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15) 미 7사단의 압록강 기념촬영은 맥아더 추락과 더 많은 피를 불러와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19.11.20 16:47 |   수정 : 2019.11.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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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압록강에서 기념 촬영한 미군 지휘관들 외쪽부터 키퍼, 호디스, 알몬드 10군단장, 바 7사단장과 우측 11월21일 미 7사단 17연대가 혜산진 압록강변에 도착하여 성조기를 꽂는 장면 [사진제공=국방부]
11월 21일, 미 제7사단17연대가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한 날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미 제 7사단(사단장 소장 바)이 17연대(연대장 대령 파월)를 선두로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하여 320km에 달하는 산악지대를 혹한과 강설을 무릅쓰면서 집요한 적의 저항 속에서 악전고투 끝에 11월 21일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이 전쟁은 끝내 종식되지 못하였다. 이후 제 17연대는 11월 30일 한국군 제 3사단 23연대에 혜산진을 인계하고 철수하게 되었거니와 그간 미 제 7사단은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는 기온의 급강하로 11월 23일까지 발생한 동상자만도 142명에 달하였다.

이상과 같이 북한 동북부의 작전은 끝을 보지 못한 채 장기적이고 불리한 새로운 작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선을 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7사단 17연대의 이원-혜산진 진격 과정

미군이 도달하기 전에 혜산진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23/26연대

국군 7연대가 이미 압록강 초산진을 점령하고 뱃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압록강을 여기저기 오가며 즐기고 있었던 10월 27일 미 제 7합동기동함대 소속의 LST 7척에 분승한 미 제 7사단의 선두부대인 제 17연대 전투단은 이날 미명 부산항을 출항하였다.

미 제 7사단 선두부대의 수송 선단은 10월 29일 아침 이원에 상륙하였다. 이원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지 않았고, 10월 23일 수도사단 제 1기갑연대가 이미 이곳을 점령한 바 있어 아무런 저항없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선두 부대인 제 17연대의 본부와 제 1대대가 상륙 즉시 제 49야전 포병대대와 제 13 야전공병대대 A 중대와 함께 신북청-북청-장흥리를 거쳐 초리에 진출하였다.

이날 제 17연대의 전방에 위치한 풍산에는 수도사단 제 1연대가 임무를 교대하기 우하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우측 제 1기갑연대는 성진 일대를 완전히 확보하였다. 반면 전날 원산 상륙을 끝마친 미 제 1해병사단은 원산탈환 이후 원산 지구의 방어 임무를 맡아 온 한국군 제 3사단과 임무를 교대 하였다.

한국군 제 3사단은 다시 함흥 지구의 경비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함흥 일대로 병력을 이동했고 수도 사단의 제 1기갑연대는 성진을 점령하였으며, 제 1연대는 풍산을 점령했다. 이후 제 3사단 18연대는 보전령 일대에서 잔적을 격파한 뒤 백암산을 공격하였다.

11월 12일 풍산에 도착한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서부전선의 청천강 일대와 동부전선의 보전호-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종합적 정보보고에 의거하여 미 제 7사단장 바 소장에게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미 7사단장 바 소장은 제 17연대로 하여금 갑산을 거쳐 혜산진으로 진격케 하여 다음 날인 11월 13일 창평리 일대에 도달했다. 미 17연대는 압록강에서 남으로 흐르는 허천강의 지류로서 수심이 30~40cm 인 웅이강의 북안과 연결된 교량에 이미 적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확인한 연대장 파월 대령은 연대에 소속된 한국군 공병대로 하여금 빈 드럼통으로 도보교를 가설케 하였다.

11월 14일 미 제 17연대는 전날 한국군 공병대가 가설한 도보교를 이용하여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선두부대가 도하할 무렵 적의 사격이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무사히 건너 하저평 일대에 전개하였다.

11월 15일 미 제 17 연대는 전날에 이어 웅이강의 도하 작전을 계속 하여 제 1대대가 최후로 무사히 이를 완료하였다. 다음날 전방의 적은 소집단으로 분산되어 갑산방면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항공 관측 보고에 따라 미 제 17연대는 웅이천 북안의 관평리에서 우가리-평인령(1186 고지)를 통과하여 동쪽 갑산도와 서쪽 삼수도의 교차로인 상리에 진출함으로써 이날 13km를 전진하였다.

