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19.06.25 11:05 |   수정 : 2019.06.25 12:01

[6.25남침전젱의 숨은 영웅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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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 계급장을 달았던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왼쪽)의 모습,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한 몽클레어 중령(오른쪽 사진의 맨 왼쪽)이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연합사령관(오른쪽 사진의 맨 오른쪽)과 만나는 모습[사진출처=보훈처]

지평리 전투의 영웅 ‘몽클레어’장군,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 선택

'미끼'로 던져진 미 23연대 ‘프리만’대령은 "나는 반드시 부하들을 데리고 나갈 것"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에서 1.4후퇴 후,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중공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푸른 눈을 가진 ‘자유의 전사부대’가 있었다.

이 ‘자유의 전사부대’ 가 승리한 ‘지평리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공격을 중단하게 되었고, 몰리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어 연합군은 북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 중 한명은 바로 프랑스의 랄프 몽클레어 (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공격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지만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알제리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는 1950년 7월 12명의 시찰단만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몽클레어 중장이다. 그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모병(募兵)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3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몽끌레아 장군은 직접 이들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몽끌레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국방차관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계급을 낮춰도 좋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몽클레어는 결국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장으로 이국만리의 전쟁에 참전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클레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클레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중요했던 ‘지평리전투’는 1.4후퇴 이후,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유명한 명장 ‘맥아더’장군이 지휘하는 연합상륙부대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함으로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여 그 선두 부대가 압록강에 도달했을 무렵 중공군이 이미 10월 15부터 압록강을 건너 은밀하게 투입되어 그 역공격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 첫 교전이 10월 25일 개시되었고 이때부터 중공군은 인간을 무기로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규모는 최초 18만명, 이후 40만에 이르는 중공군이 한반도 투입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중공군의 기습적인 역공격을 받은 유엔군은 혼란에 빠졌고 더욱이 중공군의 규모와 무기체계, 전술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터라 피리불고 괭과리 치면서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중공군에 심리적 공황까지 발생,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

급기야는 1951년 그 유명한 ‘1.4후퇴’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유엔군은 한반도를 통일하고 고향에서 크리스마스휴가를 보낸다던 계획이, 우리 국군에게는 한 맻힌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려던 꿈이 무참히 깨어졌다. 엄동설한에 다시금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전쟁수행에 대한 서구제국들의 관심이 급변하고 급기야 한반도에서의 철수와 휴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은 중공의 유엔 가입과 대만에서의 미군철수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유엔군의 재편성을 위하여 평택-원주-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금 역공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을 38도선 이북까지 격퇴하면서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인 ‘제한전쟁’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여 전쟁의 무제한적 폭력성을 특정한 목표로 제한하고 이를 통하여 정치적 목적인 휴전협상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중공군과 단절된 전선을 회복하고 철저하게 잔적을 소탕하면서 동해와 서해를 잇는 띠를 만들어 일제히 제한된 거리를 진격하는 여러 개의 작전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 지난 2016년 7월경 방한했던 몽클레어 장군의 손자(오른쪽)가 53사단 군종 참모인 김재학 소령(목사)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김재학 소령]

유엔군의 '라운드 업' 전략 속에서 중공군 섬멸을 위한 '미끼'로 던져진 미 23연대

인해전술로 덥쳐온 중공군을 3차례 전투에서 격파

지평리 전투가 있기 전에 유엔군은 작전명령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 썬더볼트(Thuderbolt)작전으로 한강선을 확보하고, 라운드엎(Round-up) 작전에 재차 돌입하였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2월 공세’로 홍천 남쪽에서 작전이 저지되고 중공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때 수원-이천-원주-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일부 진출해 있었고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횡성과 홍천 중간지인 삼마치 고개와 지평리 일대로 병력을 집결하여 대규모의 공세를 준비 중에 있었다.

드디어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2월공세’로 명명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횡성-원주일대와 지평리 일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지평리(砥平里)는 중앙선 열차가 통과하며 원주, 이천, 장호원, 양평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주요 교통요충지로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중공군은 지평리를 점령하고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때 지평리에는 라운드 업작전에 투입되었던 미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와 미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 B포대등으로 편성된 연대전투단이 지형의 잇점을 이용하여 전면방어를 편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공군 39군 예하의 3개 사단이 지평리를 그 특유의 나팔과 괭과리를 동반한 인해전술로써 포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은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즉각 미 2사단 38연대로 지평리를 증원토록 하는 한편 부대를 재배치하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고 미9 군단이 지평리에 추가적인 증원부대를 급파하도록 조치 하였다.

