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장] 오정표 “비즈공예 하는 남자, 편견서 ‘반전’으로 승화”

강이슬 기자 입력 : 2013.11.06 09:31 |   수정 : 2016.09.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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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남자로서 비즈공예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아무래도 ‘편견’이죠. 하지만 그런 ‘편견’이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됐어요.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구슬공예’를 기본에 충실한 기법 연구를 통해 작품으로 선보이면 따라할 수 없는 화려함에 한 번 놀라고, 남자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라니까요.(웃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는 한국예술문화의 산업적 가치증대와 한국문화 계승 및 보존을 위해 ‘명인’ 을 선발, 지정했다.
 
제1회 ‘한국예술문화명인인증’은 총 111명의 명인에게 수여됐다. 오정표 명인은 그 중 ‘구슬공예’로는 최초이자 단독으로 명인이 됐다.
 
‘구슬공예’라고 동그란 구슬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정표의 작품은 ‘구슬’ 형태보단 ‘비즈’의 형태로 ‘비즈공예’로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한 번쯤 도전해 볼만한 비즈공예로 생각해도 또 오산이다. 비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자태를 뽐내니 말이다.
 
한국예총에서 명인으로 지정된 비즈공예는 과연 어떨까?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자 비즈공예품을 판매하는 이오클래식, 이오드림의 대표인 오정표 명인을 만나 구슬공예와 그의 공예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구슬공예와 비즈공예
 
- 구슬공예와 비즈공예가 같은 맥락인가요.
 
“쉽게 설명해 ‘구슬공예’ 분야 안에 ‘비즈공예’가 있다고 봐야해요. 과거에는 진주를 끼는 공예만 구슬공예라고 표현했다면, 현재에는 구슬에 구멍을 뚫은 비즈로 하는 공예도 포함을 시키는 거죠. 일반적으로는 그냥 ‘비즈공예’라고 부르고요.”
 
- 비즈공예가 성황 하던 시작 시기는 언제입니까.
 
“우리나라에 비즈공예가 가장 성황 하던 시점은 IMF시절이에요. 가정을 책임졌던 남성들이 사회에서 무너지다 보니, 대체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었던 시기가 바로 그 시기거든요. 여성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적은 돈을 들여서 무언갈 만들어 내는 수공예 분야였어요. 그래서 그 당시 일본에서 유행이던 비즈공예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흡수가 됐던 것이죠. 일본에서 발행되는 모든 비즈 책자들이 다 교본으로 들어오게 됐고, 그로 인해 일반 여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겁니다.”
 
- 그 당시 구슬공예를 배운 여성들은 주로 어디에서 활동했나요.
 
“학교 CA나 특별활동에 강의를 하던지, 아니면 창업으로써 공방을 차리기도 했죠. 소자본을 통한 핸드메이드로 가치를 인정받는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구슬공예가 발달을 하게 됐고, 저도 그 시기에 유리를 가공하던 한 사람으로서 더 자연스럽게 이 분야를 접하게 됐습니다.”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크리스털 다루는 남자 오정표
 
오정표는 1989년도부터 크리스털 가공 업체에서 기술을 배워 스스로 공장을 운영했다. 주로 크리스털, 유리, 수정 등을 컷팅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그렇게 크리스털을 만지다보니, 비즈공예와의 연결도 자연스러웠다.
 
“그 당시 크리스털을 가공하는데 흙 속에서 보석을 캐는 느낌이었어요. 가공을 마치고 크리스털이 광을 내면 그 기쁨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 크리스털 가공을 하다가 비즈공예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컷팅을 하고, 남대문 시장에 납품하면서 굉장히 활동적인 삶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다리에 큰 수술을 하게 됐어요. 굉장히 활달했던 사람이 다리가 다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우울증이 걸릴 것 같고, 너무 힘들었죠. 휠체어 생활을 하던 시기여서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당시 동호회 중심의 비즈 공예가 성황 되던 시기였습니다. 인터넷에 비즈공예 관련 카페를 보는데 다른 사람들이 한 작품을 보면서 ‘내가 하면 훨씬 잘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주변에 재료를 사다달라고 부탁해서 만들기 시작했죠. 정말 밤을 새면서 만들고, 또 연구했어요. 스스로 기본기를 다지는 시점이었다고 생각해요.”
 
