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시간이 ‘멈춘’ 다는 것은…

윤재은 대기자 입력 : 2014.10.09 15:11 |   수정 : 2014.10.0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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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기자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
삶의 시간(時間)이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에게 있어 ‘삶에 가치(價値)’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가치(價値)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이나 쓸모를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며, 시간(時間)을 쓰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생(生)과 사(死)의 차이이다.

삶의 시간(時間)은 낮과 밤, 빛과 어둠, 아침과 저녁으로 나뉠 수 있다. 인간은 생활 편의상 시간을 숫자로 기록하고 그것에 따른다. 하루를 24시간으로 구분하는 우리들의 약속(約束)은 인간의 삶이 24시간이라는 숫자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오늘’이라고 말한다. 삶의 시간 중 오늘은 내가 신(God)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선물이다. 하루, 24시간,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시간의 가치를 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 할 수도 있고 불행 할 수도 있다.

행복(幸福)과 불행(不幸)도 시간 속에서는 동일한 하나이다.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의 시간과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의 순간들도 시간 속에선 하나의 현상(現象)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도 시간 속에서는 동일한 하나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은 삶의 시간이 멈출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형성된다.

삶과 죽음이란 문지방(Threshold) 하나를 건너는 것과 같은 찰나(刹那)인데도 인간은 삶의 가치를 모르고 죽음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에게 있어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삶의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시간에 제한을 받는다. 삶의 시작도 시간에서 시작되고, 그 끝도 시간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시간(時間)이 멈춘다는 것’은 나와 시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지만 본질적 시간은 공간(空間)과 함께 영원하다. 영원성을 가진 시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성(神聖)에 의해 유지되지만, 인간에게 있어 시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가져오는 유한한 것이다.

삶의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살아있으면서도 삶의 가치를 모르고 매일 기계처럼 살아간다면, 그러한 사람은 삶의 시간이 멈춘 것과 같다. 인간에게 있어 삶이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幸福)은 인간이 생(生)을 살아가는 가장 본질적인 욕구(欲求)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을 살아가면서 행복의 추구를 물질에 비례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물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 삶 자체일 수는 없다.

많은 물질을 가지면서도 그 물질에 치여 생(生)을 마감하거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삶의 가치를 인간의 본질에 두지 않고 물질에 두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은 삶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물질만으로 삶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영혼(靈魂) 없는 육체(肉體)’를 통해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물질이란 인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정도로 인식하여야만 한다.

세상에 하나의 생명체로 던져진 인간(人間)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 에게 던져야 될 자의적(恣意的)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本質)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게 해준다. 본질적 질문이 없는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 잠들어 버린 세계이며 암흑의 시대에 속한다. 암흑의 시대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빛의 사라짐처럼 삶의 의미도 사라져버리게 한다.

빛의 세계와 암흑(暗黑)의 세계는 삶과 죽음의 관계처럼 대칭적이다. 빛의 세계는 암흑의 세계 때문에 존재하게 되고, 암흑의 세계는 빛의 세계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존재란 존재되어지는 대상과 그것에 관계되어지는 것의 상관성에 의해 나타난다.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신뿐이며, 신은 이러한 세계를 초월한다.

인류가 문명에 의해 진화하면서 신에 대한 정의도 매우 명확해졌다. 신화를 통해 등장하던 수  많은 신들은 상상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현시되었다. 이처럼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믿음의 가치는 초기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한층 인간의 세계와 가까워졌다.

초기 교부 철학자들은 기독교가 좀 더 발전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 이론과 교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교리의 시작은 철학에서 빌려오게 된다. 그중에서도 플라톤(Platon)의 철학은 교부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교부란 기독교의 초기 이론을 정립한 사람들로서 미신과 이단적인 주장을 반대하며 기독교를 종교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초기 성직자들이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자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 150년경)는 잡기(雜記, Strōmateis) 라는 그의 저서에서 “진리는 하나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영구히 흐르는 강처럼 각각 여러 곳에서 흘러온 지류들과 함께 흐른다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에서 유출되었으며, 그 진리는 빛처럼 세상의 여러 곳을 비추면서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삶의 시간이 만물을 비추는 빛처럼 깨끗하고 고와야 한다. 삶은 신이 생명체에게 부여한 고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클레멘스의 부(富)에 대한 견해는 물질주의로 팽배한 현대인들에게 종교적의미를 넘어 삶의 교훈으로 받아 들일만 하다. 2세기말 이집트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비싼 생활비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얻으러 찾아온 부자 청년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강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부에 대해 지나치게 애착을 갖지 말고 삶을 살아가는데 적당한 부(富)만을 소유하라는 의미였다. 부(富)란 선(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적당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 같다. 자신이 가진 것이 하나이면 또 다른 하나를 더하려는 욕망이 인간의 선(善)한 마음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삶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물질에 억압받고 사는 삶은 시간이 멈춰 선 것과도 같다. 지금이라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삶의 시간을 소중히 하며, 오늘 ‘하루’를 삶의 모든 것처럼 살아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과거는 지나가버려서 없고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기 때문이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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