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한 번도 묻지 않고 무심코 바라만 보았던 세계 - 인식의 가치에 대한 상대성
윤재은 칼럼리스트 | 기사작성 : 2018-05-29 17:20   (기사수정: 2018-05-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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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뉴스투데이=윤재은 칼럼니스트)

보이지 않는 곳! 개미가 나타났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 번도 묻지 않고 무심코 바라만 보았던 세계.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의 영역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곁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들! 무엇을 보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눈을 주셨을까?

우리의 주변에 있으면서도, 생명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벌레로 치부되어 사라져버리는 개미와 곤충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일순간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각자의 생명은 각자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다지만, 벌레로 치부되어 예정 없이 짓밟히는 그들! 그들에게도 인간의 영혼처럼 아픔이 있다.

인간은 보고자하는 것만을 보지만, 개미는 자신만의 세계를 본다. 인간 세계와 다르게 개미의 세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자신의 영역에서 적당한 노동과 가치를 생의 모든 것으로 삼는다. 개미의 눈에 세계는 그리 크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 조그마한 안식처와 적당한 노동이면, 개미의 일상은 편안하다. 개미는 스스로의 역할과 능력에 맞게 일하고 활동한다. 자신이 가야할 길과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다. 험난한 장애물이 앞을 가려도 장애를 극복하고 그 길을 간다. 그들이 가는 그 길은 그들의 꿈과 이상이 교차하는 길이다.

인간이 가고자하는 그 길은 무엇인가? 인간은 개미가 보지 못하는 그 너머를 본다. 그 너머의 세계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의 세계이다. 이성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차별성이다. 인간의 눈에 보여 지는 것들과 보여 지지 않는 것들, 우리는 이러한 자연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한 번도 묻지 않고, 무심히 바라보았던 자연. 우리의 의식은 자연에서 묻고 스스로 답한다.

인간의 의식은 보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인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일까? 인간의 눈은 개미를 의식 할 뿐, 개미 그 자체는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의 개미는 대상이기도 하고, 실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체의 대상으로서 개미는 보편적이다.

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과,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생명체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 모두는 세계의 중심에 서있다. 우리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산을 오르며, 길을 걸으며, 쉽게 다룬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에게는 재앙이 되고, 종말이 된다. 대지에 발을 디디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지만, 그 발걸음에 의해 수많은 생명체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러한 이치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느끼는 자연 현상이 이와 같은 신의 움직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과 달리 벌레라는 생물들의 생명은 인간의 발길 아래 있는 것일까? 그들의 운명에 따라 그들의 시간을 살아가는 과정과 우리의 발걸음이 만나서 일어나는 현상일까? 한 번도 본적이 없고, 소통이 없던 개미들이 우리 곁은 지나가다 무심코 내딛는 우리들의 발걸음에 영혼과 생을 떠나보내고 나면, 그 곳에 남는 것은 인간의 발길에 뭉개져버린 개미들의 시체들뿐이다.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는 인간의 발자국에 이름도, 형체도 없이 사라져간 생명들, 우리는 이들을 ‘벌레’들이라 부른다. “벌레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벌레들, 그들은 각자의 주체를 찾고 벌레라는 노예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인간처럼 자유로운 생물들이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축복 속에 태어난 자유로운 생물들이다!” 이들의 합창이 메아리가 되어 자연의 소리와 함께 우리의 귀에 메아리친다.

만약, 인간이 개미가 되고 개미가 신이 되어 인간보다 더 커다란 발걸음으로 우리 머리 위를 걸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개미의 발걸음에 깔린 인간의 모습. 살기를 갈망하고, 개미를 원망하며, 운명의 신에게 투정과 불평을 쏟아내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자화상처럼 아른거린다.

신의 발걸음! 그 발자국은 인간의 삶이되기도 하고, 죽음이 되기도 한다.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개미, 이들의 관계는 영원한 것도, 일시적인 것도 아닌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삶을 부분적 의지로 이끌어가지만, 그것의 한계는 곧 드러난다. 하지만 신의 의지는 인간의 의지와 다르다. 그 의지는 창조의 의지, 진리의 의지, 사랑의 의지이다.

