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심호흡]진경준의 ‘공짜 넥슨주식’ 무죄 확정으로 ‘바보’된 김영란법
이태희 편집국장 | 기사작성 : 2018-05-11 17:27   (기사수정: 2018-05-1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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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주 넥슨 대표에게 4억여원 '공돈' 받아 120억원으로 불린 진경준 전 검사장 ‘무죄’확정

재판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는 ‘직무연관성’ 입증 못하면 처벌 못해” 판결

김영란법, 공무원.언론인등이 연간 300만원 이상 받으면 ‘직무연관성’없어도 무조건 형사처벌

한국의 공무원들, 향후 ‘큰 돈’을 받아 ‘김영란법’ 아닌 ‘뇌물죄’로 기소되는 전략적 선택해야

한국의 사법부, '작은 범죄'는 추상같이 처벌하고 '큰 범죄'에 온정 베푸는 사법관행 확립 중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국장)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수전노인 전당포 노파와 여동생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다음과 같이 자신을 합리화한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인간을 살해한 나폴레옹을 살인자로 부르지는 않는다. ‘비범한 인간’의 행위는 통상적인 사법의 잣대를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은 범죄’는 처벌을 받지만 ‘큰 범죄’를 행하면 영웅이 된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궤변’은 다수 인간이 공감하는 보편적 윤리와는 상치된다. 큰 범죄가 더 큰 처벌을 받아야 정의가 바로 선다고 느끼는 게 평범한 인간들의 정서이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적 현실에 직면하면 달라진다. 큰 범죄를 다루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에 걸리면 사법부의 잣대가 한없이 관대하다. 하지만 푼돈을 먹는 공직자를 다루는 ‘김영란법’을 위반하면 추상같은 사법적 단죄가 내려진다. 

서울고등법원은 11일 진경준(51·사법연수원 21기) 전 검사장에 대한 파기 환송심 선고 공판에서 김정주(50) NXC 대표로부터 ‘120억원대 공짜주식을 받았다는 핵심 범죄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진 전 검사장은 2005년 친구인 김정주 대표로부터 넥슨의 비상장 주식을 매입할 대금 4억2500만원을 받아 주식 1만 주를 산 후 이듬해 넥슨 재팬 주식 8537주로 바꿔 120억원대 차익을 얻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으로 기소됐다. 당초 검찰은 주식매입대금 4억여원을 뇌물로 보고 기소했으나 1심 무죄, 2심 유죄, 대법원 무죄 취지 파기환송 등으로 엇갈린 판결이 내려졌다.

차관급 공무원인 검사장이었던 진경준씨가 김정주 대표로부터 받은 4억여원이 뇌물이 아니라는 판결의 논리는 해괴하다. ‘직무연관성’과 ‘대가성’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재판부는 넥슨 주식 매입용 4억2500만원 등 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 "수수 당시 받은 돈과 직무사항 (관련성이) 추상적이었고, 김 대표에게 실제 형사사건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면서 "진 전 검사장에게 잘 보이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에서 이익을 공유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가 성립되려면, 받은 금품과 직무관련성 등이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해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특혜를 제공한 것이 검찰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다면 ‘순결한 행위’가 되는 셈이다.

어찌 보면 사법부의 이런 실정법 논리는 자유주의 법철학 정신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선량한 시민과 흉악 범죄자의 ‘권리’는 모두 대등하게 존중돼야 한다는 게 자유주의 인권론의 핵심이다. 진경준씨가 범죄 혐의자이지만 그의 인권도 보호돼야 한다. ‘뇌물’ 아닌데 뇌물죄로 처벌받는 억울함을 겪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선한 사람과 악인을 차별하지 않는 자유주의 정신 덕분에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은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법질서가 ‘개판’이 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공직자들의 ‘생활 속 작은 범죄’를 응징하기 위한 ‘김영란법’은 ‘직무연관성’이 없어도 처벌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4억원대의 공돈을 받아서 120억원으로 불린 진경준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로 기소돼 무죄를 받을 수 있었지만, 김영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면 ‘유죄’를 피할 수 없었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공직자를 비롯해 언론인·사립학교 교직원 등은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상관없이 1회 100만 원(연간 300만 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수수하면 형사처벌(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된다.

연간 300만원 정도 소액 금품을 수수한 차관급 공무원을 김영란법에 의해 기소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을 살릴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진경준씨 판결은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한국의 공직자들이 뇌물을 받을 때 거액을 챙김으로써 김영란법이 아니라 뇌물죄로 기소되는 전략적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는 소중한 ‘생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사법부는 '큰 범죄' 혐의는 실정법 논리로 감싸고, '작은 범죄'혐의는 추상같이 단죄하는 사법적 관행을 정립중이다. 그 관행은 진경준씨와 같은 부류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고, 다수 국민에게는 헤어나오기 어려운‘절망’을 새겨주고 있다. 


[이태희 편집국장 youyen2000@news2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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