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16)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비호산 전투)과 맥아더의 오판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19.11.29 16:38 |   수정 : 2019.11.2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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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 6사단 7연대 1대대가 1950년 10월26일 14시, 압록강 초산진에 최초 도착하기 일주일전인 10월19일 이미 중공군 9/13병단 30개 사단 약 38만명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사진은 1950년 10월19일,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사진제공=국방부]
마오쩌둥, 스탈린 요청받고 1950년 10월 3일 참전 결정

중공군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건너 북한 진입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중국은 북한과 긴밀하게 협조를 해왔다. 중국은 7월에 미군이 참전하자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동북지역으로 파병하였으며, 대만침공을 연기하였다.

1950년 8월말에 인민군의 낙동강 공세가 실패한데 이어,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지자 북한은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하였고. 마오쩌둥은 10월 1일부터 참전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미 9월 30일에는 중국외상 저우언라이가 ‘UN군이 38선을 넘어온다면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10월 2일~4일의 회의에서 참전을 확정지었으며 10월 15일에 압록강을 돌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8일, 동북변방군이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되었고, 사령관으로는 펑더화이가 임명되었다.

중국은 소련에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일성에게 참전을 통보하였다. 12일, 소련의 항공지원이 불가하다는 소식을 듣자 잠시 출병중지 명령을 내렸으나, 13일에 이 결정이 번복되어 소련 공군과는 별개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드디어 10월 19일,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중공군은 구성-오로리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UN군이 오로리로 진격중인 상황이었기에 중공군은 작전을 바꾸어 기습공격으로 나섰다.

맥아더사령관과 참모진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오판

유엔군은 거대한 중공군의 포위망 속으로 걸어들어가

10월 15일의 웨이크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초반에 개입했다면 전세에 큰 영향을 줬겠지만 지금은 그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압록강 인근의 종공군은 기껏해야 10만-12만 5000명 정도에, 실제로 강을 도하한건 5만-6만명 선이다”라고 호언 장담하면서 “중국은 항공 지원이 전혀없는 상태인데 반해, 아군은 한반도내에 기지설치를 완료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일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온다면 인류역사상 최대의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러한 맥아더의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국내정세가 많이 혼란스러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참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공군을 얕잡아 보았고, 크리스마스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중공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중공군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고, 공군력과 해군력을 이용하면 중공군을 쉽게 격파할수 있다. 첸놀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을 타고 다니면서 항공기 500기만 풀어놓으면 된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UN군은 오랜 진격으로 지쳐있었고, 분산되어 있었다. UN군은 거대한 중공군의 포위망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최악의 실수를 하게되었다. 당시 중공군 포로들이 포획되었고, 정보참모 윌로비에게도 보고되었는데, 윌로비는"그저 중국에 살던 조선인에 불과하다"며 참전 자체를 일축하였다.

▲ 중공군 1차공세와 비호산 전투 상황도[자료제공=이우형교수/국립현충원]
중공군의 1차공세에 따른 청천강선 비호산 전투는 중공군에 대한 첫 승리로 막연한 공포감 해소

국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에 태극기를 꽂았지만,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철수해야 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UN군 사령부는 방어로 전환하고 청천강선에서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국군 미1기병사단은(8기병연대와 5기병연대) 국군 15연대의 엄호를 받아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철수도중에 15연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어 8기병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됐다.

미 5기병연대가 구출작전에 나서 1대대와 2대대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3대대는 탈출하지 못했고, 5기병연대의 구축작전도 실패하면서 결국 3대대의 구출은 포기되었다. 3대대는 중공군에 맞섰지만,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미1군단과 국군 2군단이 청천강으로 철수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방어선의 형성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청천강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비호산 일대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비호산은 개천-안추-순천의 도로와 철도를 통제할수 있고,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감제할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거기다 비호산이 점령된다면 미 8군 전체가 붕괴되어 버릴수도 있었다.

최초 국군 제7사단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덕천-구장동간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는 동시에 군단의 동측방을 방호하라”는 구두명령을 군단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제7사단장으로부터 부대가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은 군단장은 작전계획을 수정하여 개천 동쪽의 비호산 방어임무를 제7사단에 부여하였다.

그리고 청천강 계곡으로 침투하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1개 연대를 개천(군우리) 북쪽에 배치해 미 제7기병연대와 함께 대비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단은 즉시 연대를 이동시켜 11월 2일 오후에 진지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때 제7사단은 약 1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고 장비는 사단 T/E의 90%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중공군은 제13병단 예하의 제38군단으로서 예하에 제112사단, 제113사단, 제114사단을 둔 약 30,000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장비는 125㎜ 및 160㎜ 곡사포, 82㎜ 및 120㎜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과 소총 등을 보유하였으나, 미군 1개 사단 장비의 54%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성능도 낙후되어 있었다.

