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10) 남부군 이현상과 백골병단 채명신의 유격전
김희철 칼럼니스트 | 기사작성 : 2019-09-06 19:47   (기사수정: 2019-09-0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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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상의 ‘남부군’ 영화 포스터와 백골병단 채명신 장군의 자서전과 ‘HID36지구대’ 김동석 대령과 딸 가수 진미령 모습. [사진=김희철]

6.25남침전쟁시 후방지역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유격전 전개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교전한 전선 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치루어 졌다.

유격전으로 유명한 부대는 북한군의 경우, 영화화된 이현상의 '남부군(남조선 인민 유격대)’이고 우리는 채명신장군의 ‘백골병단’있었다.

또한 서해쪽에서는 1950년 12월 故 김종벽대위가 창설한 ‘구월산 유격대’로 황해도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백령도로 철수하여 1954년까지 활동한 ‘동키부대’가 있었다. 동해쪽에서도 물쥐대장이라 불리면서 인민군 17사단장까지 생포해 전향시키며 1954년 2월까지 정보활동 및 유격전 활동을 한 김동석 대령의 ‘HID36지구대’도 있다.

처절했던 이현상의 '남부군(남조선 인민 유격대)’ 활동

이현상은 실존인물로 빨치산들 사이에서 영웅적인 존재로 알려진 사람으로 일반인들에게는 "남부군"이 소설과 영화로 소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이후 남로당의 무장투쟁 전술에 의해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의 후퇴에 따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가면 무장투쟁을 벌였다. 19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여오던 이현상 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광범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현상 부대는 유엔군의 9.15 총반격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하였다.당시 후평리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박헌영의 오른팔로 휴전후 7일만인 8월5일 평양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총살됨)은 이현상, 여운철 등과 함께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철에게는 6개도당의 지도권이 위임되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 이승엽은 후평리에 모인 유격대와 인민군 후퇴시 잔류한 군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에 '남조선 인민 유격대'(통칭 남부군)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현상의 지휘 아래 남하한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와 그 직속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충북 단양지구로 내려와 문경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유엔의 공격을 받고 제천지구로 이동했다가 51년 2월 초 속리산까지 내려와 활동하다가 덕유산을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51년 5월 중순 송치골에서 6개도당회의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6개도당회의 이후 남한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였다.

대표적인 빨치산이었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비밀아지트(비트)였던 지리산 빗점골에서 1953년 9월18일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이것은 우리쪽의 공식 기록이지만 그가 자살했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그는 1925년 박헌영 밑에서 김삼룡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한 남로당의 거물급 인사였으며 한국전쟁 동안 지리산을 무대로 각종 빨지산 유격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같은 남부군 빨치산은 인민군 퇴각이 있던 1950년 10월중에는 2만5천명(38선 이남 1만명, 이북에 1만5천명)으로 늘어났다.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군도 더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 ‘50년 10월 중순부터 강원도와 영남 지역, 호남 지역에서 조직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3개사단, 4만명의 인원을 동원한 것이다.

이듬해인 ’51년 1월 20일 당시 창궐한 전염병으로 남부군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도당위원장 박종근은 ’51년 5월3일자로 부수상 허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동안 제3 유격지대(일월산.보현산 일대) 편성을 위해 노력했으나 빨치산 당일꾼들이 대부분 전염병을 앓고 있다"며 1,000명의 인력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남부군 빨치산들의 최후가 다가왔다. ‘56년까지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전선없는 전쟁이 계속됐지만 북측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빨치산으로서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빨치산 1명 사살, 2명 생포. 이로써 이현상의 남부군 빨치산은 정부 공식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방군사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국군이 전쟁기간중 3개 사단을 빼돌렸을 만큼 남부군 빨치산의 무장 투쟁은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었다"며 "휴전 이후 남로당계의 숙청으로 남부군 빨치산에 대한 북측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그들의 무장 투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에 있는 백골병단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묘비와 인제군의 전적비 [사진제공=김희철]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렸던 채명신의 ‘백골병단’ 활동


2013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에서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그는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후, 남침 했던 인민군 패잔병들을 북한 전선사령관 김책의 명령으로 유격부대로 개편하자, 유엔군사령부는 이들에 대응하기 위한 유격전을 감행하기에는 피부, 언어, 지형 등을 이유로 유격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고충을 육군 수뇌부에 전달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육군보충대에 대기중인 장정 중에서 유격 특수전을 수행할만한 신체 건강하고 사상이 확고한 결사대원을 징병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때, 육군본부 정보국은 육군 보충대에 수용중인 의용경찰관, 철도경찰,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 현역 군인으로 낙오된 병사 등에서 충원하기로 했다. 이들 의용경찰 등 모두를 대구 소재 육군보충대에 입소시킨 병력자원은 6,000여명 중에 1차로 710명, 2차로 300여명을 특수작전을 수행할 결사대 요원으로 선발하여 육군정보학교에 입교시켜, 유격 특수전을 위한 ‘무장첩보 및 유격전에 필요한 교육’을 1951년 1월 25일까지 3주간의 실시하고, 각각 작전명령에 따라 적후방에 침투시켜, 적의 게릴라화 된 부대에 대응한 특수부대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백골병단'이란 참전장병 모두가 백골이 되겠다는 기개를 과시하고 적에게 무시무시한 부대로 인식되게 함과 동시에, 병력의 수를 군단급 보다 큰 집단군급으로 과장하기 위하여 병단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완벽할 만큼 북한군 행색으로 위장하여 제1진 363명이란 병력을 현역 육군중령의 직접 진두지휘하에 적진 후방지역으로 침투한 것은 건국이래 최초의 작전이었다.

