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41) 잊혀지지 않는 전쟁, 벨기에군의 학당리 전투

김희철 기자 입력 : 2020.07.03 17:33 ㅣ 수정 : 2020.07.03 17:33

학당리 전투의 화살머리고지에서 '9・19 군사합의'에 따라 남북공동유해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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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국방부는 지난해에 이어 4월20일부터 '9・19 군사합의' 합의사안인 남북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사전 준비차원에서 벨기에군이 전투했던 화살머리고지일대 우리측지역에서 지뢰제거 및 유해발굴 작업을 재개했다.

 

우리 군은 지난해 총 2030점(잠정 유해 261구)의 유골과 6만7476점의 유품을 발굴했으며, 국군 전사자 일곱분의 유해에 대해 신원확인 및 유해봉안・안장식을 거행했다. 또한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해 비무장지대내 잠들어 계신 만여 분의 6・25전쟁 전사자에 대한 유해발굴을 지속해 마지막 한 분까지 하루빨리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2020년 6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학당리전투 유해발굴작전 현장을 확인하는 서욱 육군참모총장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


영국군과 미군에 뒤지지 않는 벨기에군의 용맹성을 과시한 학당리전투


38도선 인근이었던 철원군 바로 위쪽 지역인 화살머리 고지에서 격전을 치룬 학당리 전투는 6.25남침전쟁 당시 벨기에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사이에서 발생한 국지전으로 1951년 10월10일부터 13일까지 벌어졌다. 


벨기에군은 중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은 철원군을 확실히 확보하게 되었다.


화살머리 고지는 1.5km 정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은 지역으로 각 방향마다 수백 미터나 되는 평지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립된 능선이다. 화살머리 고지는 대부분이 암석 지역이며 엄폐하기에 완벽한 지역이기도 했다. 북쪽 끝 지점은 고지에서 가장 가파르고 높은 지역이었고 중앙 지역은 최남단 지역의 암반 노두 직전에 위치한 고원 지대였다. 이곳은 미국 육군에 의해 391고지로 명명되었다. 


벨기에 대대가 학당리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0월 10일 오후 2시쯤이었다. 벨기에 대대는 다른 유엔군 위치보다 4마일 정도 앞으로 돌출된 무인 지대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있는 미 65보병여단이 1951년 10월 10일부터 담당하는 곳이기도 했다. 


벨기에 대대 도착 직후 C 중대가 북쪽 봉우리에 자리 잡았고 B 중대는 중앙 고원의 북쪽 구역에 참호를 파고 대기했다. 남쪽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할 수 없다는 판단과 박격포 공격을 위한 본부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에서 40명의 중화기중대가 그 지역에 자리잡았는데 이 지역은 대대의 다른 부대와 약 300m에서 4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벨기에 파견대는 일반적 분견대인 900명보다 훨씬 적은 560명으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전력이 부족했는데 이는 1951년 2월부터 한국 전쟁에 참전한 많은 용사들이 부대 전환 배치로 인해 귀국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A 중대를 구성하고 있는 룩셈부르크 파견대도 마찬가지였다. 1951년 9월 한국 전쟁에 처음 참전한 벨기에 군인들은 귀국했고 보충 병력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화살머리 고지 도착 직후부터 벨기에군은 중공군 76mm 포와 박격포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벨기에 병사 1명이 전사했고 몇몇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10월 10일 저녁에는 중공군 정찰대가 B 중대의 위치를 향해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위치를 사수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을 인지한 미 3사단의 사단장 로버트 소울은 학당리에 헬리콥터를 타고 방문도 했었다. 10월 11일 밤에 벨기에군은 또다시 인접 지역인 317고지로부터 날아오는 중공군 60mm 포에 피해를 입었다. 


1951년 10월 12일 이른 새벽 소규모의 중공군 공세가 재개되었다. 오전 3시 45분에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적 정찰대가 중화기중대를 공격했다. 미군이 105mm 포와 155mm 포로 중화기중대를 지원하여 적은 격퇴했다. 이 공격으로 벨기에 병사 1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했는데 부상자 중 2명은 카투사 대원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B 중대의 정찰대가 488고지를 올라가 점령한 뒤 이 곳을 중공군 관찰지대로 삼았다. 2번째 정찰 부대가 317고지를 오르던 중 파괴된 적 무기고를 발견하고 학당리로 돌아왔다. 


그 날 야간에 두꺼운 안개가 끼면서 오후 11시 30분부터 중공군은 안개를 틈타 중화기중대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 부대는 완벽한 침묵 속에서 철조망을 타고 정찰 부대의 최전선을 향해 진격했다. 철조망에는 기관총과 조명탄이 있었기 때문에 벨기에 대대는 이것을 이용하면서 중공군을 타격할 수 있었다. 동시간대에 B 중대와 중화기중대도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공군 부대는 벨기에군의 지휘부로 쓰이던 지역까지 점령했다. 