- 어떤 연구를 하셨나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비즈공예를 전파한 일본까지도 비즈공예의 기초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 마디로 하라는대로 따라하는 수준이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 기초 체계를 스스로 잡았어요.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은 ‘비즈를 낚싯줄에 엮고 줄을 교차하라’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비즈를 엮고, 교차하고, 엮고, 교차하고만 반복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면 정교한 작품을 만들 수 없어요. 낚싯줄을 교차할 때도 오른쪽 줄을 위로 교차하느냐, 아래로 교차하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거든요. 일정한 방향으로 교차를 시켜야 한다는 그런 간단한 원리조차도 잡혀있지 않았던 거죠.”
 
“또 저는 크리스털 가공부터 했던 사람이니 어떤 원재료를 어떻게 가공해야 이러한 비즈가 나온다는 원리부터 알고 있었으니 더 좋았어요. 그렇게 원재료의 기초부터 공예의 기초까지 체계를 잡았습니다.”
 
- 그렇게 스스로 연구했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비즈공예를 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남자로서 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편견’이죠. 하지만 그런 ‘편견’이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됐어요.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구슬공예’를 기본에 충실한 기법 연구를 통해 화려한 작품으로 선보이면 따라할 수 없는 기법에 한 번 놀라고, 남자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라니까요.(웃음)”
 
- 편견에서 반전으로 바꾼 일화가 있다면.
 
“일본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수강생들은 전부 여성이었고 강사인 저만 남자였어요. 더군다나 일본이 구슬공예의 원조인데, 제가 강사로 가니 ‘한국의 남자가 와서 일본에서 교육을 하냐’라며 말이 나올 정도로 선입견이 심했죠. 일본은 교육을 하고 나면 강의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강사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제 강의가 끝나고 저의 강평도 실시됐어요. 그런데 평가 중에 ‘눈에 안개가 걷힌 기분이었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 수강생이 말한 ‘안개’란 남자에 대한 편견부터 제가 강의한 비즈공예의 기초 원리를 뜻하는 거죠.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강의를 할 때도 단지 비즈공예를 하는 방법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유리를 가공하고 컷팅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기법을 이용해 얼마큼의 입체를 표현할 것인가 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알려주거든요. 그러니 단순하게만 알았던 비즈공예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이죠.
  
- 요새는 편견이 많이 사라졌습니까.
 
“제가 좀 많이 바꾸었죠. ‘남자’라는 편견 외에도 비즈공예와 관련된 교육과 사업 등 ‘비즈공예는 단순한 거야’ 혹은 ‘비즈공예로 교육과 사업은 불가능해’라는 인식들도 없애고 있고요.”
 
- 비즈공예 교육과 사업에 관한 편견은 어떤 방식으로 없애나요?
 
“그런 편견이 생긴 이유를 찾아야 해요. 비즈공예가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일본의 비즈공예를 그냥 그대로 베껴서 따라하기만 급급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할 수 있는 카피를 전부 다 해버리고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비즈공예가 하향세를 타게 되는 거죠. 카피 그 이상으로 발전이 없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디자이너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처음 비즈공예를 보는 사람은 쉽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비즈공예는 알면 알수록 그 깊이가 아주 깊은 분야입니다. 때문에 디자인으로 얼마든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요.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 능력은 비즈공예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죠.”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일본을 앞지른 한국 비즈공예
 
“저는 비즈공예의 기본 원리부터 디자인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했어요. 처음엔 일본보다 더디게 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저는 정말 자부합니다. 지금 우리의 비즈공예는 일본 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것을요. 세계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일본에서 들어온 비즈공예를 이제는 거꾸로 제가 일본에 가서 강의를 해주는 것으로 이미 입증한 부분이죠.”
 
- 현재 일본 비즈공예와 오정표의 비즈공예는 어떤 차이가 있나.
  
“일본은 자기가 만든 핸드메이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요. 예로 30여 명의 작가들이 저희와 함께 작품을 판매하는 이벤트를 하면 하루 매출액이 10억 정도 돼요. 작품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렇게 매출이 놓은 이유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기본 개념이 다르니 일본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비즈공예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쉬운 비즈공예도 하지만, 작품으로 내놓는 저만의 비즈공예는 배우지 않고서는 절대 구현해내지 못 할 화려한 비즈공예를 만든 다는 것이죠.”
 
