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루마썬팅 김우화 대표 ① 경력: 삼성전자 나와 썬팅업계를 뒤집은 역발상의 승부사
김성권 기자 | 기사작성 : 2018-09-0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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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화 씨피에프(CPF) 루마코리아 회장 [일러스트=민정진 / ⓒ 뉴스투데이]

선팅 산업을 창조한 김우화 회장, 4시간의 인터뷰 통해 삶과 희망 그리고 성공을 논해

(뉴스투데이=김성권 기자) 자동차 운전자에게 차량 선팅은 필수적이지만 으레 자동차 출고 시 딜러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부가적인 서비스에 불과했다. “루마에 가면~”, “거봐~ 루마썬팅하길 잘했지!”라는 TV광고 카피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했어도 그랬다. 우리나라 선팅필름 업계 1위 기업인 씨피에프(CPF) 루마코리아의 김우화 회장도 필름의 ‘필’자도 몰랐다고 한다.

김 회장은 자동차에 필름을 바른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1990년 초반 덜컥 필름업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업계에서 ‘똘아이’ ‘이단아’ ‘돈키호테’ ‘엉뚱한 놈’ ‘정신 나간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루마썬팅’이라는 브랜드가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한국에서 자동차 선팅 자체가 산업으로 자리잡은 건 김 회장의 ‘마케팅’에서 비롯됐다. 후발주자로 레드오션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업계 1위로 올라서는 데는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가 ‘마케팅의 신’으로 불리는 이유다. 선팅 필름과는 전혀 무관했던 그가 루마썬팅의 회장까지 올라선 계기는 잘 다니던 삼성전자를 뿌리치고 나와서부터였다.

김 회장은 지난 달 28일 루마코리아 사옥에서 기자와 무려 4시간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장시간 진행된 인터뷰 내내 지친 모습없이 열정적으로 삶의 역정과 꿈 그리고 성공에 대해 논했다. 김 회장은 일류기업인 삼성전자에서 나와 사업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어린 시절 우연히 검은 지프에 탄 국회의원이 지라시를 뿌리는 모습이 멋져보여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다. 국회의원이 되려면 능력이 있거나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우선 돈버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됐다”


구두닦이 고학생에서 삼성전자의 ‘무대뽀’ 사원으로 성장

김우화 회장은 1948년 대구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김 회장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고 한다. 접착제인 아교풀을 최초로 사업화했고, 1950년대 어렵던 시절에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 거래를 할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그러던 중 김 회장이 중학생이던 때 정부에서 추진한 도로공사 사업을 수주해 진행하다 실패로 돌아가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울로 이사와 판잣집에 자리를 잡았고, 어린 그는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서소문 법원 앞에서 구두 닦이를 시작했다. 학교는 포기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밥 한 번 원 없이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낮에는 구두를 닦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대학을 갔다. 대학에 가서도 채소장사, 수박 장사, 고층빌딩 유리창 닦이 등 안해본 일이 없었는데 잔디를 깎는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다쳐 불구가 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김 회장의 첫 직장은 삼미그룹이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근대화의 상징인 종로 삼일빌딩을 지은 회사인 삼미그룹의 공채 1기로 뽑혀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취업준비생들의 로망이었던 삼성전자로 옮겼다.

그는 1975년부터 19년 간 삼성전자에 근무했다. 영업, 채권관리 등 다양한 부서를 돌면서 경험했다. 가전제품, 자판기, 시계, 금전등록기, 카메라, 방송용 장비까지 거의 모든 제품을 팔았다고 한다.


1억원 규모 입찰에 ‘1원’ 써내 수주..고 이병철 회장이 칭찬하며 특진시켜

삼성전자에서 근무할 당시 김 회장은 패기 넘치는 사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중요한 입찰 경쟁에서 ‘1원’을 써내 낙찰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30여년 전 대통령과 장군들이 회의하는 곳에 가전제품을 설치하는 1억원 상당의 입찰이었는데 김 회장은 고민 끝에 1원을 써내면서 수주하는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이후 사내에 ‘똘아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상사들도 ‘미친놈’이라고 욕했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 후 신문에 ‘1원 낙찰’이라는 기사가 대서특필되면서 1억원 이상의 엄청난 홍보 효과가 발생했다.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면서 “이런 적극적인 직원이 있다”며 그를 크게 칭찬했고 특진시켰다.

이러한 김 회장의 ‘역발상’ 전략은 계속 통했다. 외상으로 판매하던 가전제품을 10% 할인해 현금으로 거래해 미수금 손실을 줄이거나, 생리대 자판기를 백화점이 아닌 여직공이 많은 섬유회사에 설치하는 등 틀에 박힌 관행을 벗어난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했다.

김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의 선배나 동료들은 ‘무대뽀’, ‘똘아이’라 불렀지만 이런 과정에서 체득한 마케팅 경험이 루마썬팅을 단 기간에 업계 1위로 성공시키는 데 큰 발판이 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사표낸 후 사업 투신, ‘장사’만 있던 업계에 ‘마케팅 DNA’ 심은 루마썬팅

이러한 실적을 쌓아오면서 승승장구 했지만 김 회장은 돌연 삼성전자에 사표를 던진다. 국회의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자는 청년시절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자동차 선팅과의 인연도 이 시기에 찾아왔다. 19년을 다닌 삼성전자를 그만 둔 시기에 무역업을 하던 후배로부터 선팅 필름을 유통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게 운명의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자동차 선팅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터라 후배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고심 끝에 아주 손해 보는 사업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의 전환이 김 회장의 첫 번째 회사를 탄생시켰다. 바로 루마썬팅의 전신인 아코상사다. 아코는 ‘한국의 예술이 되자’는 의미의 아트코리아에서 따온 이름이다.

당시 국내 필름 시장은 일본 필름이 70%, 미국 필름이 20% 정도 차지고하고 있었다. 국내 총판은 무려 4곳이나 될 정도로 레드오션이었다. 하지만 기존 업체들은 말 그대로 ‘장사’를 했지 ‘마케팅’이란 게 없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마케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장을 바라봤다. 삼성전자에서 몸소 경험한 전략을 사업에 접목시킨 것이다.


선팅업계 루이비통 노리며 파격 마케팅 시도해 4년만에 1등 브랜드 도약

김 회장은 “필름이라고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가 되지 말란 법이 있나, 루이비통이 명품 가방을 대표한다면 우리가 선팅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가 돼보자”며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섰다. 업계 최초의 보증제도, 전면선팅, 15만원에 판매하던 선팅을 14만9900원에 판매하는 ‘99마케팅’ 등은 자동차 업계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업계에 발을 들인지 4년만에 1등 브랜드를 만들었다.

삼성전자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선후배들은 세계적인 삼성전자의 DNA를 만든 주역이다. 삼성전자에서 체득한 경험으로 사업을 시작한 김 회장 역시 치밀한 계획과 앞선 발상으로 루마썬팅을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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