13일 새벽 2시에 새로운 중공군의 공세가 중화기중대를 향해 또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벽 4시가 되자 주공세는 격퇴되었고 벨기에군은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중공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동이 틀 무렵 오직 4명의 중공군 병사만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코만도 작전과 폴차지 작전에([김희철의 전쟁사](40) 중공군의 '유엔군 보급선 차단'을 막아낸 호주대대의 마량산 전투 참조) 참여한 중공군 제141사단 병사들이었다. 


벨기에군은 정오 즈음 317고지를 다시 확보했지만 C 중대의 정찰대는 488고지에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안개가 걷힌 후 벨기에 전선에서는 98구의 중공군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실질적인 중공군의 피해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후 미 3사단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벨기에군은 UN군 방어선 일대로 철수해야 했으며 이들은 362고지에 재배치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벨기에군은 ‘학당리’라고 쓰여진 부대 깃발을 수여 받았고 또한 전투에 참전한 벨기에군 용사들에게 ‘학당리 훈장’도 추가되었다. 

 


▲ 화살고지일대에서 발굴된 유엔군 추정 유해와 유해발굴단 병력이 유해를 수습하는 모습 [사진자료 =국방부/연합뉴스]


벨기에 참전용사들의 한국사랑, 작은 마을에 '한국전쟁 기념박물관' 세워


벨기에 북부 작은 마을 틸렌에 벨기에 육군 제3공수대대 병영 막사 건물이 있다. 정식 이름은 '제3공수대대, 피에르 가일리 부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가일리 대위는 1953년 중공군과의 잣골 전투에서 전사했다.


부대 중앙 연병장 옆 아담한 단층 건물이 ‘한국전쟁 기념박물관’이다. 한국전 참전 부대였던 제3공수대대와 참전 용사들의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아래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참전 용사 코르넬리 페이트(84)씨이다. 평생을 군에서 보내고 은퇴 이후에도 한국전 기념관을 위해 헌신해온 그에게 기념관을 소개하는 일은 필생의 과업이자 즐거운 봉사이다.


1950년 당시 군사학교를 거쳐 군복무 중이던 페이트씨는 한국전쟁 참전 병사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참전을 결심했다. 참전 당시 하사였던 페이트씨는 벨룩스 대대(벨기에 대대에 룩셈부르크가 소대 병력으로 합류) 구성 초기부터 참여했다. 


벨룩스 대대는 약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후 1950년 12월 18일 벨기에 앙베르 항에서 영국 수송선 카미나호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카미나호에는 당시 22살이던 페이트 하사도 타고 있었다. 페이트 씨는 필리핀 마닐라, 일본 사세보를 거쳐 1월 31일 부산항에 들어왔다.


그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후까지 남아 남방한계선 진지 구축 공사 등에 참여한 후 그해 9월 4일 귀국할 때까지 거의 만 3년을 한국전쟁에 복무했다.

 
 
▲ 6・25남침전쟁 참전용사인 벨기에의 코르넬리 페이트(84)씨와 벨기에 틸렌에 있는 ‘제3공수대대 한국전 기념 박물관’ 모습 [사진자료 =연합뉴스]
 

참전 용사 코르넬리 페이트, 벨기에군의 임진강・학당리・잣골 전투에 모두 참여


참전 용사 코르넬리 페이트는 기념관에 전시된 지도와 전투 지형 모형 앞에서 벨룩스 대대의 전과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며 특히 함께 싸웠던 영국군과 미군에 뒤지지 않는 벨기에군의 용맹성을 강조했다.


기념관 가운데에 놓인 패널에는 매일 매일 산 자와 죽은 자의 숫자가 표시된다. 단 한국전 참전 벨기에 병사의 총 인원은 3171명, 전사자 106명으로 이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국 후 죽은 전우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수는 수시로 바뀐다. 아직 살아 있는 전우는 1075명. 사망자 비율은 66.1%. 참전 용사 대부분이 이제는 70대 후반이나 80대여서 생존자 숫자는 더 빠르게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1985년 근 40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페이트씨는 1990년 옛 전우들과 함께 ‘한국전 기념관’을 만들었다.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 한국전쟁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한 페이트씨와 동료들은 제3공수대대의 도움으로 아담한 전시실을 마련하고 손수 전시물품을 채웠다. 그들은 옛 전우들로부터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영국군 및 미군 측 자료도 구해 전시관을 꾸몄다.


페이트씨는 "처음 시작할 때는 보잘것없었지만 이후 조금씩 더 나아졌다. 처음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국전 기념관 전시실 입구에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가일리 부대에 들어오면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기념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와 전쟁 직후의 한국을 기억하는 페이트씨에게 한국의 발전은 경이와 보람이다. 그는 "3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많은 한국인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준 데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 인생을 이보다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페이트씨에게 6・25남침전쟁은 '잊혀지지 않은 전쟁'이다. 지구 반대편의 참전용사들도 잊지 않는데, 하물며 전쟁 당사자인 우리 국민들은 ‘6・25남침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 최악의 비극을 반드시 기억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