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실체(實體)’ - 실체란 무엇임, 보편적인 것, 그리고 밑바탕이다.
윤재은 대기자 | 기사작성 : 2014-07-09 17:57   (기사수정: 2014-07-09 17:57)
3,809 views
N
▲ 사진=윤재은 기자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실체(實體)’ – 실체란 무엇임, 보편적인 것, 그리고 밑바탕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인간의 생명이 존재하는 한에서 ‘실체(實體)’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질문은 본질적이며,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이다. 현대과학으로 이루어낸 오늘날의 물질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실체(實體)’라는 본질적 질문보다 인간의 편의를 가져다주는 물질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물질적 가치를 느끼는 육체는 본질적으로 정신(精神)에 속해 있으니, 정신적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성적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적 본성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人間)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유한성 속에서 잠시 왔다가 되돌아가는 인생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인간으로서 ‘존재적 가치’와 ‘실체적 가치’를 동시에 묻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지고, ‘나’는 알고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에게 만족하였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실체적 진리와 많은 차이가 있다.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알고 있는 한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알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 관념의 한계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게 안다는 것은 관념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를 넘어서면 그것은 불확실한 대답이 된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認識)이 실체를 알기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타 생명체가 생각해보지 못하는 ‘반성(反省)’을 통해 실체적 질문을 한 번쯤은 해보아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반성은 자기 성찰을 위한 순수마음에서 시작되며, 이러한 심리적 선택은 인간으로서 갖는 가장 솔직하고 자기 고백적인 마음이다. 인간으로서 한 번도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 번도 형이상학적 질문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의 정신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곁가지만을 맴돌다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기된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세계를 인지하고, 그러한 원인으로서 지혜를 깨달게 하는 학문은 무엇인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은 세상에 생겨난 수많은 대상들을 통해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세계를 중시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으로서 본질적 질문을 통해 보다 더 고차원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추구하는 학문중 제1의 학문은 ‘지혜(知慧)’를 깨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의 길은 진리의 사실만을 추구하며, 어떤 종류의 원인과 원리에 대한 진실을 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감각적으로 아는 것은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경험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쉬운 일이지만, 정신적 실체로서 지혜를 깨달게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삶과 학문에 있어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소견(所見)에 치우치지 않고 보다 엄밀한 원인을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하려한다. 학문뿐 아니라 모든 삶의 이치에서 보다 더 엄밀하게 원인을 파헤쳐나갈 때 그러한 자를 지혜로운 자라 말 할 수 있으며, 현대인으로서 요구되는 가치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자만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반성’을 통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가려 하는 사람을 말한다. 세계는 수많은 변화를 통해 움직이고 나아가지만, 궁극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세계로 귀결된다. 이 하나의 세계는 결국 실체(實體)의 세계이며, 형이상학적 사유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세계는 인간의 반성을 통해 그 밑바탕으로 향하고 그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자유로운 ‘자아(自我)’는 세계 속에 있고, 그 속에서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분명한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실체에 속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자유로운 자아는 개념에서 실체에 도달하는 최초의 실체가 되며, 실제로 존재하는 고귀한 ‘자아(自我)’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자아를 통해 실체의 밑바탕에 들어서게 되면 세상의 모든 길은 하나의 길로 통하게 되고 이러한 길의 첫 대문이 바로 형이상학적 실체의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학문을 하거나,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관여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소여(所與)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논쟁들은 형이상학적 사고(思考)의 결여에 의해 일어나는 것들이다. 특히 정치를 하거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면 ‘밑바탕’ 없이 결과를 예측하고 속단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건축가가 집을 짓는데 기초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서, 그러한 집은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다.

정치를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세상의 중심에서 힘과 지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분야의 전문성에 대한 ‘밑바탕’을 세심히 드려다 보아야 한다.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언어와 지식, 그리고 힘은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위임된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과 인간의 본질적 행복을 위해 사용하도록 국민으로부터 양도되어진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는 하나의 문제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제시되고, 그에 따른 판단도 제 각각인 것을 볼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은 그것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의 이익에 따라 하나의 원인에서 수 개의 다리가 달린 괴물로 변하여 다양한 결과를 산출한다. 성냥을 켜서 종이에 불을 붙이면 종이가 타고 재만 남는다는 원인과 결과가, 인간의 지식과 관념에서는 재가 아닌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게 되고, 원인은 결과의 밑바탕이 된다. 본시(本是) 진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밑바탕’은 변할 수 없다. 모든 결과는 불에 탄 종이의 재처럼 명확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사고의 부재는 이러한 밑바탕을 흔들게 된다. 이렇게 밑바탕이 흔들리게 되면, 이로 인해 도출된 결과는 수많은 돌연변이를 불러오게 되며, 이러한 현상이 빈번히 발생한 국가에서는 믿음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서로의 불신과 투쟁만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 파국(破局)의 길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부여된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 힘의 칼날을 올바로 사용하여야 하며, 이러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실체의 궁극적 사유(思惟)가 절실히 요구된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메일보내기
보내는분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내용
 
주요기업 채용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