서 발전해서 점점 큰 걸 만들면서, 가구를 만들게 되었어요.” - 새로운 걸 하다보면 접목되는 디자인도 다시 배우셔야 했겠네요. “그렇죠. 디자인부터 제작, 판매까지 저 혼자서만 할 수가 없어서, 따로 외부에 의뢰해서 디자인 하시는 분이 계세요.”  - 옻칠 작품을 많이 선호 안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비싸니까 선뜻 구매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 주로 구매 합니다.” - 전통에 현대인 요소를 섞어서 제작하는 분들도 많던데, 그렇게는 안하시나요. “혼자하기엔 힘이 들어요. 가구 제작도 하고, 칠도 해야되서 힘들죠. 또 금전적으로 여유가 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빠듯하다 보니 그럴 여유가 없어요.” - 주문이 안 들어 올 때는 무엇을 만드시나요. “외부에서 디자인한 상품에 옻칠만 해달라는 주문도 있어서, 그런 작업을 많이 해요.” - 경제적으로 힘들 때, 다른 일이 하고 싶진 않으셨는지. “다른 걸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나가면 당장 벌이가 안 되니깐, 그래도 이걸 놓지 못 했어요. 한 때는 저도 건설 쪽에 페인트칠하러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저하고는 안 맞았어요. 일찍 나간사람들은 건설 현장에서 자리 잡았고, 이거 고집하고 계속 잡고 앉아있는 저 같은 사람도 있죠.(웃음) 벌이가 되던 안 되던 계속하고 싶어요.” - 힘든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소반을 하고 계신 이유가 있다면. “작은 소반을 만들다가 큰 가구를 만들어 완성된 걸 보면 ‘내가 했지만, 참 멋있다’라며 뿌듯해 하죠. 매 작업이 끝날 때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공방에 나와 칠을 하고 있으면, 시간도 잊고 그냥 빠져들어요. 작업하는 게 재미있고요. 다 완성해서 보고 있으면, 좋아요. 보기도 좋고, 뿌듯하고. 그렇다보니 이 끈을 못 놓는 거죠.”  ▲ 이익종 [사진=강지연 기자] ■ 45년 경력의 명장, 그러나 이제부터 진짜 시작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는 지난 4월 ‘제1회 한국예술문화명인'을 인정하고, 최종 합격된 명인에게는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익종은 실력과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예술문화명인’으로 단단히 지정되었다. 판매를 위해 만들어지던 옻칠 소반이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욕심 없이 소반을 만들던 그에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이렇게 계속 제 일을 하다 보니 우연하게 한국공예가협회 이칠용 회장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협회에 가입도 하고 제1회 명인도 신청해서 선정되기도 했죠. ‘우물 안 개구리’라고, 그런 협회에 가입을 안 하면 사람들이 전혀 몰라요. 혼자서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갈 뿐이죠.” “명장이나 명인으로 지정되더라도 금전적인 혜택이 별로 없어요. 문화재 등록이 되어야 금전적인 혜택을 받죠. 그런데 문화재 지정하는 수가 워낙 소수다 보니 나머지 사람들은 힘들죠. 그렇다고 금전적인 도움만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시 단위, 동 단위로 전시장을 마련해서 선보일 수 있는 자리가 많았으면 해요. 작품을 선보일 장소가 너무 없으니 아쉬워요.” - 정부 기관을 찾아가 요청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딜 찾아가겠어요? 전통공예를 맡아서 하는 정부 기관이 없잖아요. 그나마 이칠용 회장님이 전통분야에 발 벗고 나서주셔서 감사하죠.” - 이칠용 회장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어 협회에 가입까지 하게 되셨나요. “제가 행보사를 나와서 백골 짜는데를 찾다보니깐 백골하시는 장경춘 선생님을 찾게 되었어요. 그 분의 소개로 협회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 가입해도, 경제적인 지원은 없죠? “네. 그런건 없지만, 전시나 공예 관련 정보를 빨리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도움도 많이 받고요. 같은 계통에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는가 많이 보기도 하고요.” “이칠용 회장님도 나전칠기 하던 분이라 그런지, 전통공예하는 분들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도 많이 해주시고, 많이 도와주려고 해요. 전통공예 분야에서는 정말 필요한 분이에요.” - 협회 가입 전, 혼자 하실 때는 어떻게 판매를 하셨고, 재정상태는 어땠나요. “판로가 거의 없었죠. 그러다보니 수입 면에서 힘들었어요. 요즘은 옻칠 가구나 뭐 이런 걸 잘 사용 안 하니깐요. 옻칠 좋다는 건 아는데 워낙 비싸니깐…. 옻칠은 전부 수공예라서 단가가 많이 들어가요.” - 요즘에는 판로가 좀 정해지셨나요. “요즘도 주문이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저는 주로 자수하시는 분들과 연계가 되어 수를 보관하는 장을 주문받아 만들어요. 요새는 ‘크로스포인트’사에 전속으로 납품하게 되었어요.” - 옻칠 소반, 앞으로 나아질까요. “사실 그렇게 많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아요. 소반의 쓰임 폭이 좁아져 찻상이나 다과상 외에는 안 쓰잖아요. ‘밥상’이란게 없어졌으니까요.“ - 옻칠로 꿈꾸는 미래가 있다면? “국가적인 옻칠 연구단체가 생겨서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옻칠이 얼마나 좋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옻칠이 발전될 것이고, 옻칠하는 사람들도 더 잘 되겠죠.” - 45년을 해오셨지만, 앞으로 할 게 더 많아 보이세요. “할 게 많죠. 문화재도 되고 싶어요. 최고로 올라가고 싶습니다. 문화재가 되면 책임감이 더 무거워지니까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직까지 전시를 한 적은 없어요. 이제 목동에 한국공예가협회 전시관이 생겼으니, 전시할 기회도 많이 생기겠죠. 제 작품을 전시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어요.” “앞으로는 공모전에 출품도 하고 싶고, 활동 분야를 넓혀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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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22
  • [한국의 명장] 채화칠기 최종관 “전통분야 가업 잇는 자식들 뿌듯”
    ▲ 최종관 [사진=강지연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채화칠기를 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채화칠기를 물려받은 것이 가장 보람되고 뿌듯해요. ‘아버지, 어머니처럼 안 산다’는 자식들도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무리없이 제가 하는 일을 하겠다고 다가올 때 ‘내가 그냥 채화칠기 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전통 가업을 잇는다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전통은 대부분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은 것보다는 전수자를 통해 이어온 것이다. 가업에 뜻이 맞지 않는다면 부모든 자식이든 모두가 얼마나 속상할까. 그러나 대를 이어 전통 채화칠기를 해나가는 가족이 있다. 대를 잇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4식구가 모두 채화칠기를 하는 보기 드문 가족, 최종관 가족이다.  최종관은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칠기장 제10호 故김태희 선생을 사사한 채화칠기 작가다. 그의 부인인 김경자는 현재 대한민국 채화칠기 기능계승자며, 그의 아들 최민우는 배재대 칠예과와 동 대학원 칠예과를 나왔으며, 딸 최다영 또한 한국전통문화학교를 나와 온 식구가 ‘채화칠기’를 하는 명실공이 ‘채화칠기 가족’이다. 지난 2011년 ‘최종관 채화칠기 가족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그 가정의 CEO 역할을 하고 있는 최종관을 만나, 채화칠기와 보기 드문 채화칠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최종관 [사진=강지연 기자]█ 손이 작은 아이, 명장이 되다 - 옻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먼 친척 형이 나전칠기를 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는 걸 좋아하고 손재주가 많다보니 형이 이 계통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문화재 김태희 선생님을 소개시켜주었고 그 분께 사사하게 되었습니다.” “김태희 선생님은 굉장히 엄하고 위엄을 가진 분이셨어요. 선생님을 찾아뵈니 갑자기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손을 내미니까 ‘손이 작으니깐 잔재주가 많겠네’라며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재주가 많은 줄 알고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 엄한 김태희 선생님께 사사할 때 생각나는 일화가 있으시다면. “당시 문화재생들이 7~8명 됐는데, 저는 크게 야단맞은 적은 별로 없어요. 다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만들지 않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굉장히 야단을 맞았죠,”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에요. 작업실 옆에 방을 얻어놓고 작업을 했는데, 거의 밤 12시까지 작업을 하다 12시 되기 바로 전에 양말도 못 신고 뛰어간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훈련을 받은 거라 생각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채화칠기를 못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 어린 시절, 공예 관련된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아니요. 그런 환경은 전혀 없었고요. 아무래도 성격이 찬찬하고 그래서 형이 이 쪽으로 유도를 한 거죠. 하나하나 배우고 나가면서 저의 적성하고 굉장히 잘 맞았고, 선생님께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요. 사사할 때가 스무살 땐데 스물다섯살까지는 선생님 슬하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명한 선생님 몇 분 빼고는 전부 상업적인 옻칠을 했었지만, 저는 그런 쪽하고는 거리를 두고 작품 세계로 뛰어든 거죠. 작품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고 보니까 디자인이 굉장히 부족하다고 느껴서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배웠어요. 그러다 김태희 선생님께서 ‘너는 나전칠기도 좋지만, 칠을 전공했기 때문에 채화칠기를 하는게 좋을 거다. 채화칠기에 좀 더 신경을 써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그때부턴 채화칠기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 최종관 작품 [사진=강지연 기자] ▲ 최종관 작품 [사진=강지연 기자]█ 다양한 색을 내는 ‘채화칠기’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을 품다 - 채화칠기는 약간 생소해요. 채화칠기에 대한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채화칠기는 옻칠에 안료를 섞어서 전통문양이라든가 다양한 문양들을 세필로 그려나가는 작업을 말합니다.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있다고 하지만, 나전칠기에 가려져 크게 발전을 못했어요. 극소수의 사람만이 명맥을 이어 왔을 뿐이죠. 화려하게 발전되거나 채화칠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분도 없었습니다.” - 채화칠기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채화칠기라고 하면 자연색, 자연에서 얻어진 색이라 말합니다. 채화칠기의 색이 참 매력적이에요. 옻칠을 처음 칠하면 굉장히 진한 갈색으로 나오는데, 제대로 된 색은 3년 후에 나옵니다. 다시 말해 3년 후에 필 색을 연상하면서 색을 만들어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고도의 경험이 많이 필요합니다. 현재 보기에 어둡다고 밝게 하면 나중에 옻이 폈을 때 굉장히 유치해지는 거죠. 