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하나의 세계, 두 가지 생각 -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윤재은 칼럼리스트 | 기사작성 : 2018-05-1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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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재은]

(뉴스투데이=윤재은 칼럼니스트)

하나의 우주는 수많은 것들의 생성과 소멸의 공간이다. 우주의 근원은 하나에서 시작되지만, 그곳에서 파생되는 것은 다양하다. 세계의 시간은 한줄기 섬광처럼 지나가지만, 시간이 맞닿는 곳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생겨난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세계이며, 그 무엇이다.” 우리는 그 무엇에서, 그 길을 찾고자 한다. 그것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내재된 이 세계는 카오스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파생의 미학은 생성의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다양성은 하나로부터 출발한다. 하나가 다수이고, 다수가 하나이다. 다수를 위해 하나가 희생되고, 하나를 위해 다수가 뭉친다. 이러한 파생의 미학은 하나와 다수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근원은 다수를 생산해내고,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다수를 살리고 세계를 살린다.

조화로운 사회는 하나의 생각, 그리고 다수의 생각이 서로 화합하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구성하는 사회이다.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화음도 하나의 팀에서 구성된 조화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서로의 음을 존중하며, 다수의 음에 순응하는 조화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어느 누구 하나가 조화의 화음을 깨고 튀어나온다면, 그 화음은 깨져버리게 된다. 화음이 깨져버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상상해보라!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는 것은 돌출된 사고와 행동 때문이다. 다수의 삶보다 개인의 삶, 다수의 생각보다 혼자만의 생각이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편협한 생각, 이기적 사고, 광기적 행동 들이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고 혼란으로 이끈다. 이러한 사회는 불안한 사회를 넘어 불쌍한 사회이다. 이러한 불행은 그 것을 일으키는 사람뿐 아니라 그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가 다수가 되고, 다수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화로움 때문이다. 조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가식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정성에 있다. “진정성은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행동”으로, 상대를 감동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인간적 삶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의 중심에는 배려가 있다. 배려는 상대의 실수를 따스하게 감싸주고, 상대의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상대의 마음이 되고, 상대의 마음이 나의 마음을 알아줄 때, 배려는 사랑의 힘으로 태어난다. 이러한 배려는 조화로운 사회로서 서로 다름을 하나로 묶어준다.

들판에 서있는 나무를 보라! 나무는 하나이면서도 다수이다. 하나의 나무가 다수를 이루어 숲을 이룬다. 이렇게 이루어낸 숲속에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간다. 나무는 배려를 통해 또 다른 생명들에게 나눔과 베풂의 미학을 실천한다. 배려가 살아있는 숲을 보라! 그곳은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는 우리의 미래가 있다.

나무의 조화는 뿌리, 기둥, 가지, 나뭇잎의 조화이다. 하나의 나무가 여러 개의 구조를 통해 이루어져있고, 그 구조에서 생명이 피어나고, 변하는 것은 나무가 가지고 있는 조화로움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기능과 구조를 하나의 완성체로 만들기 위해 대지에 뿌리 내린 나무는 쉼 없이 조화롭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서로의 기능과 역할에 따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는 하나의 세계이다. “바람이 나무를 대하고, 나무가 바람을 대하듯”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하나이면서 다수인 것은, 정적이면서도 동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의 세계, 두 개의 생각이 공존하는 것이다. 세계는 수많은 변화를 통해 오늘을 있게 한다. 시간의 선상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영원히 변화하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도 본질적 시간으로 들어가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눈을 통해 매순간 변하는 세계는 분명 동일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 것은 세계 안에 있다. 그 세계는 하나이다.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동적 세계관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세상 만물은 단순히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모순을 통해 새롭게 변화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순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극복되고, 투쟁은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근본원인이 된다.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라 그 강물에 들어간 나도 흐른다. 세상에 동일한 나는 없다. 오직 변한 것은 나뿐이다. 어제의 강물은 흘러가버려서 없고,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설명되는 흐르는 강물의 인간은 동적 세계관의 시간성을 표현하고 있다. 동일한 사람이 그 강물에 두 번 들어가는 것은 변화되어 버린 자신과 강물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 현상만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변하는 것은 시간의 본성뿐이며, 영원한 사물은 하나도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에 의한 우주의 생성을 세계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생성과 변화의 근원에 ‘불’이 있다. 그는 세상을 구성하는 변치 않는 물질을 불로 보았다. 불은 만물의 생성원인이며, 세계질서는 불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된다.

