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윤재은 대기자 | 기사작성 : 2014-11-17 08:25   (기사수정: 2014-11-1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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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기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변치 않는 ‘진리(眞理)’는 주장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을 인지(認知)하는 것과 같다. 진리(眞理)란? 진리가 존재하는 사실 속에 있을 뿐, 인간의 생각이나 관념(觀念)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현상이 우리들의 관념을 교차하지만, 진리의 범주에 접근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겪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은 시간적 유희(遊戱)이며, 상상(想像)일 뿐 진리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학문(學問)을 한다는 것은 거짓 없는 삶을 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하지만 학문의 범주가 스스로의 지식과 관념에 의존하여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자만(自慢)이 갖는 ‘오만(傲慢)과 편견’이다. 진리(眞理)란? 지식의 많고 적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변치 않는 사실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갈대로서 시간의 유한함 속에 한 평생을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은 변치 않는 진리에 한걸음 다가서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논리를 통해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 일 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변치 않는 진리는 주장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계몽적 이성은 인간으로서 변치 않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 증명 중 하나였다. 인간은 수많은 방법으로 진리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주장일 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에서 하나의 사건에 대해 종합하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관념을 형성할 뿐, 형성된 관념이 진실이며, 정의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실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난무한 수많은 주장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고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그 것은, 말하는 자, 주장하는 자의 관념을 통해 나오는 판단일 뿐 진리의 범주에 미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지식이 갖는 모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이란 태어나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事件)들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시간의 터널을 통해 수많은 형태로 왜곡, 변형되어진다. 이처럼 원형이 왜곡되어진 진실은 자신들만의 방식과 절차를 통해 사실적 실체를 외면하고 가상적 실체에 현혹되어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인간이 갖는 지식(知識)의 유한성에서 보면, 지식이란 매우 한정적이며, 단편적이다. 유한한 삶의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이 얻고 배우는 것은 그가 경험하고 상상하는 관념의 한계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만한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만해버린다. 그들은 스스로의 지식에 취해 자신의 관념 속에 갇혀 버린다. 그것은 관념의 울타리이며, 한계의 울타리이다. 그러한 관념은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을 암흑 속으로 던져버리는 오류(誤謬)를 범한다.

계몽주의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오만과 편견으로 얼룩져 있는 지식의 한계를 던져버리고 싶었다. 스스로 오만과 편견의 경계를 넘어 순수의 세상으로 자신을 던져버렸다. 그가 던져버린 ‘지식(知識)의 굴레’는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실체가 없는 안개는 현상일 뿐 진리에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지식은 인간이 갖는 경험에 불과할 뿐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진리의 범주에 한걸음 들어 갈수 있다는 것은 신의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직관의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신의 세계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는 관념의 눈, 욕망의 눈을 통해 보여 지는 것이 아니고, ‘직관(直觀)과 심상(心想)’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바라볼 때 보여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시간, 삶의 공간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진리의 대상이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인간, 존재하는 인간’을 통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진리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의(懷疑)하는 시간의 존재만이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이며, 실재라고 보았고, 이러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버리면서 스스로 찾고자 하는 존재의 실체를 찾았다, 그리고, 그 실체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았다. 그가 찾은 자아는 자유(自由)이며, 진리(眞理)였다.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하루를 시계바늘처럼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신 앞에서 유한하며,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번 살다가는 인생(人生)이라면,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과거의 시간 속에서 더듬어보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숨죽이는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비움의 철학(哲學)’은 순수한 진리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지식으로 얻어진 모든 것에 대한 회의(懷疑)는 스스로를 비우려는 몸부림이었으며, 성찰(省察)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회의는 자만(自滿)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에게 지식의 한계와 오만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으로 태어나 삶의 불꽃을 불태우는 모닥불처럼, 진리의 시계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진리(眞理)의 등불’을 밝혀주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의 등불은 하나의 주장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무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사실에 대해 진실(眞實)과 정의(正義)로 대답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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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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