이게 옻칠의 매력이라고 생각됩니다.” - 옻, 나무, 붓 등 제작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전통이라고 해서 과거에 있던 걸 그대로 답습만 하면 안 된다고 봐요. 현대문화에도 우리 전통이 어울리게끔 해야 된다는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부분이죠. 기능적으로 전통기법을 쓴다는 건 좋은데, 우리가 현재 편안하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을 접목시켜야 하죠.” - 해외전시를 통해 채화칠기를 선보이면, 반응은 어떤가요. “해외에서는 완전히 감탄하죠. 한국이 이런 고급 공예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많아요. 옻칠은 ‘웰빙’ 그 자체에요. 그러니 해외쪽으로도 발전가능성이 크죠. 최근에는 옻칠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고,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요. 회화분야에서도 재료를 옻칠로 바꿔서 한국적인 회화를 하려는 분들도 많고, 현재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아요. 채화칠기가 기본이 되어 회화도 더 많이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 2005년에 이어 몇 년 만에 개인전을 연 소감은 어떠십니까. “개인전을 할 때 마다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인전 준비하는 동안은 굉장히 힘이 들기 때문에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판을 벌려서 전시장에 앉아있으면 ‘다음엔 이걸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죠. 어려웠던 건 다 잊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게 됩니다. 애기 낳고 힘든 걸 잊어버리는 거랑 똑같아요.(웃음)”  -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자면. “다 애착이 가는데, 우리 전통을 현대화시킨 관복함이 특히 애착이 가긴 해요. 그러나 전통적인 요소를 살린 것은 그것만의 매력이 있고, 우리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현대적인 요소를 섞는 것은 또 그것만의 매력이 있어요.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 너무 예쁘고 그래요.”  ▲ 최종관 [사진=강지연 기자]█ 채화칠기 가족, 보셨나요? 4식구가 모두 채화칠기를 하게 된 것은 최종관의 철저한 계획아래 이루어 졌다. 결혼 후 일본에 견학을 간 최종관은 너무나 발전되어 있는 일본의 옻칠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왜이렇게 앞설까’를 생각하던 그는 일본이 대를 이어서 옻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자신은 꼭 대를 이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일본 견학 후에 집에 와서 집사람한테 우리도 대를 물려줘야겠다고 말 했어요. 그래서 아들을 4살 때부터 미술학원에 보냈어요. 전시하면 같이 전시보러 다니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설명도 해주며 점차 이 분야로 끌어 들인거죠. 단체전을 했는데, 그때 아들이 제 작품 앞에서 ‘이게 아빠 작품이다!’라고 알아보고 좋아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 점점 물이 들어가고 있구나’싶었죠.(웃음)” - 자제분들은 ‘하기 싫다’는 말없이 잘 따라왔나요. “아들은 공을 들여 칠에 끌어들였는데, 딸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라면서 자유롭게 나뒀어요. 그랬더니 딸이 ‘안하겠다는 말은 안한다’고 하면서 딸도 이쪽으로 자연스럽게 오더라고요. 딸은 부여에 있는 전통대학을 다니며 집에서 배울 수 있는 기능 대신 이론을 중점적으로 공부시켰어요. 어떻게 보면 나중에 딸의 작업 폭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돼요.” - 아내분께 채화칠기를 직접 알려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집사람이 서양화를 했어요. 그림을 했기 때문에 옻칠에도 굉장히 관심이 있었고, 저한테‘내가 해봐도 괜찮겠다’는 말을 결혼 초부터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여자가 하는 경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여자가 하려고 하냐. 하지 말아라’했었죠. 그런데 제가 작업하다가 잠깐 화장실가면 슬쩍 조금 해놓고, 하다 잘못하면 버려놓기도 해서 저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는 걸 보니까 잘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같이 작품을 하게 된 거죠. 지금은 채화칠기 수강생들을 집사람이 가르쳐요.”  - 선배로서 자제분들께 당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제 나이에 맞는 전통적인 작품을 많이 했지만, 아들이나 딸에게는 우리의 전통기법으로 현 시대에 맞는, 네 나이에 맞는 작품을 하라고 말해요. 단 자신에게 맞는 디자인을 연구하되  절대적으로 전통기법을 살려야 한다고 당부하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조상들이 내려준 전통기법을 해야만 천년을 가는 작품이 나올 수 있어요.” “또한 장인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조금만 게을리하고 편법을 쓴다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상업적으로 빨리 만들기 위해서 칠 대신에 다른 걸 쓴다던가, 황토 대신에 다른 분말을 쓴다던가 그러면 30~40년 밖에 못 쓰거든요. 지금 70~80년도에 만들었던 자개들이 지금 다 버려지잖아요.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죠. 옻칠하는 사람들은 정말 양심적이어야 해요.” - 가족끼리 함께하면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좋은 점은 살림살이가 녹록치 않아도 참고 한다는 거죠. 남 같으면 뛰쳐나가잖아요. 가족이니까 그 테두리 안에서 힘들 때 서로 힘이 되어주죠. 안 좋은 점은 망하면 같이 훅 간다는 겁니다.(웃음)” - 지난해 갤러리 초이를 오픈하셨는데, 소개해주세요. “저희 가족은 3층 건물에 살고 있습니다. 3층은 작업실, 2층은 반은 저희 집, 반은 전시장이고, 1층을 갤러리로 꾸몄어요. 가족이 필요해서 갤러리를 꾸미는 것은 거의 없잖아요. 온 가족이 채화칠기를 하는 우리 가족들에게 필요해 갤러리를 만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생각은 해왔는데, 경제적으로 안 따라줘서 미루다가 작년에 오픈했습니다. 채화칠기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갤러리 전시를 통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어요.” “지하에는 수강생을 받아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강생은 12명이에요. 수강하시는 분들이 40~50대 주부들로 대부분 4~5년을 하신 분들이에요. 한 번 옻칠을 하게 되면 손을 놓을 줄을 몰라요. 빠져나올 수 없는 거죠(웃음). 그 분들에게 ‘어떤 매력에 끌려 계속 하시냐’고 물으면 자기들도 모르게 매력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전통도 전통이지만, 전통을 가지고 계승발전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갤러리와 수강생교육관, 그리고 아들, 딸에게 전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거죠.”  ▲ 최종관 [사진=강지연 기자]■ 채화칠기,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분야로… - 옻칠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꿈이라면 굉장히 크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예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내에서만 했지만, 우리 애들은 세계적으로 나갔으면 해요. 제가 이만큼 길을 닦아놨으니, 충분히 해외로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전통으로 만든 훌륭한 공예품은 몇 천 만원, 몇 억 원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봐요. ‘문화상품 보급’을 위해 무조건 저렴하게 하는 건 안 좋다고 봐요 훌륭하게 만들어 당당하게 해외에 나갔으면 합니다.” -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으셨나요. “경제적인 것 때문에. 옻칠을 한다고 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붓 한 자루도 10만원이 넘고, 모든 재료가 자연에서 얻어지는 거라 비싸요. 그런데 그걸 사야지만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큰 비용을 지불해서 작품을 만드는데, 작품이 팔리지 않을 때는 참 난감할 때가 있었죠. 30대 중반정도에 한 2년 동안 작업을 못하기도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런 좌절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열의를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놓치 않고 해나갈거에요.” - 요새는 경제적인 면에서 괜찮아지셨나요. “그래도 요새는 좀 낫죠. 우리 집안 식구들이 다 같이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적자나요.(웃음) 일본에서도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풍족하게 옻칠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런데도 그렇게 발전했잖아요. 일본이 비싼 재료에도 불구하고 발전한데에는 옻칠에 대한 세금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가도 옻칠은 세금이 안 붙어요. 얼마나 좋아요.(웃음) 옻칠 작품에 대한 우대를 해주는 거죠.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잖아요. 세금 다 내고 4대보험 들라고 해서 저희 가족끼리 4대보험 들어요. 하하” - 전통분야에 대해 국가에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우리를 박물관에 넣어달라는 건 아닙니다. 단, 우리 전통공예품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이것이 우리 문화다’라는 것을 알릴 수 있게끔 인사동이나 시청, 궁 등에 전시할 공간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한국적이면서도 좋은 작품이 너무나 많거든요. 상설전시장을 만들고 전문 큐레이터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설명해 주고, 홍보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부에게 무조건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를 정확하게 알리는 장소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 끝으로 꼭 하고픈 말이 있으신가요. “언론에 부탁하고 싶어요.” “전통분야, 물론 돈 안 되고 낙후되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선진국으로 갈려면 우리 문화가 발전해야 되잖아요. 우리 문화가 발전하려면 전통분야에도 김연아 같은 스타가 있어야 해요. 우리가 물론 잘 해야겠지만, 언론에서도 함께 만들어 줘야 된다고 봅니다. 전통분야의 스타가 생기면 대중들의 관심도 많아지고,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지겠죠. 그래야만이 우리 문화가 살아요. 개인이 죽어라 해도 소용없어요. 온국민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론이 나서줘야 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많은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큰 전시보다는 2년 동안 제 작품 정말 귀하게 만들어서 채화칠기의 묘미를 다 쏟아내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 손재주가 이렇게 좋구나’라는 걸 보여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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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08
  • [한국의 명장] 도예가 윤주철 “첨장기법은 한국적 색 입힌 현대도자”
