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告白)’을 넘어서
윤재은 대기자 | 기사작성 : 2014-09-11 17:02   (기사수정: 2014-09-1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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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기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告白)’을 넘어서: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감’으로 존재한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 중, 신에 대한 ‘고백(告白)’은 원죄의 속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삶의 가치를 되짚어 보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넘어 ‘필연(必然)’이라 할 수 있다. 필연이란 인간의 의지를 넘어 신의 의지에 다가서는 것으로서 우연(偶然)일 수 없는 실체이다.

세상 속에 한 인간으로서 돌처럼 던져진 나는 또 다른 나를 통해 나를 인식하고 바라본다. 인식(認識)을 통해 바라본 나는 나의 실체이면서, 또 다른 나의 표상(表象)이다. 삶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수많은 행복과 고통은 나의 실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나는 나의 본질(本質)로 한걸음 다가 설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나에서 또 다른 나로, 또 다른 나에서 하나의 나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나에 대한 ‘관조(觀照)’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하나의 돌처럼 던져진 나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해 간다. 그러한 성장과정에서 인간으로서 갖는 수많은 일들은 주마등(走馬燈)처럼 나의 과거를 채워나가고, 나는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날로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삶의 가치가 삶 자체에 있기 보다는 물질이나 명예를 쫒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세상에 홀로 던져진 나는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인간으로서 나는 세상에 던져진 ‘들꽃’처럼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물질주의적 사회에서의 운명은 자유로운 상상(想像)보다는 기계화된 규칙을 요구하며, 사회적 도구로서의 ‘기계(機械)’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어느덧 사회의 기계가 되어버렸고, 사회가 원하는 애완견처럼 주인이 주는 음식과 서비스에 만족하여야만 했다. 나는 나의 실체가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되었을 때, 또 다른 나는 나를 관조(觀照)하며 그림자가 되었다. 형체 없는 그림자는 소리 없이 흐느끼지만 그 것은 고통의 소리도, 행복의 소리도 아닌 무언(無言)의 관조였다.

나의 곁에 영원히 맴도는 그림자는 또 다른 나의 분신처럼 소리 없는 침묵(沈黙)으로 나를 바라본다. 일상적 인간으로서 물질적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바라보지만, 자신의 삶에 관조(觀照)하고 고백(告白)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세계는 보려는 의지에 따라 그 깊이를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告白)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기반성이다. 자기반성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이 유한한 육체에 짓눌려 이성적 영혼을 망각하게 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다.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세계는 시작되고 ‘울음’도 시작된다. 이러한 빛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너와 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있게 하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침묵과도 같은 어둠에서 빛은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는 대신에 육체가 견뎌내야 할 ‘무게’를 주셨다. 그 무게는 인간의 욕심에 따라 달라지는데 욕심의 무게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무게는 더더욱 인간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이 되었다.

이러한 고통의 무게는 빛의 세계에서 지불하여야할 필연적 숙명(宿命)일 뿐이다. 인간이기 이전에 어둠의 세계에서 가져보았던 안식(安息)의 세계는 빛을 통해 볼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보상(報償)일 뿐이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욕심은 끝도 없이 차오르는 것이다. 이처럼 물질적 호기심이 욕망으로 바뀌고, 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은 스스로의 ‘고백(告白)’을 통해 안식을 구해야만 한다.

안식은 자기반성의 ‘고백(告白)’에서 나오고 그 고백은 우리를 있게 한 절대 신(God)에게 향한다. 신은 천지를 창조하였으니 선하고 위대하다. 완전한 신은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을 통해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신의 ‘좋음’으로부터 생겨났으니, 세상의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이 좋음 속에는 선한 것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선하고 좋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물질들은 이와 다르다. 신으로부터 나온 자연은 모두가 좋은 것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완전하지만, 피조물의 인간으로부터 생겨난 것들은 피조물의 세계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버린다.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물질적 세계에서는 유한한 욕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심은 인간으로서 한계를 드러내며 고통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 받고 소외될 때 신의 품속으로 되돌아가길 원한다. 이때 ‘고백(告白)’은 순수한 영혼이 되며 선함으로 나타난다.

중세 교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다음과 같은 자기 고백을 한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나의 행동 중에서 악이 아님이 무엇입니까? 내 행동에 악이 없다고 해서, 내 말에도 악이 없었을까요? 내말에 악이 없다고 해서, 내 의지에도 악이 없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告白)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자기 고백이며 반성이지만, 신의 의지를 깨달고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찰(省察)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채워진 나를 보고, 사라져 가는 나를 본다. 나는 본시(本是) 그에게서 왔고 그에게로 돌아가니,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세상에서, 세상의 모든 물질과 욕망은 허망하고 신기루(蜃氣樓) 같은 것이다. 인간으로서 참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감으로 존재 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채우려고만 하는 우리의 삶 앞에서 비우려는 자연의 소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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