이 세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불은 완전한 생성체로서 세계의 질서에 따라 연소되고, 꺼지면서 영원한 것이 된다. 생성의 불은 언제나 있었고, 또 있으며,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 만물은 살아있는 실체로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무릇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고 유전한다.

세계에 있어 선과 악도 하나인 것이다. 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나, 아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 모두 다 동일한 하나의 길이다. 인생에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한 게 없는 세상의 이치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생과 사, 기쁨과 슬픔, 선과 악 같은 것도 모두 같은 것이다. 선이 있음으로 악이 있고, 기쁨이 있음으로 슬픔이 있는 것과 같이, 세계는 투쟁을 통해 대립이 발생하고 다시 하나가 된다. 대립은 본질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은 하나이며, 여럿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본질에서 대립의 생각이 나뉜다. 이러한 대립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명제에 대한 의견뿐이며, 같은 것이다. 대립에서 답을 구하려는 자! 우주의 이치와 본질에 순응하라!

세계를 끊임없는 변화의 세계로 인식하고 생성의 변화를 설명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동적세계관에 반(反)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모든 존재의 통일성을 통한 정적세계관을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의 변화는 단순한 사물의 변화일 뿐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존재하는 세계의 물질들은 그들의 형태를 포함한 외형적 변화일 뿐, 영원한 실체의 모든 것은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존재의 본질에 들어서면 조그마한 현상이나, 변화를 보고 비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인간의 판단과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 불확실한 관념에 믿음을 넘겨주고, 그것만이 진리인양 주장한다.

그는 자연에 대하여(on nature)에서 존재하는 다수의 사물과 변화는 영원한 하나의 실재현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세계의 모든 것은 하나라는 그의 주장은 하나의 세계는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인간의 일생이 수많은 사건과 변화를 거쳐 죽음에 이를 때, 이러한 삶의 시간은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삶의 순간을 우리의 일생으로 바라볼 때 그 삶은 그저 자신의 삶일 뿐이다. 이처럼 하나의 삶도 생각과 방식에 따라 한 개가 되기도 하고, 두 개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하나이기도하고, 두 개이기도 한 것처럼 하나의 세계는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찬다.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주장!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주장과, 생성 소멸은 없다. 변화하는 것도 없다. 운동은 없다는 주장은 하나의 세계를 놓고 전혀 다른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반된 주장은 세계를 보는 이성의 눈 때문에 발생한다. 조그마한 가치에 큰 가치를 포함해 설명하는 것과, 큰 가치를 보면서 작은 가치는 그 곳으로 묻어버리는 두 개의 세계관. 이러한 생각의 다양성이 오늘의 문명을 만들어낸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조화가 멈춘다는 것! 그것은 종말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면서, 영혼과 육체를 가진 두 개의 인간이기도 하다. 세계의 시간은 끝없는 종말을 향하고 있지만,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인생의 시간도 이와 같다. 탄생의 시간에서 죽음으로의 시간! 이 시간은 항구를 떠나는 뱃고동 소리 같다.

목적지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잔잔한 파도, 따스한 햇살, 부드러운 순풍만이 불어오길 원하지만, 인생의 여정은 거친 파도, 내리치는 번개, 넘칠 듯한 폭우, 찌는 듯한 태양, 오아시스를 찾는 갈증 등과 같은 고난이 수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고난과 행복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 외로운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우리들이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일 것이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윤재은은 현재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학교 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 Design Program, 홍익대학교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윤재은 칼럼리스트 dreamas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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