    ▲ 윤주철 [사진=강지연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해외 도예가들에게 ‘현대도자 중에 한국적인 도자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설명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전의 작업을 모두 접고 한국적인 색을 입은 도자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탄생한게 첨장기법입니다.” 청자와 백자,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런 우리나라 도자기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 백자까지 활발하게 생산되던 전통 도자기는 임진왜란 이후 우리의 훌륭한 도공들이 일본으로 강제로 넘어가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전통 도자기를 다시 연구하며 옛 것과 똑같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전통도자의 흐름이 끊긴 탓인지 전통도자를 이어갈만한 우리의 도자를 찾을 수 없었다. 도예가 윤주철은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도자의 부재 속에 길을 잃고 있던 한국 도자기계에 그가 개발하고 명명한 첨장기법으로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했다.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도시를 떠나 한적한 마을에 들어서니 마음까지 편안하다. 이제는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철도길이 운치를 더해주는 그 곳은 도예가 윤주철의 근간이 되고 있는 윤철예가(尹哲藝家)다.  - 유년시절부터 이곳에 살았나요. “네. 아버님이 땅을 구매해 관리 해주셨다가, 제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이곳을 근본으로 작업을 하라며 ‘네 터로 써라’고 말씀하시고 손수 ‘윤철예가’라고 비석을 써서 세워주셨어요.” “이곳은 주위가 아주 조용해요. 특히 저녁시간이 넘어가면 주위에 아무소리도 안 들려요. 그리고 옆에 철길은 기차가 다니는 길이 아니라서 더 좋아요. 작업에 집중하는데 도시보다는 낫죠.” - 아버지께서 예술적인 영향을 물려받으셨나요. “아버지 쪽은 아니었고, 어머니 쪽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외가 쪽이 문경에서 옹기를 만드는 집안이었어요. 예전엔 그런게 어려웠죠. 그래서 지금은 대를 잇지 못하고 저희 가족이 아닌 외부사람에게 물려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영향이 있던 것 같아요.” - 어머니께서도 옹기를 직접 만드셨는지. “예전엔 만드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먹고 살기 힘드시니깐 당장 돈을 벌어야 해서 그만 두셨어요.”   ▲ [사진=강지연 기자] ▲ 윤주철 [사진=강지연 기자]■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거든요. 작품으로 한 번 보여줘야죠.” 현대 도예가로 활동하던 윤주철은 해외 도예가들로부터 ‘한국적인 색이 담겨있는 현대 도자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한 두 번에 그친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는 현실에 한국 도자사를 공부했고, ‘귀얄기법’을 만났다. 귀얄기법은 분청사기 기간에 한국에서 활발했던 기법으로 한국 고유의 기법이다. 이를 모티브로 심화시켜 새로운 기법으로 개발된 것이 윤주철의 첨장기법이다.  “귀얄기법을 가지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다가 여러 번 반복해서 바르다 보니 돌기가 좀 형성되는걸 알게 되었고, 이걸 키워보자 생각했어요. 저도 처음엔 잘 안됐죠. 바른다고 다 키워지는 것도 아니고. 초기작품을 보면 돌기가 균일하지도 않고 엉망이에요. 그냥 발라서 돌기만 만들자던 시기였어요. 돌기의 크기, 높이, 모양 등을 실험을 하면서 데이터를 만들다 보니 안정이 된 겁니다.” - 이제는 해외 작가들이 같은 질문을 해도 할 말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이젠 얘기할 수 있죠. 전통도자는 이런게 있었고, 그걸 가지고 나만의 색깔을 찾아서 첨장기법 작업을 한다. 이렇게 당당히 얘기하죠.” - 해외 반응은 어떠신지. “기존에 도자하면 표면에 유약을 바른다던가, 색깔을 내서 모양을 잡아줬는데, 표면에다가 입체적인 기법이잖아요. 기존에 없던 표현방법이다 보니, 관심을 많이 가져줘요.” “2009년 정도부터는 홍보를 통해 해외에 알려야겠다는게 주목적이었어요. 그래서 특허도 내고, 해외전에 중심을 뒀죠. 정부가 주관하는 해외전에 당선이 돼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전시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 뒤로는 1년에 한 번씩은 작품을 해외에 보내는 것 같아요. 올해도 벌써 4월에 프랑스에서 전시했고, 5월에는 영국에서 전시합니다. 전시를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가 제 작품에 호감이 있다는 뜻이겠죠.” - 그럼 앞으로는 해외에 더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실 계획인가요. “네. 국내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거 같고 해외에 더 취중을 두려고 해요. 국내는 도자기 하시는 분들은 어느 정도 아니까. 애초에 계획이 도자기 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다음이 공예계, 미술계…이렇게 조금씩 넓혀가자는 취지였어요. 그래서 공모전도 많이 냈었고. 전시도 많이 하고. 그런 걸 통해서 이제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몇 년하고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해외에서 전시할 기회 있으면 하는 거죠.   ▲ 윤주철 [사진=강지연 기자]■ 뾰족하게 장식했다…첨장기법 복어같기도 하고, 동굴 천장에 매달려있는 종유석(鐘乳石)같기도 하고, 바다 속에 있는 산호초 같기도 한 첨장기법의 제작과정은 어떻게 될까. 석고와 물레를 이용하여 기물을 제작하고 백자흙을 원료로 한 흙물을 붓으로 바른다. 완성된 몸체에 붓질을 한 번 발라보면 붓 결이 보이는데, 그 위에 또 바르면 처음에 바른 결 위에만 발리는 원리로 도자에 돌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500~600회 정도 반복해서 바르면 된다.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흡수하고 안착되기 위해서는 붓질로 한 번 바르고 대략 1분에서 길게는 3분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발라야 한다. 돌기가 형성된 몸체에 원하는 색상의 안료를 이용하여 50회에서 100회를 바르고 1차소성(900도)과 2차소성(1250도)를 하면 첨장기법을 이용한 도자기가 완성! - 오브제 디자인은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보통은 전통적인 부분에서 많이 따옵니다. 기본적인 한국적인 선. 기존에 청자나 백자에서 보여줬던 선을 재해석해서 따오게 되죠. 기존에 성형이 되고 나왔던 것들은 전부 물레에서 나온 거잖아요. 손으로 해서 나온 건데, 저는 석고를 이용해서 하기 때문에 똑같은 선을 뽑아내더라도 그 느낌이 달라요. 과거에 만들어졌던 선들을 제가 작업하고 있는 거에 맞춰서 전환을 하는 거죠.” - 크기가 다양해서 다를 것 같긴 하지만, 보통 작업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브제 있는 작품과 상품위주의 생활용 소품으로.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돌기 성형자체를 1주일 정도 잡아야 하고, 소품은 크기가 작아 이틀이나 삼일 정도 걸려 성형을 끝냅니다.” “보통 하나의 콘셉트를 잡고 작업할 경우 한 달 정도 걸려요. 스케치하고, 원형만들고, 틀 뜨고, 몸체 성형하고, 첨장기법을 이용해 돌기 성형하고, 색 칠하고 그런 모든 작업이 그 정도 걸려요. 대작에 따라서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도 해요. 보통은 소품은 2주, 작품은 한 달 정도.” - 다작하는 편인가요. “아니요. 작업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려서…. 아무래도 작가다 보니까 작업에 충실해야겠죠. 시간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고요.”  -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여기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영국에 있어요. 영국 전시를 위해 얼마전에 보냈습니다. 2006년 열린 ‘윤주철 도예전’ 도록의 메인에 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전 당시 작품은 대부분 팔렸는데, 이 작품은 판매를 안 하고 가지고 있죠. 2006년 당시 공개를 하고, 그 이후로는 공개도 하지 않았어요.” - 이 작품이 특히 애착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 작품을 보면 그냥 ‘돌기네~’하실 수 있지만, 자세히 보시면 돌기가 다 달라요. 그때그때 마다 저의 기분이나 작업에 대한 행위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돌기가 다르죠. 그런데 이 작품을 할 당시는 첫 개인전이라 정말 애지중지 작업을 했던 거죠. 바르는 것만 3개월을 했으니깐요. 하루에 몇 번 안 발라요. 그래서 돌기가 아주 균일하고 이뻐요. 그러다보니 애착이 갑니다.” - 작업 신조가 있다면. “작업 신조라고 까지 말하긴 그렇지만, 작품에서 저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작품으로 다 드러나거든요. 모든 작가가 그럴 거에요. 자기 작품을 할 때 에너지를 다 쏟아 심혈을 기울이니깐 당연히 작가의 성격이 작품에 나오겠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나면 후회가 되는 경우도 있고, 아쉬운 경우도 있지만 그거 할 때는 모든 신경을 다 거기에 쏟아요.” - 첨장기법 작품을 보면, 윤 작가님 성격이 꼼꼼할 것 같습니다. 맞나요. “그렇진 않아요.(웃음) 다른 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B형 같은 A형이에요. 작업할 때만큼은 의도적으로 꼼꼼하게 하려고 하지만 실제 성격은 그렇지 않습니다.” - 꼼꼼한 작업이다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실 것 같은데. “다른데서 스트레스 받은 것을 작업하면서 풀어요. 오히려 작업을 안 하면 스트레스를 받죠.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한 2년을 작업을 안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깐 그때가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화도 많이 내고…. 그러다 작업을 다시 하니깐 그런게 아무래도 없어지더라고요.” - 다른 취미생활 하시는게 있나요. “전혀 없어요. 최근 작년 겨울에 스키 처음 타봤고, 골프도 지인이 한 번 쳐보자고 하도 그래서 3개월 연습장에서 치다가 접었어요. 나이가 있어서 운동을 해보려고 했는데 작업처럼 저랑 맞아야 하지, 저랑 안 맞더라고요. 취미생활 없어요.”  ▲ 윤주철 [사진=강지연 기자]■ 윤철예가, 또 한 번의 비상을 꿈꾸다 윤주철의 첨장기법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윤철예가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온 첨장도자기를 한 데 모아 전시할 첨장미술관을 짓는 중이다. 첨장미술관에 와야지만 첨장기법 도자기를 볼 수 있게 말이다. 미술관 설립은 그가 그동안 고민했던 한국적인 현대 도자를 체계화 시키고 확고하게 시키기 위한 것이다. “미술관을 너무 크게 벌려놔서 지금은 잠깐 공사 중단시켰어요(웃음). 첨장기법 10주기인 내후년에 오픈하면 어떨까 생각은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공사를 쭉 하는게 아니라 돈 모아서 짓고, 돈 모아서 짓고 이런 식이거든요. 빨리 하려는 그런 욕심은 없고 후대에 좀 남기고 싶어요.” - 그렇다면 최종 꿈이 미술관 건립인가요. “최종 꿈은 도자학교를 만드는 거였어요. 20대에 꾼 꿈인데, 아직 가지고 있죠. 미술관에서 그칠지 더 발전해 학교까지 발전할지는 모르겠어요. 우선은 당장 해야 할 것은 미술관 건립입니다.” - 10년 후에 무얼 할지 상상해 보신다면. “10년 후에도 여전히 작업하고 있을 거고, 미술관 운영하고 있을 것 같아요. 미술관에서 문화강좌를 통해서 교육도 계속 하고 있을 것 같고요.” - 도예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점을 꼽자면. “먹고 사는게 제일 힘들어요.” “첨장기법으로 작업을 한 지 8년이 됐어요. 판매하기 위해 실생활에서 사용할 소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저것도 4~5년 지난 다음에 만들었어요. 그 전까지는 오브제성 작품만 하니, 가격도 비싸고 팔리기가 힘들었죠. 소품을 만들고 나서는 좀 판매가 돼요. 왜냐면 가격대를 10~30만원 대로 일부러 맞추다 보니깐 아무래도 선물용이나 그런 목적으로 많이 나가는 것 같아요.” - 그럼 반대로 가장 즐거울 때는 판매될 때 인가요. “아니요. 작업할 때요. 작가라면 누구나 다 그럴거에요. 작업할 때가 제일 즐겁죠.” - 작품에 애정을 쏟다보면, 판매될 때 아쉬운 감정이 들기도 한다는데, 어떠신가요. “글쎄요. 저는 제가 애지중지 하는 아끼는 작품은 판매를 하지 않아요. 나머지는  사신다는 분이 있으면 그 자체가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실생활 소품용 도자는 선물이나 쓰임의 목적이 분명히 있겠지만, 몇백만원을 호가하는 작품들은 정말 작품이 좋아서 구매하시는 거니,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아쉬운 것보단 좋죠.” - 후대에 어떤 도예가로 남고 싶으세요. “도예가보다도 기법에 대한 걸로 남고 싶죠. 첨장기법 작가 혹은 개발자 윤주철. 첨장기법이라고 이름붙이고 작업한게 이제 8년입니다. 첨장기법을 과거의 청자나 백자처럼 자리를 잡게끔 하는게 제가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선 작품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 전시도 많이 해야 하고 그래야겠죠?” “오리지널 작품은 작품으로써 하고 있고, 홍보를 위한 작품도 하고 있습니다. 도자는 파손우려가 있잖아요. 그래서 실질적인 디자인에 적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도 해봤어요. 휴대폰 케이스, 스피커, 아트타일 등.”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작업하시나요. “네! 이제 옷 갈아입고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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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02
