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과 한림대 ‘인술(仁術) 공헌 50년’ ① 한국의료 개척자 윤덕선의 거대한 발자취
이상호 전문기자 | 기사작성 : 2019-11-13 10:07   (기사수정: 2019-11-1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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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의료의 선구자 일송 윤덕선 박사의 삶은 봉사와 헌신 그 자체였다. [사진=한림대의료원]

학교법인일송학원 48년 발자취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 1921~1996)이라는 선구자이자 개척자가 있었기에 오늘날 ‘의료한류(醫療 韓流)’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의료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일송 윤덕선과 윤대원 이사장, 2대에 걸친 일송학원의 역사, 현재의 모습, 마이티 한림(Mighty Hallym)의 비전을 통해 한강에서 시작한 작은 인술의 씨앗이 지구공동체를 움직이는 의료봉사의 기적이 되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이상호 전문기자] 대한민국은 의료강국이다. 한국은 미국, 독일에 이어 세 번째로 인기있는 의료관광 목적지로 매년 40만명의 외국인 환자가 한국을 찾는다. 대장암과 위암 생존률 세계 1위, 세계 최고의 성형외과기술로 거센 ‘의료한류(韓流)’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의료산업이 이와같은 기적적인 성취는 한국 의료의 선구자, 1세대 의사인 일송 윤덕선 박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일송은 1921년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평남 용강군 지역에는 1900년 설립된 진남포교회를 본당으로 하는 5곳의 공소(公所, 간이 성당)가 있었는데 일송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늘 사랑과 봉사를 되새기며 성장했다.

일송의 깊은 천주교 신앙은 그가 고향 용강에 세운 ‘성심병원’, 명동 성모병원 개원, 한강 이남에 세운 최초의 민간종합병원인 한강성심병원의 이름을 통해 드러난다.


● 독실한 가톨릭집안 태생...고교 때 가슴에 새긴 ‘주춧돌 정신’

일송은 일제강점기 북한지역 최고 명문인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를 다녔다. 평양고보 3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땅에 묻힐 주춧돌 노릇을 해라. 주춧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을 튼튼하게 받들고 있는 것이다”는 말씀을 듣고 ‘주춧돌 정신’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평양고보 졸업 무렵 “일본인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고 살 수 있는 직업은 의사밖에 없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1942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그는 외과계의 권위자인 스승 백인제 박사의 ‘백인제외과’(서울백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했다.

그 무렵 패전의 징후가 완연했던 일제는 군의관을 강제 징집하기 위한 명령을 내렸고 일송은 이를 피해 1945년 고향으로 가서 결혼을 하고, 용강온천 인근에 ‘성심의원’을 개원했다.


● 월남과 피난, 야전병원 근무, 전쟁후 복구

1945년 해방으로 러시아 군대가 북한을 점령했는데, 일송은 용강의 공군기지에 주둔한 러시아 공군 조종사들을 진료하면서 공산주의 실상을 체험하고 1948년 남한으로 내려왔다. 홀로 월남해서 인천항에서 방황하던 일송은 우연히 충청도 홍성역장으로 부임하는 용강역장을 만나 생면부지의 땅 홍성으로 가서 또다른 ‘성심의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잠시 피난을 갔던 일송은 9·28 수복 후 서울 용산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에서 근무하는 한편, 백인제외과 병원에 힘을 쏟았고 1954년 국내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했다. 1954년 일송은 한미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화물선을 타고 21일만에 미국에 도착해 1956년까지 코네티컷주 브릿지포트(Bridgeport) 병원에서 병리학과 외과학을 수련했다.
 

▲ 1954년 윤덕선은 장학생으로 선발돼 3년 간 미국에서 선진 의료를 배운다. 유학길 배 위에서 가족과 함께. [사진=한림대의료원]

귀국 후 윤덕선 박사는 성신대학 의학부(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유일한 전임교수로서 후배 의학도를 양성하는 한편, 성모병원에서 외과진료를 했다.

1961년에는 명동성모병원(가톨릭중앙의료원)을 신축, 개원하는데 참여하고 병원의 중흥을 이끌었다. 당시 그는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시골 병원을 찾아가 무료 진료를 하는가 하면 교수와 의료진을 백령도 연평도 같은 오지에 정기적으로 파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덕선은 명동성모병원 원장, 가톨릭중앙의료원 의무원장직을 마지막으로 1958년 13명의 교수와 함께 ‘의학연구와 의학교육, 진료를 통한 봉사’를 기치로 한 사단법인 한국의과학연구소를 창립했고, 그해 6월 법인은 필동성심병원(중앙대학교병원)을 개원했다. 개인이 세운 국내 첫 민간 종합병원이었다.


● 한국 의료사의 기념비적 사건, 한강성심병원 개원

1971년 일송 윤덕선은 한국 의료사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해 12월 서울 영등포 한강변 모래사장 허허벌판에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인 한강성심병원(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을 개원한 것이다.
 

▲ 1970년 1월 한강성심병원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윤덕선 박사. [사진=한림대의료원]

그때까지 한국 의료는 대학병원 중심이었는데, 일송은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을 세워 의료서비스의 외연을 확장하고, 의료를 산업으로 만든 것이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뒤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짓겠다”는 염원, 한강의 허허벌판 모래밭에 병원을 지음으로써 주춧돌이 되겠다는 신념이 발현된 하나의 사건이었다. 병원의 초대 원장은 일송과 같은 평남 출신이자 동갑으로, 평양의전을 나온 방창덕 박사(1921~2009)가 맡아 7년을 일했다.

