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조용준 한국화이바 창립자① 경력 : 실패를 먹고 사는 위기의 승부사

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입력 : 2020.03.30 13:33 |   수정 : 2020.03.30 13:40

90세 노장의 지론, “독창력만이 살 길이다”란 자서전에 담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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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한국화이바(Hankuk Fiber)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재료연구소를 기반으로 복합소재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유리섬유와 카본섬유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신소재 전문 기업이다.

 

한국화이바는 1972년 설립됐으며, 1978년에 방위산업체로 지정됐다. 본사는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으며, 차량사업부의 공장은 함양군에 있다. 사업 분야는 유리섬유, 버스, 철도차량 부품, 파이프, 케이블카, 우주항공, 방위사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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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 9월 29일 조용준 한국화이바 창립자가 조선대학교 개교 51주년 기념식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국카본]

 
이 회사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이끌어온 조용준 한국화이바 창립자는 1930년생이다. 지난해 자신이 걸어온 90년 인생을 되돌아보며 수많은 성과와 함께 뼈아픈 실수까지 가감 없이 담아낸 ‘독창력만이 살 길이다’란 제목의 자서전도 발간했다.

 

조 회장은 일제시대인 1944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호기심 많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동네병원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원장실에 있는 일본어로 된 의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의사 자격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세상은 바뀌어 독학으로 의사가 되기는 어려워 우여곡절을 겪다가 고향인 담양을 떠나 부산의 한 병원에서 원장의 조수로 일하게 됐다. 어느 날 그는 낚시를 좋아하는 병원장이 당시 쌀 한 가마 값으로 일본에서 밀수입된 낚시대를 구입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낚시대 소재인 ‘유리섬유’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외국어 서적을 파는 책방을 뒤지면서 일본어 공업서적을 독학했고, 급기야 병원장을 설득해 병원 옥상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자금을 지원 받은 후 일본에서 유리섬유 원단을 들여와 각고의 노력 끝에 국내 최초로 수제 유리섬유 낚시대를 개발했다.

 

이후 제품의 질이 향상되면서 낚시대는 생산하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는 대량 생산체제를 갖춘 낚시대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새로운 투자자를 찾았고, 1966년 ‘은성사’란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국내 낚시대 시장은 은성사가 장악했지만, 일본에서 유리섬유 원단을 적기에 공급받지 못해 생산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유리섬유 낚시대 개발, 공급 차질 빚자 ‘역발상’ 도전

 

조 회장은 결국 1972년 한국화이바공업사를 설립하고, 원사만 일본에서 수입해 유리섬유 원단을 직접 만드는 작업 공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신식방직기를 살 돈이 없어 농촌에서 쓰던 베틀 두 대를 구입해 직조에 들어갔는데, 원시적 방법이긴 했으나 유리섬유 천이 짜져서 국내 최초로 원단을 생산했다.

 

이 당시 원단의 품질은 일본 수입품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상품화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낚시대를 만들 때 수지를 연탄불에 끓이면서 오랜 기간 실험을 통해 얻은 수지의 응용기술을 잘 접목시켜 원단의 품질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는 일본에서 수입하던 유리섬유 원사를 직접 생산하겠다는 새로운 모험을 시도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원사를 만드는 재료들을 배합하여 녹인 후 미세한 구멍의 백금 노즐을 통해 원사를 뽑아내는 ‘용융로(熔融爐)’가 있어야 했다.

 

1977년 그가 용융로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회사 간부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벌이기보다 일본에서 용융로 설비를 도입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그는 “만약 우리가 일본에서 시설과 기술을 도입하면 영원히 그들에게 끌려갈 것”이라며 개발을 밀어붙였다.

 

이후 몇 번 일본에 드나들며 어렵게 유리섬유 생산 공장을 견학할 수 있었지만 시설을 보면서 메모도 할 수 없어 머릿속에 기억해두는 정도에 그쳤다. 그들이 겉모습만 보여줬지만 그래도 큰 도움이 되었고, 용융로 제작에 필요한 정보와 관련 서적들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기술 독립 위해 목숨 걸고 용융로 개발, 비웃던 일본인 기술자도 놀라
 
조 회장은 자신이 직접 공부하고 엔지니어들과 토의하면서 제작비가 적게 드는 간접 가열식 용융로 개발에 착수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방식이었지만 일본식 용융로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 당시 회사 형편에서 제작 가능한 용융로였기에 연구에 몰두했고, 2년여 만에 개발을 완료했다.

 

그동안 연구에 몰두하다가 건강이 악화돼 입원한 병실에서 기술 서적을 보다가 아내가 책을 빼앗으며 목숨이 중하지 용융로가 뭐냐며 울부짖던 일도 생각났고, 공장 안에서 용융로만 생각하다가 쇠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한동안 고생했던 일 등 어려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 기술로 만든 용융로에 불을 붙이는 순간, 그는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을 모두 잊고 직원들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쁨의 시간은 잠시였다. 가동된 지 한 달도 못돼 용융로가 파열됐다. 경제적 손실은 물론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주위 사람들의 조롱이었다.