  • [토킹어바웃] 김영성 이바돔 대표 “목공예와 옻 보급, 전통지킴이가 꿈”
    ▲ 김영성 이바돔 대표 [사진=김현우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저는 팔아서 이익을 보는 것보다도 너무나 좋은 ‘옻’을 목공예 등 실생활에 많이 접목해 널리 알리는게 꿈입니다. 자동차 핸들 커버에 세균이 많다는 뉴스를 봤어요. 옻칠을 하면 세균이 싹 죽으니 옻칠한 자동차 핸들커버를 만들었어요. 소비자들에게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시도해보는 중이죠.”‘전통’을 소재로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통에 대한 개인의 호불호가 뚜렷하기 때문에 판매층이 얇고, 선뜻 선물로 구매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인연이 없는 전통분야에 뛰어든 이가 있다. 바로 이바돔 대표 김영성. 서울 마포에 위치한 이바돔 사무실을 찾아가 김영성 대표를 만났다. ■ 자연으로 돌아가라김영성 대표는 전통과는 전혀 관련없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전통공예품을 제조․판매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도움없이 직접 발품을 팔아다니며 전통에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고향이 서울 노량진이에요. 그래서 어린시절, 한강에서 여름에는 수영을, 겨울에는 얼음썰매를 타며 보냈어요. 오래전 노량진 수산시장 터에는 별장이 있었는데, 별장 주위에 수많은 나무가 심어져 있었어요. 그 곳에서 나무를 올라타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분질러보기도 하며 항상 자연 속에서 살았죠. 누구보다 자연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살았다고 생각합니다.”“문명과 문화가 발전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인간은 자연회귀본능이 생겨 옛것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전통공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직장생활을 하다가 전통공예분야에 뛰어는 계기는.“직장생활을 하면서 적성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언젠가는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이바돔의 주력상품은 목재제품이 많은데, 전통공예 중 ‘나무’를 선택한 이유는“‘나무’로 하면 가장 다양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보고 자란게 나무 밖에 없었고, 가장 친한 것이 나무였으니까요. 나무․풀․물․모래 그 중에서 저에게 가장 친근한 나무를 선택한 것이죠”- 전통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 했을텐데, 어떻게 시작했나요.“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어요. 우연히 백화점이 아니라 한 상가에서 나무로 된 그릇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게 옻칠을 한 그릇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옻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카다로그 하나 받아와서 읽었더니 굉장히 좋은 얘기가 많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았습니다.”“그리고 나무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파주에 있는 목공예단지를 찾아갔어요. 이런 상품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무작정 쫒아다녔어요. 실패도 많이했지만 나무하는 업체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습니다.” ▲ 김영성 이바돔 대표 [사진=김현우 기자] ■ ‘이바돔’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이바돔은 귀한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이라는 뜻으로 순수한 한글이다. 이바돔은 이름에 맞게 식기류, 수저, 도마, 조리도구, 쟁반과 같은 주방용품뿐 아니라 보석함, 신발 깔창, 자동차 핸들커버, 선물용품까지 다양한 전통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요즘에는 가구까지 분야를 넓히고 있다. 전통용기, 전통가구만을 취급하지 않는 ‘이바돔’은 과연 어떤 분야인가.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전통생활공예’. 앞으로는 ‘이바돔’하면 ‘전통생활공예’가 떠오르길 바라면서.- 주방용품에만 주력하고 있나요.“주방용품이라기 보다 생활용품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세계 추세가 과거에는 주력상품 하나만 만들었다면 요즘엔 ‘토탈화’되는 것 같아요. 신발만 만들던 회사가 옷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잖아요. 이바돔도 주방용품에만 한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토탈화하려고 합니다.”- ‘이바돔’하면 감자탕집을 생각하게 되는데.“제가 2001년도에 상표등록을 위해 특허청에 갔어요. 상표등록을 하면 범위를 정하는데, 저는 주방용품이나 생활용품 내에서 ‘이바돔’을 사용하겠다고 등록을 했죠. 상표등록을 마치고  좀 있다가 ‘이바돔 감자탕’이 나왔어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낯선 이름이 아닌 친숙한 이름이 되는 거니까요.”- 이바돔의 뜻은 무엇인가요.“이바돔은 순수한 한글이에요. 이바지랑 같은 뜻이라고 보면 돼요.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란 뜻입니다. 국어사전 가져다 놓고 제가 직접 찾은 이름이에요.(웃음)”- 그럼 회사이름인 ‘에버파이버’는 어떤 뜻인가요.“회사를 경영하다가 나중에 가서 해외진출용으로 영어이름을 지으면 어려울 것 같아서 창립할 때부터 해외 진출을 생각해서 따로 만든 이름이에요. 뜻은 말 그대로 ‘영원한 다섯’이에요. 다섯이란 숫자가 ‘중간’, ‘안정’을 의미해요. 월드컵도 오륜기고, 5대양도 있고, 음악에서는 오선지를 사용하잖아요. 안정적인 회사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에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저의 경영목표도 에버화이버를 가지고 만들었어요. 하나, 고객을 감동시켜야 한다. 둘, 내실 경영을 해야겠다. 셋, 평등이 아닌 공정한 경영을 해야겠다. 넷, 즐거운 회사를 만들어야겠다. 다섯, 계속 성장해 나갈 기업을 만들어야겠다.”- 해외진출은 어느 정도 이뤄졌나.“아직까지 해외진출은 하지 않고 있어요. 전에 LA사시는 분이 ‘한 번 해보겠다’며 샘플로 구매해갔는데 아직 답이 없어요. 아직은 내수 기반이 약한 편이에요. ‘가화만사성’이라고 일단 내수부터 안정이 되면 해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싸이가 처음부터 해외진출을 목표로 ‘강남스타일’노래를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삶이 다 그런 것 같아요. 목표를 정해서 가지 않더라도 하다보면 자연스레 돼는 경우도 있다고 봐요. 그러니 일단 내수에 신경을 쏟을 계획입니다.” - 백화점 입점이 힘들지 않았는지.“처음에 정말 어려웠죠. 백화점 측에서 ‘과연 이게 팔릴 것인가’ 문제제기가 많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처음에는 제기(祭器)를 안 팔았습니다. 제기전문이라는 인식이 박히면 제품을 판매하는데 한정이 되기 때문이죠. 백화점에 계속 쫒아다니니, 백화점 직원분들도 보는 눈이 있으니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등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6개월 쫒아 다녀서 입점을 했어요. 처음 입점할 때는 백화점에서 별로 좋지 않은 자리에 매장을 열었어요. 그렇게 판매를 하는데, 예상외로 좀 팔리니깐 백화점에서 관심을 가져주셨고, 품목도 더 다양해졌죠.”- 수입은 많이 나는지.“흑자일 때도 있고, 적자일 때도 있어요. 수입보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기업을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강한 자가 이기는게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거라고 하잖아요. 끝까지 살아있는 기업이 강한 거죠. 규모는 작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는 기업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경영의 가장 기본은 발전이 아닌 유지에요. 유지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발전하게 되어있어요.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수입은 일정하지 않지만,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직원과 협력회사에요. 13년을 경영하면서 금액이 크던 작던 한번도 신용을 어긴 적이 없었어요. 신용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 김영성 이바돔 대표, 정낙완 실장(왼쪽부터) [사진=김현우 기자] ■ 고객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이바돔에서 제작한 모든 상품에는 이바돔 마크가 찍혀서 나온다. 이는 AS를 위해서다. 보통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생활용품에 AS제도를 시행한 이유는 단연 ‘고객 만족’을 위해서다. 고객에게 신뢰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 고객의 입장에서 항상 생각한다.“주걱은 쓰다보면 다 닳아요. 그런 것도 다 AS해줍니다. 옻칠이 벗겨지면 옻값이 워낙 비싸다보니 최소한에 실비는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용기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해드려요.”“도마는 사용하다보면 칼집이 생기는데, AS를 맡기면 대패로 싹 밀어 칼집을 없애고 다시 옻칠을 하니 완전 새 상품이 됩니다.”- 얼마나 사용해야 칠이 벗겨지나요.“수년은 써야 좀 벗겨져요. 오래된다고 벗겨져 보기 싫은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닳게되면, 나무무늬가 다 보여요. 그것을 옻이 핀다고 해요. 옻이 핀 나무도 그 나름대로 멋스럽죠.”-이렇게 꼼꼼하게 AS하는 이유는 뭔가요.“이렇게 해야 전통공예제품을 선호하죠. 전통공예품이 사랑받기 위해서 해야할 하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바돔이 해 나갈 거예요.”“그리고 자주 보면 친해진다고, 고객과 이바돔이 좀 더 자주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죠.”- 공방을 직접 운영한지는 얼마나 됐나요.“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지난 2011년도에 공방을 직접 만들게 되었습니다. 