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저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리라!
윤재은 대기자 | 기사작성 : 2016-06-27 23:02   (기사수정: 2016-06-27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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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기자]

‘저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리라!’ - ‘우리가 죽인 것은 파란 하늘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죽였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그대는 땅만 보고 걷는 대지의 인간인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도시의 이방인! 초(秒)를 다투는 자본의 쳇바퀴 속에서 기계화 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단 한번만이라도 저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리라! 수없이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기계의 톱니바퀴 속으로 또 끌려가 버리고 만다.

도시화 된 세계는 ‘해의 시간(Sun’s Time)’을 ‘기계의 시간(Machine’s Time)’으로 바꾸어놓았다. 해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으로 신이 우리에게 허용한 노동의 시간이다. 아침을 맞이하여 생산에 참여하고, 저녁을 맞이하여 휴식을 얻으라는 신의 명령이며, 계시인 것이다.

하지만 기계의 시간은 그러한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의 시간 속에서 인간은 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땀 흘리고, 또, 땀 흘려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기계의 시간 속에서 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기계소리에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기계적 인간은 해의 인간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인정을 받으려고, 하늘을 한 번도 여유롭게 바라볼 시간적 여유가 없다. 기계적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은 해의 시간 속에 사는 인간보다 자본을 더 많이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힘이며, 생산이다. 하지만 자본의 풍요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본의 무게를 중용(中庸)의 무게로 바꾸어 놓지 않는 한, 자본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황금열쇠가 될 수 없다.

해의 시간은 자본의 욕망보다 인간의 삶에 무게를 둔다. 삶의 가치를 생산의 가치보다 존재의 가치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해의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땅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생산의 즐거움 속에서도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이 우리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은 우리들의 꿈이며, 희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도시화의 세계 속에서 회색으로 앞을 가려버린 하늘을 보면 우리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의 상징이었던 파란 하늘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앞을 알 수 없는 회색 하늘만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가? 회색의 도시에서 갈길 잃은 우리는 언제쯤 파란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비가 내리기를 기도할 뿐이다. 비가 내리면 잠시나마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인간이 망쳐버린 환경을 신의 눈물로 씻어낼 때 우리는 잠시나마 파란하늘을 볼 수 있다. 이 순간만이라도 신으로부터 주어진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린 시절 하얀 도화지위에 파랑색 크레파스로 마음껏 하늘을 색칠하곤 했던 것이 꿈만 같다. 그 꿈은 이제 꿈이 아니고 현실이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하늘의 색을 잊어버렸다. 하늘의 색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늘을 버렸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을 죽였다. 우리가 죽인 것은 파란 하늘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죽였다.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희망을 죽여 버렸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위에 회색으로 물들인 하늘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처럼 회색을 하늘색으로 알고 자랄 것이다. 얼마나 슬프고, 암울한 현실인가? 욕망을 쫒으려다 희망을 놓쳐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신의 의지로 태어난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축복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자연은 보여주고 있다. 기계의 시간 속에서 삶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한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자연은 보여주고 있다.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택할 것인가? 혹독하고, 어두운 그늘에서 물질적 욕망을 쫓을 것인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산업화를 거부하고, 오염물질의 생산을 거부하는 친환경적 국가들의 정책을 보라! 그들은 물질적 욕망에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생산성의 촉진과 도시화보다 생산의 질을 생각한다. 많은 물질이 생산된다 해도 환경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파란 하늘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물질과 자본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종과 배려의 마음이다.

각 나라마다 환경의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물리적 안전뿐 아니라, 환경적 안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은 요구하고 있다!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파란 하늘을 되돌려 달라고. 그것은 최소한의 국민적 요구이며, 명령이다. 생존을 위한 명령이다.

통치자와 행정부는 이러한 국민의 요구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은 끊임없는 발전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호하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일해야 하고,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생산마저도 지속가능한 생산이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는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에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환경을 살리고,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라도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져야한다. 하늘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기계의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이다. 자신의 삶이 기계의 그림자가 되어 끊임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에 멈추게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무지의 인간이다.

물질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중함을 의식하고 절대정신으로의 기차를 갈아탈 수 있는 희망은 헤겔(Hegel)의 절대 정신뿐이다. 우리의 의식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 눈앞에 놓인 회색의 도시를 푸른 하늘의 세계로 되돌리는 것은 변증법을 통해 예측해야 한다.

헤겔은 말한다. 우리의 역사란 우리의 의식을 통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는 것을, 헤겔의 절대정신 속에서 삶을 위한 생산을 말하고, 과도한 생산을 통한 환경의 파괴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합을 통해 지속가능한 생산성만이 인간의 행복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친환경 정책으로 새롭게 다가올 대한민국을 기대해 본다. 나는 파란 하늘을 보고 싶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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