- 예술성은 우리가 우위지만, 대중성은 일본이 우위겠죠?
 
“맞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지하철을 타면 비즈공예부터 퀼트공예까지 DIY키트를 한 봉지씩 들고 타는 승객이 많아요. 또 일본에는 DIY 부재료만 살 수 있는 도매상도 엄청나게 크게 자리 잡고 있고요. 이렇게 DIY 문화가 전반적으로 깔려있죠. 편의점에서도 손쉽게 DIY키트를 살 수 있을 정도니까요. DIY 문화가 깔려있으니, 비즈공예도 대중화가 될 수밖에 없죠. 우리나라는 한 분야에 빤짝 붐이 일어나면 확 인기 있다가 사라지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십자수가 붐을 일으켰다가 시들해지는 것 처럼요. 하지만 정말 기술력 만큼은 자부합니다.”
 
- 일본에 자주 왕래를 하나요.
 
“네. 강의도 많이 나가고, 수출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타 기업과 거래를 안 하고 저희가 아예 일본지사를 만들었어요. 오사카, 동경, 후쿠오카에 지사를 만들어서 더 본격적으로 일본 시장을 공략할 계획입니다.
 
- 다른 나라의 비즈공예 수준은 어느 정도 인가요?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손이 커서 이런 섬세한 작업을 정말 못 해요. 그리고 장시간 앉아서 진득하니 하는 성향이 아니라서 동양의 작품을 선보이면 ‘이걸 어떻게 손으로 만들었냐’며 깜짝 놀라요. 때문에 서양인들은 주로 단순한 비즈공예를 하죠. 서양 시장에 접근하려면 손으로 이런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공예로 다가가면 됩니다. 너무 어려운 걸 보여주면, 굳이 하려고 하지도 않아요.(웃음) 물론 서양에도 세밀한 비즈공예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양만큼 대중적이진 않죠.”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두리안과 같은 비즈공예만의 매력
 
- 주로 만드는 비즈공예는 무엇인가요.
 
“두 가지로 나뉘는 데요. 일단 비즈 패션쇼나 주얼리 페어 등에 출품하는 저의 개인적인 작품 위주의 비즈공예와 또 하나는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비즈공예에요. 앞으로는 일본처럼 비즈공예 시장이 커질 것을 예측하고, 비즈공예 하나를 만들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있는 패키지를 판매하고 있어요. 디자인 도안부터 만드는 법, 필요한 재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정식 디자인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총 95개의 키트를 만들었습니다.”
 
- 개인적인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저의 작품에는 다 스토리가 있어요. ‘마지막 사랑의 하트’, ‘여덟 가지 사랑 이야기’, ‘가을의 전설’ 등 그 당시 시대와 문화를 대변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제 혼을 담아 만들죠.  제가 그렇게 만든 작품을 제자들에게 알려줘 제자들이 그대로 만들고 나면, 저의 감성까지도 그대로 느끼더라고요. 참 신기해요.(웃음)”
 
- 작품에 담긴 스토리 영감은 어디서 받습니까.
 
“저의 이야기를 담아요. 저의 스토리를 모르고 보시는 분들은 그냥 작품명이겠거니 하시죠.(웃음) 제가 정말 가슴 깊이 사랑을 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고 더 이상의 사랑이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사랑이라 느낀 적이 있어요. 그 감정을 살린 작품이 ‘마지막 사랑’이었죠. 그런데 마지막이라 여겼던 사랑이 또 돌아오더라고요.(웃음)”
 
- 가장 최근의 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완성은 했지만 아직 공개는 안 된 ‘홍콩 거북이’라는 작품이에요. 전시 때문에 홍콩에 갔을 때 혼자 야경을 보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거예요. 그 모습을 스케치해서 그 때 그 느낌을 담아 홍콩을 기리는 작품으로 만든 것이죠.”
 
