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가을(秋)의 길목에서 ‘스콜라철학’을 바라보다
윤재은 대기자 | 기사작성 : 2014-10-23 19:22   (기사수정: 2014-10-2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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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기자

가을(秋)의 길목에서 ‘스콜라철학’을 바라보다 :
‘떨어지는 낙엽(落葉)은 실재적 이성(理性)이고, 초월적 이성은 낙엽 그 자체(自體)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낙엽(落葉)은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자연(自然)의 얼굴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피어난 새순은 푸른 새싹을 통해 봄의 생생함을 담아내지만, 시간(時間) 안에서 새싹은 푸른 나뭇잎으로 변하고, 붉은 단풍잎으로 물들어 생명을 다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人間)이 세상에 나와 자연(自然)의 하나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청춘의 시간도 시간 앞에선 어느덧 중년이 되어있고, 중년의 시간도 찰나(刹那)의 시간에 노년이 되어가는 것과 같다. 삶이란? 청춘(靑春), 중년(中年), 노년(老年)이 합쳐서 만들어 내는 하나의 인생(人生)이며, ‘나뭇잎’인 것이다.

나뭇잎의 변화와 같은 인생(人生)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가버린다. 언제나 청춘일 것만 같은 젊음도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한 시간에 도달할 때쯤이면, 인생의 황혼(黃昏)기가 되어버린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도 지나가는 시간 앞에선 어느덧 노년이 되어 삶의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와 같이 삶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가을의 문턱’에서 붉게 물든 낙엽을 바라보면 아름다움에 취해 자연의 경이(驚異)에 감탄하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싸늘한 가을바람에 떨어져 내릴 낙엽을 생각하면 고독(孤獨)이 가슴을 쳐 내린다. 가을바람은 붉게 물든 산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붉은 단풍잎들을 날려 보낸다. 바람에 날려버린 단풍잎들은 가을의 흔적(痕迹)을 알리는 메아리처럼 우리의 가슴으로 밀려 들어와 삶에 지친 육신의 영혼을 위로한다.

하나의 나뭇잎이 색의 변화를 통해 레테(그리스어: Λήθη, 영어: Lethe)의 강을 건너갈 것 같은 역사적 순간을 표현할 때, 나는 가슴 속에 ‘하나의 추억(追憶)’이란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다. 인간이 인생(人生)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잡고, 놓고 싶어 하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 앞에선 모든 것이 허무(虛無)할 뿐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변화는 ‘가슴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 어떤 물질보다 더 소중한 추억(追憶)을 간직할 수 있다.

신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가을 낙엽은 덧없는 인간의 마음을 담아내는 예술(藝術)이며, 음악(音樂)이고, 시(詩)인 것이다. 시인(詩人)은 시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대화하고, 예술가는 그림을 통해 대화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가을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 앞에서 모두가 예술가(藝術家)이고 시인(詩人)인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 이후 인간의 지위(地位)와 행복이 자본(資本)의 테두리 안에서 평가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은 이러한 차별을 강요하지도, 평가하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모든 생명의 순환고리에서 평등하고 숭고하다. 하나의 대상이 실체이고, 하나의 실체가 존재(存在)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평가(評價)는 많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는 ‘의지(意志)’에 있는 것이다. 한그루의 나무가 수많은 나뭇잎을 피워내면서도, 그 나무의 가치를 각각의 나뭇잎에 주고, 그렇게 피어난 나뭇잎은 스스로의 ‘자유의지’ 속에서 시간의 흔적(痕迹)으로 그 가치를 남기려한다.

단순한 나뭇잎 하나에도 삶의 의지와 가치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삶의 가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말할 가치도 없이 명백하다. 세상 속에 홀로 고독한 존재의 자아(自我)를 찾아 내면의 심장박동 속에서 몸 전체로 뻗어나가는 피의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인생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어제의 낙엽(落葉)은 사라져 버려서 없고, 오늘의 낙엽 또한 떨어져 버린 것처럼, 어제의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잠들어 버린 과거(過去)이며, 현재를 숨 쉬는 나의 정신과 육체만이 나의 전부이며, 모든 것이다. 인생의 고독(孤獨)은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것에서 찾아오며, 그 고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에서 극복(克服)될 수 있다.

