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환종의 공군 이야기 (31)] 신사적 사고방식과 유머를 배운 공군본부 생활

최환종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9.07 14:23 |   수정 : 2020.09.23 11:37

공군본부 참모부 과장은 공사생도 시절 카리스마 있던 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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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공군대학을 수료하고 받은 보직은 공군본부 00참모부의 00담당장교! 공군본부는 출장차 몇 번 왔을 뿐, 근무는 처음이다.당시 공군본부는 계룡대로 이전해 있었다. 공군본부 00참모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고 소속부서로 갔다.

 

소속부서장인 00처장(대령)에게 신고 후 직속상관인 과장(K 모(某) 대령)에게 가서 인사를 했는데, 이 분은 필자가 사관생도 시절에 생도대의 옆 중대 중대장님(당시 소령)으로 계셨던 분으로 매우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런 분을 직속상관으로 모시게 되어 처음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팬텀기 조종사인 이 분은 평소에도 선이 굵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후배들을 많이 아껴 주었고,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했다. 이 분은 후에 2성 장군까지 진급하였고, 00비행단장과 00사령관을 역임한 후에 전역했다.

 

공군본부.png
공군본부 제공

 

필자의 자력서를 다 읽어본 과장은 필자에게 “공군사관학교 00기라고? 그런데 생도대에서 자네를 왜 한번도 못봤지?” 그러자 나도 모르게 이런 대답이 튀어 나왔다. “저는 생도 시절에 한번도 중대장님 사무실에 불려간 적이 없습니다!!!” 과장이 필자를 쳐다보더니 유쾌하게 웃는다. 생도시절에 생도대 중대장이나 훈육관에게 호출되어 불려 간다는 것은 십중팔구 좋지 않은 일이다. 또한 옆 중대 중대장실에 불려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갈 일이 없었다.

 

유쾌하게 웃고 난 과장은 과원들(모두들 필자보다 2~5년 위인 선배 장교들이다. 당시 필자는 부서 내에서 막내 장교였다)에게 대략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이 친구(필자를 지칭함)가 내가 생도대 중대장일 때 생도였는데, 내 사무실에 한번도 불려오지 않았다는구만. 앞으로 잘 지도해 주게! 하하하!” 과장의 웃음과 함께 잔뜩 긴장했던 필자의 긴장이 풀어졌다.

 

그날부터 기라성같은 선배 장교들의 지도 아래 공군본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공군본부에서는 1년만 근무를 하고 그 다음 해에 유도탄 포대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공군을 바라보는 시야가 많이 넓어졌고 방포사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많이 달라졌다. 야근도 무척 많았다. 그러나 몇 년 전에 경험했던, 필자가 대위 시절의 오산기지에서와 같은 무의미한 야근은 없었다. 업무가 힘은 들었지만 배울 것도 많았고 사무실 분위기가 매우 긍정적이었기에 보람을 느끼는 마음으로 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보직이 변경될 때마다 이사는 큰 문제였다. 필자가 보직 변경에 따른 이사 문제에서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은 대령 진급을 몇 년 앞 둔 시기부터였다. 즉, 결혼 후 소령 때부터 중령 진급 후 상당기간까지 보직이 변경될 때마다 이사 문제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군(軍)에서 제공하는 아파트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일부 대도시 지역으로 보직이 변경되면 당장 이사할 집이 없어서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고, 따라서 부인과 자녀들은 이사할 집이 나올 때 까지 전에 살던 곳에 남겨 두고 남편만 새로운 보직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독신자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대위 때 결혼해서 전역까지 24번 이사,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사

 

공군에서 장교들의 보직 이동은 평균 1 ~ 2년에 한번이다. 자녀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자녀들이 아버지의 보직 이동주기에 맞추어 학교를 옮겨야 하므로 부모나 자녀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사하는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삿짐 센터가 생기면서 이사하기가 그나마 편해 졌지만, 그 전에는 일일이 이삿짐을 꾸려야했다. 참 어려운 시기였다. 필자는 대위때 결혼해서 전역할 때까지 이사를 24번 했다. 군인의 아내가 모두 그렇듯이 이사는 늘 아내 담당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공군본부에 전입신고 후, 몇 달 동안은 군(軍) 아파트 입주 사정이 좋지 않아서 독신자 숙소에서 지냈다. 토요일 오후에는 송탄에 가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는 다시 계룡대로 와서 월요일 근무에 대비했다. 계룡대의 독신자 숙소는 한 방에 장교 둘이 사용하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대체적으로 여건이 좋았다. 계룡대의 공기도 맑았고, 부대 내의 식당 메뉴도 훌륭했다.

 

혼자서 지내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그 시기에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서 아내가 혼자서 두 아이를 돌보며 송탄에서 생활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몇 달 후에 공군에서 지은 신축 아파트가 완공이 되면서 아파트를 배정 받고는 바로 이사를 했다.

 

공군본부에서 생활하면서 공군에 대하여 많이 배웠고, 특히 기안지의 한 글자 한 글자에 심혈을 기울이는 선배 장교들을 보면서 ‘軍 戰力 건설’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실무적으로 배운 시기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대위 시절 경험한 오산 기지의 부대나 최근에 경험한 방포사와는 업무의 내용이나 부대 분위기가 질적으로 많이 차이가 남을 느꼈다.

 

당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1년간의 본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사무실 구성원들의 마음 씀씀이와 그들의 신사적인 태도(또는 사고방식의 수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무실에는 유난히 입담이 좋은 선배 장교들이 몇 명 있어서 가끔 사무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거나 힘들 때는 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그런 분위기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꿔 나갔다.

 

그리고 또 하나의 활력소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하다가도 전투체육의 날(매주 수요일 오후로 기억한다)이 되면 처장부터 행정 부사관까지 모두들 운동을 하러 나갔다. 주로 부대 내에서 테니스를 했고, 가끔은 인근 산으로 등산을 했는데, 운동 후에는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이런 자리는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없애고 새로운 기운을 충전하기에 충분했다.

 

매년 여름에 실시하는 을지연습도 끝났고, 사무실의 주 업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어느 덧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도는 가을이 되었다. 가을이 되면서 인사참모부에서는 장교들의 내년도 보직을 심의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각자 희망 보직을 1, 2, 3 지망 순으로 정하여 제출하면 각 특기별로 종합하여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게 된다. 필자는 다음 해에 유도탄 포대장으로 나갈 대상자였고, 방공포병 선배 장교의 조언과 필자의 생각에 따라 희망 보직서에 ‘방공포병 사령부 판단(지시)에 따르겠음’이라고 적어서 제출했다.

 

보직심사 결과 필자의 내년도 보직은 ‘군산 유도탄 포대장’으로 결정이 되었다. 부임 시기는 다음해 1월 중순! 드디어 유도탄 포대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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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현재)

 

 

최환종 칼럼니스트기자 3227chj@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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