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군의 나도 문화해설사] 정조반차도36 - 자궁가교(2)
강이슬 기자 | 기사작성 : 2014-08-26 07:23   (기사수정: 2014-08-2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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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최동군 객원기자]
자궁가교(2) - 협연군(挾輦軍) 등 호위군사
 
이제부터는 대비와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대규모의 군사들이 등장한다.
 
■ 협연군(挾輦軍) 과 무예청 총수(武藝廳 銃手)
 
그 첫번째로 협연군(挾輦軍)은 조선후기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임금의 수레인 연(輦)을 호위했던 군사들인데 좌우로 40명씩 배치되어 있다.
 
바로 그 옆에는 무예청 총수(武藝廳 銃手)가 협연군과 똑같이 40명씩 배치되어 있는데 무예청총수는 훈련도감에 예속되어 임금을 호종하며 대궐문의 수직을 담당하던 무예별감(武藝別監)을 관장하던 관청인 무예청의 조총수이다.
 
■ 어갑주마(御甲胄馬), 어승인마(御乘引馬) 외 여분의 말 8필
 
그 가운데에는 자궁가교를 끌 여분의 말이 8마리나 있다. 그런데 앞서 정가교를 끌 여분의 말은 4마리였기 때문에 자궁가교의 규모가 정가교의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뒤로 임금이 사용할 갑옷과 투구를 실은 말인 어갑주마(御甲胄馬)와 임금이 탈 여분의 말인 어승인마(御乘引馬)가 있다.
 
■ 군뢰의 숫자에서 보이는 화원의 실수
 
한편, 협연군과 무예청총수의 안쪽으로 <어갑주마>와 <어승인마> 의 양쪽에 <군뢰>가 10명씩이나 좌우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설명에는 군뢰가 10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림에는 9명 뿐이다. 이것은 앞서 어보마(御寶馬) 바로 뒤의 인의(引儀)의 숫자 실수에서 보았던 화원의 똑같은 실수로 여겨진다.
 
자궁가교 앞 행렬의 양쪽 가장자리에 협연군 40명과 무예청총수 40명이 각각 길게 늘어선 가운데 다시 한 줄을 새로 만든 10명의 군뢰의 뒤를 이어 4명의 순시(巡視)기수가 따르고 있고 순시기의 뒤편 위쪽 가장자리에는 파총(把摠), 문기수(門旗手), 중월도(中月刀)가, 그리고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초관(哨官)과 중월도(中月刀)가 배치되어 있다.
 
문기수(門旗手)는 훈련도감 무예청(武藝廳)에 속해 문기를 들던 하급군사이다.
 
중월도(中月刀)는 긴 자루에 칼날이 넓고 휘어 초승달같이 생긴 칼로 의장용으로 사용했다. 원래 월도(月刀)는 무게와 길이에 따라 <단월도> <중월도> <청룡도>로 나뉘는데 삼국지의 <관우>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청룡언월도>는 <청룡도>에 해당한다.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은 각각 속오군 편제에 따른 군 지휘관의 이름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는 중금(中禁), 신전(信箭), 신전선전관(信箭宣傳官)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한가운데는 근장군사(近仗軍士) 12명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조기퇴직을 강요받았던 중금(中禁)
 
중금(中禁)은 액정서(掖庭署)에 딸린 심부름꾼으로 임금을 시종하며 전갈하는 일을 맡았는데 보통 15세 이하의 동자(童子)로 삼았다가 16세가 되면 정년퇴임을 시켰다. 어린 나이에 정년퇴임을 시킨 이유는 이들이 임금의 행차 때 `주상전하 납시오` 라고 외치거나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전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변성기에 들어서면 다른 자리로 옮겼기 때문이다.
 
뱀의 발(蛇足) :
영조실록 121권, 49년(1773) 11월 27일(임오) 1번째기사
* 경운궁 동구 안의 어린이에게 쌀을 지급하고, 금위영·어영청의 상번을 정지케 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서 경운궁(慶運宮) 동구(洞口) 안에 살고 있는 어린이를 불러서 각각 쌀을 내려 주었고, 15세된 동자(童子) 세 사람에게는 선혜청으로 하여금 혼인을 돕게 하였으며, 이어 중금(中禁) 으로 차출(差出)하게 하였다.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상번군(上番軍)은 내년 가을까지 한정(限定)하여 번(番)을 정지하게 하였다.
 
■ 신전(信箭), 신전선전관(信箭宣傳官)
 
한편 신전(信箭)은 임금이 교외에 거둥할 때, 선전관을 시켜서 각 영에 군령을 전달하는 데 쓰던 화살을 말한다. 살촉에 '令'자를 새겼고, 깃 아래에 '信' 자를 쓴 삼각형의 5색 비단 조각의 표지를 각각 하나씩 나누어 달았는데 신전선전관(信箭宣傳官)은 신전을 담당한 선전관을 말한다.
 
신전과 비슷한 것으로는 국왕이나 장수가 명령을 전할 때 신표로 사용하던 영전(令箭)이 있는데 신전은 임금전용이므로 영전보다는 격이 훨씬 더 높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앞선 행렬에서 훈련대장, 중군, 금군별장 등이 영전(令箭)을 사용했다.
 