마포에 있는 공방은 AS전용으로 하는 공방으로 봐야죠. 더 큰 공방은 따로 있어요. AS를 중요시 하니 AS전용 공방을 만들게 된거죠. 공방 공개는 정말 처음이네요.(웃음)”- 전통공예품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일단 원자재가 좋아야 해요. 좋은 나무는 옹이가 많지 않는 나무에요. 옹이부분은 수분율이 대단히 높아요. 그래서 건조했을 때 많이 줄어들고 그 부분이 약해져요. 옹이없는 나무가 많으면 좋지만 많지 않아요. 큰 나무 일수록 옹이가 없는 나무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어째든 제일 중요한 부분은 원자재인 나무. 그 다음이 옻칠의 질, 장인의 기술, 건조하는 조건 등이 중요합니다. 그런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맞아야지 좋은 공예품이 나오는 거죠.”- 특정 나무만 사용하나요.“‘물푸레 나무’라고 옛날부터 우리나라서 쓰이던 나무인데, 나뭇잎을 따서 물에 넣으면 물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나무입니다. 이 물푸레 나무가 굉장히 질기면서도 강해하고 문양도 좋아요. 그래서 주로 물푸레 나무를 쓰는데 물푸레 나무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져요. 그래서 우리가 물푸레 나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물푸레나무를 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항상 다른 나무도 검토하고 있습니다.”“우리나라는 엄청난 나무를 수입해요. 함지박처럼 큰 상품을 만들 큰 나무는 국내에 거의 없어요. 제품마다 사용하는 나무종이 조금씩 달라요. 동그란 것은 주로 물푸레를 쓰고, 쟁반같은 것은 원목을 쓰면 나무가 다 휘기 때문에 'MDF'라고 나무가루를 기계로 빻아서 압축을 해서 만든 나무를 씁니다.”- 제작하면서 어려운 사항을 꼽자면.“나무를 자르면 최소 1~2년은 건조를 시켜야 돼요. 만약에 대량주문이 들어와도 만들 수가 없는 거죠. 준비하려면 나무 공수 때문에라도 한 2년 전부터 해야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신제품을 만들려고 해도 나무가 없어서 출시를 못한 적도 있었어요.” ▲ 김영성 이바돔 대표 [사진=김현우 기자] ■ “공존을 위하여 일하는 장인이 되고 싶어요. 항상 적어놓고 틈틈이 봅니다.”내가 잘할 수 있고 사회에 ‘가치’를 더해 기여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삶의 오랜 기간 동안’ 종사하여 자신을 발전시키는 모습, 내가 선택한, 동시에 내게 주어진 일에 몰입해 숙달된 경지에서 훌륭히 해내고, 항상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자신에게서 존엄한 인간의 얼굴을 발전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 그런 ‘장인의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김 대표가 2010년 9월 21일 추석명절 전날에 ‘예병일의 경제노트’에서 발췌한 장인에 대한 글이다. 그의 책상 앞에는 항상 이 글이 붙여있었다고 한다. 그의 남다른 포부가 돋보인다.“저는 제품을 만드는 장인이 아닙니다. 단지 전통공예가 좋아서 시작한 사업가죠. 우리 직원들하고 ‘이바돔’이라는 브랜드가 전통분야로써 아주 뿌리깊게 내려앉고, 욕심이 있다면 해외진출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희 제품은 ‘상품화’라기 보다는 ‘양심화’에요. 절대 속이지 말아라. 우리 직원들에게 강력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직접 만드시진 않나요.“그렇죠. 저는 디자인과 신제품개발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 제품수가 굉장히 많아요. 판매에는 실패한 커피잔, 와이잔, 시계 등 정말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어요. 그런 제품들은 대량으로 만들지 않아 판매하진 않고, 20~30개 정도만 만들어서 여기저기 선물도 드리고, 매장에 진열해두었죠.” ▲ 김영성 이바돔 대표 [사진=김현우 기자] ■ ‘전통 지킴이’가 되고 싶어요스스로 자료를 찾아보며 전통에 푹 빠져버린 김영성 대표는 스스로 ‘전통 지킴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토록 좋은 전통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라며….“나전칠기는 조개에 옻칠을 한 것이잖아요. 조개는 바다에서 나오는 것으로 바다의 정기를,  옻은 산에서 나오는 것으로 산의 정기를 품고 있죠. 한 마디로 나전칠기는 바다와 산의 정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거죠. 바다와 산의 정기를 느끼면 가정이 화목해진다고 하더라고요.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거에요.”- 대표님께 ‘전통’은 어떤 의미인지.“전통은 누군가가 계속 해 나가야하는데, 전통 기반이 너무 약해요. 힘들지만 누군가는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절대 못하지만 전통을 유지하려고 함께 해나가야죠. 국가에서 장인들에게 지원을 해주는 것은 개인적으로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장인 스스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바돔이 많은 고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브랜드로 키우다 보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인 측면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제품은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공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얘기가 있나요.“우직지계(迂直之計)라는 말이 있어요. 돌아가는 것이 똑바로 가는 것보다 빠르다고, 서서히 가는 것이 빠른 거에요. 그리고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약삭빠르지 않은 우둔한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죠. 우직지계와 우공이산, 전통공예업계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빠를 땐 빨라야 하지만 느리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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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20
  • [한국의 명장] 에그아트 김혜란 “서양산 알공예에 자개 입혀 세계 제패”
    ▲ [사진=김현우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왜 이렇게 깨지기 쉬운 알에다가 작품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플라스틱으로 모형을 만들어서 하면 더 쉽다면서….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러니까 예술’. ‘그러니까 에그아트’라고. 깨지기 쉬운 알 위라 더 감동이 오는 거죠.”에그아트 장인 김혜란은 미국 라스베가스로 가족들과 여행을 갔다가 호텔 지하에 있는 보석상 쇼윈도에 있는 작은 거위 알로 만들어진 에그아트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분명히 모양은 알인데 저게 뭘까 하고 물어봤더니 정말 거위 알이래요. 심플하게 중간만 딱 절개해서 안에 보석을 넣을 수 있는 반지함이었는데, 정말 신기했어요. 그 얇은 알로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신비롭고 경의롭게 느껴졌죠.”김혜란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계속 에그아트가 떠올랐고, 스스로 알공예를 하고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러다 우연히 알공예를 하시는 분을 알게 되어 배우게 됐다.- 처음 시작은 취미활동이었나요.“취미라기 보다도 ‘정말 하고 싶어’이 생각에 했어요. 단지 그냥 좋아서 시작한거죠.”- 전업주부에서 에그아트 작가로 전향. 쉬운일은 아니었을 텐데.“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에그아트를 발견하고 나서는 시작하게 되었죠. 그러다 문화센터 강의를 나가 7년 정도 가르치다가 뉴질랜드로 가게 됐죠.”- 좋다고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닌데, 원래 손재주가 좋으셨나요.“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았어요. TV에서 ‘뉴질랜드에서 활동하는 작가 헬레나김, 김혜란’이라고 나오는 걸 본 동창들이 놀라지도 않았데요. 그럴 줄 알았다면서(웃음). 저는 몰랐는데 친구들 눈에 비친 저는 뭔가를 잘 만드는 손재주가 많은 사람 이였더라고요.” ▲ [사진=김현우 기자] ■ 나의 황금기를 누린 곳…뉴질랜드 (New Zealand)김혜란은 에그아트 강사로 7년간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해왔다. 가르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다보니 자연스레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는 친구가 그에게 잠깐 쉬었다 가라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고 정보도 없던 나라, 2001년 뉴질랜드로 아들과 떠나게 된다.그녀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외국인 최초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명성을 자랑하는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은 국가 행사와 같은 공적인 행사를 하는 곳으로 개인전시를 아예 받아주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만은 제외였다. 성당에서 먼저 전시의뢰가 온 것이다. 이제는 뉴질랜드가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김혜란. 그 곳에서 보낸 그녀의 황금기를 들어보자.- 뉴질랜드를 가게 된 계기는.“아주 우연히 친구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는데, 잠깐 있다 가라고 제안했어요. 문화센터에서 강의하면서 제 작품을 만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뉴질랜드로 가게 되었어요.”- 남편분이 말리시진 않았나요.“원래는 잠깐 한 1년 정도 예상하고 간 거라서 남편도 말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1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고, 10년이 넘은 거예요.(웃음)”- 알이 저렴해서 뉴질랜드로 갔다고 들었는데.“그 이야기 정말 속상해요. 예전에 인터뷰를 할 당시 ‘뉴질랜드에 가게 됐는데 거기는 타조알이 너무 싸더라’라고 얘기한 것이 와전되어 ‘타조알이 싸서 뉴질랜드에 갔다’로 바뀌었어요. 알 때문에 갔다는건 말이 안돼죠.”“뉴질랜드 가기 전에 한국에서 에그아트를 했던 초기에는 타조 한 알에 10만원씩 했어요. 농장이 많아진 지금도 한 3만원은 줘야 구매할 수 있지만, 뉴질랜드에는 당시 한 알에 1만원 꼴이었으니, 너무 싸서 우연히 참가한 쇼에서 팔고 있던 타조알을 다 사왔었죠.”“뉴질랜드에 가기 전에는 뉴질랜드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어요. 여행을 좋아해서 외국에 많이 가보았지만, 뉴질랜드나 호주는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이었고, 가게 되었던 가장 큰 계기는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남편없이 잠깐 쉬었다 올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갔어요.”- 뉴질랜드는 에그아트가 유명한가요.“제가 갔을 때는 그 곳도 에그아트가 초창기였어요. 그런데 제가 가면서 완전히 바뀌었죠. 뉴질랜드 에그아트 발전에 큰 역할을 했고, 재능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뉴질랜드 ‘탈랜트비자’도 받았어요.“ “신문에서 에그아트하는 분의 기사를 읽고 무작정 그 분이 근무하던 학교로 찾아갔어요. 가서 ‘저도 한국에서 에그아트를 가르치던 사람인데, 그 분과 국제적인 교류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니 그 곳의 대표가 강의를 수강해야지만 그 분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재차 말했지만 대답이 같아서 포기하고 돌아왔죠. 저는 뉴질랜드에서의 첫 전시를 그 분과 함께 하고 싶었거든요. 하는 수 없이 저 혼자 전시를 개최했고, 현지에서 에그아트 하시는 분들이 많이 왔어요. 그때 제가 만나려던 그 분도 오셨죠. 당시 상황을 얘기했더니 ‘왜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무척 바보같다’며 아쉬워하셨어요. 