11월 3일부터 중공군38군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진지에 있던 7사단 3연대는 중국군의 파상공격으로 유무선 통신이 모두 두절된 상태에서 3시간에 걸쳐 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로 비호산 정상은 3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벌어졌다. 3연대는 비호산 정상에서 육박전과 혈투 끝에 새벽녘에는 결사대를 편성 육탄공격을 펼쳐 적을 몰아내고 고지를 확보하였다.

1950년 11월 5일 아침 사단장은 제3연대와 예비대인 제8연대를 교대시켰다. 격전을 치른 제3연대는 개천의 조양국민학교에 집결해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제8연대는 비호산 주봉에서 청천강 남안으로 연결된 북쪽 능선 일대에 편성된 진지를 강화하고 수색대를 파견해 적정 수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제5연대는 비호산 남쪽의 535고지-760고지간의 진지를 강화하고 적과 대치하였다.

쌍방 간에 수색전이 전개되던 11월 5일 새벽 3시에 적은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중국군 제38군단은 개천을 탈취하기 위해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비호산 동쪽의 제5연대를 공격하였다. 덕천-개천간 측방도로를 장악한 적은 비호산 동남쪽 2㎞ 지점에 위치한 535고지의 제5연대 제2대대 진지 정면에 병력을 집중투입 했다.

중국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제2대대 진지에서는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결국 적의 인해전술에 밀려 제2대대 진지가 무너졌다.

이는 아군의 방어 진지에 연쇄적인 충격을 주었다. 방어진지가 무너져 흩어진 제5연대는 2㎞ 후방지역으로, 동쪽의 미 제5연대전투단은 1㎞ 후방지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호산 주봉의 제8연대 제2대대도 협상참 계곡으로 밀려 비호산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개천마저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7사단은 11월 6일 아침 8시부터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적의 진지를 초토화시킨 후 제5연대와 제8연대로 고지 남북에서 협공작전을 전개하였다. 남쪽의 제5연대는 신성리에서 미 제5연대 진지를 초월하여 535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의 저항이 완강했으나 한번에 격퇴시키고 비호산 진지를 탈환하였다. 중공군은 전선에서 이탈하였으며, 결국 중공군의 1차공세는 여기서 멈추었다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한 후, 11월 9일과 10일의 이틀간에 걸쳐 미 제1기병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개천으로 이동해서 부대정비에 착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을 격퇴한 국군 제7사단의 승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호산 전투는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라는 의미가 컸다. 그밖에도 초창기 연패로 인해 국군 장병들이 느끼고 있던 중국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또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군 장병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유엔군 B-29기의 대규모 폭격과 중공군 1차공세시 비호산 전투 모습 [사진제공=국방부]

대규모 공습과 국군 7사단의 승리에 도취된 유엔군의 재반격,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빠져…

UN공군역시 대규모 공습에 나섰고, ‘신의주가 안된다면 다른 도시들을 시험삼아 불태우자’는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의 끈질긴 요구 끝에 맥아더가 “스트레이트마이어, 그렇게 원한다면 모두 태워버리시오, 강계 외에도 적에게 중요한 시설이라 판단된다면 다른 소도시들도 모조리 시험삼아 불태우고 파괴하시오”라고 지시하였다.

11월 4일-5일간 청진-강계에서 B-29에 의한 소이탄 대량폭격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1월 8일에는 신의주 폭격이 시작되었다. 폭격은 12월 5일까지 개시되었고, 4개 교량이 파괴되었다

11월 6일,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며 반격작전을 발표하였고, 물자가 확보되는 대로 공세에 나서기로 하였다. 하지만 물자의 보급은 늦어졌고, 11월 15일로 예정되었던 작전은 미루어졌다. 철교를 보수하고 진남포항의 기뢰를 제거한 후에야 보급이 활발해졌다.

UN군의 재반격은 11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국군 제 1사단은 박천-태천-용산동 방면에서 위력수색을 가하며 공산군에게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다.

한편 1차 공세후 정비를 마친 중공군은 11월 13일 UN군을 깊숙이 유인해 섬멸한다는 방침을 확정하였고, 한국군 3사단과 더불어 미군 17연대 제 1대대가 압록강변 혜산진을 점령한 21일에는 국군 2군단과 동해안을 목표로 하여 각각 11월 25일, 26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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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비호산 전투)과 맥아더의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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