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군의 나도 문화해설사] 정조반차도45(끝)-도승지와 병조판서(4)
강이슬 기자 | 기사작성 : 2014-10-0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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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최동군 객원기자]
 
도승지와 병조판서(4) - 병조판서(兵曹判書)
 
■ 정조의 정적, 병조판서(兵曹判書) 심환지
 
그 뒤를 병조판서 심환지가 행진하고 있는데 당시 정권을 차지한 여당인 노론의 실세이기도 하거니와 일국의 병권을 쥐고 있는 병조판서의 의전치고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위치도 반차도 행렬에서 가장 후미일 뿐더러, 자기 휘하의 훈련대장의 의전내용을 봐도 군뢰가 좌우 3명씩, 장용대장은 군뢰가 5명씩 좌우에서 호위하는데 비해 병조판서 자신은 고작 군뢰가 2명씩 호위할 뿐이다. 
 
상식적으로 간단히 추측해보자면…병조판서는 정조의 눈 밖에 난 천덕꾸러기, 즉 <찬밥>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병조판서를 지낸 심환지(沈煥之,1730~1802) 를 인터넷백과에서 찾아보겠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이다. 철저한 노론계 인물로서 언관직을 거쳐 1800년(순조원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벽파의 영수를 지냈다.
 
그리하여 정조가 죽은 후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고, 나이 어린 순조의 원상(院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 신유사옥(천주교박해사건)을 일으켰다.
 
아하!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그런 집단인 <노론 벽파>의 영수를 지냈으니 정조의 눈밖에 날 만도 하다. 그리고 그간 심환지는 정조와 정치적으로 심하게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09년 2월에 발견된 어찰첩(御札帖, 심환지와 정조가 나누었던 비밀 편지 모음)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로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 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정조의 탕평책
 
도대체 정조는 왜 그랬을까?
 
여기서 정조의 뛰어난 성군자질이 확인된다. 만약 정조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노론들을 완전히 배제시켰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수당인 노론이 없는 당시의 조선은 반쪽짜리 나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반쪽짜리 나라를 경영하는 것은 이미 증조할아버지였던 숙종 때 경험을 했다. 조정에는 끊임없는 환국정치로 피바람이 끊이질 않았다.
 
<노론>이 없으면 그 자리에는 <소론>이든 <남인>이든 간에 이름만 바뀐 <노론>이 된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하기 마련. 따라서 정조는 반쪽짜리 조선이 아닌, 온전한 조선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 유명한 탕평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바로 이 대목을 현대의 정치인들이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면 대통령과 정치철학이 다르다고 해서 국가기관의 수장들이 법률이 보장하는 임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강제로 쫓겨나가는 현실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난후금군(攔後禁軍)
 
병조판서의 뒤를 따르는 행렬은 <난후금군>을 제외하고는 이미 앞선 연재물에서 모두 설명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앞의 내용을 참고하시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난후금군>과 비슷한 이름이 앞에서도 한번 등장했는데 바로 정조임금의 뒤쪽에서 바짝 호위하고 있는 <난후아병(攔後牙兵)>이고 두 군대에 공통적으로 쓰인 글자는 막을 란(攔)인데 이는 임금의 행렬 후미를 책임지는 부대라는 뜻이다. <난후금군>은 바로 앞쪽에서 행진하고 있었던 <가후금군>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용호영에 소속되었던 금군이다.
 
■ 일반적인 임금의 호위군사 배치법
 
이 반차도와는 별개로, 일반적인 왕의 도성밖 거둥시 군대의 배치법은 아래와 같다.
 
(1) <선상군> : 훈련도감에서 차출된 약80명 정도의 군사가 국왕의 가마 앞쪽을 호위
(2) <금군별장> : 뒤따르는 금군을 이끈다.
(3) <선구금군> : 금군에서 차출된 약100명 정도의 군사가 국왕의 가마 앞쪽을 호위
 
(4) <협연군(훈련도감)> <금위영/어영청 차출병사>가 각각 100여명씩
     국왕의 가마를 여러겹(안쪽은 협연군, 바깥쪽은 금위영/어영청 차출)으로 에워싼다.
(5) <병조판서> : 금군의 최고지휘권을 가진 병조판서가 임금의 가마 바로 뒤에서 호종
 
(6) <가후금군> : 금군에서 차출된 약100명 정도의 군사가 국왕의 가마 뒤쪽을 호위
(7) <별기대병> : 훈련도감에서 차출된 약80명 정도의 기병이 국왕의 가마 뒤쪽을 호위
(8) <난후금군> : 금군에서 차출된 약100명 정도의 군사가 국왕의 가마 뒤쪽을 호위
(9) <후상군> : 훈련도감에서 차출된 약80명 정도의 군사가 국왕의 가마 뒤쪽을 호위
 
위에서 <선상군>, <후상군>, <협연군>과 <금위영/어영청 차출병사>는 보병이고 <별기대>와 <금군>은 모두 기병이다.
 
정조반차도에서는 일반적인 행렬 배치법에서 후반부에 있어야할 <별기대> 가 맨 앞쪽에 배치된 것이 독특하다. 이는 정조뿐만 아니라 <혜경궁 홍씨> 까지 포함된 행차여서 상황에 맞게 금군의 배치에 약간 조정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 아래 : 일반적인 금군배치법 >



 
< 위 : 정조반차도의 금군배치법 >


# 맺음말 #
 
그 동안 부족한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반차도> 연재물에 많은 성원과 관심을 보여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전통문화와 문화재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그 가치를 보존하고 이어가야 합니다. 특히 공간을 차지하는 유형문화재보다 <정조반차도>와 같이 책 속의 그림 형태로 되어 있는 무형의 문화재는 좀더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조반차도>는 아직까지 세부적인 내용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제가 특별히 조명하고자 했던 문화아이템이었습니다.
 
제가 연재한 내용 이외에도 앞으로 여러분들께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셔서 <정조반차도>를 통해 우리 선조들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앞으로 새로운 연재물로 여러분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뉴스투데이=최동군 객원기자)
 




문화해설분야 작가 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컨텐츠학부 외래교수
저서 : <나도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 시리즈물 - 궁궐편, 사찰편, 북한산둘레길편, 능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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