그 후에 제가 그 학교에서 에그아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탤런트 비자’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에그아트로 비자 받은 사람이 없었나요.“에그아트로는 아예 없었고 공예분야에서도 받은 적이 없어요. 탤런트 비자는 러시아 음악가들이 주로 받을 만큼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비자에요. 뉴질랜드 자체가 원래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까다로운데, 비자를 받게 되면 1년 동안 생활비와 작품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지원해주기 때문에 더 까다로워요. 심사기간만 해도 1년이 넘고 받은 뒤 2년 뒤에는 이 사람이 정말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를 했는지 다시 심사를 받아요. 그 심사를 통과해야 비로소 영주권이 나옵니다.”- ‘탤런트 비자’는 어떤 계기로 신청하신 건가요.“주변에 알게 된 국회의원들과 시의원들에게 추천을 받았어요. 추천을 받아 신청을 했는데 ‘에그아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더 받기가 어려웠어요. 당시에는 뉴질랜드에서도 에그아트가 아주 소규모 단위밖에 없었거든요. 에그아트 하시는 분들이 비자 받을 수 있게끔 많은 응원을 주셨어요.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고 말해주셔서 받을 수 있었죠. 너무 어려워서 될가 싶었는데, 받게되어서 너무 기뻤어요. 마침 며칠차이로 아들도 명문사립고등학교인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5년 장학생으로 선정됐다고 해서 결국 뉴질랜드에 터를 잡은 거죠.”- 뉴질랜드가면서 이런 성공을 예상하셨는지.“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나갈 때 꿈은 있었죠. ‘뉴질랜드에서 전시회를 열어야지, 그럼 미디어에서 나를 취재할 것이고, 그럼 나는 유명해질 것이다’ 이렇게 형제들에게 얘기 했어요. 그랬더니 형제들이 ‘알을 사와서 그 알이 닭이 되어서 오리로 바꾸고, 그 오리로 돼지를 사고, 소를 사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저에게 마치 그 이야기 같다며 꿈이 너무 크다고 다들 웃었어요. 그런데 제가 말한 대로 다 됐잖아요. 다들 대단하다고 하죠.”- ‘뉴질랜드’는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요.“뉴질랜드에 살면서 접했던 아름다운 자연들은 저에게 예술적 감흥과 소양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얻었던 문화적인 영향이 고스란히 작품으로 표현되었고 이런 저의 작품을 보고 현지 예술평론가인 Casandra Fusco(카산드라 푸스코)는 '동서양의 정서가 같이 느껴지는 혼(soul)이 담긴 작품'이라고 평하셨습니다.”“유형과 무형의 아름다운 기회를 제공해준 뉴질랜드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사진=김현우 기자] ■‘코리아 에그아트’ 세계를 제패하다우리나라에서 ‘알공예’라고 많이 불리는 ‘에그아트’는 AD988년경 부활절에 쓰이던 계란에 문양을 그리던 것을 유래로 보고 있다. 현대에 우리가 생각하는 ‘에그아트’는 중세 군주주의가 한창이던 러시아에서 발전했다. 알렉산더 3세가 1884년 황후에게 부활절 알을 선물하기 위해 주문하고 제작한 ‘에그아트’로 인해 에그아트가 유행하게 됐다. 현재 한국공예예술가협회에는 ‘알공예’가 정식 한국공예 분야로 등록되어 있다. 러시아 태생의 ‘알공예’가 어떻게 한국공예가 되었을까.- 알공예가 한국공예로 등록되어 있는 걸 보고 의아했습니다. 해외공예가 아닌 우리전통 공예인가요.“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예를 들어 커다란 부채가 일본에 들어가서는 접힌 부채로 탄생됐고, 우산도 영국의 기다란 장우산이 일본에 들어가니 3단우산으로 접혀서 나왔잖아요. 세계의 문물이 일본화된 거죠. ‘자개’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전 아시아권에서 모두 사용하고, 제가 있던 뉴질랜드에서도 자개를 자신들의 천연보석이라고 주장해요.  에그아트도 그 자체는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한국적인 것을 결합시켜서 전혀 색다른 것을 다시 보여 주면 이것은 단연 한국의 전통공예가 되는 거에요.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알과 관련해서 굉장히 많은 설화를 가지고 있잖아요.”“외국에서 전시를 할 때 ‘이 에그아트가 한국에서 유래가 됐나요?’하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완전히 한국 에그아트가 된거죠. 러시아 에그아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유럽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저의 에그아트를 보고 전혀 러시아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고 다시 귀국한 소감은.“한국에 있었다면 제가 이렇게 까지 스스로 개발하지 못 했을거에요.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활동을 하게된거죠. 솔직히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만큼 인정받고 싶다’ 이런 마음 없어요. 그런 것에는 전혀 욕심없어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게 행복해요.” ▲ [사진=김현우 기자] ■ ‘자개’와 ‘옻칠’하면 ‘김.혜.란’김혜란 작가는 최초로 알에 ‘자개’를 도입하고 옻칠로 색을 입힌 에그아트를 선보였다. 그녀가 선보인 에그아트는 전세계 에그아트 전문인은 물론, 세계의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 자개와 옻칠을 에그아트에 접목하게 된 계기는.“한국전통분야에서 정말 꼭 필요하시고 다방면으로 명석하신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님께서 ‘너무 보석으로만 하지 말고 자개를 하는게 어떻겠나’하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에그아트에 자개가 어울릴까 의아해 했죠. 그래서 시도도 안했는데, 계속 해보라고 하시고 재료도 직접 구해다주시고, 나전칠기 공예를 하시는 분으로 자개하는 방법까지 다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결국 자개를 시작했죠. 저희 세대는 부모님께서 자개농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잖아요. 저는 그 자개가구가 너무 싫었어요. 가구를 가득채운 그 까만것에 너무나도 요란했던 조개껍데기 문양들이 너무 싫었는데 제가 직접 작업을 하다보니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라고 생각했죠. 그러다보니 알에 보석을 붙이는 작업들이 너무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자개는 천연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자체가 보석이에요. 물에 닿으면 영롱하게 빛이 나는데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작업하면서도 주변에 너무 아름답지 않냐고 계속 그랬어요.”“그러다가 이칠용 회장님께서 이번에는 옻칠을 권해주셨어요. 그래서 검정색 옻칠을 시작했죠. 예전에는 아크릴물감으로 채색을 했는데 아크릴물감은 마치 화장을 덕지덕지한 느낌이었는데, 옻칠을 하니까 투명하면서도 깊이 있는 빛이 나는데 아크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요새는 옻칠과 자개를 이용해 작업을 하죠.”- 외국의 반응은 어떤가요.“외국에서는 ‘옻칠’과 ‘자개’하면 헬레나킴을 생각할 정도가 됐어요.”“일본은 옻칠과 자개에 관심도 많고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여기잖아요. 제가 작년에 일본에 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옻칠한 작품을 가져갔어요. 일본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자기네 공예로 보였나봐요. 일본인들은 딱 보면 이게 무슨 칠인지 알거든요.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배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아니라고 한국에서 배웠다고 하면서 우리 전통예술품이라고 했어요.”“이제는 해외에 나가서 한국의 나전칠기 기법을 전수하는 상황이 됐어요. 정말 한국이 에그아트에 종주국이 된거죠. 제가 나전칠기 에그아트에서는 최고거든요.(웃음) 아직 제대로 시도한 사람도 없었고, 똑같은 나전칠기 작품을 만든다 해도 차별화된 작품을 하고 있으니깐요.”- 현재는 옻칠과 자개를 도입한 에그아트가 많이 나오고 있나요.“옻칠까지는 몰라도 지금 자개놓는 사람들은 많아졌어요. 제가 볼 때 한국 사람들 재능이 정말 뛰어나요.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봐도 재능이 굉장히 뛰어나요.”- 에그아트 한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작업기간은.“보통 프로젝트는 시작을 하면 2년 정도 잡아요. 영감을 얻어야 되고, 그 다음 디자인 구성과 스토리를 만든 다음에 본격적인 에그아트 제작에 돌입합니다. 2년이라고 해도 처음에 제가 구상한대로 끝나는 경우는 없어요. 중간에 계속 바뀌죠. 그래서 2010년도에 뉴질랜드 수상에게 기증한 작품도 구상부터 기증까지 거의 5년이 걸렸습니다. ‘마지막…마지막…’하면서 마무리하고 뒷배경을 완벽히 구상을 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남겨두다가 그것까지 채우고 나서 기증하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그런데 작품수는 300점이 넘습니다. 쉴새없이 작업을 하시는 건가요.“숙련되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더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더 많은 작품을 만들수는 있지만 지금은 제가 숙련된 상태기 때문에 2년에 하나, 3년에 하나씩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만들면 1년에 몇 십 작품씩 만들죠. 300작품이라는 건 숙련되지 않았을 때부터 만든 작품수에요. 작업을 하는 중간에도 딱 봤을 때 아니다 싶으면 깨트려요. 얼마 전에도 깨트려서 버렸어요.”-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알이 깨진 적 있나요.“많죠. 알이 둥글잖아요. 말리려고 책상 위에 잠깐 두고 나갔는데, 바람이 살짝 불었는지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에 떨어져 박살나기도 해요. 계란을 깨트리면 안에 피막이 있잖아요. 그 피막을 걷어내면 거의 뼈가 없는거나 마찬가지에요. 에그아트는 그 피막을 걷어내고 작업해요. 특히 타조알 같은 경우에는 피막이 거의 가죽 같은데 그걸 걷어내면 정말 얇아지죠. 그러니 굉장히 약해서 쉽게 깨지죠.”- 작품하다 깨지면 같은 작품을 다시 시작하나요.“다시 시작해요. 처음부터.” ▲ [사진=김현우 기자] ■에그아트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진정한 예술인세계가 인정한 에그아트가 300작이 넘지만 김혜란은 한번도 작품을 판매한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꼭 필요한 곳에 기증을 한다. 영구보존할 곳에 무상기증을 하거나 아니면 의미있는 단체에 기증해 단체가 경매를 통해 판매한 수입금으로 좋은 일에 사용한다. 옥션을 통해 그녀의 작품이 거래되는 가격은 무려 약5천불(약 5백40만원)에서 1만불(약 1천만원) 수준이다. 그녀는 왜 이렇게 고가로 거래되는 작품을 판매하지 않는 것일까.- 처음부터 금전적인 면은 생각하지 않았는지.“없었어요. 정말 좋아서 시작한 것 뿐이에요. 뉴질랜드에서 대형전시를 처음 열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봤는데 그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겠지만, 저는 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때 재능을 좋은 일에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한사람이 소유해서 그 사람만 즐겁게 하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에그아트를 처음할 때 부터 그랬어요. 저는 팔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다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기증하고 가장 보람된 적은 언젠가요.“뉴질랜드에서 어린이들은 위한 자선경매에 기증한 적이 있어요. 대만인 의사부부가 제 작품을 구매했는데 그 분들을 우연히 파티자리에서 다시 만났어요. 이번 지진에 작품 괜찮았냐고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그 작품을 내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이며 대를 물려서 영원히 간직할 거예요. 