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62)] 6·25남침전쟁의 영웅임을 재입증한 백마고지 전투(하)

김희철 기자 입력 : 2020.10.13 15:12 ㅣ 수정 : 2020.10.13 15:12

전설적인 명장 김종오 장군은 적이었던 북한과 중국에서마저 군신(軍神)으로 위명을 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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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1952년 10월6일 시작된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38군(江擁輝)은 395(백마)고지 정상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지만, 김종오 장군의 9사단은 재차 역습을 가해 고지를 탈환하는 등 이 고지를 점령하기위해 10일 동안 국군과 중공군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반복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15일까지의 고지 쟁탈전 기간 동안에만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는 것이다. 전쟁영웅들이 무수한 피를 뿌리며 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기억해야한다.


▲ 수류탄을 들고 기관총 진지에 돌입해 자폭한 30연대 1대대 ‘육탄 3용사(3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의 동상과 철원에 위치한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에 있는 전쟁영웅 김종오 장군의 전시물 [자료출처=전쟁기념관/철원군]
 

영웅칭호 받은 중공군 335연대 괴멸에 결정적 기여한 국군 30연대의 육탄 3용사 


국군 29연대가 10월10일 06:30 드디어 21시간 30분의 교전 끝에 395고지를 또 탈환하며 역습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밤 고지는 또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김희철의 전쟁사(62)] 6·25남침전쟁의 영웅임을 재입증한 백마고지 전투(중) 참조) 


이때 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395(백마)고지 주봉을 사수하는 전술에서 새롭게 전환하여 과감하게 북진해 화랑고지와 북쪽 산맥의 장송고지까지 장악하여 중공군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과감한 만큼 그 위험부담도 컸다. 첫날 전투에서 화랑고지를 점령했던 중대는 백마고지와 화랑고지 사이로 공격한 중공군에 의해 거의 전멸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국군은 또 다시 자신의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다는 평을 들어야 했고 결국 9사단은 재차 과감한 공격을 결정했고 11번째의 혈전이 시작됐다.


10월12일, 먼저 30연대 3개 대대가 돈좌된 29연대를 초월공격하여 백마고지 주봉인 395고지의 탈환에 투입했으나, 적 엄호진지에서의 기관총 사격이 완강해 공격부대의 피해만 늘어나 전진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1대대 1중대 ‘육탄 3용사(3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가 13시20분경에 수류탄을 들고 기관총 진지에 돌입해 자폭하며 파괴시켰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백마고지 주봉을 다시 탈환한 후에 야간방어도 성공했다. 이어 28연대가 초월공격하여 화랑 및 장송고지를 탈취하며 전연대가 영웅칭호를 받은 중공군 112사단 335연대를 괴멸시켰다. 


그러자 중공군 38군은 112사단 336연대를 새롭게 추가 투입시켰다. 이날밤 장송고지를 지키던 28연대 1대대는 신병이 3분의 1이상이었고 남은 장교들 마저 거의 손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교가 쓰러지면 부사관이, 부사관이 쓰러지면 고참 병사가 지휘를 대신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며칠간의 전투가 장병들을 강인한 승부사로 바꿔 놓았고 이 격전으로 장송고지를 끝까지 사수했으나, 화랑고지의 거점 세 곳은 다시 빼앗겼다.


10월14일 다시 교대한 29연대가 9사단의 마지막 공세인 12번째 탈환전에 나섰다. 15일 오전까지 29연대가 기세를 몰아 중공군이 공격의 교두보로 삼고 있던 화랑고지의 거점과 395(백마)고지의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38군은 예하 112, 114사단을 축차로 철수시키며 전선에서 물러나면서 비로서 백마고지 전투는 끝이 났다.


▲ 백마고지를 최종 탈환 후 태극기를 휘날리는 국군 9사단 장병들과 백마고지전적비 [자료출처=전쟁기념관/청원군청]
 

병력 열세를 딛고, 화력 우세와 적시 적절한 예비대 투입으로 승리 


열흘간의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의 손실은 전사 8234명, 포로 5097명으로 38군 전체가 공격력을 상실했고 아군은 3428명이 전사했다. 