삶의 고독, 외로움, 허무함도 가을낙엽처럼 스스로 피워내는 생(生)의 몸부림이며, 기지개인 것이다. 신은 인간이 기지개를 펴도록 오늘도 우리에게 가을 낙엽을 전해주고 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이러한 성인들의 역사적 기지개였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중세 천년의 역사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알리는 메시지이며, 이는 청명한 가을하늘에 빛나는 낙엽들이었다.

중세시대의 스콜라 철학은 그들의 목표를 ‘획득 가능한 진리전체’에 신앙의 가르침을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우리의 삶 속에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펼쳐 주신 신의 근원을 신앙과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 증명에 다가서려는 것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목표인 ‘획득 가능한 진리전체’에 대한 신앙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표명한 사람은 보이티우스(라틴어: 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480년~524년)와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僞- )였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에 결합하라고 요구하며, 이를 실천하려 하였다. 보이티우스는 인간의 자연적 이성 능력에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 이성(理性)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합리주의적 신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위 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否定神學, apophatic theology)은 신 자신이 계시하지 않는 다면 어떤 이름도 신에게 줄 수 없다. 만약 이름이 주어진다면 그 이름마저도 인간의 유한한 오성(悟性)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을 통해 신의 본성에 이르거나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이론가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모든 긍정적 진술은 부정이라는 교정수단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인간은 신을 실재(實在) 또는 존재(存在)라고 부를 수도 없다. 신을 존재를 논하는 명제 또한 어떠한 대상을 통해 그 실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스스로 창조한 대상과 비교될 수 없는 초월성(超越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 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은 초기 스콜라 철학의 안셀무스(Anselmus)는 인간 이성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함으로써 합리주의적 사고를 취하였다. 그가 말한 ‘이해 받기를 원하는 신앙(信仰)’이나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그의 말은 계시(啓示)의 신비가 모든 추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스콜라철학에서 이성과 신앙의 결합은 피조물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과 초월적 이성 사이에서 논쟁의 요소일 수밖에 없는 결합이었다.

스콜라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대담하게 도입한 신학자는 13세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였다. 그는 직접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을 통해 경험만이 확실성을 보장해준다고 보았다. 그의 새로운 방법론적 원리는 이성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는 이성이 형식상으로 올바르게 사고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실재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보았다.

스콜라철학에 있어 다양한 주장과 방식들을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통합하려는 사람은 알레르투스(Albertus Magnus)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였다. 그는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서(聖書)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인간의 신체와 인식능력을 포함하여 자연적 실재 전체를 긍정하며,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이끌어 내려한 사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는 신학자가 자연의 대상을 탐구하여 얻은 것은 미리 규정되어질 수 없지만, 신앙은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전제로 한다. 창조에 대한 오해는 사람들을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부정할 수도 있게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신이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대상의 본질도 알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도 신앙과 이성이 결합을 완성체로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14세기 스콜라 철학은 신앙과 이성의 결합이 부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오성(悟性)은 필연성의 관념(觀念)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Jean Duns Scot)는 ‘자유(自由)’라는 것을 신과 관련시켰다. 그는 창조(創造), 전능(全能), 은총(恩寵) 같은 작업은 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이성이 요구하는 필연적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의 이성과 초월적 이성의 신성을 동등관계로 묶으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잘못된 시도였다고 보았다.

스콜라 철학자 오캄(William of Ockham)은 긍적신학을 통해 개별 사실들만이 실재적이고 단순한 사실은 계산하거나 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초월적 신앙과 인간의 이성은 완전히 다르고 두 요소의 결합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중세의 시작인 교부철학(敎父哲學)에서 이어지는 스콜라철학까지 천년(千年)의 노력은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이루지 못하고 중세(中世)를 끝마치게 되었다.

자연은 아름다워서 좋고 삶 또한 아름다워서 좋다. 인간의 삶은 붉은 단풍처럼 떨어져 사라져버릴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따스한 흔적을 남겨서 좋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신에게서 주어지며, 자연은 실체해야만 한다. 자연의 실재가 실체하지 않는다면 신을 향한 수많은 울부짖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에 대한 증명과 믿음을 실천하려는 스콜라철학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초월적 신성과 이성을 하나의 열쇠로 풀어 헤치려는 것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며, 세상에 던져진 인간으로서 순수한 신의 의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인간 본성의 삶을 살아가라는 메시지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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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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