신의 기침이 번개가 되고, 신의 눈물이 홍수가 되며, 신의 입김이 태풍이 되고, 신의 발걸음이 지진이 되어 우리 앞에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우성대며, 운명인 듯 생을 마감하고, 상처 입는다. 신의 스침과 몸짓하나가 자연의 큰 현상을 불러오듯이, 인간의 몸짓하나, 발길하나가 또 다른 자연재해로 느껴지는 개미의 하루. 우리는 이런 하루를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개미의 중심은 개미에게 있고, 낙타의 중심은 낙타에게 있다. 인간이 다른 동, 식물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인간중심의 사고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사고에는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성은 생각하는 이성, 그리고 반성하는 이성이다.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무지에 대해 반성하며, 거짓 없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시타르타의 여행처럼 우리의 이성은 본질을 향해 항해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세계의 중심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삶의 중심에 설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능력은 창조주의 존재를 믿고, 자연의 실체를 확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세계의 중심에선 인간의 일순간은 삶의 모든 것이다. 사람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삶의 연속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이러한 메시지의 울림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매일 걷고, 뛰는 발걸음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 눈이 보지 못하는 곳과 우리 눈이 보는 곳, 보이는 곳과 보는 곳의 차이는 우리의 의식에 달려있다. 세계의 여러 대상과 현상을 통해 사물이 생겨나고 자라는 과정 등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의 인식은 인간이 보거나 의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관념이지만, 인식대상의 본질은 인식할 수 없다. 상대주의(relativism)는 이러한 객관적 실재를 감각, 의지, 표상의 내용으로 보는 주관적 관념론을 말한다. 상대주의로서 인간의 인식이 미치는 능력은 객관적 실재의 일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으나, 절대적으로 본질은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이 신의 의지를 알지 못하고, 개미가 인간의 발걸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상대주의는 인간의 경험과 문화적 환경 등에 따라 관념이 고착되면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 세계의 절대적 타당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이 상대주의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절대적 진리를 부정한다. 인간에게 있어,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조건이 절대적 의미로 자리 잡기보다는,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상대주의 철학자 고르기아스(Gorgias)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추구하는 가치는 “인식의 가치에 대한 상대성”이다. 고르기아스는 허무주의로도 유명한데, 그의 저작인 ‘비존재에 관하여’ 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인식되지 않는다. 만약, 인식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자신들이 갖는 믿음의 진실은 상대적 주장일 뿐 진리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다고라스는 인간은 개별적 시각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하며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일상생활의 행동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은 ‘덕(arète)’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덕은 인간의 본질이다.

개미와 인간이 하나의 실체로서 상대적 존재인 것처럼,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주장에 잘못됨이 없는 지를 반성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인식에 기초하는데 이러한 인식의 기반이 인간의 감각에 의해서 발생한다. 하나의 보편적 인간이라도 서로 다른 개별자의 인식능력은 각기 다른 이성으로 대상을 판단하고 결론내리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프로타고라스의 일화 중 상대주의적 주장을 엿 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청년 한사람이 프로타고라스에게 돈이 없어도 논법(論法)을 배울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자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은 청년하기에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청년에게 수업이 끝나고 자신이 수업을 통해 배운 능력으로 재판을 해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수업을 듣게 해주었다. 그러나 청년은 수업을 마치고도 어떤 재판도 참여하지 않고 놀기만을 반복했다.

이에 화가 난 프로타고라스는 청년을 고소하면서 “어차피 너는 수업료를 지불하게 되어있다. 만약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의 계약을 이행하는 것으로 수업료를 지불하고, 재판에서 지면, 재판의 결과에 따라 수업료를 물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청년은 프로타고라스에 반하여 수업료를 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청년이 재판에 이기면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얻고, 재판을 지면 스승님과의 계약에 따라 재판에 졌기 때문에 수업료를 물지 않아도 된다고 답변했다.

이 둘의 생각은 말하는 쪽과 말을 듣는 쪽 모두 상반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상반된 의견으로 이끌어 가는 주장들은 인식의 상대적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삶의 길목에서 뒤돌아보면 아득하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인생.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빨리 달려 암흑의 삶을 살려고 하는가. 천천히 걷는 자, 정상에 늦게 오르지만 가슴에 희망을 품고 걸으니 행복하기 그지없고, 빨리 가는 자, 목적지에 빨리 도달 할지라도 끝없는 불안만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진리의 세계에서 주제도 없이 쏟아내는 무수한 주장과 오기들은 타인의 가슴에 상처와 무력감만 남긴다.

그 길! 우리가 가는 그 길은 황금빛도, 암흑도 아닌, 그저 평범하기만 한 개미의 길이다. 앞날을 알 수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주어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개미의 일상을 통해 우리 인생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윤재은은 현재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학교 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 Design Program, 홍익대학교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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