백골병단은 ‘결사 제11연대’인 제1진 363명을 1951년 1월 30일 육군중령 채명신이 직접 지휘하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육군 수뇌부의 격려를 받으며, 국군 제7사단 전방 지휘소에서 평창 정선 방면의 적진 후방으로 침투하였다.

2월 7일에는 제2진 ‘결사 제12연대’ 330명이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강동지서앞까지 도착하자 육해공군 총참모장 육군소장 정일권, 지역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 지역 작전부대인 수도사단장 송효찬 준장, 주한 미 군사 정보수석 고문관 미육군중령 하우스만, 한국 육군본부 정보국 3과장 등이 출진 장도를 격려하는 사열과 선서·훈시 그리고 보급수령후 강릉 구정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제3진으로 출동한 ‘결사 제13연대’ 124명은 부산항에서 미해군 수송함(L.S.T)에 승선하여 동해 묵호항에서 하선, 명주군 성산면 대관령 경유, 횡계 방면으로 이동, 월정사 방면으로 침투하여 2월 20일 삼산리에 도착함으로써 3개부대가 합류·통합되었다.

1월 30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적후방으로 침투작전을 개시한 ‘결사 제11연대’는 2월10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적 3군단 예하 병력 34명을 생포하고, 비상식량을 보충함을 시작으로 2월27일 작전참모 전인식 대위 지휘하에 3개소대(대원 9명과 장교 1명)를 구룡령 차단작전에 투입하여 작전중, 인민군 69여단 정치군관 대위 외 중위, 특무장, 전사 등 4인을 생포하여, 69여단의 전투상보와 기타 주요 기밀사항을 적 3군단에 보고하려던 1급 기밀문서를 압수·노획하여 이를 강두성, 장인홍 보좌관 외 2인으로 하여금 아군 수도사단에 신속히 전달하여 적을 괴멸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3월 18일 인제군 인제면 가리산리 필례 마을일대에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 인민군 중장 길원팔과 빨치산 제5지대 참모장 인민군 대좌 강칠성 등 참모진 13명 전원을 생포 및 사살했다.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때 길원팔과 채명신장군의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 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는데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 고 말하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고아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는데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을 추가했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 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훗날 남쪽으로 복귀 후 채 장군은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키며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특히 참군인이자 남자 중 남자인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백골병단은 적생포 309명, 사살 174명, 권총 9정, 다발총 17정, 장총 178정, 계 204정의 무기를 노획하고, 군관증 11, 노동당 당원증 40여매, 인민위원회 조직표 5점, 694 무전기 1대와 통신 암호문, 김일성의 직접지령문 등을 노획함으로써 적의 전의 상실과 후방지역의 혼란을 조성케 하여 상대적으로 아군작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장비·보급으로 미루어 14일 이전까지 작전을 끝내고 귀환해야 했으나 그들에게 부여된 작전명령은 보급의 현지조달을 통해, 계속 작전하게 하였으므로 생존성의 보장은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백골병단은 14일분의 비상식량으로 60여 일간의 전투를 감행하고 1951년 3월 24~25일 사이에 굶고 허기진 동·아사자 120여 명의 비전투 손실도 발생하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백골병단으로 통합된 총병력 647명중 희생 364명(56.3%), 귀환·개선 장병 283명(43.7%)으로 파악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간의 유격전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남침전쟁은 같은 민족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쓰라린 민족의 비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은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남한에서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13만 5천명이 전사하고 44만 3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또한 8,333명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다가 포로교환 시에 생환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함구하고 있지만 최근에 공개된 소련 측의 자료에 의하면 포로교환이 끝난 1953년 말에도 약 4만 명 이상의 포로를 북한에 억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행한 조사에 따르면 남한이 입은 물질적 피해의 총 규모는 당시 금액으로 4,123억 원에 달한다.

북한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그들의 군대가 이 전쟁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에 입수된 구 소련의 자료에 입각한다면 최소 약 38만 명의 북한 군인이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계산해낼 수 있다. 부상자에 관한 자료는 없지만 이 보다 훨씬 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음에 틀림없다.

또한 75,823명의 북한 군인이 UN측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구 소련의 자료에 의한다면 80만 명이 남한으로 넘어왔고, 28만 명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의 재산피해는 4,201억원에 달한다. 전쟁으로 남북간에 흩어져 고통받고 있는 이산가족이 2천만 명에 다다른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은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군사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제 2의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해서 굳건한 안보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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