“승리는 승리를 믿는 자, 전투는 끝까지 버티는 자에게만 승리의 영광을 안겨준다”고 한다. 지평리의 병사들은 그동안의 전투에 지쳐 제각기 호를 파고 그 속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 프리만 대령과 그 부대원들은 철저한 준비를 이미 완료한 뒤였다.

▲ 한국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운 UN(프랑스)군의 지평리전투 충혼비와 상황도[사진출처=보훈처]

몽클레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 1일차 전투에서 대승리

드디어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횡성의 삼마치고개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재개 하여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군 3군단이 패하면서 지평리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프리만 대령은 퇴로가 차단되어 중공군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건의 하였으나 철수허가 대신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접수 하였다.

사실 미23연대는 ‘라운드업 작전’ 속에서 '미끼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중공군을 찾아내어 소화기와 인력에 의존하는 중공군을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섬멸코자 계획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미 23연대는 미끼로서 중공군에 던져 졌고 중공군은 그 미끼를 물 게 되었으며 프리만 대령의 미23연대는 그 속에서 미끼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1951년 2월 13일 드디어 중공군이 지평리 전방에서 대규모로 집결 중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제보로 확인되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중공군의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지평리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한겨울 지평리의 추위는 살을 에이는 듯하였고 장병들은 긴장속에서 전투준비를 갖추고 중공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여기 저기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중공군의 그 나팔, 호각, 괭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중공군은 떼를 지어 몰려들었고 장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의 1제파, 2제파, 3제파를 차례로 격퇴하였다. 중공군의 시체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한편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은 58세의 노병으로 1,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하고 무공훈장을 17차례나 받은 백전노장이며 진정한 군인 이었다. 원래 프랑스 육군 중장 이었던 대대장의 본명은 ‘마그랭 버르너리(Magrin Vernery)’이었고 개명한 새이름 ‘몽클레어’로 또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이 프랑스군 대대의 장병들도 대부분 이와 같이 전쟁을 위하여 자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용맹성과 전투능력을 어느 군대보다도 강하고 철두철미하였다.

프랑스군 대대전방에서도 중공군의 피리와 괭과리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물밀 듯이 중공군이 몰려들어왔다. 이때 프랑스군 진지에서 난데없이 사이렌(신호 및 조기경보 용으로 중대급에 보급된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임)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괭과리 소리를 삼켜 버렸고 중공군은 신호 및 연락이 끊기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일제히 화력을 집중하면서 진지를 박차고 나가 중공군을 닥치는 대로 쏘고 찌르는 육박전이 벌어졌고 중공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날밤 중공군은 감히 재공격을 하지 못하였다. 한 병사의 기지가 대대전체를 구하며 참으로 값진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밤이 지나갔다. 중공군은 3개 사단 병력으로 1개 연대전투단이 방어중인 지평리를 밤새워 포위공격을 하고서도 함락하지 못한 채 시체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퇴각한 것이다.

미 프리만 대령, 절름발이 상태에서 중공군 9만명을 상대로 한 2일차 전투 승리

중공군은 낮에는 유엔 공군의 폭격이 무서워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재편성을 한 다음 밤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한편 이날밤 전투에서 연대장 프리만 대령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헬기로 탈출 치료받도록 조치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붕대를 감은 절름발이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프리만 대령은 "내가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 왔다. 반드시 이들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라고 전의를 북돋으며 진두지휘, 장병들의 사기를 올렸다.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던 유엔군은 정오경에 수송기 편대를 이용 수십톤의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을 공수 하였다. 이때 연대 지휘소 부근 헬기장에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날아 들어왔다. 오는 도중 중공군의 저격으로 헬기가 명중되었으나 다행이 치명적이지 않았다.

지평리의 장병들은 가슴에 매단 수류탄 두발을 보고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란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가슴에 수류탄 2발을 매다는 코디로 자신을 야전군 지휘관임을 자랑스럽게 외부로 드러내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장병들과 프리만 연대장에게 오늘밤 하루만 더 버텨줄 것을 당부하고 격려 하였으나 장병들은 오히려 사령관의 귀로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필자는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이글을 쓰면서 상상만 해도 정말 흥분되고 용솟음치는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2월 14일 어둠이 채 깔리기도 전 지평리에는 기분 나쁜 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전날 2개사단이 동시에 공격하여 실패한 중공군은 그날 밤 새로이 3개사단과 3개연대규모를 추가하여 2일차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중공군이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지평리를 반드시 확보하여야 만 했기 때문에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력 수 9만여명의 중공군이 3천여명의 유엔군과 혈전을 전개하였다.

