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군의 나도 문화해설사] 정조반차도32 뒤쪽 깃발부대
강이슬 기자 | 기사작성 : 2014-08-08 09:06   (기사수정: 2014-08-0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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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양문숙 기자]
뒤쪽 깃발부대
 
취타부대의 뒤를 이어 다시 깃발부대가 행진하고 있는데 중앙부분에는 5개의 고초기(高招旗) 가 자리잡고 있다. 고초기의 이름을 보니 역시 오행의 순서에 의해 배열되어 있다. 다만 동쪽을 의미하는 고초기는 청고초(靑高招)가 아닌 남고초(藍高招) 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해 준다.
 
■ 계라선전관(啓螺宣傳官) 과 검칙장교(檢飭將校)
 
취타부대의 뒤를 따르는 깃발부대를 이끄는 사람은 계라선전관이다. 계라(啓螺)는 소라를 불어 임금의 거둥이 있을 때 군악을 연주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맡아보는 선전관(宣傳官)을 계라선전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계라선전관 양옆에 나인(內人)이 나란히 가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계라선전관 뒤의 검칙(檢飭)장교는 행렬의 질서를 담당하는 장교를 가리키는데 검칙이란 규정대로 시행되지 않은 행정 조치를 조사해서 규정에 따르도록 단속하는 것을 뜻한다.
 
뱀의 발(蛇足) :
정조실록 42권, 19년(1795) 2월 1일(계축) 6번째기사
* 화성에서 연회를 베풀 때의 음악과 음식 대접, 각종 물력의 조달 등에 대해 명하다    
  
화성(華城)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 협률랑(協律郞)의 역할은 계라 선전관(啓螺宣傳官) 이 대행하고, 음악 연주는 장용영(壯勇營)의 군악(軍樂)을 대신 쓰라고 명하고, 금원(禁園)에 행행할 때에 제신(諸臣)에 대한 음식 대접과 군병들에 대한 식사를 공급하면서 규례에 지나치지 않게 하라고 신칙하였다. 이어 노자(路資)는 정리소에서 내주고, 반열에 참여하는 내외의 손님 및 행차를 따르는 궁인(宮人)·여자 악공(樂工) 등의 옷감·말 값[馬貰]·노자와 군병에게 먹이는 데에 드는 물력(物力)도 정리소에서 내주도록 명하였다.
 
■ 후미 깃발부대는 수원화성의 구조물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좌우 깃발의 종류를 살펴보면 행차길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을 상징하는 청도(淸道)기와 각 군영의 문에 세워놓고 출입을 단속하던 황문(黃門)기,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네 방위신의 깃발 이외에 동남각(東南角)기, 동북각(東北角)기, 서남각(西南角)기, 서북각(西北角)기가 나온다.
 
이 깃발들은 각 방위의 모서리 끝을 나타내는 깃발인데, 수원화성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성벽 위의 모서리에 지은 누각인 네 개의 각루(角樓)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깃발부대의 후반부는 지금껏 못보던 새로운 깃발과 관리들이 몇몇 등장한다.
 
우선 <등사(螣蛇)기> 와 <금고(金鼓)기> 는 앞에서도 나왔던 것으로써 등사기의 경우, 군영의 중앙에 세워 중군(中軍)이나 중위(中衛)를 지휘하는데 사용했고, 금고기는 군대에서 좌작진퇴(坐作進退, 군대가 훈련할 때 앉고 서고 나아가고 물러섬)를 지휘하던 깃발중의 하나인데, 특히 <취타부대>를 대상으로 할 때 사용한다고 했다.
 
<등사기> 와 <금고기> 의 뒤를 말을 탄 세 사람이 따르고 있다.
 
■ 전배차지교련관(前排次知敎鍊官), 대기치차지교련관(大旗幟次知敎鍊官), 대령교련관(待令敎鍊官)
 
우선 맨 위쪽에는 전배 차지교련관(前排次知敎鍊官) 이 있는데, 전배(前排)는 임금의 거둥시 임금의 가마(御輦) 앞에 늘어서던 궁속(宮屬)을 가리키며 차지(次知)는 각 궁방(宮房)의 일을 맡아보던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전배차지교련관은 임금의 수레 앞 부분의 행렬을 담당하는 훈련교관이다.
 
그 아래쪽의 대기치 차지교련관(大旗幟次知敎鍊官)은 진중(陣中)에서 방위를 나타내던 대기치(大旗幟)를 담당하는 군졸들의 훈련교관이다.
 
맨 아래쪽의 대령교련관(待令敎鍊官)은 윗사람의 지시나 명령을 항상 기다리는 교련관이다.
 
■ 훈련도감 초요기(招瑤旗) vs 장용영 초요기(招瑤旗)
 
이들의 뒤로 <훈련도감초요기>와 <장용영초요기>가 따라가고 있는데 초요기(招瑤旗)는 전쟁터의 진중에서나 행진할 때에 대장이 부하장수들을 부르고 지휘, 호령하던 신호기의 하나이다.
 
<뱀의 발>
정조실록 19권, 9년(1785) 2월 10일(경인) 1번째기사
* 강릉, 태릉 능행 후 사하리에서 모의 전투를 시행하여 포상하다      
 
강릉(康陵)에 배알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으며, 태릉(泰陵)을 두루 배알하였다. 어가를 돌려서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각신(閣臣), 승지(承旨), 옥당(玉堂)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장전(帳殿) 앞에 용호영(龍虎營)의 초요기(招搖旗)를 세우자, 금군 별장(禁軍別將) 이득제(李得濟)가 금군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오니, 임금이 마병 별장(馬兵別將) 조학신(曹學臣)에게 비밀히 명령하여 난후 별대(攔後別隊)를 거느리고 맞받아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하고, 징을 울려 진을 파하게 하였다.
 
■ 취타악대 6인과 용기초요기 겸 차비선전관(龍旗招瑤旗 兼 差備宣傳官)
 
그 뒤를 6명의 취타악대가 횡으로 1열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북, 징, 꽹과리와 함께 소라껍데기로 만든 악기인 나각(螺角)을 담당하고 있다.
 
깃발부대의 맨 마지막으로는 <용기초요기겸차비선전관> 이 따르고 있는데 임금을 상징하는 용기(龍旗)와 초요기를 담당하는 선전관청의 무관이다.
 
(뉴스투데이=최동군 객원기자)
 


문화해설분야 작가 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컨텐츠학부 외래교수
저서 : <나도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 시리즈물 - 궁궐편, 사찰편, 북한산둘레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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