- 비즈공예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두리안’이라는 열매를 아시나요? 두리안은 냄새는 역하지만 그 역한 냄새를 참고 한 입 딱 베어 물면 정말 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과일이에요. 저의 작품은 만드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굉장히 어려워요. 정말 배우시는 분들이 막 욕을 할 정도에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해서 완성을 하면 그 감동이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감동이 밀려옵니다. 과정은 어렵지만 그 과정을 참고 완정하면 정말 최고의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비즈공예의 매력입니다.”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공예사랑으로 이룬 한국공예사랑협회와 이오드림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여성들이 공예분야로 많이 진출하면서 여러 가지 협회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어요. 하지만 진정 공예를 위해서는 이렇게 체계 없는 협회 설립은 더 이상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가를 받은 협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던 오정표는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갔다. 공예의 높은 가치를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여주고, 일본에서의 활동, 앞으로 공예의 문화가치와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등을 제시하며 전국적인 협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2006년 ‘한국공예사랑협회’가 정식 출범하게 됐으며, 오정표는 초대 회장을 맡게 된다.
 
- 초대 회장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문체부에서 승인을 받을 때부터 지원은 일체 받지 않겠다고 했고, 협회의 다른 임원들에게 돈을 걷지도 않았어요. 지원을 받지 않아도 협회 자체적으로 수입을 내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계획했거든요. 지금까지 지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협회에 6천명의 회원이 활동한 다는 것은 다시 보면 공예만으로도 밥벌이가 된 다는 거예요. 공예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증명해보이고 있는 협회라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초대회장으로서 시스템의 초석을 만들어 놓고 4년째 되던 해에 회장직을 물려주고 2011년도에 주식회사 이오드림을 설립했습니다.”
 
- 초대 회장직을 내려두고 이오드림을 설립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협회를 만들어 공예로 수입을 내는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그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게 뿌리를 내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예별로 독립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이오드림은 저의 재능을 기부하고 싶기도 했고, 사회적 기업으로 공예 문화를 나누고 싶기도 해서 설립을 했어요. 저는 다친 다리로 인해 장애인 1급입니다. 지금 여기 사무실 공방에서 비즈공예를 만들고 있는 직원 중 2명의 청각장애인이 있고, 다른 장애인 직원들도 여럿 있어요. 이오드림의 설립목적은 함께하는 사회에요.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고 싶었고, 취약계층에게 조금이라도 그 문화를 함께 나누려 했던 거죠. 저는 취약계층에게 하루 한 끼의 걱정을 해결해주기 보다는 문화갈증을 해소해주고 싶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취약계층에게는 무료로 재료를 제공해 강의를 해드리고, 그 중 실력이 있는 분들은 채용해 일자리를 주어 제가 만든 기업문화를 함께 누리고 싶어요.”
 
- ‘이오드림’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드림(Dream)’은 꿈을 말하는 것이고요, 앞에 ‘이오’는 경영 개념에서 가져왔다고 볼 수 있어요. 경영은 기획, 제작, 판매, 관리 이렇게 4가지로 나뉘는데, 그런 개념으로 봤을 때 과연 저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무엇이 됐든 최고로 잘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제가 생각한 ‘최고’의 기준이 25%가 되는 것이죠. 100% 중 기획, 제작, 판매, 관리 4가지로 나뉘니까요. 하지만 최고치인 25%만 가지고는 회사가 운영될 수 없겠죠? 최고치 25%를 달성할 수 있는 4가지 분야의 최고들이 모두 모여야 제대로 된 경영이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 공예인들도 공예품을 만드는 제작만 최고라고 해서 잘 될 수 없다는 것이 되죠. 다시 말해 각자의 분야의 최고가 되자는 뜻입니다. ‘이오드림’은 총괄 관리를 하는 회사로 보시면 되고, ‘이오드림’ 외에 이오클래식, 이오와이어 등 많은 브랜드가 있는데 모두 최고를 뜻하는 ‘이오’가 항상 들어가죠.”
 

- 구슬공예 명인으로서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명인이 되고서 더욱 사명감을 느껴요. 이렇게 된 이상 구슬공예가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후세들이 지금 저의 비즈 기법들을 더 개발시켜서 더 훌륭한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요. 자신만의 창작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명인으로서 저의 책임이라 생각해요.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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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오정표 “비즈공예 하는 남자, 편견서 ‘반전’으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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