 

용융로를 처음 설계할 때 일본인 기술자에게 자문을 의뢰했는데, 현재 설계 방식대로 만들면 생산성은커녕 실험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일본인 기술자는 자기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라며 비아냥거렸고, 개발팀 중에서 반대하던 직원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조 회장은 결코 좌절해선 안 된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직원들 앞에 섰다. 그는 “비록 개발에 실패했지만 그만큼 기술을 축적했다”면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어 개발팀을 독려하면서 곧바로 두 번째 용융로 개발에 착수했다. 처음 개발한 용융로가 폭발한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여러 가지 기술을 보완하여 1년 만에 새 용융로를 완성했다.

 

첫 번째 용융로보다 용량이 크고 원사를 뽑는 방사구가 5대인 것이었다. 행여 또 다시 파열될까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석 달이 지나도 이상 없이 원사를 뽑아냈다. 드디어 원사에서 원단까지 완전 국산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설계 방식을 비웃던 일본인 기술자도 공장을 돌아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두 번 실패 후 성공해 세계 시장 석권, ‘나프타’ 승부수로 연료비도 낮춰

 

그러나 가동된 지 6개월 만에 두 번째 용융로도 파열됐다. 그럼에도 조 회장은 놀라지 않았으며, 이미 축적된 기술이 있으니 계속 도전해야겠다는 의지만 불태웠다. 하지만 개발팀 기술자가 이런 방법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자 회사 내부에 용융로 개발 반대파가 결성됐다. 그는 이들을 설득하다가 결국 일부 간부들을 퇴출시키는 용단을 내렸다.

 

그리고 더욱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이전보다 생산용량을 늘린 세 번째 용융로 제작에 들어갔다. 불과 6개월 만에 새로운 용융로가 완성됐고, 좋은 품질의 원사를 뽑을 수 있었다. 아직은 일본에서 수입한 원사보다 품질이 다소 뒤떨어졌지만 낚시대 소재로는 충분하여 일본 제품보다 훨씬 싼 값으로 낚시대를 공급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낚시대 소재는 1㎡당 10,000원을 호가했으나 한국화이바는 이를 국산화해 1㎡당 3,000원에 공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산 제품은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고, 1977년 한국이 100억불 수출을 달성할 때 낚시대류만 4억불을 차지해 세계 시장의 70%를 석권하는 등 한국 수출의 원동력이 됐다.

 

조 회장은 생산원가를 줄이기 위해 연료 개발 과정에서도 엄청난 모험을 했다. 당시 용융로에 사용되는 원료는 LPG 가스였는데 값이 비싸게 들었다. 그는 LPG의 반값인 ‘나프타’로 대체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나프타에 열을 가해 기체화하면 LPG처럼 사용할 수 있으리란 엉뚱한 발상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화학 엔지니어들은 펄쩍 뛰었다. 나프타에 열을 가하면 휘발유에다 불을 댕기는 것과 같은데 그처럼 위험한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적당한 온도의 열을 일정하게 가하면 기체화할 수 있으리란 믿음을 버릴 수 없어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험에 들어갔다. 그런데 실험 과정에서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두려움 접고 1% 가능성 도전…조선대, 명예공학박사 학위 수여

 

폭발음이 워낙 커서 공장 주위에 사는 주민들이 놀라고 공장 유리창도 모두 깨졌지만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그는 실험을 중단하지 않고 원인을 분석한 결과 열의 전달이 일정하지 않아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이번에는 옥상에 설비를 하여 다시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고, 이후 연료비를 절반으로 줄여 생산원가를 낮출 수 있었다. 

 

조 회장은 기술 개발에 착수할 때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일단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을 갖고 검토에 들어가 가능성의 끄트머리만 발견하면 도전하고 본다. 실패할 확률이 더 많지만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7년 9월 조 회장은 조선대학교에서 개교 이래 두 번째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조선대학교가 학위를 주겠다고 제의하자 조 회장은 연구 업적도 없다며 망설였다. 하지만 당시 김기삼 총장은 “조 회장님의 복합 소재에 관한 연구 업적은 단순한 박사학위 논문에 비할 수 없으며, 소재 분야에 끼친 업적을 높이 평가해 드린다”고 말했다.

 

학위 수여식을 마치고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조 회장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오늘 당신 아들이 배우지 못한 설움을 이기고 왔노라”고 고했다. 그는 “아들을 중학교에 진학시키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한을 품고 돌아가신 어머님이 박사모를 쓴 내 모습을 보고 당장에라도 뛰어나와 껴안으실 것 같았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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