현리 전투를 비롯해 그동안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실망스러운 졸전을 거듭했던 한국군은 1951년 후반부터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에 따라 부대 전체의 재교육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6·25남침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을 소모했다.


국군은 겨우 1개 사단이 중공군 최정예 3개 사단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 있었지만, 9사단은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 탈취를 위해 강인한 투지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기간중 적시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 및 부대교대 등으로 부대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을 지을 받을 수 있어 4배의 포탄을 퍼부어댄 것이 승리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국군의 또 다른 대승인 용문산 전투 이후 병력의 열세를 화력의 우세로 메꿀 수 있음을 또 다시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9사단은 철의 삼각지를 지배하려던 중공군의 전략 기도를 꺾고 끝내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 팽더화이 사령관에게 "제38군 만세!"라는 축전을 받아 그때부터 만세군으로 불릴 정도로 중공군 내에서는 최정예 부대인 38군(江擁輝)은 궤멸상태가 되어 중공군 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났다.


현재 철원에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세워져 있으며 여기서 1.5km 떨어진 곳에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로 확보된 북한군의 노동당사가 위치해 있다. 현재 백마고지는 5사단 관할로 근처에 열쇠전망대가 있으며 신청하면 둘러볼 수 있다.

 
 
▲ 철원에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남으로 1.5km 떨어진 곳의 북한 노동당사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음원을 녹화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자료출처=철원군청/국방부]
 

밴플리트 장군이 가장 높게 평가, 중공군도 역시 유일하게 패배 인정한 백마고지 전투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6·25남침전쟁에서 한국군이 치른 전투 중 ‘백마고지(395m)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이 전투에 대한 연구를 미 육군에 지시하고 미 9군단 작전처는 사후 검토보고서(AAR)를 작성해 전 미군 부대에 배포도 했다.


유엔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날조하는 중공군 역시 6·25남침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했고, 적이었던 중공군과 북한군이 김종오 장군을 ‘군신(軍神)’으로 부르며 위명을 떨치게 된 전투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용사의 말에 의하면 야간에 백병전을 할 때 머리카락 길이로 피아 여부를 판별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머리를 박박 깎았고 국군은 머리가 길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에 전혀 안보이는 상태에서 한손으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만져 길면 살려주고 짧으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대검으로 베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턱~ 하고 올려서 만졌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가 죽일 가능성이 50:50 이었으므로. 다행히 아군이었는지 자신을 놔두고 다른 사람 머리 만지러 떠났다고도 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는 에피소드는 물론 실제 고지전 혹은 점령전하에서 야간백병전은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 총검이나 군용삽을 이용한 무차별적인 난투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6․25남침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 전쟁영웅이자 한국 육군사의 전설적인 명장 김종오 장군이다. 


그는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4년 24살의 나이에 일본군에게 학도병으로 강제 징용되었으나 다행히 일본의 패망으로 참전하기 직전에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여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31)로 임관했다.


그 후,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북한군 1대대를 유인 섬멸한 사직리전투 등 큰 전공을 세웠고, 이후 6․25남침전쟁을 불과 며칠 앞둔 1950년 6월10일 29세의 나이로 6사단장으로 보직되어 춘천·홍천 방면으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간이나 지연시켜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했다.  


또한 충북 음성군 동락리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하여 사살 1천 명, 포로 97명과 수많은 장비를 빼앗는 등 개전 이래 최초·최대의 전과를 올렸으며([김희철의 전쟁사](2)'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 참조), 같은 해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 작전에 나선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은 10월26일 초산을 점령, 한만 국경에 최초로 태극기를 꽂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51년 3사단장 재직시 현리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도 겪었다.( [김희철의 전쟁사](25) “중공군 제 5차 5월공세가 만든 최악의 패전 '현리전투', 3군단 해체 초래” 참조) 


허나 이후에도 백마고지전투 승리 등 6․25남침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한국군의 전설적인 명장이자 영웅으로 불렸던 그는 종전 후, 육사교장, 1·5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및 합동참모회의 의장 등 군의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수만의 적군을 물리친 그였지만 몸속 깊이 찾아온 병마와의 싸움에서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1966년, 4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김종오 장군은 마지막 병상에서 조차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니,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뤄 달라’는 유언을 대통령에게 남기며 일평생 조국을 향한 애국과 충절을 보여주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