그리고 전날 보전호의 동단에 진출한 미 제 31연대 3대대 정찰대의 뒤를 따라 이날 본대는 수상리-장진령(1898 고지)-보전호반의 경로를 따라 서북으로 전진하여 보전호 북단 한대리의 보전댐 부근에서 약 200명의 중공군을 격퇴시켰다.

미 제 17연대는 17일 갑산 남쪽 16km 지점인 석우리를 점령하고 18일에 전진을 계속하여 갑산 남쪽 6km지점인 송우리-장평리 일대에 진출하였다. 이어 선두 부대인 제 1대대는 11월 19일 10:30 경에 보, 전, 포 협동작전으로 갑산을 공격, 점령하였다. 특히 미 제 17연대 전차중대는 참호 속에 있는 적을 압살하였으며, 미 제 15대공포대는 40mm 고사포로 교통호의 잔적을 향해 맹열한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동 연대의 제 1대대는 갑산을 점령한 다음, 계속 혜산진 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여 이날 밤에는 갑산 전방 13km 지점인 판장리에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앞으로 혜산진까지는 37km가 남아 있었다.

한편, 지난 10일 사단의 제 7정찰중대가 파견되었던 슬령 발전소에는 이날 밤 한국군 제 3사단의 전차공격대대의 1개 중대가 도착하여 미 제 32연대의 1개 중대와 교대함으로써 동 1개 중대의 미군은 갑산의 연대 집결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밤 적의 기습을 받고 한국군 양개 중대가 교전한 끝에 한국군 5명이 부상하였다.

드디어 11월 21일 아침, 미 제 17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혜산진 가로를 전진하여 오전 10시에는 혜산진 시가와 압록강에 연한 주변일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시가는 일주일 전인 13일 동해상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 함재기에 의하여 군영과 창고가 파괴되는 등 시가의 85%가 소신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가의 북쪽을 가로지른 압록강의 강폭은 45~70m 정도였는데, 유폭은 불과 2m였다. 강상의 교량은 동 연대가 들어오기 전부터 파괴되어 있었으며, 강의 북쪽 300m 지점의 만주경내에 위치한 장백에는 중공군의 보초와 장교들의 왕래를 역력히 볼 수 있었다.

당시 17연대 대위였던 레이하비씨는 KBS의 ‘6.25 6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인터뷰에서 “압록강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한국부대가 와 있었습니다. 부대장인 대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더군요. 우리 부대가 압록강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하여 한국군이 먼저 도달했음을 증언했다.

또한 그는 “중국군은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폭이 좁아 밤에 중국군이 건너다니는 길목도 보였습니다. 우리 부대 안에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중국군에게 ‘이쪽으로 건너오지 그래’하자 중국군은 ‘네가 이쪽으로 와’라며 밤에 대화를 나눴습니다.”라고 그때 상황을 회상했다.

레이하비 대위의 증언처럼 미군이 도달하기 전에 혜산진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부대는 두개라는 설이 있다. 그 부대는 10월1일 38도선을 강원도 양양에서 최초 돌파했고 미17사단과 협조된 공격을 한 3사단 23연대와 당시 3사단 소속이었던 26연대(현재는 수도기계화 사단 소속)이고 이 부대들은 부대 명칭을 혜산진 부대로 부르며 자긍심에 차있다.

맥아더,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라는 축전을 보내...

이와 같이 한국군 3사단과 더불어 미군 17연대 제 1대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자 전날 갑산에 와 있었던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사단장 바 소장과 연대장 파월 대령을 대동하고 혜산진에 도착하였고, 이어 동경의 맥아더 원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전날 미 제 7사단 17연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원수는 다음날인 11월 22일 아몬드 소장에게 "네드여!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바 소장에게도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고 전해주시오"라는 축전을 보내 왔다.