이 작품은 우리 집안에 가보이며 보물’이라고 얘기해 주셔서 너무너무 기뻤어요.” ▲ [사진=김현우 기자] ▲ [사진=김현우 기자] ■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알에 덮인 화려함…- 알공예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에그’는 작은 캔버스에요. 작은 공간이지만 자신의 일생과 삶과 자신이 꿈꾸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죠. 자신의 꿈을 그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외국사람들과도 인터뷰 하면 ‘에그아트’가 뭐냐고 물어봐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생각하는 ‘에그아트’가 다르기 때문에 대답도 다 다르죠. 저 같은 경우에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을 통해서 세계역사나 그리스 신화, 소설, 오페라 이런 전 세계의 문화를 담고 소개시켜주고 싶어요. 한국의 전통적인 자개를 사용한다고 해서 한국의 전통만이 아니라 세계의 전통으로 만들고 싶어요.”- 작품을 시작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시나요. 작품이 너무 화려해서 대단한 각오로 임하는 것 같아요.“처음부터 작정하고 시작하진 않아요. 작업을 다 하고 난 뒤에 깜짝 놀랄만한 작품이 돼는 거죠. 저는 그냥 컨셉과 테마에 맞는 작업을 아주 조용히 시작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는 도중에 자꾸만 다른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중간에도 계속 변형이 돼죠. 완성작을 보면 저도 놀래요. 제가 어떻게 이 작품을 만들었나 하고(웃음).”- 에그아트를 하면서 안 좋았던 기억이나 후회한 적이 있나요.“없었어요. 제가 돈벌이로 에그아트를 했다면 ‘저 사람이 내 작품을 얼마에 살까’, ‘내 작품을 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이런 생각에 실망할 경우도 생겼겠죠. 제가 좋아서 스스로 했고, 제가 원하는 시간에 작업을 하고, 제가 원하는 곳에 기증을 하니깐 실망할 일도 없고 자유로워요.”“그리고 ‘알’은 축복과 희망을 의미해요. 저는 이걸 통해서 굉장히 많은 축복과 행운을 받았고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을 알게 됐고, 에그아트를 통해 저 자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제가 단지 가정주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발된 거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작업하면서 스트레스는 안받나요.“거의 안받아요. 근데 전시회 직전에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죠.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고 저의 작품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18시간씩 작업에 몰두해요. 그러다 전시회가 딱 끝나면 공황상태에 빠져요. 엄청난 파티가 끝나고 나 혼자 남은, 연극이 끝나고 혼자 객석에 앉아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전시 끝나고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그때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줘야 해요. 혼자 있으면 안돼죠. 그래서 누군가를 만납니다.”- 가장 응원이 돼는 분은 남편인가요.“남편이죠. 남편의 지원이 없었으면 지금에 저는 없었어요. 제가 너무 하고 싶어 하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라고 선뜻 지원해줬어요. 에그아트에 사용하는 재료가 비용이 엄청나요. 아무리 남편이라도 그렇게 지원해주기 힘들죠. 남편과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보다 남편이 더 대단하다고 해요. 남편이 정말 저를 위해서 아파트 한 채 값을 썼어요. 제가 원하는대로 다 사서 썼거든요.” ▲ [사진=김현우 기자] - 에그아트 관련해서 어떤 목표가 있나요.“예전에 전시회를 하거나 작품을 하면서 작품을 보면 ‘아 정말 괜찮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면 미흡한 부분이 많아요. 그것은 제가 해마다 성장해서 달라보이는 거죠. 그 작품들을 리터치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더 완벽한 작품으로 공개를 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2015년은 호주 시드니에있는 윌로비(Willoughby) 도시의 150주년으로 기념작품을 의뢰를 받아 그곳에 전달하기로 했어요. 그곳에서 제 작품을 영구보존하기로 했습니다.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윌로비에 가기로 했어요.”“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양평에 ‘계란교회’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에그아트를 하는 사람으로써 너무 반갑고 기뻐서 직접 연락을 했어요. 마침 교회측에서도 갤러리를 오픈할 예정이었는데 저를 염두해 두고 있었는데 연락할 방법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활절에 계란교회에서 전시를 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갤러리 개관이 늦어지고 있어요. 부활절은 매년 돌아오니깐 기다리고 있습니다.(웃음)”- 에그아트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희망을 전달하고 싶어요. 저를 보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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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12
  • [토킹어바웃] 차우수 한지협회장 “정부 조금만 도와줘도 한지로 세계 석권 가능”
    ▲ [사진=김현우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전통한지는 우리의 자부심과 자긍심 그 자체죠. 끊어지지 않는 질김과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어떤 ‘숙명’같은 거라고 생각해요.”차우수 한지산업기술발전진흥회 회장은 잊혀져가는 우리의 전통인 ‘한지’를 위해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다닌다. 차우수 회장은 대대로 한지를 만들던 장인의 자손도 아니고, 한지 장인에게 ‘한지’를 사사받은 제자도 아니다. ‘한지’와 인연이 없던 그가 어떻게 ‘한지’와 이토록 끈끈한 인연이 된 걸까.차우수 회장은 지난 2004년, 해외 이민을 준비 중인 지인이 이민을 떠나기 전 우리 고유의 ‘무언가’를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 함께 고민하다 ‘한지’로 결정을 내렸다. 제대로 된 ‘한지’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마침내 괴산에 위치한 한지 공방을 찾게 됐다. 손수 전통한지 그대로 만들고 있던 그 공방은 한마디로 ‘초라했다.’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장인들의 초라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차우수 회장과 ‘한지’는 그렇게 눈이 맞았다.■ 우수한 한지의 초라한 현실- 한지발전을 위해 스스로 나서는게 쉬운 일은 아닌데.“‘미친 짓’ 좀 그만하라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한지를 위해 나선 이유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사회에 환원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길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 한거죠.” “내가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일을 하는 겁니다.”- 가족들이 말리시진 않았나요.“많이 말렸죠. 한지에 너무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데 소득은 전혀 없으니….” - 주위에 시선은 어땠나요.“처음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제가 자기 밥그릇 뺏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질시와 질투, 음모, 모함 뭐 이런게 엄청 많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런 것들은 자연스레 정리가 됐습니다.” ▲ [사진=김현우 기자] ■ 한지의 변신은 무죄!서울 잠원동에서 가방 안에 짐을 한보따리 짊어진 차우수 회장을 만났다. ‘한지’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한지를 한보따리 챙겨온 것.자리에 앉자마자 차우수 회장이 가장 먼저 가방에서 꺼낸 것은 두툼한 한지였다. 한지도 이렇게 두툼하게 만들 수 있구나.“한지를 가공하면 다양한 크기의 ‘부직포’도 만들 수 있어요. ‘한지 부직포’가 대중화되면  블라인드가 싹 다 이걸로 대체될 수 있어요. ‘한지 부직포’는 향균실험에서 99.7% 향균력이 나왔을 정도로 세균이 없어요. 또한 에너지가 약 5%에서 30퍼까지 절감이 돼요.”- 한지로 이용해 만들 수 있는게 얼마나 다양한가요.“한지를 부직포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응용이 무궁무진해요. 자동차, 항공필터라든가 우리가 식당에서 쓰는 행주도 한지로 대체할 수 있죠. 냄새도 없고, 세균이 없으니 환경성 면에서 이걸 따라올게 없습니다.”“또한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찧어 돌돌 말면 실을 만들 수 있어요. 이 실로 면을 만들면 ‘천연섬유’가 됩니다. 목화섬유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획기적인 거예요. 이걸 가지고 2차 3차 산업으로 뻗어 나갈 수 있죠. 그 외에도 스피커, 신발, 우산…, 끝이 없네요.”- 한지가 ‘대중적’인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고가품’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구분이 돼야하지만, 고급이 되려면 일단 저변이 돼야죠. 저변이 되기 위해선 일단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해야 되겠죠. 뭐든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봅니다. 다작에서 수작이 나오죠. 수작하나로 어떻게 다 같이 밥 먹고 살겠어요.” ▲ [사진=김현우 기자] ■ 정부조차 한지에 손을 놓다한지의 우수성을 알게 된 차우수 회장은 곧바로 국가기록원에 찾아가 현재 기록용지가 무엇인지 물었다. 국가기록원은 한지가 아닌 수입한 중성지를 쓰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등 한지를 기록용지로 사용해 오랜 시간 보존가치를 스스로 입증했던 한지는 정부에서조차 외면 받고 있던 것이다.“한지의 기본적인 소양은 ‘기록’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록문화의 강국이에요.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 등 열두가지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근간이 바로 ‘한지’입니다.” “전세계 기록 용지시장과 지주문화재 시장의 10퍼센트만 가져와도 엄청난 수입이 생겨요. 그런데 정부에서는 한지에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장 큰 문제죠”- 한지에 기록하면 훼손이 덜 하나요.“우리가 ‘기록’을 한다고 하면 디지털 USB, CD 등에 하는게 일반적인데, 오히려 ‘디지털’은 환경에 굉장히 취약해요. 한번 충격을 가하면 정신을 못 차리고 다 날라가기 일수죠. 하지만 한지는 이미 천년이상 지속된다는 검증이 다 됐어요. 우리의 인쇄술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또 세계적으로 천년이상 가는 기록을 가진 나라가 드물죠.”- 전통한지와 현대한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엄청난 차이가 있죠. 한지가 천년을 가는 비밀이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 땅에서 자란 닥나무’. 그것도 ‘참닥나무’를 쓰는 것입니다. 토양자체가 좋기 때문에 우리 땅에서 자란 닥나무가 좋은 겁니다.” “여기에 닥나무는 가공을 할 때도 비밀이 다 숨겨져 있어요.” “한지는 가공하는 과정에서 중성지를 만듭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들은 대부분 산성을 띄는데 처음 이것을 삶을 때 잿물(가성소다)을 써요. 그렇게 되면 산성이 자연스럽게 중성화가 돼는 과정을 격습니다. 이게 하나의 가공비밀이죠. 그다음은 이 상태에서 더 두드리고 지통(종이를 뜨는 통)에 넣어 막 저어줍니다. 그리고 ‘황촉규’라는 닥풀을 넣어줘요. ‘확촉규’는 얇게 비산(飛散)시켜주는 역할과 동시에 잡아주는 결집역할을 하는 것으로, 쫙 펼쳐지게 해서 종이가 잘 떠지게 하는 거죠. 