중공군이 보유한 화력은 미약했지만 인간이란 무기는 넘쳐나는 듯 했다, 유엔군의 포병과 박격포세례에 살아남은 자는 지뢰지대에서 죽고 지뢰지대를 벗어난 자는 철조망 앞에서 기관총에 죽었다. 그러나 끝이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은 마침내 유엔군의 진지 전방까지 도달하였고, 유엔군은 실탄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갔고 지평리 외곽의 유엔군 진지 전방에는 전날에 이어 이날밤 사살된 중공군 시체가 산에 산을 이루었다. 이제 지평리에서 2일간 전투를 치룬 미 23연대전투단은 더 이상 버틸 힘도 탄약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금 진지를 보수하고 오늘밤의 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 6·25 당시 미 23연대장 프리만 대령(왼쪽. 미육군 대장 전역)과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사진출처=보훈처]

미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 3일차 전투에서 중공군 괴멸시켜

전투 3일차인 이때 리지웨이 사령관은 미 9군단에 ‘지평리 연결작전’을 명령하였고 9군단장은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은 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전차 23대를 앞세우고 지평리로 진격을 하게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대신방향에서 북쪽으로 길 게 뻗은 좁은 도로를 따라 지평리로 전속돌진 하였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양쪽이 높은 고지군으로 둘러 쌓여있고 이곳은 중공군이 미23연대 전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곳이어서 중대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폭약을 들고 전차를 저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2대의 전차가 중공군의 로켓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차의 승무원이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전차를 도로밖으로 밀어내고 후속전차가 멈추지 않도록 공격템포를 유지하면서 돌진 하였다.

한편 지평리에서는 프리만 대령의 부상이 악화되어 후송되고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우선 야간에 피탈된 전선에 대하여 주간 역습을 실시 회복하도록 명령하고 야간작전 준비에 돌입하는 한편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연결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보유하고 있던 전차 4대로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뢰를 제거하고 중공군의 배후로 우회하여 중공군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돌진 해 들어갔다.

더불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중공군의 지휘소와 탄약고등 전투근무지원시설을 잇따라 유린하면서 파죽지세로 돌진 드디어 양군의 전차가 마주치면서 연결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충격적인 돌진은 중공군들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중공군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이 광경은 군대가 아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사라져 갔다. 미군과 프랑스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치 풀을 베는 농부처럼 메뚜기를 사냥하듯 중공군을 쓰러뜨렸다.

소총사거리를 벗어난 중공군은 박격포와 야포의 세례를 받으면서 무수히 쓰러져갔고 ‘중공군의 2월 공세’는 그들이 자랑하는 무기 인간을 무수히 소모한채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최초 이 특수임무부대는 전차위에 보병 1개중대 165명을 탑승시켰으나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23명이고 나머지 142명의 장병이 전사하거나 부상 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크롬베즈 대령과 에드워드 중령을 감격의 포옹으로 전우애를 확인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

이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이후, 후퇴와 패배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유엔군이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장에서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하는 지휘관의 자세에 대한 수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 23연대 전투단의 프리만 연대장은 부상 중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함께 하였으며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중공군의 포화를 뚫고 헬기로 포위된 전장을 방문했을 때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바로 손자병법 모공편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의 진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진정한 군인으로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 장병들이 엄동설한의 꽁꽁 얼은 야지에서 구축한 진지는 그들이 흘린 땀만큼 피와 목숨으로 보답한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다.

그렇다 방어작전시 승패는 누가 더 깊이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가용한 화력과 장애물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전투결과로서 보여주었다.

한편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완전히 포위하고 3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루면서도 패배하였던 원인은 중공군에게는 인간이 무기인 인해전술만 있었지 곡사화기를 이용한 화력지원체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공군의 신호 및 연락 수단이었던 피리, 괭과리. 북, 호각 등 의 소음은 야간전투에서 심리적인 효과까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 대대 어느 병사의 수동식 사이렌 작동으로 완전히 차단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한 것은 전장에서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25남침전쟁’의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국내의 영웅들과 애국자분들에게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다. 그런데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장군과 ‘프리만’, ‘크롬베즈’대령,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장군 등 연합군의 알려지지 않은 유엔군 영웅들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다시한번 더 ‘지평리 전투’에서 장열히 산화한 미군과 프랑스군의 전몰 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또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인 67개국이 단일 연합군으로 우리나라를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선양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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