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위기관리]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하) 김좌진은 흉탄에 숨지고 김원봉은 북에서 숙청돼
김희철 칼럼니스트 | 기사작성 : 2019-08-30 10:54   (기사수정: 2019-08-3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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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만주 간도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 자행

[뉴스투데이=김희철 컬럼니스트]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만행에 의한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1년 6월 28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을 불러일으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로 집결한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지도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두 파로 나뉜 독립군 중 한 파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의견이 다른 독립군을 배신하고 말았다. 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혁명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것이다.

이 과정에서 960명의 독립군이 죽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끼리의 싸움으로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죽게 되자, 사건과 관련된 지도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외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김좌진 장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공산당 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

홍범도장군,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한 말년

한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 김봉환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불혹인 40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또 한명의 영웅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의병활동을 접고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러시아로 귀화해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을 했었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김원봉은 북한 국가검열상으로 ‘6·25 전쟁’ 주도, 전후 '팽' 당해 숙청

또다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인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최근 정부에서 보훈자 선정을 추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인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무장투쟁노선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 파괴하고, 친일 및 일본군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하였다.

또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후신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의용군(5만명)은 ‘6·25남침전쟁’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했다.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6·25 새벽 남침한 북한인민군 연대 21개 중 47%인 10개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입북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국방부장관)에 올랐다.

6·25 남침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남침전쟁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후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됐다.

정부는 1962년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 업적은 인정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제외되었고 우리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동족을 비극에 떨어뜨린 위법자로 추락했다.

특히 김원봉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천만 이산가족과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리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되었다.

비극의 역사 반복 막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자주국방태세 강화

지난 24일 북한은 새벽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최고 고도는 97㎞, 비행거리는 약 380여㎞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금년에만 9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의 압박으로 발사하지 못하면서 남한을 사정거리에 두고 위협하는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은 거리낌 없이 발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중앙통신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굴함 없는 공격전을 벌려 적대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 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란 강대국 미국과는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남한을 목표로 노후된 1,0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대체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포함시킨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존하는 위협은 해방 후, 김원봉이 오판해 김일성을 도와준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이것이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사항 위반이 아니라고 북한편을 들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되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도 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민족역사의 위법자가 되고, 천만 이산가족을 만들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든 주역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이 담긴 삶의 마무리 과정을 돌아보며 가슴이 절여오는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자주국방태세 약화를 막아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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