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조화(調和)로운 세계(世界)’ - 조화란 세상의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본질이며 질서이다.

윤재은 수석전문기자 입력 : 2014.03.26 09:08 |   수정 : 2014.03.2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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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기자]

‘조화(調和)로운 세계(世界)’ – 조화란 세상의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본질이며 질서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수석전문기자) 
세상에 현존(現存)하는 모든 물질과 현상은 그 존재(存在) 자체로서 조화로운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신의 의지에 의해 서로 다른 속성들이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조화로운 세계(世界)’라 할 수 있다. 세상의 현존(現存)에 있어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조화의 미학(美學) 속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조화롭지 못한 세계는 서로를 파괴하고, 결국엔 공멸하기 때문에 궁극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인간이 말하는 실체의 근원(根源)과 본질(本質)은 현존 세계의 조화를 통해 나타난다. 조화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본질이며 질서’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파괴를 불러오고, 결국엔 파국(破局)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파국의 세계도 그 파괴가 영원한 종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시간성의 개념에서 보면 종말은 순간적이며, 그 순간은 또 다른 세계의 창조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로운 세계는 참 아름답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자연의 속성들은 각각의 보편자에서 시작된다. 각각의 인간은 인간의 보편자에서 그 근원을 찾으려하고, 각각의 동물과 식물은 동물과 식물의 보편자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이렇게 수많은 속성으로 이루어진 자연은 다양한 보편자들의 관계 속에서 어우러지는데, 이러한 관계의 세계를 ‘초월적 세계’라 한다. 초월적 세계는 초월적 자연을 창조하고, 초월적 자연은 조화로운 신성(神性)에 의해 만들어졌다. 자연은 조화를 통해 아름다움을 나타낼 뿐 아니라, 조화를 통해 영원(永遠)의 세계로 나아가고, 조화의 틀 속에서 세계 속에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보편적 속성 중 하나인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국가와 사회를 이루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조화를 통해 스스로 국가와 사회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객체들이 서로 다른 생각과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만약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이익이나 공익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로운 사회라 할 수 없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이러한 조화의 원리를 영혼 삼분설(三分設)의 신화적 비유를 통해 파이드로스(Phaidros)에게 설명한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理性), 기개(氣槪), 욕구(慾求)가 있는데 이성은 지혜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기개는 명예를 사랑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며, 욕구는 이득을 사랑하고 감각적 욕망을 목적으로 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이와 같은 세 가지의 특성에 의해 구성되는데 올바른 영혼을 이끌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플라톤(Platon)은 조화(調和)의 개념을 마차와 마부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만약, 목적지를 도착하려는 마부가 있다. 그 마차에는 이성적 기개를 상징하는 백(白)말과 욕망의 욕구를 상징하는 흑(黑)말이 있다.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을 끌고 목적지를 도착해야 하는데, 오직 이성의 백(白)말에 의지하여 그 길을 가다보면, 마부는 변화 없는 여정에서 졸거나 잠에 빠져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지나쳐버릴 수 있다. 또한 욕망과 욕구의 상징인 흑(黑)말에 의지하여 목적지를 가려다 보면, 마부는 미쳐 날뛰는 말에 치여 마차가 부서지거나, 길을 벗어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명한 마부는 이성의 백(白)말과 욕망의 흑(黑)말을 적정하게 이끌어야만 자신의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다.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시간 속에 이성과 욕망의 두 마음은 언제나 하나의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삶의 여정이 단순히 목적지를 도착하는 과정이라면, 이성의 마음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삶은 너무 이성적이지도 않고, 너무 욕망적이지도 않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삶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이성과 욕망에 치우침이 없는 조화로운 삶이여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상반된 마음속에서 조화의 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조화란 이렇게 상반되고 대립적인 관계를 중용(中庸)의 마음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자신의 삶 속에 불어넣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물질성은 신성(神性)이 부여한 조화의 의미를 망각(妄覺)한 체 독선(獨善)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 힘을 가진 인간들은 저마다의 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주장만을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한다. 특히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하나의 사건(事件)을 놓고도 너무나 다른 평가와 주장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은 사건에 대한 진실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두 그룹의 상반된 논쟁을 바라보다 보면,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도 혼동(混同)스럽다. 알 수 없는 주장과 오만(傲慢)만이 판을 치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나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없는 사회로서 결국엔 파국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조화(調和)란 이러한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양심(良心)이며, 정의(正義)이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너무나도 다른 주장을 하는 대립적 두 그룹의 사람들은 서로를 반성하면서 대립의 각을 낮추어야 한다. 그리고 관조(觀照)의 마음으로 그 사건의 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올바른 자신의 주장은 명확히 밝혀야 하지만, 거짓된 사실에 대해선 용기 있게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용기가 정의이며 양심인 것이다.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을 보고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힘과 권력을 모두 회수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혼동의 사회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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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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