여기서 또 하나의 비밀은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를 건조시키면 ‘황촉규’ 기능이 싹 없어지면서 중성지가 된다는 겁니다. 알칼리성 종이나 산성종이는 천년을 못가요. 중성지가 천년을 갑니다.” “종이를 접었다 폈다하는 ‘매절도’실험이 있어요. 우리 닥나무로 만든 순수한 우리 한지는 보통 9천회에서 1만2천회는 해야 조금 손상이 오는데 일반적일 한지는 3천회하면 잘라져버려요. 그만큼 강도, 내구성에서 차이가 나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이 중에 한지는 최고일 수밖에 없습니다.”-요새도 한지를 만들면 그런 방식으로 만드나요.“요즘은 그렇게 안 해요. 일단 국내산보단 수입산을 많이 사용하죠. 수입한 한지는 화학약품을 써서 품질이 많이 떨어집니다.” - 한지용 닥나무는 수입품을 많이 쓴다는데, 국내에는 닥나무를 식재하는 곳이 없는지.“있긴 한데 한․두군데 정도에 그쳐요. 나머진 다 수입을 해서 쓰죠. 왜냐면 국내에서 닥나무를 구입하면 kg당 2만원인데, 수입산은 kg당 6~7천원이면 살 수있어요. 어떻게 국내산을 쓸 수 있겠어요. 시장가격이 안 맞는 거죠. 시장가격 폭을 줄이기 위해선 정부의 정책이 절실합니다.” ▲ [사진=김현우 기자] ■ 종이를 관장하던 조지서(造紙署), 지금은?조선시대에 종이를 관장하던 ‘조지서’가 있었다. 조지서의 주 임무는 왕의 말을 속기로 손수 받아적는 사초(史草:공식적 역사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작업이다. 사초를 모으면 날을 잡아 ‘실록’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처음 왕의 말을 받아 적은 사초는 중요국가기록이므로 외부에 나가지 못하도록 소멸하는 작업을 거친다. 노비들이 사초를 물에다 빨아 내용을 모두 지우고 그 종이를 재활용했다고 한다.“우리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종이를 관장하던 이런 틀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져 너무 아쉽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마을단위 공동사업장을 만들어 닥나무를 심고 종이를 만들었어요. 그러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1884년도부터 양지공장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부터 한지는 급격하게 쇠락하게 된거죠. 그리고 마침내 1974년도에 서울에 있던 마지막 한지공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한지는 만드는 곳은 얼마나 되는지.“수치적으로는 스물대여섯 군데라고 하는데 더 많이 줄였을 것으로 예상돼요. 돈이 돼야 말이죠….” - 한지 종류는 다양한지.“한지의 종류는 다양해요. 원래 ‘한지’라는 말은 근대에 들어 쓰게 된 말이에요. 그 전에는 ‘종이’를 벽에 붙이면 벽지. 창호에 붙이면 창호지, 장판에 깔면 장판지, 태지, 협지 등 쓰이는 용도에 따라 약 5백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대에 들어 ‘예전에 쓰던 종이’를 모두 합쳐 그냥 ‘한지’라고 부르고 있죠.”- 요즘 한지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은 어딥니까.“단연 공예 분야죠. 한지공예에 가장 많이 쓰이며, 서예할 때도 많이 씁니다. 이 두 분야가 가장 많은 소비처고, 그 다음에는 국가에서 문화재의 창호지를 바꿀 때 대량으로 사용됩니다.”-한지공예품은 어느 정도의 소득이 나오나요.“한지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층이 다양해요. 학력도 다양하고, 소득의 층도 다양합니다.-학력에 따라 소득이 다르나요.“우리가 보통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을 작가라 부르는데, 한지공예를 하는 분들은 다 작가에요. 한지공예는 전통공예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근대에 나온 공예에요. 오랜 세월 내려온 전통이나 기준이 없으니 누구나 작가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스스로 ‘작가’라 칭하면서 시중가격에 10배, 100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고 있어요. 작가활동을 하고 싶으면 미술공부도 하고 예술쪽 공부도 해서 작가에 맞는 소양을 갖춰야죠.”- 국내에 한지 전통학교나 한지전공이 있는지.“전주대학교에 한지문화산업학부가 있다가 학생이 없어서 3년 전에 폐과가 됐어요. 대학원 두 군데 정도에 한지문화산업학과라고 있긴 한데, 그걸로는 한지의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렵다고 봐야죠.”- 그럼 지금 한지공예를 하는 분들은 장인에게 직접 배우는 건가요.“A선생 밑에서 배운 사람, B선생 밑에서 배운 사람, C선생 밑에서 배운 사람. 이렇게 한지공예도 계보가 있어요. 그런데 연결들이 안 되어 있죠. 서로 인정을 안 해줘요. 이게 참 안타깝습니다. 연합도 만들고, 통합하기 위한 나름에 작업을 하고 있는데, 조금은 더 시간이 지나야 숙성이 될 거 같아요.”- 한지를 하는 사람 중에 젊은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젊은 친구들은 취미로 많이 배워서 제법 있어요. 그런데 취미로만 하다보니 전문적인 직업의식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해요. 한지가 돈이 되지 않으니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는거죠. 정부에서는 한지 분야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끔 전문 직업군으로 육성을 시켜줘야 해요.”- ‘참종이 공예공모전’을 꾸준히 개최하고 있는데 어떤 취지로 시작했나요.“지금 우리나라 공예 관련된 단체들이 공모전을 하면 ‘상 장사’를 해요. 무슨 얘기냐면 ‘장관상 줄테니 얼마를 줘라’ ‘총리상 줄테니 얼마 줘라’ 이런식으로 상을주면서 돈을 받는거죠. 이런 일을 있어선 안되는 일이지만 비일비재합니다.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해요. 단체들이 정부의 지원 없이 운영을 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돈이 필요하니깐요.”“그러나 순수하게 한지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불공평한 공모전이죠. 그래서 순수하게 한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인정 하고, 산업화로 연결해 밥벌이가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시작했어요.” ▲ [사진=김현우 기자] ■ 한지, 5대 기간산업을 대체하다우리나라는 한지만 맡아서 하는 부서가 없다. 문화관광부도 한지를 다루고 지식경제부, 살림청, 교육인적자원부, 농림부에서도 모두 한지를 다루긴 하지만 각 부처별 일반화된 정책을 피고 있지 않아 한지분야는 더 어렵기만 하다.“국가에서 기록문화에 대한 인프라 구축만 해줘도 한지 분야는 엄청나게 발전할 수 있어요.”“우리나라를 먹여살린 5대 기간산업이 있어요. 조선·철강·자동차·전자·화학. 이 기간산업을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줬지만, 환경을 파괴하죠. 그래서 결국엔 사람들에게도 폐해를 남깁니다. 이 5대산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지에요.”- 한지산업기술발전진흥회에 대한 국가 지원은 어느 정도인가요.“협회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국가에서는 닥나무 식재부터 한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소득을 낼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구축해야돼요. 또한 사라져가는 국가 문화로서 국가가 정책을 펴줘야 합니다. 이것은 한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전통문화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겁니다.”- 구체적인 지원방향을 얘기한다면.“일단은 한지산업에 대한 인프라 구축이 가장 중요해요. 해외로 나가서 한지 10만장 주문을 받는다고 해도 당장 만들어낼 곳이 마땅치 않아요. 그러니 기본 인프라가 갖춰져야 저변도 되고, 2차 가공 산업도 발전시킬 수 있는거죠.”“또한 ‘전통문화’는 말 그대로 우리 것이기 때문에 모든 원료는 우리 농민이 생산을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구매자는 항상 저렴한 것을 원하기에 국내산을 구매하지 않죠. 그러니 이 차익을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풀어줘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정부의 힘만으론 부족해요. 요즘 ‘사회적 기업’을 내세우는 대기업들도 앞장서서 도와줘야 합니다.”- 요즘 대기업들도 ‘사회적 기업’, ‘문화경영’ 등을 내걸고 있지만 전통문화와 함께하는 기업은 드물지 않나요.“얼마 전 괴산군에서 닥나무 산업화에 대한 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 SK그룹과 행복나눔재단이 참여했어요. SK그룹이 ‘닥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기 시작한거죠. 기업에서 전통문화산업을 한다고 하면 시끄러워집니다. 한 분야, 혹은 한 사람(장인)을 지원하려 하면 다른 쪽에서 난리가 나는데 이것이 굉장히 심해요. 그런 부분에서 SK그룹이 ‘닥나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또한 기술개발사인 ‘나노에프엔씨’도 함께해 지원과 개발이 함께 이뤄지는 거죠.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통한지가 살아나게 돼있어요.”- SK그룹은 어떻게 함께 하게 되었나요.“SK그룹 초창기에 故최종현 회장이 우리나라 산림과 임업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계셔서 전국에 약 1200만평에 나무를 심었어요. 보통 나무는 40~50년이 되면 수종이 다해 베고 다른 나무를 심어줘야 하는데, 그때 SK에서 심은 나무의 수종이 다 된거죠. 그래서 이명박 정부 출범당시 ‘녹색성장’이 정책으로 나와 SK도 그에 맞게 그 나무로 가공산업을 하려다 정부정책이 뜨뜻미지근하게 되면서 ‘닥나무’를 심는데 관심을 가지게 된거죠.”“SK입장에서도 처음엔 돈도 안되는 닥나무를 왜 심냐고 했지만, 나노에프엔씨와 협약을 통해 닥나무를 구매도 약속되었으니 어느 정도 수입을 보장받았고, 식재하는 과정에서 저소득층, 다문화가정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사회적 기업’으로도 나갈 수 있는 길이된 것이다.” ▲ [사진=김현우 기자] ■ 이제는 끊을 수 없는 인연한지에 가슴 아픈 현실에 남은 인생을 한지와 동행하기로 다짐한지도 언 10년이 다되어 간다. 차우수 회장은 여전히 ‘한지’를 위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한지’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에게서 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우수한 한지는 국민에게, 정부에게 온전히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 한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허구한 날 했죠. 그렇지만 나마저도 한지를 놓으면 누가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요. 나같이 이렇게 욕을 먹어가며, 여기저기 쫒아 다닐 사람이 아직 없거든요. 나는 욕먹는데 이골이 나서 괜찮아요(웃음).” -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한지 발전을 이끌어나갈 계획인가요.“한지를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해요. 한지에 대한 정리가 조금 더 되면 해외로 나갈거에요. 한지로 친환경섬유 만들어 나가서 밀라노·뉴욕·파리 등 패션 요충지에 가서 우리한지로 우리 디자이너가 만든 옷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신가요.“늘 하는 얘기긴 하지만 한지는 민족적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소재에요. 이 소재를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한․두사람이 나서서 될 일이 아니지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정부에서 한지산업육성정책만 피면 전세계 섬유시장, 음향시장(한지스피커로) 등을 우리가 석권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한지에 정부와 기업, 국민 모두 다함께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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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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