<뱀의 발(蛇足) >
 
정조1년에 경희궁 존현각에서 실제로 벌어졌었고, <영화 역린(逆鱗)>으로 세간의 주목을 끈 <정조암살미수사건> 에서도 신전(信箭)이 사용됐다. 실록에는 1777년 7/28 정조가 거처하던 경희궁 존현각 지붕위에서 누군가가 발각되었지만 도망갔고 한동안 범인을 잡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도둑으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12일 후인 8/11 에 궁궐에 다시 침범한 범인을 잡고 국문하고보니 그제서야 단순 도둑이 아니라 국왕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관련된 모든 사실이 드러났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7월 28일(신묘) 1번째기사
* 궁궐내에 도둑이 들어 사방을 수색하게 하다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이었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 곁에 내시(內侍) 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扈衛)하는 군사들이 직숙(直宿)하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左右)가 텅비어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東北)쪽에서 회랑(回廊) 위를 따라 은은(隱隱)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류(中霤) 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임금이 한참 동안 고요히 들어보며 도둑이 들어 시험해 보고 있는가를 살피고서, 친히 환시(宦侍)와 액례(掖隷)들을 불러 횃불을 들고 중류 위를 수색하도록 했었는데, 기와 쪽과 자갈, 모래와 흙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마치 사람이 차다가 밟다가 한 것처럼 되어 있었으니 도둑질하려 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드디어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을 입시(入侍)하여 고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에, 홍국영이 말하기를,
 
“전폐(殿陛) 지척(咫尺)의 자리가 온갖 신령(神靈)들이 가호(呵護)845) 할 것인데, 어찌 이매 망량(魑魅魍魎)846) 붙이가 있겠습니까? 필시 흉얼(凶孼)들이 화심(禍心)을 품고서 몰래 변란을 일으키려고 도모한 것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변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나는 새나 달리는 짐승이 아니라면 결단코 궁궐 담장을 뛰어넘게 될 리가 없으니, 청컨대 즉각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이때에 홍국영이 금위 대장(禁衛大將)을 띠고 있었고 사세가 또한 다급하므로, 신전(信箭)을 쏘도록 하여 연화문(延和門)에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삼영(三營)의 천경군(踐更軍)으로는 담장 안팎을 수비하게 하고 무예 별감(武藝別監)을 합문(閤門)의 파수(把守)로 세우고 금중(禁中)을 두루 수색하였으나, 시간이 밤이라 어둡고 풀이 무성하여 사방으로 수색해 보았지만 마침내 있지 않았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8월 11일(갑진) 1번째기사
* 이찬(은전군)을 추대하여 반정을 꾀하려던 일당을 복주시키다
       
제적(諸賊)들이 복주(伏誅:베어 죽임)되었다.  지난달에 존현각(尊賢閣)에서 적변이 생긴 이후에 여러 차례 신칙하여 기찰(譏察)하도록 했었으나 오래도록 잡아내지 못했다. 이날 밤에 경추문(창덕궁의 서문) 수포군(守鋪軍) 김춘득(金春得), 김세징(金世徵) 등이 서로 어울리어 몸을 포개고 누웠는데, 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2, 3차례 수포군을 부르자 김세징이 응하려고 했다. 김춘득은 이때에 나이가 17세 였는데, 시급히 제지하기를,
 
“부르는 음성이 이상스러우니 아직은 응하지 말고 다만 동정(動靜)을 살펴보자” 했다. 조금 있다가 어느 사람이 곧장 경추문(景秋門) 북쪽 담장을 향해 가며 장차 몰래 넘어 가려고 하므로, 김춘득 등이 이웃의 수포군 김춘삼(金春三), 이복재(李福才) 두 사람을 툭툭 차서 일으키어 함께 추격하여 잡았는데, 병조를 경유하여 포도청(捕盜廳)으로 보냈고, 포도청에서 그 정절(情節)을 힐문해 보니 원동(院洞) 임장(任掌)인 전유기(田有起)로 이름을 흥문(興文)이라고 고쳐버린 자이었다. 대개 전흥문은 강용휘(姜龍輝)와 함께 존현각(尊賢閣) 중류(中霤) 위에 몰래 들어가 칭란(稱亂)하려고 도모하다가 실현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또 재차 거사(擧事)하려다가 마침내 수포군(守鋪軍)에게 잡히게 된 것이다. (후략)...
 
■ 별감(別監)과 별장을 혼동하지 말 것
 
근장군사(近仗軍士)는 궁문을 지키거나 임금이 거둥할 때에 경호를 맡아보던 근위병을 뜻한다.
 
한편, 자궁가교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영기가 5명씩 있고 별감(別監)이 3명씩 자궁가교를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다. 별감(別監)은 액정서(掖庭署)에 딸린 하급관리의 하나인데, 임금이나 세자의 행차시 호위하는 일을 하였고, 대전별감, 중궁전별감, 세자궁별감, 처소(處所)별감 등의 구별이 있었다. 비슷한 이름의 (금군)별장과 혼동하지 맙시다.
 
■ 무예별감은 관직 뿐만 아니라 관청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궁가교의 바로 뒤쪽에는 장관(將官)2, 장교(將校)2 이 호종하고 있고 승전선전관(承傳宣傳官)과 통장(統長)이 양쪽 가장자리에서 뒤따르고 있다.
 
장관(將官)은 대장, 부장, 참장의 총칭으로, 각 군영의 종 9품 초관(哨官)이상의 무관을 말하며 장교(將校)는 각 군영과 지방 관아의 군무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인데 장관과 장교는 거의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셔도 무방하다.
 
승전선전관은 앞서도 한번 나왔는데 그 날의 왕명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던 선전관청의 당직 선전관이다.
 
통장(統長)은 조선시대 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관(武官) 관청인 무예별감(武藝別監)의 으뜸벼슬이다. 무예별감은 무예청(武藝廳)이라고도 한다.
 
 (뉴스투데이=최동군 객원기자)


문화해설분야 작가 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컨텐츠학부 외래교수
저서 : <나도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 시리즈물 - 궁궐편, 사찰편, 북한산둘레길편, 능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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