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의 '나의 삶 나의 현대사', 오늘의 '광장'을 담다
이상호 전문기자 | 기사작성 : 2019-05-30 18:33   (기사수정: 2019-05-3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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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이 최근 자전적 에세이 '나의 삶 나의 현대사'를 출간했다. 이 책은 최인훈의 '광장'을 연상시키는 한국사회의 이념적 갈등이 도처에서 진행 중임을 담담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사진은 2007년 7월 2일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는 권 전 사장. [사진제공=연합뉴스]

60년만에 다시 만나는 ‘광장’의 감성,

'자전적 에세이'서 좌우 대립이 낳은 ‘슬픈 가족사’와 ‘30년 칼럼 인생’ 정리

[뉴스투데이=이상호 전문기자]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최인훈의 ‘광장’이 실려 있지만, 소설이 나온 1960년 이후 ‘광장’을 읽는 것은 대학 신입생에게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광장’이 출간된 뒤 60년이 지났어도 남과 북, 좌우대립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지식인의 고뇌는 ‘현재 진행형’이다.

중앙일보 사장과 발행인, 편집인을 동시에 역임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경력의 언론인이자 논객, 권영빈의 자전적 에세이자 문집, <나의 삶 나의 현대사>(살림 출판사)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실제 인물 이명훈의 고뇌와 번민을 다시 만나게 된다.

6·25 직후 총살된 막내삼촌,월북한 셋째 삼촌

사학도 청년의 질을 바꾼 평생의 ‘외상(外傷)’

‘보도연맹’ 소속이었던 막내 삼촌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경북 예천군 호명면 담암리 마을 앞 강변 백사장에서 9살 조카, 권영빈이 보는 앞에서 처형된다.

“그날 저녁 담바우 뒷산 우리 집 선산에선 여우의 슬픈 울음처럼 내 숙모의 한 맺힌 소리가 길게 길게 울려 퍼졌다”는 소년의 기억은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 온 ‘외상(外傷)’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직전에 월북한 셋째 삼촌이 공산당의 고위 간부가 되어 백마를 타고 고향집을 찾아와 어린 조카(권영빈)의 새카만 손톱을 깎아 주었다.

큰 아버지는 시골 지주, 아버지는 군청 공무원, 셋째는 월북하고 막내는 전향자로 일찌감치 생을 마감했으니,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전쟁이 낳은 ‘슬픈 가족사’였다.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보안사 끌려가 ‘고문’

보안사 요원, “너 김일성 동생이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한 권영빈은 조교로 대학원 공부를 해서 사학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 후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는 셋째 삼촌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인 서울대 조교를 포기해야 했다.

결국 월간 <세대>를 시작으로 출판사를 거쳐 중앙일보에 입사, ‘글쟁이’의 길을 시작한다. 중앙일보 재직 중이던 1980년 말, 수배된 동료 정태기(훗날 한겨례신문 대표)를 숨겨준 죄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81년 5월에는 소설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엮여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끌려가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권영빈을 고문하던 보안사 요원의 질문, “너 김일성 동생이지?”라는 대목에서 경찰서 마당을 나서는 ‘광장’ 주인공 이명훈이 느낀 참담함과 마주친다.

대통령 이름만 바뀔 뿐, ‘제자리 걸음’ ‘퇴행(退行)’

“진보든 보수든 집권만 하면 똑같은 횡포”


30년 전부터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하면서 써온 주요 칼럼에 당시 상황과 현재를 대비시킨 편집과 서술에서 우리 역사가 대통령 이름만 바뀔 뿐, 놀랍도록 제자리 걸음, 오히려 퇴행(退行)해 왔음을 느낀다.

이념보다는 실제, 공리공담이 아닌 실사구시, 분열과 갈등이 아닌 통합과 공생,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되어서 안된다고 해왔지만,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는 현실.

이 책에 “우리에게 내일이 있는가”라는 부제가 붙여진 이유다. “진보 권력이든 보수 권력이든 그 어떤 권력도 집권만 하면 똑같은 횡포를 되풀이했다. 보수가 잡으면 좌익을 빨갱이로 몰았고 좌익이 집권하면 보수를 적폐청산으로 때려잡았다.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더 잔혹하고 간교하게 기술적으로 생사람을 잡고 있다.”


분단 후 최초 남북한 정식허가 받아 4차례 방북

오늘의 '광장', 문정인 교수와 북핵 토론 후 중앙일보 떠나

1997년 9월 권영빈이 소장으로 있던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는 분단 후 최초로 남북한 당국의 정식 허가를 받아 북한을 방문한다. 총 네차례에 걸친 방북에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홍라희 삼성 리움미술관장도 동행했는데 뒷 얘기가 흥미롭다.

당시 그가 만난 북한의 대남 라인 인사들에 대한 인물평과 행동 습성에 대한 기술은 오늘날까지 남북 대화의 유효한 지침서다. 권영빈은 “(방북협상을 하던)1996년부터 북한이 최초 핵실험을 한 2006년 6월까지 북한을 연민과 뜨거운 가슴으로 접근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말대로, “햇볕론자였고 퍼주기 주창자였다.” 북한의 식량난으로 수십만 명이 죽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1996년 6월, 권영빈은 중앙일보 칼럼에 ‘조중동’ 이른바 보수언론 최초로 북한에 식량을 보내자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6년 10월말 중앙일보 사장 권영빈은 일본 고베시 인근 이와지에서 열린, 한일 양국의 정치인 언론인 회의체 <한일포럼>에 참석했다. 북한이 10월9일 첫 번째 핵실험을 하고, 여러 차례 미사일을 발사한 직후였다.

한국 상황 발제를 맡은 권영빈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북한 핵실험에 대해 일본 총리는 아침 7시 반 보고를 받고 즉각 내각을 소집한 반면, 한국 대통령은 9시가 넘어서야 보고받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이 논의되는 시점이기도 했지만 북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 자리에는 현재 대통령 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교수도 있었는데 문 교수가 이를 받아 시시콜콜 마치 정부 대변인처럼 그의 지적이 부당하다고 반박하는 바람에 한일포럼이 아니라 ‘한한포럼’, 두 사람의 논쟁장으로 변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권영빈은 중앙일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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