한강성심병원은 개원 초기부터 한강성심병원은 매달 무의촌을 찾아아 무료 순회진료를 다니는 등 진료봉사에 열성을 다했다. 수해가 발생하면 그 지역으로 달려가 건강과 생명을 돌보고 서울시와 함께 봉동 언덕 달동네에 ‘새마을보건진료센터’를 개설하기도 했다.


● 의술로 꽃피운 성모(聖母),성심(聖心)의 신앙

일송 윤덕선에게 의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술(仁術)이자 신앙이었다. 그가 직접 개원하거나 종사한 병원 대부분이 성모(聖母),성심(聖心)이라는 신앙이 표현된 이름이었고, 어떤 경우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1974년에는 ‘의료법인 성심중앙유지재단’을 설립, 국민보건 향상과 영세민 구호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75년 1월 ‘성심자선병원’을 개원했는데 영세민을 위한 무료병원으로 민간 의료법인이 무료 자선병원을 개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맹인점자도서실’을 운영해 시각장애인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천주교 구라회’를 인수해 나병(한센병)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어릴적부터 다짐했던 주춧돌이 되겠다는 신념이 속속 실천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 일송 윤덕선 박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한 일송부부 [사진=한림대의료원]

1976년 12월에는 서울동산병원(동산성심병원)을 인수했고, 1977년 1월, 미국령 괌에 ‘마리아나메디컬센터’를 세웠다. 괌에 유일한 종합병원이자 한국의 민간병원이 해외에 처음으로 진출한 쾌거였다.

1980년 1월, 강남성심병원(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을 개원하자마자 무료진료팀을 구성해 지역사회 곳곳을 누비며 영세민을 대상으로 활발한 진료활동을 했다.

이어 1981년 12월에는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인 난곡에 ‘신림종합복지관’을 열었는데, 민간 의료법인이 자체 재정으로 보건의료와 복지를 통합해 실천하는 종합복지 사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일송의 활발한 병원 개원이나 인수는 언제나 수익창출이 아니라 사회의 공익과 공적가치 창출이 목적이었다.


● 일송 정신의 완결판 한림대학교, 어제와 오늘

1982년 1월 일송 윤덕선 박사는 ‘학교법인 일송학원’과 ‘한림대학교’를 각각 설립했고, 1982년 12월 ‘춘천간호전문대학(한림성심대학교)’을 인수했다. 그는 대학의 사명을 ‘연구, 교육, 사회봉사’로 정의했으며, “대학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투자만이 있을 뿐이다”는 지론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단기간에 명문사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1984년 12월 일송은 ‘춘천성심병원(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개원과 동시에 의료혜택에 목마른 강원도 지역을 대상으로 무료진료 활동을 펼쳤다.

한강성심병원은 1986년 3월 ‘화상치료센터’를 개설해 국내 최초의 화상전문 치료기관이 됐는데 일송은 병원의 수익 때문에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험한 길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1986년 10월에는 “의료혜택이 부족한 지역에 병원을 세워야한다”는 신념에 따라 ‘강동성심병원’을 개원했고, 1989년 2월 강원도에 부지와 자금을 주어가며 ‘강원도장애자종합복지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1990년 2월에는 ‘한림과학원’을 설립해 젊은 학자를 양성하고,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김원룡 현승종 유재천 등 당재의 지식인들이 원장을 맡아 격이 다른 연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다가오고 있는 고령화시대를 예견한 일송은 1991년 10월, ‘한국노인보건의료센터’를 개원했다. 보건의료와 복지를 결합한 사업도 갈수록 활발해져 1992년 10월에는 ‘성심복지관’이 개관했고, 신림종합복지관과 성심복지관은 야간 무료진료를 시작하기도 했다.


● 의술(醫術) 아닌 인술(仁術), 명의(名醫) 아닌 덕의(德醫) 추구한 일송의 삶

1996년 1월 일송은 심장병 어린이 수술후원금을 기탁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그해 3월부터 신림종합복지관의 자선진료 사업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는 등 봉사와 헌신의 불꽃을 태우다 3월 10일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동안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았으며, 사회적 약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밀알의 삶이었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 1953년 백병원 수술실에서 의료진과 함께 한 일송 윤덕선(뒷줄 맨왼쪽) [사진=한림대의료원]

한강성심병원 초대 원장을 지냈던 방창덕 박사는 일송의 사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도않았지요. 우리는 틈만 있으면 생과 사,신과 자연, 의(醫)의 윤리 같은 명제를 나누었지요. 그럴 때마다 공(일송)은 항상 예리하고도 선견(先見)의 명(明)이 돋보이는 탁견을 들려주셨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억울한 일입니다.” <방창덕-선견의 명이 돋보이는 외우(畏友)>

일송은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 실천가였으며, 그의 인생은 이름 그대로 덕(德)과 선(善)을 향한 여정이었다. 일송의 성모신앙과 ‘주춧돌 정신’은 의술이 아닌 인술, 명의(名醫)가 아닌 덕의(德醫)를 추구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봉사와 공헌의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학교법인 일송학원의 역사는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나간 인류애의 실천의 기록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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