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에선(382)] 21세기 맞나? 이해하기 힘든 일본의 아나로그 문화, 도장과 팩스 업무방식 고수

김효진 기자 입력 : 2020.08.21 09:32 ㅣ 수정 : 2020.08.21 09:32

재택근무 와중에도 도장 찍으러 출근하는 일본 도장문화의 숨겨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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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도쿄=김효진 통신원] 전 세계 기업들이 빠르고 효율적인 업무처리를 위해 앞다퉈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종이문서와 도장날인을 고집하던 일본사회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금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앞서 월스트리트 저널은 올해 5월에 ‘코로나로 바뀌는 일본기업, 도장을 포기하는 움직임도’라는 기사를 통해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전통에 묶여있는 하이테크 국가일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일본의 사무실은 2020년 초까지도 팩스나 대면회의, 종이계약서 날인이 표준이었다’고 소개했다.

 

 

해당 기사에서는 일본의 대표기업 중 하나인 파나소닉(Panasonic)이 코로나로 인해 매년 호치키스를 찍어 배부하던 결산자료를 없애고 설립 이래 처음으로 결산보고회를 화상으로 진행했다는 소식을 비꼬듯 전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지금이 21세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본 기업들의 업무처리 방식은 도장과 팩스 등을 포함하는 아날로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보경제사회 추진기구(JIPDEC)가 올해 3월에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재택근무를 위해 사내 시스템이나 규정을 정비한 기업은 전체의 30%를 밑돌았다. 계약방식을 조금이라도 디지털화한 기업은 40%를 조금 넘기는 수준으로 바꿔 말하면 일본 기업 3곳 중 2곳은 디지털과는 전혀 무관한 업무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코로나로 불가피하게 재택근무를 하는 와중에도 주 1회 이상은 결재도장 찍으러 사무실에 출근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현실에 정부 관계자들도 이를 의식한 듯 올해 6월 19일에는 내각부, 법무성, 경제산업성이 함께 ‘날인을 하지 않아도 계약의 효력에 영향은 없다’는 정식 견해를 발표했다. 물론 이는 그저 견해일 뿐 현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사실 일본 직장인들도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본에는 전일본 인장업협회(全日本印章業協会)라는 조용하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단체가 있다.

 

1997년에 자민당의 행정개혁 추진본부가 각종 서류양식 및 신청을 디지털로 전환하려고 하였을 때 바로 이 단체가 중심이 되어 맹렬한 반대운동을 일으켰고 약 3만 5000명의 반대서명을 제출하며 계획을 무산시킨 전례가 있다.

 

일반적으로 몇 만은 물론 몇 십만 명의 반대서명을 모아도 정부사업을 뒤집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감추고 있는 권력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전일본 인장업협회는 당시 자민당의 계획을 무산시킨 직후에 전국 인장업 연락협의회(全国印章業連絡協議会)를 발족하는 한편 국회의원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인장제도 및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을 만들어 대놓고 일본사회의 디지털화를 가로막았다.

 

행정의 디지털화를 추진해야 하는 타케모토 나오카즈(竹本 直一) IT 정책장관이 최근까지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 와중에 지난 달 정부의 경재재정 자문회의는 앞으로의 경재재정 운영을 위한 기본방침을 정리하면서 행정의 디지털화를 중점사항으로 다시 포함하였다. 이를 통해 1년 사이에 대면, 종이, 도장을 폐지하겠다는 계획인데 시작은 올해 4월 아베 총리가 동 자문회의에서 디지털화를 위해 법 제도와 관습의 재검토를 관계 각료들에게 지시한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01년에도 e-japan전략을 통해 업무처리의 디지털화를 꾀했지만 실패한 전력이 있다. 당시 계획은 2003년까지 전자정보를 종이정보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행정을 실현시켜 5년 내에 세계 최첨단 IT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내용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예산만 낭비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2013년에도 정부의 행정시스템을 통합하기 위해 ‘내각 정보통신 정책관리기구’를 설치하면서 디지털 정부를 표방하였지만 해당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몇몇 특정기업들에게만 유리한 경쟁입찰을 진행하여 민관유착 의혹만 일으키고 역시나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처럼 정부마저도 일개 협회에 좌지우지 당하면서 자신들의 업무조차 개혁하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일본기업들의 종이문서와 도장날인 고집은 사실 자의적 선택이 아닌 강제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코로나 사태가 재택근무의 보편화를 넘어 일본의 뿌리 깊은 도장문화까지 바꿀 수 있을지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