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투분석] 한국 대표제약사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의 ‘독립운동’과 ‘무소유’정신, 광복절에 재조명돼

한유진 기자 입력 : 2020.08.15 07:03 |   수정 : 2020.08.15 07:03

일제치하 치열한 ‘독립운동’과 유한양행을 사회환원한 ‘무소유’는 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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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한유진 기자] 15일 광복 75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치열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1895~1971)박사의 ‘이타적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민족기업의 씨앗을 키우면서도 항일전선에 직접 뛰어들었고, 운명의 순간에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던 유일한의 삶의 궤적은 사후에도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 제약사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매출 기준 국내 1위의 위치를 지켜왔다.

 

유한양행은 다양한 조사에서 17년 연속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뽑히고 있다. 그 뿌리가 창업주 유일한 박사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 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라고 말했던 유 박사의 기업정신을 이어온 결과이다. 현재 유한양행은 헌혈, 연탄 나눔, 학술 연구 지원, 국가유공자 지원에 앞장서는 등 착한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유일한 박사.png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 [그래픽=한유진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 기업가의 삶 버리고 독립운동 전선에 합류 / OSS요원 활동은 사후 비밀문서 공개로 알려져 /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유일한 박사는 1904년 9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떠나 1919년에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하는 등 남부럽지 않은 유학 생활을 보냈다.

 

졸업 후 1922년 ‘라초이식품회사’를 창업,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간도를 방문하게 된 유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인들은 온갖 질병을 앓으면서도 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 박사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1926년 미국에서 운영하던 식품회사의 주식을 매각하고 국민 건강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이후 1942년에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돌아가 재미 한인들로 구성된 무장독립운동단체 맹호군을 주도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기업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무장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유 박사는 1945년 50세의 나이에도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한국광복군 국내 침공작전인 ‘냅코(NAPKO)작전’ 핵심요원으로도 참여하며 고된 군사훈련까지 견뎌냈다. 그는 이 같은 사실을 주변에 조차 알리지 않았다.

 

OSS의 비밀문서가 유 박사의 사후인 1970년대에 공개됨으로써 유 박사가 OSS요원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독립운동 이력을 스스로 내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밝히지 않았던 셈이다. 때문에 유 박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은 사후에 연구가들에 의해 재조명됐다. 유 박사는 유명을 달리한 지 24년만인 1995년에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 해에 김영삼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전재산을 사회환원, 손녀 학자금 1만달러만 증여 / 2019년 유한양행 사업보고서 통해 ‘무소유’ 확인돼

 
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유일한 박사의 ‘독립운동’ 정신은 마지막 순간에 유한양행의 사회환원이라는 ‘무소유’ 결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는 보유 주식 14만941주를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당시 아직 대학을 나오지 못한 손녀 유일링에게 대학졸업까지 학자금 1만달러(한화 약 1200만원)를 지원한 것이 유산의 전부였다.

 

유일한 박사는 가족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했다. 유 박사는 아들을 비롯한 친척들이 경영에 참여하여 회사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 박사의 친척들이 유한양행의 약품을 돈을 내고 사먹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1969년 경영의 제일선에서 은퇴하여 조권순 부사장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회장직으로 물러났다. ‘가족 승계’가 당연시 됐던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체제는 50년을 넘겨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의 유한양행이 지배구조(governance)측면에서 창업주 일가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2019년 유한양행 사업보고서에서도 선명하게 확인된다.

 

유한양행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주식소유 현황001.png
[자료제공=dart]

 

최대주주의 주요경력 및 개요ㄹ001.png
[자료제공=dart]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유한양행의 최대주주는 유한재단이다. ‘유’씨 성을 가진 인물은 없다. 특수관계인에도 ‘유’씨 성은 찾을 수 없다. 한국의 주요기업들의 사업보고서를 보면, 최대주주가 창업주의 후손이라는 점과 대조된다.

 

유한재단을 경영하고 있는 현 이사장도 외부인사 출신인 한승수 전 국무총리다. 유한재단 이사회를 구성하는 임원 현황에서도 유 박사의 가족과 친인척은 배제돼 있다. 유한재단 이사회는 이사장을 포함해 총 12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유한양행 관련인물, 정관계, 학계, 경제계 인사 등이다.

 

유한재단 임원 현황001.png
[자료제공=dart]

 
■ 민족과 국가를 위한 삶, 그 이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 살아


유일한 박사는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한 바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유 박사가 1962년 서울시가 제2한강교 건설을 위해 제안한 토지수용을 공익차원에서 받아들였던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서울시가 지급한 금액은 시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 박사는 흔쾌히 수용했다.


유 박사는 교육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3년 개인소유주식 1만7천주를 장학기금으로 연세대와 보건장학회에 기증하였다. 1964년에는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건립하였으며, 1965년에는 유한교육신탁기금 관리위원회를 발족하고 개인주식 5만6000주를 희사하였다. 이때도 회사의 재산이 아닌 자신의 재산을 투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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