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피히테: 원칙(原則)’은 존재가 아니고 행동하는 양심에 달려있다
윤재은 대기자 | 기사작성 : 2016-02-17 16:04   (기사수정: 2016-02-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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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피히테: 원칙(原則)’은 존재가 아니고 행동하는 양심에 달려있다 :
행동의 양심에 있어, 원칙은 하늘에 두고, 행동은 대중을 향해야 한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의 의식은 행동의 원천이다.’ 행동은 의식으로부터 시작되어 결과로 나온다. 행동하는 의식이란 정의로운 의식이며, 순수한 의식이다. 행동하는 의식이 물질의 세계와 맞물리면 사심이 되고, 대의와 맞물리면 정의가 된다. 행동의 양심에 있어, 원칙은 하늘에 두고, 행동은 대중을 향해야 한다. 순수한 의식은 대중과 결합하면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을 기능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세계의 뒤처진 사고에서 나온다.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는 이러한 뒤처진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선 행위 자체의 자아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행동하지 않는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를 앞선다. 세계에 홀로선 우리의 자아는 행동하는 자아를 통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자아는 홀로 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하는 자아여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함 속에 얼굴을 숨기는 것과 같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행동하기를 겁내지만, 행동하는 자는 말에 앞서 그것을 실행한다. 하지만 행동에는 정의의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은 자신만의 규칙이어야 한다.

그 규칙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정의로 와야 한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정의롭지 않으면, 행동은 멈춰야 한다. 한번 날아간 화살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동은 확신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 확신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확신이어야 한다.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의 자아는 우리 바깥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행(事行)’ 속에 존립한다. 사행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지만 모든 사실에 앞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 활동’이다. 우리가 믿는 어떤 사실도 궁극에 가면 의심을 낳는 것은 사실에 대한 정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경험과 의식을 통해 얻은 관념은 시장의 우상에서는 확실성을 갖는 것 같지만, 시장으로부터 벗어나면 많은 의구심을 낳는다. 그러한 의구심은 본질을 희석하며, 혼돈을 가져오고, 결국엔 대중과 자신의 파멸을 가져온다.

존재하는 자아는 욕망적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자아 속에서 발생한다. 그 자아는 그 자신 속에 순수하게 내재되어 있는 자아여야 한다. 존재의 문제에 있어 행동하는 자아는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에 대한 근본 문제에서 행동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보다 근본적일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자신을 속이고 세계를 속이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칸트의 혁명과도 같은 선험적 이성의 자유우위 사상을 하나의 혁명으로 보고 그 사상을 학문의 제1원칙으로 세웠다. 그는 행위의 자기의식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서, 자기의식 그 자체가 확실히 선행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도 기억시킨다.

피히테의 자기의식 중 비아(非我)의 정립은 자아(自我)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아의 정립은 자아와 비아의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의식에 있어 주관과 객관은 자아와 비아의 관계처럼 명확하다. 서로 다른 의견은 주관과 객관으로 대립되며, 이러한 의견은 자기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다.

하나의 원칙에 있어 주관과 객관은 상대방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하나의 의견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관이 되기도 하고, 객관이 되기도 한다. 의식의 행동에 있어 실천적 의식이나 이론적 의식이나 두개의 관련성은 기본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

피히테의 자아와 비아의 관계는 나와 다른 것의 관계를 통해 나의 자아를 구하는 것이다. 자아의 첫 번째 행위를 행동이라 부르고, 두 번째 행위를 인식이라고 부른다. 행동은 실천적 이성이며, 인식은 이론적 이성이다.

피히테의 자아는 비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원칙은 대중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정립한다. 절대적 자아는 자아와 비아를 통해 구성된 이론적 자아와 자아의 편에서 비아를 규정하는 실천적 자아로 구분된다.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는 비아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자아를 정립한다. 이렇게 정립된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원칙과 양심에 따라 실천하는 자아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내가 아닌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만 내가 아닌 타자가 보이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내가 우선이고, 내가 주인이며, 내가 모든 것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과 결론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요란한 지식은 부족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처럼, 원칙 없는 행동은 무지함에서 나온다.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된 후 가능하다. 자신의 무지함을 모르는 인간에겐 반성보다는 우매한 욕망이 앞선다.

피히테의 말처럼 실천적 자아의 활동성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노력은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한 극복을 말한다. 이러한 극복은 용기 있는 절제와 같아서 원칙이 우선되어야 한다. 원칙 없는 대화와 타협은 사소한 이익에 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 있는 소신은 불의에 타협하거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확신에 찬 소신이 흔들린다면, 그 소신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원칙과 소신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은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하나의 세계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색채와 같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색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빛의 세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빛은 모든 색을 하나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 있어 원칙, 소신, 노력은 실천적 자아의 완성체이다. 세계의 악은 선이 있는 곳에서만 있을 수 있고, 강력한 저항은 평화가 있으므로 돌출되는 것이며, 원칙에 대한 반대는 원칙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원칙과 행동하는 양심의 본질은 자기 자신 속에 있으며, 그것은 자기반성을 통해 완성체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원칙의 완성은 진행형의 속성이 아니고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자기반성을 통한 실천자는 원칙과 소신에 있어 무한한 가능태를 열어놓아야 한다. 어떠한 목표에 대한 절대적 실재성이 아니고, 정립된 실재성만이 그 목표를 확신 있게 밀어붙일 수 있다. 원칙의 실천자는 대상의 실체에 속지 말고 자신이 원칙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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