아몬드 소장은 이에 부가하여 사단장 바 소장에게 『불과 20일 전에 이원에 상륙하여 320km 이상의 심산협곡을 적설과 영하의 혹한을 무릅쓰고 집요하게 저항을 반복하는 적을 무찌르고 귀하가 거둔 성과는 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일 "갑산에 집결한 미 제 32연대는 삼수를 거쳐 신갈파진에 진출하여 미 제 17연대의 서측에 배치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이날 갑산에서 삼수를 통과한 제 32연대가 삼수에서 신갈파진으로 진격을 개시함에 따라 혜산진의 제 17연대도 일부 병력을 신갈파진으로 우회시켜 제 32연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 미 제 17연대의 수색대는 서쪽으로 11km를 전진하다가 북한군의 강력한 화력을 받았고, 제 32연대 3대대의 특수 임무부대 역시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되어 양 부대는 사투에 사투를 거듭한 나머지 28일에야 신갈파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 좌측 10월 24일~11월26일간의 동부전선의 유엔군 진격로와 우측 10월25일 중공군 40군 118사단이 국군 6사단을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1월8일까지 진출한 중공군과 유엔군의 접전도 [자료제공=이우형교수]
미 알몬드 10군단장의 압록강 기념 촬영, 맥아더의 추락과 많은 미군의 피를 불러와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유엔군 약 1만7천명 사상 피해

하지만 이미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10월25일 국군 6사단을 궤멸시키기 시작하였고 동부전선에서 미17연대가 치열하게 혜산진으로 북진하던 11월8일 개천 -회천-황초령까지 진출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존재를 확인한 유앤군은 작전을 전환하여 10월 26일~12월 13일까지 함남 장진군, 함주군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전투에서는 많은 미군들의 피를 뿌렸고, 만주 폭격을 시도하려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경질을 확정짓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 전투는 피난민들이 흥남 부두에 정박한 미국 군함에 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단연 압권인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각인된 흥남 철수 작전은 아비규환의 필사적 탈출이었다.

T R 페렌바크는 책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흥남 철수에 대해 “덩케르크 철수와는 달랐다. 서둘러 배에 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은 없었다”고 썼다. 군 작전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기습 공세로 전멸 위기에 처했던 연합군이 가까스로 빠져나온 덩케르크처럼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미 군함에 타지 못하면 공산치하를 탈출할 길이 없었던 피난민들의 절박성은 다른 문제였지만 유엔군과 민간인 20만 명의 흥남 철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미 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였다.

1950년 말 개마고원에는 유엔군은 7,83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그해겨울은 어느 때보다 더 지독한 추위였다. 옷을 여러 겹 입어도 살을 에는 추위를 막을 수 없던 장병들의 손과 발은 동상으로 하얗게 변했다. 수통의 물도, 캔 속의 전투식량도 얼어버렸다. 수류탄은 불발되기 일쑤였고, 차량은 시동 걸기가 어려웠다.

그런 혹한 속에서 미 해병들은 음산한 나팔 소리와 함께 밀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격렬하게 싸우며 퇴로를 열었다. 남쪽으로 물러서면서도 공격전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 후퇴는 ‘남쪽으로의 공격’이라고 불렸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인들에겐 ‘잊혀진 전쟁’이 된 6·25의 기억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워싱턴 한국전쟁기념공원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기념비와 함께 서 있는 조형물도 장진호의 해병 장병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6만7천명 중 사상자는 4만 8천명이지만 유엔군 측은 3만명 중 사상자는 약 1만7천명에 달했다. 양쪽의 피해 규모를 볼때는 유엔군의 전술적 승리이지만, 중공군은 전쟁 국면의 전환시켜 본격적인 공세돌입하여 37도선까지 유엔군을 전면 철수시킨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장진호 전투는 ‘초신 퓨(Chosin Few)’라고 불린다. 즉 장진(長津·일본어 발음으로 초신)에서 압도적 병력 열세에도 온갖 고난을 이겨내 마침내 ‘선택받은 소수(chosen few)’가 된 영웅들의 전투였지만 미군 지휘관들의 혜산진 기념촬영은 많은 미군들의 희생과 맥아더의 경질 그리고 한국 현 대통령을 배출시킨 흥남철수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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